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36
5월25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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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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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레오파고스 언덕 위의 사도 바오로>
가톨릭평화방송 TV 기획 프로그램 아레오파고스에 출연하면서 아레오파고스라는 단어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레오파고스는 일종의 지명입니다. 고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낮은 언덕을 말합니다.
초창기 아테네 귀족 회의가 열리던 장소였는데, 나중에는 아레오파고스라는 말의 개념이 확장되어 회의 자체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아레오파고스 회원들은 왕의 자문위원회 역할을 수행했고, 행정, 종교, 교육 분야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이토록 대단한 장소 아레오파고스 한가운데 섰습니다. 당대 난다긴다하던 석학들과 당시 사회를 주름잡던
세력가들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여러 첨예한 주제에 대한 토론과 비판의 전문가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자칫 엉뚱한 말이나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할 경우, 그 자리에서 고발당하고, 매질 당하고, 투옥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무엇에도 거칠 것이 없이 당당하고 의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오로 사도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아테네 지식인들과 권력자들의 심기를 사정없이 긁는 표현들이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 상이나 은 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지적을 감안할 때, 당시 아테네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나 잡신에 깊이 빠져 살았습니다. 이미 깊이 빠져들어 헤어나기 힘든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복수심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던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오로 사도는 목슴을 걸고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놀랍도록 담대하게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그토록 담대하고 의연한 바오로 사도의 모습, 그 배경에 과연 무엇이 자리하고 있었을까요?
바로 진리의 영, 협조자 성령이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복음 16장 13절)
오늘 우리 안에도 항상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현존하시고,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함께 하시길 청합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바오로 사도처럼 목숨을 불사하고 진리의 말씀을 이웃들에게 선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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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에서 주관 무료 북 콘서트, ‘위로해 Dream’
일시: 2022년 5월 27일(금) 저녁 7~9시
장소: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 마리아홀
주제: 인문학이 주는 삶의 치유
출연
: 독서전문가 임성미 선생, 생활성가 가수 김정식 로제, 테너 송봉섭 요한
참가 문의 및 접수: 02. 832. 2654
장소: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로 93(7호선 신풍역 4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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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0UIs24yvW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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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충만하면 성경해석이 잘 될까?>
오늘 복음은 말씀을 전해 주시는 ‘성령님의 역할’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 말씀을 지금은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요한 16,12)
만약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다면 성령의 역할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하시는 말씀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떤 가톨릭 잡지에 글을 쓸 때, “예수님은 유다 한 명도 회개시킬 수 없으셨다”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편집자분이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은 유다인 한 명도 회개시킬 수 없으셨다”로 바꿔서 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결국 유다인 한 명도 회개시키지 못한 분이 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십니다. 이해한다는 말은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그저 아드님한테서 들으신 말씀을 당신 생각을 첨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
하느님이신데도 말씀에 한 마디도 더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이기에 말씀에 자기 생각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말씀을 해석하게 만드는 장본인은 분열을 일으키려는 사탄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반전이라 불리는 ‘유주얼 서스팩트’는 주인공이 자신을 심문하는 경찰을 끊임없이 해석하게 만듭니다. 그런 해석을 통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결론을 내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범인은 해석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또 최고의 반전 영화는 ‘식스 센스’입니다. 여기서도 주인공은 끊임없이 상황을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정작 죽은 유령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정작 자신이 유령임을 깨닫게 되는 때는 해석하는 대상이 아닌 해석 당하는 대상이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감히 해석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말씀에 해석 당하는 대상입니다. 감히 성령께서도 말씀을 해석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해석하려는 것은 말씀 위에 서는 교만한 행위입니다. 사람도 해석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말씀을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 말씀을 해석하려 시도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분열이 일어납니다. 해석은 호해를 낳고 분열을 낳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베드로의 믿음 위에 세우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습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여기 어디에도 베드로의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없습니다. 베드로 위에 세운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게 어렵습니다.
또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행하신 성찬례가 예수님의 진짜 살과 피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
몸과 같이 여기라거나 그냥 예식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예식을 거행하라는 명령이셨습니다.
