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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전통시장’(가제) 출판계획서
◆기획 의도
선사시대 대구는 강을 이용한 수운(水運)이 발달했고, 중세엔 경상감영이 들어서며 영남의 국방, 행정, 상업, 물류의 중심으로 발전했다. 현대에 들어와 경부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 광주대구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의 개통은 대구가 한반도 중남부의 물류, 유통, 상업도시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구의 장터 DNA의 원조는 어디일까. 그 의문은 뜻밖의 쉽게 풀렸다. 2006년 대구 월성동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구석기유적 발견은 전국적인 현상이니 새삼스런 일이 아니지만 월성동 유적에서 발견된 화산암의 일종인 ‘흑요석’에 주목해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대구는 화산지대가 아니기 때문에 화산암이 발견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흑요석의 출토는 고대 대구의 문명 교류 흔적을 들여다보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2017년 국립대구박물관은 월성동 흑요석이 백두산계 화산석이라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후기구석기시대 대구는 백두산 북방 계열과 이미 교역로로 연결 되어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조그만 돌멩이는 1만 8천년 전 이미 대구는 한강수계를 거쳐 백두산까지(직선거리 700km) 문화벨트, 교역로로 통해 있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대구 구석기 시대 문명의 교역로 전통을 잘 계승한 건 조선시대였다. 임진왜란 이후 대구의 국방, 상업, 행정으로써 중요성을 인식한 조선 정부는 대구에 경상감영을 설치하게 된다.
고려시대 이후 별다른 존재감을 갖지 못했던 대구는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을 유치하면서 일약 영남의 중심으로 도약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경상도의 심장부에 위치한 대구는 각 지역과 사통팔달로 연결됐고 낙동강, 금호강을 통한 수운도 활발해졌다. 북쪽으로는 안동, 영주, 상주, 등지 물자들이 육로를 통해 들어왔고 낙동강수계로는 부산, 남해 해산물과 일본의 상품들이 영남 내륙까지 물길로 연결되었다.
이런 상권의 신장을 배경으로 서문시장은 서울, 평양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대구엔 영남의 상인들은 물론 서울, 평양, 원주, 공주, 광주 등 대상(大商)들이 찾아 들었고 ‘서문시장에 가면 구하지 못 할 물건들이 없다’는 속담도 회자되었다.
한말,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대구는 섬유도시로 발전을 거듭하여 상권을 키워갔다. 도시의 확장과 인구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시장을 필요로했고 교통요지나 행정 동(洞)의 중심부에는 어김없이 시장이 들어섰다.
교통, 물류도시 대구 발전을 이끈 또 하나의 계기는 철도, 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이 대구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1905년 개설된 경부선이 대구를 관통하며 대구는 서울과 부산을 있는 교통의 요지로 도약할 수 있었고, 1970년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도 대구의 한반도 남부 교통 거점으로서 위상을 확인해 주었다.
여기에 구마고속도로, 광주대구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등이 잇따라 대구와 연결되며 대구는 영호남, 강원,도 수도권, 남해를 연결하는 교통, 물류의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북구 농수산물 유통시장, 산업용재관 등 매머드급 유통시설이 주변 경쟁지를 제치고 대구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이런 사회간접자본이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1988년 노태우 정부의 200만호 건설도 대구 전통시장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 당시 대구 성서지구, 대곡지구, 칠곡지구, 안심지구, 지산·범물지구에 대단지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대단지 아파트가 조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들이 함께 들어섰는데, 이른바 관(官)주도, 행정시장들이다. 이들은 아파트 주민들의 생활필수품 및 식료품 공급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유통, 상업도시로 발전을 거듭해온 대구의 시장은 어느 순간 급격한 쇠락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는 대구뿐만이 아니고 전국적인 현상이다. 우선은 급격한 인구의 감소로 국가나 자치단체의 상권이 위축되고 경제의 역동성을 잃은데 기인한다. 1970년대 1년에 100만 명을 넘었던 출생인구는 2021년엔 26만명으로 감소했다. 이런 경제인구 감소는 구매력의 감소, 내수시장 침체로 이어져 국가경제의 근간을 위협하게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1996년에 단행된 유통시장 개방이다. 글로벌 관세, 무역장벽을 허문다는 명분으로 국내 들어온 까루프, 월마트, 코스트코 같은 외국계 대형마트들은 한국 유통시장을 빠른 속도로 잠식해갔다.
이에 국내 대기업들은 외국 유통 업체로부터 상권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대형마트를 잇따라 설립하면서 전국의 골목은 각종 대형마트, SSM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유통업계의 저승사자’라는 대형마트는 대기업의 자본력과 대규모 시설, 쇼핑 편의성을 내세워 순식간에 마을 골목 전통시장의 상권을 허물어 버렸다. 2000년대 초반 대형마트의 ‘공습’에 전국 전통시장, 슈퍼 등 점포 14만여 곳이 문을 닫았다. 마을 경제, 골목상권의 대학살이라고 불러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20조 이상으로 성장해버린 온라인, 비대면 마케팅 시장도 전통시장 존립의 최대 위협 요소이다. TV 홈쇼핑, 인터넷 쇼핑으로 시작한 온라인 시장은 이제 쿠팡, 위메프, 티몬 등 대기업을 내세워 유통 전쟁을 벌이고 있다. 가격경쟁력 뿐 아니라 당일·무료배달 등 편의성까지 내세우며 시장을 잠식해가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정국에서 오프라인시장, 대면(對面)마케팅이 막힌 틈을 이용해 온라인 업체들은 상상 이상으로 몸집을 불려갔다. 이런 틈새에서 전통시장 상인들에 주름은 더 깊어지고 있다. 온라인마케팅의 싼 가격과 편리함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온라인, 비대면 마케팅이 성장은 대구 전통시장에 치명타를 입혔고 이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2019년 대구시 전통시장 실태조사에서 시장 150곳 중 39곳이 시장 기능을 상실했고 23곳시 ‘쇠퇴’ 단계로 들어갔다고 조사되었다.
본고는 디지털경제에 2020년부터 연재되었던 ‘정 듬뿍! 추억 가득 대구의 전통시장’ 시리즈를 엮어 펴낸 것이다.
현재 대구에는 100여 곳 전통시장이 있지만 이중 상당수는 시장 기능을 잃어버렸거나 폐쇄되었다. 이 중 나름대로 각 구(區)별로 대표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시장, 일정 규모를 갖춘 시장, 역사와 전통을 갖춘 시장을 선별해 기사로 정리했다. 짧은 시간에 급히 대구시 전역을 도느라 누락된 시장, 빠진 내용, 허술한 기술도 많을 것이다.
또 저자는 경제, 경영, 마케팅 전공자가 아닌 까닭에 단순한 저널리즘적 접근에 미쳤을 뿐 전문적, 학술적 접근에는 미흡했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대구 저녁에 전통시장을 일람하고 시장의 역사, 풍물, 특징, 맛집 등을 일별한 점은 기록성, 현장성에서 나름 의미를 둘 수 있겠다.
◆대구의 전통시장 예상 목차
▶제 1장 중구의 전통시장
①서문시장, 서문시장 규모와 지구별 분포, [주목! 이 골목] 대구 국수의 본산, 서문시장 ②교동시장, [주목! 이 점포] 대구 교동시장 ‘신창사’, [주목! 이 점포] 대구시 교동 제일등산사 엄기원 대표 ③염매시장 ④남문시장 ⑤방천시장
▶제2장 서구의 전통시장
①서대구시장 ②서남시장 ③신내당시장 ④서부시장 ⑤신평리시장
▶제3장 동구의 전통시장
①불로시장 ②평화시장 ③반야월시장 ④방촌시장 ⑤동서시장
▶제4장 남구의 전통시장
①봉덕신시장 ②관문시장 ③대명시장 ④명덕시장 ⑤영선시장
▶제 5장 수성구 전통시장
①신매시장 ②수성시장 ③목련시장
▶제6장 북구의 전통시장
①매천시장, [경제 & 피플] 대구신화수산 고중근 대표이사 ②칠성시장 ③칠곡시장 ④산격종합시장 ⑤원대신시장 ⑥팔달신시장
▶제7장 달서구의 전통시장
①월배시장 ②대동시장 ③달서시장 ④[주목 이점포] 대구 수제찰떡의 명가 ‘자인떡방앗간’ ⑤서대구시장 ⑥성서 용산시장 ⑦와룡시장
▶제8장 달성군의 전통시장
①화원시장 ②현풍 도깨비 100년시장 ③논공시장 ④달성군 전통시장의 역사
◆기사 샘플
[정 듬뿍·추억 가득! 영남 전통시장 탐방] 대구 봉덕신시장
1970~80년대엔 미군수품, 지금은 돼지국밥으로 전국적 유명세
정유재란 때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였던 울산성 전투.