또 그들은 진리의 기둥이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1티모 3,15) 성경은 성경이 아니라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성모님을 하느님처럼 섬긴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어떻게 인사하였습니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성모님은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셨고 주님께서 함께 계신 분이셨습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그분은 주님의 어머니이십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2-43)
친구의 어머니도 공경해야 하는데 주님의 어머니를 공경하는 게 무슨 잘못일까요?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께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분으로 공경받으시는 것을 질투하실까요?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모님께 공경을 올렸고 이것은 태중의 아기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왜 “말씀만으로!”란 기치를 들고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지 못할까요?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령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말씀을 받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십니다. 이것처럼 해야 합니다. 말씀은 해석할 대상이 아니라 믿을 대상입니다. 믿고 순종할 대상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아버지가 죽으며 밭에 보물이 있으니 파서 갖는 사람이 임자라고 두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밭은 돌이 많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버려진 밭이었습니다. 두 아들은 보물을 찾기 위해 계속 밭을 팠습니다.
보물이 나오지 않자 첫째는 아버지가 자신들을 속였다고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돌밭을 파는 일을 멈추었습니다.
그래도 둘째는 열심히 팠습니다. 보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돌을 다 걷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씨앗을 뿌리니 정말 엄청난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몸도 좋아지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왜 아버지의 말에 대한 두 아들의 의견이 달랐을까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해석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올까요?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해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분명 자신에게 좋은 일임을 알고 순종하였습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지 않았고 그래서 말씀을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류에 빠졌습니다. 반면 둘째 아들은 말씀에 순종하였고 그 보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말씀하시는 분을 믿게 만들어 그 말씀에 순종하게 합니다. 순종하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녀에게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밭을 파 보면 보물이 나올 것이라고. 이렇게 하나도 첨가하거나 빠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먼저 말씀을 믿고 순종합시다. 그러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가장 완전한 해석입니다. 해석이라기보다는 ‘이해’입니다. 한 말씀에 여러 해석이 나온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여러 개의 해석이 가능한 말을 하여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을 분열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성경 해석 문제로 갈라진다면 그건 사탄에게 속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성령이 가장 충만한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입니다. 내가 진리의 기둥인 것처럼 성경을 해석하여 옳고 그리고를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말씀의 심판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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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12-15: 진리의 성령이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3절)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참다운 진리가 무엇인지,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조금씩 깨우쳐 주시리라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즉, 사랑 안에서 더 충만한 지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 안에서 살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모든 말씀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13절) 성령께서는 스스로 오시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오시는 분이시다. 성령께서 계신다는 것과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들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영감도 주고 말도 한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들의 말씀이며, 아버지의 뜻이다. 아들도 성령께서도 스스로 말하지 않으신다.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3절) 그분의 가르침은 아들의 가르침이며, 성령께서는 아들이 가르친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 그 말씀들은 아들의 말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는 말씀이다.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성령의 은총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의 삶을 이 땅에 미리 앞당겨 살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사를 통하여 하늘나라의 기쁨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 하느님 안에 살 때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4절)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충만케 하시어 아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실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와 가르침은 주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당신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당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았듯이 성령께서 당신에게서 받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15절)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아들의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이것들을 아들에게서 받지만,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기도 하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일치하신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은, 아들이 주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여 성령께서는 우리를 평범한 인간적 삶에서 벗어나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 즉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영원한 파스카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세상에 살지만 이미 천국으로 건너간 삶을 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를 맡겨드리고 따를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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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이라는 말씀은, 말하지 못한 새로운 가르침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제자들을 충분히 이해시키기 위해서 ‘보충 설명’을 해야 하는데 시간도 부족하고, 제자들도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체포되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살 준비가 아직 안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말씀, 그리고 제자들이 겪게 될 박해에 관한 말씀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9)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약속하신 분’은 ‘성령’이고,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기다리면서 기도에 전념하면서 지냈습니다.(사도 1,14) 그러다가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받은 뒤에, 박해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대한 사도이며 선교사로 완전히 변화되어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모님의 경우에, 보통 사람이라면 감당하지 못할 말을 시메온 예언자에게서 들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그런데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할 때부터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분입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기꺼이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신앙 여정과 인생살이에서 겪게 될 고난과 박해를 미리 알게 된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어떤 고난을 겪게 될지, 또 어떻게 죽게 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21,18-19) 만일에 예수님 부활 전에 그 말씀을 들었다면, 베드로 사도는 겁에 질려서 달아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또 성령을 받고 나서 완전히 변화된 베드로 사도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 죽음을 향해서 용감하게 나아갔습니다. 그는 죽음 너머에서 영광과 새 생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또 베드로 사도처럼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고, 죽음 너머에서 새 인생과 새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물론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새 인생과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종말’에 관한 말씀에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 전의 재난들과 종말의 날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시기는 했는데(마르 13장), 그날과 그 시간이 언제인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마르 13,32) 만일에 지금이라도 어떤 예언자를 통해서 종말의 날과 시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 예고된다면 인간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인간들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날과 그 시간이 되기 전에 인류 역사는 정지될 것이고,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고, 멸망을 향해서 내달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과 그 시간이 언제인지 모르는 것도 은총일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은 ‘성령’입니다.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의 말씀들을 온전히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될 것이며, ‘삶’으로 실천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예고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 박해에 맞서서 신앙을 증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증언하는 일 자체는 우리가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령께서 아무리 큰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셔도, 우리 쪽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다른 새로운 계시는 없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새로운 가르침을 주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일입니다.