당시 조명(朝明)연합군은 왜군을 성안에 가두고 보급로를 끊어버렸다. 식수가 끊긴 왜군이 소변을 받아 목을 축이고, 말의 피로 해갈(解渴)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극한의 공간 울산성에 매일 새벽에 시장이 섰으니 바로 물장수들이었다. 물장수들도 목숨을 걸고 성벽을 넘었을 것이니 그들의 물 한병은 금은과 바꿀 정도였다. 이렇듯 전쟁과 시장은 생사가 오가는 극한의 순간에서 묘하게 만나기도 한다.
전쟁과 시장이 조우한 흔적은 대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구시 남구에 있는 봉덕시장은 6·25 한국전쟁이 대구에 남긴 유산이자 작은 선물이다. 한국전 당시 전쟁을 피해 대구로 왔던 난민들이 봉덕동 일대에 난전을 열면서 전시(戰時)시장이 자연적으로 생겨났다.
전략요충지로 대구를 주목했던 미군은 이천동에 군부대를 설치하고 대규모 군인, 군속을 배치하며 캠프헨리 시대를 열어갔다. 이 과정 속에 봉덕동 모퉁이 조그만 난전은 대구의 대형시장으로 성장해갔다. 미군부대와 시장의 동거는 이렇게 전란 속에서 싹을 틔웠던 것이다.
◆1970~80년대 미군부대 군수, 구제물품 넘쳐나=봉덕시장은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에 설립되어 올해 66주년을 맞았다. 전쟁이란 불행한 역사 속에서 태동했지만 대구경제의 한 축을 이루며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해왔다.
시장의 가장 호황기는 1970~80년대였다. 당시 캠프헨리에 주둔한 미국 병력 수나 군속, 한국인노무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고 이들이 여는 지갑은 지역의 큰 돈줄이자, 시장의 활력소였다.
당시 봉덕시장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워커(군화), 담요, 재봉틀, 씨레이션(미군 전투식량)부터 온갖 구제품과 군수보급품들이 넘쳐났다.
명품의류, 구제 패션을 찾아 대구의 멋쟁이들은 봉덕동으로 몰려들었다.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여성군무원이나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학생들이 골목을 누비며 쇼핑을 즐겼다. 이 때문에 패션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구 구제역사의 출발을 봉덕시장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상인들과 미군이 서툰 영어로 바디 랭귀지를 통해 흥정을 하는 모습은 당시 상가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시장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그때는 영어를 제대로 배운 사람이 없었고 그냥 ‘This~’ ‘That~’ ‘How much~’ ‘킹사이즈? 스몰사이즈?’만으로 장사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돼지국밥, 한과, 보리밥집 전국적 유명세=현재 봉덕시장의 점포 수는 노점 포함 모두 280곳. 청과, 채소, 양곡, 농축수산물, 반찬, 패션 등 웬만한 마트수준의 제품을 갖추고 있다. 봉덕시장의 인기 제품은 단연 한과. 인기 비결은 백화점, 마트와 달리 즉석에서 만들어 판다는 점이다.
44년간 한과를 만들었다는 한 상인은 “옛날에는 봉덕시장 한과를 사기 위해 경산, 고령, 칠곡에서도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며 “요즘도 옛날 단골이나 어르신들이 옛맛을 찾아 일부러 여기까지 온다”고 말한다.