앞으로 올 일들을 성령께서 알려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종말의 심판에 관해서 알려 주실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신다는 뜻은 아니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은사 가운데 ‘예언의 은사’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아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능력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하느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직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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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타밈 안사리의 ‘다시 보는 5만년의 역사’를 읽었습니다. 인류의 문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석물린다.’라고 표현합니다. 색은 삼원색이 있습니다. 빛의 삼원색은 함께하면 더 밝아지고, 물감의 삼원색은 함께하면 더 진해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색은 석물리면서 다양한 빛과 색을 나타냅니다. 인류의 문명도 크게 4개의 문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입니다. 이 문명은 모두 강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와 유크라테스 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와 갠지스 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황하문명은 황하 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각자 시작된 문명은 실크로드를 통해서, 해상의 무역 로를 통해서 서로 석물리며 발전하였습니다.
우리는 4 복음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의 복음서만 있다면 예수님의 한 모습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4복음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영성적인 사유를 하게 해 줍니다.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태초부터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주론적인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약의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임마누엘’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가복음서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갇힌 이들, 아픈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각자의 복음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복음서를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박해의 시기였고, 아직까지 교회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의 철학과 로마의 법과 페르시아의 문학과 대화를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세상에서는 문명과 문화의 변방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살던 사도들이 문명의 중심지인 로마와 아테네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보이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성령의 도우심과 뜨거운 열정으로 마침내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 모든 일을 가능케 하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철학과 법과 문학을 뛰어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십자가의 힘을 증언하였습니다.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당당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제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들 각자의 복음서를 가지면 어떨까? 가브리엘 복음서, 안드레아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 로사 복음서와 같이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한 복음사가처럼 깊은 영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처럼 성서에 대한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루가 복음사가처럼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처럼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도전은 ‘그리스의 철학, 로마의 법, 페르시아의 문학’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신화와 종교의 틀을 벗겨버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가치와 의미를 빨아드리고 있습니다. 인간중심의 사고는 함께 살아야 하는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온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푸른 별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굳셈의 성령, 지식의 성령,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 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생태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눔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오늘 막사랑에 빠진 것처럼,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직 지금이 유일한 것처럼 서로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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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고대 그리스 문화의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아테네. 그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아크로폴리스 정상에는 고대 그리스 건축물의 정수라고 손꼽히는 파르테논 신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건물로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지만, 그 거대한 규모와 높이 솟아오른 수많은 돌기둥은 여전히 보는 이를 압도하며 과거의 영광과 위용을 그대로 자랑하고 있는 듯합니다.
여행길에 그 아크로폴리스 정상을 향하여 가다가 산 중턱 한 모퉁이에서 작은 푯말 하나를 보았습니다. “아레오파고스, 바오로가 이곳에서 설교하다.” 바오로는 그렇게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인 아테네에서, 그리스의 다신론 사상이 절정을 이루고 있던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며, 산 중턱 한 모퉁이에서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선포합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함과 웅장함과 그 화려함 앞에서 담대하고도 용기 있게 외칩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나왔을까요? 신전 중에 신전이요, 인간이 지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졌던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어떻게 이런 말로 설교할 수 있었을까요? 바오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이 다 담아낼 수 없는 하느님, 사람의 손으로 드리는 섬김과 예배에 결코 종속되실 수 없는 그 하느님께서 바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오늘은 그렇게 온 세상조차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계심을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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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서 연설합니다. 당시 아테네는 교육 도시로서 명성이 매우 높았으며, 시민들은 새로운 학문에 대한 갈망과 함께 종교심도 깊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우상 숭배에 물들어 있었기에 온갖 것에 이름을 붙여 신격화하여 제단을 만들어 섬겼던 것입니다. 더욱이 아테네 시민들은 아직 자신들이 모르는 신이 분명 있으리라고 생각한 나머지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긴 것입니다.
오늘 주목할 점은 바오로 사도의 태도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아테네 사람들을 대하는 바오로 사도의 지혜와 포용력이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세운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언급하면서, 바로 그 알지 못하는 신이 ‘하느님’이심을 자연스럽게 말한 것이지요. 이 방법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그들의 무지와 우상 숭배를 무조건 탓하기보다, 그들 안에 심어진 복음의 씨앗을 발견하여, 그 싹을 키워 주는 이런 방법도 바람직한 선교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복음을 전하면서,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의 환경과 입장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참되고 변하지 않는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입과 손이 되어 말씀을 널리 전하도록 성령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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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진리 안에 머무는 것은 타인에 대하여, 나아가 하느님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생각에 따라 말하고 행동합니다. 각자의 생각을 고쳐 하나의 사실과 정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고 다듬는 것이 진리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진리는 다름의 자리에서 서로를 향한 열린 눈과 귀를 간직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진리의 영께서 일깨워 주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믿음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길잡이시며 버팀목이셨습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신앙의 정답을 제시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아버지 하느님께 들으신 것을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여러 가르침은 획일화되고 화석이 되어 무조건 그대로 수행해야 하는 정언 명령이 아니라, 다양한 색깔로 채색된 화려한 그림과 같습니다.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리의 영께서 이어받으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들은 이야기를 진리의 영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과 같이, 신앙인들은 서로의 다른 생각을 교환하고 교환한 자리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누리는 개방적이고 초월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생각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다듬고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른 이와 우리 각자의 생각을 나누기 위하여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은 저 혼자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사람과의 친교를 되새기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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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령과 나>
요한 16,12-15 (성령께서 하시는 일)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성령과 나>
오시는 성령
어디에 오시나
오신 성령
어디에 계시나
품으시는 성령
어떻게 느끼나
이야기하시는 성령
무엇을 듣나
이끄시는 성령
어떻게 따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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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리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민주주의 원칙 중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다수결의 원칙이 진리는 아닙니다. 따라서 진리가 다수에 의해서 바뀔 수는 없습니다. 다수에 의해서 이랬다저랬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누가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일 뿐입니다. 성 막시밀리안 콜베는 말합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리를 뜯어고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결국 진리의 길을 따르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고정되고, 우리가 그분께 기쁘고 은혜로운 일들을 찾으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행한다면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을 무장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 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에페6,14-16).
진리의 영을 받은 제자들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안내하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셨고 진리 안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믿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안내하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하겠습니다.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고 예배하도록 이끄는 세상의 많은 어두운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진리 안에 더욱 굳건해야 합니다. “숨기려고 하면 왜곡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자신의 논리로 합리화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없애려고까지 하게 됩니다.”(박병규)
그러나 진리의 영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들은 이웃과 세상에 열려있습니다.
한 때 ‘다빈치 코드’소설이 영화 되어 상영되고, 많은 이야기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일 뿐입니다. 허구는 허구요, 픽션은 픽션일 뿐입니다. 근래에는 ‘신천지’라는 이단이 많은 이들을 유혹하고 이제는 공공연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와 굴곡된 성경해석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 ‘구해줘’라는 드라마가 개신교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아무리 흔들고 뜯어고치려 해도 진리입니다. 거짓 논리를 통해 진실처럼 보이게 할지라도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지 거짓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는 것에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영적인 지혜, 계시 및 지식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17,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진리다.”(요한 14,6)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제 진리의 영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진리의 영은 새로운 계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이끄는 역할을 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가져온 유일한 계시로 깊이 들어가게 하고 깨닫도록 합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마음이 열려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빕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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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 말. 말!>
나는 하루에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사는가? 입이 있기에 말을 하고 살아야 함은 당연할진대 어떨 때는 쓸데없는 말을 할 때도 많고 안 해도 될 말을 할 때도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반대로 꼭 말을 해야 할 때도 힘이 없어서 말 못하고, 말하면 누군가 다칠까 봐 가만히 있기도 하고, 심지어 말해봐야 입만 아플 것 같아서 말을 못 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말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 말 때문에 수많은 문제가 야기된다.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오해가 생기고 관계가 나빠지기가 일쑤다. 그럼 어떤 식으로 말하면서 살아가야 하나? 그 원칙을 한번 복음에 비추어 정리해 보자.