이곳 보리밥집도 제법 유명세가 있다. 식객들은 ‘공주보리밥파’와 ‘행복보리밥파’로 나뉘는데 맛에 우열이 있는 건 아니고, 각자의 입맛에 따른 기호의 차이일 것이다.
봉덕신시장의 최고 아이템은 뭐니뭐니해도 돼지국밥골목이다.
봉덕동 국밥의 특징은 부드러운 고기와 진한 국물맛. 돼지머리를 푹 끓여 국물을 내고 여기에 머릿고기를 썰어 말아내는 방법이다. 다른 식당과 큰 차이점은 없지만 머리를 통째로 넣으면서도 누린내를 잡은 것이 이곳의 비법이다. 이 누린내까지 사랑해야 진정한 국밥 마니아라고 하지만, 쌈장과 다대기를 적당히 첨가해 먹으면 이 잡내도 잡을 수 있다.
각 식당마다 개성이 뚜렷해 호불호가 가리지만 일반적으로 청도, 삼정, 김천, 털보식당을 봉덕신시장 국밥 4대천왕으로 부른다. 일부 호사가는 이를 세분화해 1강2중1약으로 나뉘는데 여기에 대한 평가와 검증은 각자의 몫이다.
입구에서 만난 윤경태(57) 씨는 “여기 국밥 특징은 넉넉한 고기로 수육을 따로 시킬 필요가 없을 정도”라고 말하고 “청도는 한약 냄새가 특징이고, 김천과 삼정은 쌈장을 얼큰하게 풀어 먹는 맛이, 털보는 잡내를 확실히 잡아줘 담백한 맛이 각자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2005년 현대화 사업 이후 ‘봉덕신시장’ 시대 열어=1972년에 정식 허가를 받은 봉덕시장은 주변 상권 침체와 대형마트와 슈퍼마켓 등이 들어서면서 1990년도부터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시장이 기능을 잃어가자 남구청은 2005년 시장을 다시 살리기 위해 현대화사업을 실시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추진되지 못했다. 기존 봉덕시장은 주택가 골목에 자리잡고 있고 여러 권리관계가 얽혀 있어 협약이 원활하지 못했다. 이에 남구청은 봉덕시장 대신 큰 길과 붙어있던 상가들을 모아 현대화 사업을 실시했는데 그때 새로 생겨난 시장이 봉덕신시장이다.
2006년에 등록된 봉덕신시장은 지속적인 현대화 사업을 펼쳐 시장 전체에 아케이드와 넓은 공영주차장, 야외상설공연장 등을 설치했다. 덕분에 지난 2013년 중소기업청 시장경영진흥원이 발표한 ‘전국 전통시장 활성화 수준 평가’에서 최상위 등급인 A등급을 받기도 했다.
장흥섭 전 경북대 교수는 “봉덕시장은 한국전쟁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시장인 만큼 새로운 활성화 방안을 찾아 시장의 역사를 유지하고, 봉덕신시장은 국밥골목이나 구제골목 등을 특성화해 재미있는 관광거리로 만들어 활성화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취재를 위해 봉덕동을 찾았다. 1970~80년대 사람들로 가득했다는 봉덕시장은 옛 시장의 활기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골목마다 손님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함광식 신시장상인회장은 “현재 재난지원금으로 반짝 특수를 누리고 있지만 전통시장의 위기는 현재 진행형”이라며 “봉덕신시장 상가번영회에서도 전통시장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6·25전쟁 중에 대구에 경제 싹을 틔웠던 봉덕시장. 지금 포성을 멎었지만 전통시장 생존이라는 또 다른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이 시리즈물의 활용
현재 디지털경제에서는 ‘경북의 전통시장’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전체 35회 분량으로 ‘대구의 전통시장과 비슷한 분량이다.(현재 공정률 70%)
향 후 두 지역의 전통시장을 한권으로 펴내거나 상, 하권으로 발행한다면 대구경북의 전통시장을 한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작성자, 집필자 한상갑 기자 010-6573-6676
◆기획 의도
선사시대 대구는 강을 이용한 수운(水運)이 발달했고, 중세엔 경상감영이 들어서며 영남의 국방, 행정, 상업, 물류의 중심으로 발전했다. 현대에 들어와 경부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 광주대구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의 개통은 대구가 한반도 중남부의 물류, 유통, 상업도시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구의 장터 DNA의 원조는 어디일까. 그 의문은 뜻밖의 쉽게 풀렸다. 2006년 대구 월성동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구석기유적 발견은 전국적인 현상이니 새삼스런 일이 아니지만 월성동 유적에서 발견된 화산암의 일종인 ‘흑요석’에 주목해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대구는 화산지대가 아니기 때문에 화산암이 발견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흑요석의 출토는 고대 대구의 문명 교류 흔적을 들여다보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2017년 국립대구박물관은 월성동 흑요석이 백두산계 화산석이라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후기구석기시대 대구는 백두산 북방 계열과 이미 교역로로 연결 되어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조그만 돌멩이는 1만 8천년 전 이미 대구는 한강수계를 거쳐 백두산까지(직선거리 700km) 문화벨트, 교역로로 통해 있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대구 구석기 시대 문명의 교역로 전통을 잘 계승한 건 조선시대였다. 임진왜란 이후 대구의 국방, 상업, 행정으로써 중요성을 인식한 조선 정부는 대구에 경상감영을 설치하게 된다.
고려시대 이후 별다른 존재감을 갖지 못했던 대구는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을 유치하면서 일약 영남의 중심으로 도약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경상도의 심장부에 위치한 대구는 각 지역과 사통팔달로 연결됐고 낙동강, 금호강을 통한 수운도 활발해졌다. 북쪽으로는 안동, 영주, 상주, 등지 물자들이 육로를 통해 들어왔고 낙동강수계로는 부산, 남해 해산물과 일본의 상품들이 영남 내륙까지 물길로 연결되었다.
이런 상권의 신장을 배경으로 서문시장은 서울, 평양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대구엔 영남의 상인들은 물론 서울, 평양, 원주, 공주, 광주 등 대상(大商)들이 찾아 들었고 ‘서문시장에 가면 구하지 못 할 물건들이 없다’는 속담도 회자되었다.
한말,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대구는 섬유도시로 발전을 거듭하여 상권을 키워갔다. 도시의 확장과 인구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시장을 필요로했고 교통요지나 행정 동(洞)의 중심부에는 어김없이 시장이 들어섰다.
교통, 물류도시 대구 발전을 이끈 또 하나의 계기는 철도, 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이 대구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1905년 개설된 경부선이 대구를 관통하며 대구는 서울과 부산을 있는 교통의 요지로 도약할 수 있었고, 1970년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도 대구의 한반도 남부 교통 거점으로서 위상을 확인해 주었다.
여기에 구마고속도로, 광주대구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등이 잇따라 대구와 연결되며 대구는 영호남, 강원,도 수도권, 남해를 연결하는 교통, 물류의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북구 농수산물 유통시장, 산업용재관 등 매머드급 유통시설이 주변 경쟁지를 제치고 대구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이런 사회간접자본이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1988년 노태우 정부의 200만호 건설도 대구 전통시장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 당시 대구 성서지구, 대곡지구, 칠곡지구, 안심지구, 지산·범물지구에 대단지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대단지 아파트가 조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들이 함께 들어섰는데, 이른바 관(官)주도, 행정시장들이다. 이들은 아파트 주민들의 생활필수품 및 식료품 공급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유통, 상업도시로 발전을 거듭해온 대구의 시장은 어느 순간 급격한 쇠락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는 대구뿐만이 아니고 전국적인 현상이다. 우선은 급격한 인구의 감소로 국가나 자치단체의 상권이 위축되고 경제의 역동성을 잃은데 기인한다. 1970년대 1년에 100만 명을 넘었던 출생인구는 2021년엔 26만명으로 감소했다. 이런 경제인구 감소는 구매력의 감소, 내수시장 침체로 이어져 국가경제의 근간을 위협하게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1996년에 단행된 유통시장 개방이다. 글로벌 관세, 무역장벽을 허문다는 명분으로 국내 들어온 까루프, 월마트, 코스트코 같은 외국계 대형마트들은 한국 유통시장을 빠른 속도로 잠식해갔다.
이에 국내 대기업들은 외국 유통 업체로부터 상권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대형마트를 잇따라 설립하면서 전국의 골목은 각종 대형마트, SSM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유통업계의 저승사자’라는 대형마트는 대기업의 자본력과 대규모 시설, 쇼핑 편의성을 내세워 순식간에 마을 골목 전통시장의 상권을 허물어 버렸다. 2000년대 초반 대형마트의 ‘공습’에 전국 전통시장, 슈퍼 등 점포 14만여 곳이 문을 닫았다. 마을 경제, 골목상권의 대학살이라고 불러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20조 이상으로 성장해버린 온라인, 비대면 마케팅 시장도 전통시장 존립의 최대 위협 요소이다. TV 홈쇼핑, 인터넷 쇼핑으로 시작한 온라인 시장은 이제 쿠팡, 위메프, 티몬 등 대기업을 내세워 유통 전쟁을 벌이고 있다. 가격경쟁력 뿐 아니라 당일·무료배달 등 편의성까지 내세우며 시장을 잠식해가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정국에서 오프라인시장, 대면(對面)마케팅이 막힌 틈을 이용해 온라인 업체들은 상상 이상으로 몸집을 불려갔다. 이런 틈새에서 전통시장 상인들에 주름은 더 깊어지고 있다. 온라인마케팅의 싼 가격과 편리함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온라인, 비대면 마케팅이 성장은 대구 전통시장에 치명타를 입혔고 이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2019년 대구시 전통시장 실태조사에서 시장 150곳 중 39곳이 시장 기능을 상실했고 23곳시 ‘쇠퇴’ 단계로 들어갔다고 조사되었다.
본고는 디지털경제에 2020년부터 연재되었던 ‘정 듬뿍! 추억 가득 대구의 전통시장’ 시리즈를 엮어 펴낸 것이다.
현재 대구에는 100여 곳 전통시장이 있지만 이중 상당수는 시장 기능을 잃어버렸거나 폐쇄되었다. 이 중 나름대로 각 구(區)별로 대표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시장, 일정 규모를 갖춘 시장, 역사와 전통을 갖춘 시장을 선별해 기사로 정리했다. 짧은 시간에 급히 대구시 전역을 도느라 누락된 시장, 빠진 내용, 허술한 기술도 많을 것이다.
또 저자는 경제, 경영, 마케팅 전공자가 아닌 까닭에 단순한 저널리즘적 접근에 미쳤을 뿐 전문적, 학술적 접근에는 미흡했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대구 저녁에 전통시장을 일람하고 시장의 역사, 풍물, 특징, 맛집 등을 일별한 점은 기록성, 현장성에서 나름 의미를 둘 수 있겠다.
◆대구의 전통시장 예상 목차
▶제 1장 중구의 전통시장
①서문시장, 서문시장 규모와 지구별 분포, [주목! 이 골목] 대구 국수의 본산, 서문시장 ②교동시장, [주목! 이 점포] 대구 교동시장 ‘신창사’, [주목! 이 점포] 대구시 교동 제일등산사 엄기원 대표 ③염매시장 ④남문시장 ⑤방천시장
▶제2장 서구의 전통시장
①서대구시장 ②서남시장 ③신내당시장 ④서부시장 ⑤신평리시장
▶제3장 동구의 전통시장
①불로시장 ②평화시장 ③반야월시장 ④방촌시장 ⑤동서시장
▶제4장 남구의 전통시장
①봉덕신시장 ②관문시장 ③대명시장 ④명덕시장 ⑤영선시장
▶제 5장 수성구 전통시장
①신매시장 ②수성시장 ③목련시장
▶제6장 북구의 전통시장
①매천시장, [경제 & 피플] 대구신화수산 고중근 대표이사 ②칠성시장 ③칠곡시장 ④산격종합시장 ⑤원대신시장 ⑥팔달신시장
▶제7장 달서구의 전통시장
①월배시장 ②대동시장 ③달서시장 ④[주목 이점포] 대구 수제찰떡의 명가 ‘자인떡방앗간’ ⑤서대구시장 ⑥성서 용산시장 ⑦와룡시장
▶제8장 달성군의 전통시장
①화원시장 ②현풍 도깨비 100년시장 ③논공시장 ④달성군 전통시장의 역사
◆기사 샘플
[정 듬뿍·추억 가득! 영남 전통시장 탐방] 대구 봉덕신시장
1970~80년대엔 미군수품, 지금은 돼지국밥으로 전국적 유명세
정유재란 때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였던 울산성 전투.
당시 조명(朝明)연합군은 왜군을 성안에 가두고 보급로를 끊어버렸다. 식수가 끊긴 왜군이 소변을 받아 목을 축이고, 말의 피로 해갈(解渴)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극한의 공간 울산성에 매일 새벽에 시장이 섰으니 바로 물장수들이었다. 물장수들도 목숨을 걸고 성벽을 넘었을 것이니 그들의 물 한병은 금은과 바꿀 정도였다. 이렇듯 전쟁과 시장은 생사가 오가는 극한의 순간에서 묘하게 만나기도 한다.
전쟁과 시장이 조우한 흔적은 대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구시 남구에 있는 봉덕시장은 6·25 한국전쟁이 대구에 남긴 유산이자 작은 선물이다. 한국전 당시 전쟁을 피해 대구로 왔던 난민들이 봉덕동 일대에 난전을 열면서 전시(戰時)시장이 자연적으로 생겨났다.
전략요충지로 대구를 주목했던 미군은 이천동에 군부대를 설치하고 대규모 군인, 군속을 배치하며 캠프헨리 시대를 열어갔다. 이 과정 속에 봉덕동 모퉁이 조그만 난전은 대구의 대형시장으로 성장해갔다. 미군부대와 시장의 동거는 이렇게 전란 속에서 싹을 틔웠던 것이다.
◆1970~80년대 미군부대 군수, 구제물품 넘쳐나=봉덕시장은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에 설립되어 올해 66주년을 맞았다. 전쟁이란 불행한 역사 속에서 태동했지만 대구경제의 한 축을 이루며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해왔다.
시장의 가장 호황기는 1970~80년대였다. 당시 캠프헨리에 주둔한 미국 병력 수나 군속, 한국인노무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고 이들이 여는 지갑은 지역의 큰 돈줄이자, 시장의 활력소였다.
당시 봉덕시장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워커(군화), 담요, 재봉틀, 씨레이션(미군 전투식량)부터 온갖 구제품과 군수보급품들이 넘쳐났다.
명품의류, 구제 패션을 찾아 대구의 멋쟁이들은 봉덕동으로 몰려들었다.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여성군무원이나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학생들이 골목을 누비며 쇼핑을 즐겼다. 이 때문에 패션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구 구제역사의 출발을 봉덕시장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상인들과 미군이 서툰 영어로 바디 랭귀지를 통해 흥정을 하는 모습은 당시 상가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시장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그때는 영어를 제대로 배운 사람이 없었고 그냥 ‘This~’ ‘That~’ ‘How much~’ ‘킹사이즈? 스몰사이즈?’만으로 장사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돼지국밥, 한과, 보리밥집 전국적 유명세=현재 봉덕시장의 점포 수는 노점 포함 모두 280곳. 청과, 채소, 양곡, 농축수산물, 반찬, 패션 등 웬만한 마트수준의 제품을 갖추고 있다. 봉덕시장의 인기 제품은 단연 한과. 인기 비결은 백화점, 마트와 달리 즉석에서 만들어 판다는 점이다.
44년간 한과를 만들었다는 한 상인은 “옛날에는 봉덕시장 한과를 사기 위해 경산, 고령, 칠곡에서도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며 “요즘도 옛날 단골이나 어르신들이 옛맛을 찾아 일부러 여기까지 온다”고 말한다.
이곳 보리밥집도 제법 유명세가 있다. 식객들은 ‘공주보리밥파’와 ‘행복보리밥파’로 나뉘는데 맛에 우열이 있는 건 아니고, 각자의 입맛에 따른 기호의 차이일 것이다.
봉덕신시장의 최고 아이템은 뭐니뭐니해도 돼지국밥골목이다.
봉덕동 국밥의 특징은 부드러운 고기와 진한 국물맛. 돼지머리를 푹 끓여 국물을 내고 여기에 머릿고기를 썰어 말아내는 방법이다. 다른 식당과 큰 차이점은 없지만 머리를 통째로 넣으면서도 누린내를 잡은 것이 이곳의 비법이다. 이 누린내까지 사랑해야 진정한 국밥 마니아라고 하지만, 쌈장과 다대기를 적당히 첨가해 먹으면 이 잡내도 잡을 수 있다.
각 식당마다 개성이 뚜렷해 호불호가 가리지만 일반적으로 청도, 삼정, 김천, 털보식당을 봉덕신시장 국밥 4대천왕으로 부른다. 일부 호사가는 이를 세분화해 1강2중1약으로 나뉘는데 여기에 대한 평가와 검증은 각자의 몫이다.
입구에서 만난 윤경태(57) 씨는 “여기 국밥 특징은 넉넉한 고기로 수육을 따로 시킬 필요가 없을 정도”라고 말하고 “청도는 한약 냄새가 특징이고, 김천과 삼정은 쌈장을 얼큰하게 풀어 먹는 맛이, 털보는 잡내를 확실히 잡아줘 담백한 맛이 각자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2005년 현대화 사업 이후 ‘봉덕신시장’ 시대 열어=1972년에 정식 허가를 받은 봉덕시장은 주변 상권 침체와 대형마트와 슈퍼마켓 등이 들어서면서 1990년도부터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시장이 기능을 잃어가자 남구청은 2005년 시장을 다시 살리기 위해 현대화사업을 실시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추진되지 못했다. 기존 봉덕시장은 주택가 골목에 자리잡고 있고 여러 권리관계가 얽혀 있어 협약이 원활하지 못했다. 이에 남구청은 봉덕시장 대신 큰 길과 붙어있던 상가들을 모아 현대화 사업을 실시했는데 그때 새로 생겨난 시장이 봉덕신시장이다.
2006년에 등록된 봉덕신시장은 지속적인 현대화 사업을 펼쳐 시장 전체에 아케이드와 넓은 공영주차장, 야외상설공연장 등을 설치했다. 덕분에 지난 2013년 중소기업청 시장경영진흥원이 발표한 ‘전국 전통시장 활성화 수준 평가’에서 최상위 등급인 A등급을 받기도 했다.
장흥섭 전 경북대 교수는 “봉덕시장은 한국전쟁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시장인 만큼 새로운 활성화 방안을 찾아 시장의 역사를 유지하고, 봉덕신시장은 국밥골목이나 구제골목 등을 특성화해 재미있는 관광거리로 만들어 활성화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취재를 위해 봉덕동을 찾았다. 1970~80년대 사람들로 가득했다는 봉덕시장은 옛 시장의 활기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골목마다 손님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함광식 신시장상인회장은 “현재 재난지원금으로 반짝 특수를 누리고 있지만 전통시장의 위기는 현재 진행형”이라며 “봉덕신시장 상가번영회에서도 전통시장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6·25전쟁 중에 대구에 경제 싹을 틔웠던 봉덕시장. 지금 포성을 멎었지만 전통시장 생존이라는 또 다른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이 시리즈물의 활용
현재 디지털경제에서는 ‘경북의 전통시장’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전체 35회 분량으로 ‘대구의 전통시장과 비슷한 분량이다.(현재 공정률 70%)
향 후 두 지역의 전통시장을 한권으로 펴내거나 상, 하권으로 발행한다면 대구경북의 전통시장을 한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작성자, 집필자 한상갑 기자 010-6573-66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