1) 먼저 할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슴에 담아두자.
된장이 맛이 있기 위해서는 오래 담구어 두어야 하고 술이 맛이 있기 위해서는 오래 숙성시켜야 한다. 말도 다 입으로 내뱉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때론 가슴 속에 묻어두어야 한다. 자식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쓸데없는 말을 줄이자.
자기를 자랑하고 드높이는 말, 과장해서 하는 말, 남보다 더 많이 아는 듯이 보이기 위해 하는 말, 남을 험담하는 말,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 욕설 등은 내 입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기에 가능한 한 줄여나가야 한다.
3) 꼭 할 말은 더 많이 하자.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는 기도, 남을 칭찬하는 말, 감사하는 말, 미안하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위로의 말, 용서를 청하는 말, 이런 말들을 하면 할수록 내 입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기에 더욱더 늘려나가자. 침묵만이 금이 아니다. 침묵이 금이라면 이러한 말들이야말로 보석들이다.
4) 입보다는 눈으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말하자.
전철을 타고 갈 때마다 늘상 만나게 되는 "예수 믿으시오!"하는 소위 쟁이들을 만날 때마다 입보다는 마음과 행동으로 설교해야 함을 더더욱 느끼게 된다.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눈으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말보다는 실천이 앞서야 함은 당연지사...
예수님은 입보다는 몸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의 삶 자체가 하나의 설교였다. 그분은 아직도 나에게 할 말이 많으신데 그냥 마음속에 품어 두신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 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말씀은 <바오로, 너를 사랑한단다!>이리라.
그 사랑을 말로 하기보다는 눈으로 마음으로 몸으로 하셨기에 이는 내가 진리의 영 안에서 올바로 해석할 줄 알아야만 알아듣기 때문이다.
<주님,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 드려야겠지만 입으로 보다는 나도 눈으로 마음으로 그리고 내 삶으로 그 응답을 드려야 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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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을 두고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이 좋다”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신력이 웬만큼 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예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며느리가 새 식구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신혼집에 방문하신 시부모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데 글쎄 밥을 태운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인상을 쓰면서 “너는 친정에서 밥하는 것도 못 배웠니?”라고 나무랐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시어머니는 “내가 한 번 봐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네. 미안하다.”라면서 오히려 사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두 시어머니 중에 누가 정신력이 강한 분일까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먼저 책임을 지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더 큰 가치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이 먼저 책임을 지며 더 큰 가치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족함으로 인해 정신력 강한 사람이 되기 힘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과 함께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향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가신 다음 제자들을 홀로이 이 세상에 남겨두지 않고 당신과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이렇게 말씀하셨었지요.
첫째, 진리의 성령으로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머물 것이며(요한 14,16-17),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며(요한 14,25-26), 셋째, 진리의 성령으로서 예수님의 일을 증언할 것이며(요한 15,26), 넷째, 세상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요한 16,8)
오늘 복음에서는 이제 다섯 번째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안내자이신 성령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 외의 또 다른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제자들이 깨닫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도와주고 격려하여 주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길로 제자들을 이끄시는 안내자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의 안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책임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더 큰 가치를 바라보면서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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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을 찾는 인간>
- 진리의 영이 무지에 대한 답이다 -
엊그제 23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3주기 추도식엔 여야 지도부가 총출동했습니다. 국민의 통합을 위해 참 바람직한 일입니다.
“나는 깨어 있는 강물이다”를 주제로 열린 추도식에서 문 전 대통령은 “늘 깨어 있는 강물이 될 것”이라 말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을 때 늘 깨어 있는 강물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역시 늘 강조하는 바도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맑게 흐르는 강같이 살자는 것입니다. 제 좋아하는 좌우명시 한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를 향해
맑게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깨어 맑게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깨어 맑게 흐르는 강입니다. 어제는 코로나로 중단됐던 단체피정이 만2년만에 재개되어 매달 갖는 모임인 예수성심자매회 10명이 참석하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루하루 맑게 흐르는 강처럼 살아 온 자매들이라 한결같이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들이 모두 성녀들처럼 보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만남의 기쁨을 만끽한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이란 호칭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이고 눈물이 글썽인다는 어느 수도승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을 찾는 인간에 하느님을 찾는 여정입니다.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 베다 베네빌리스 사제 학자’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성 베다는 7세때 수도원에 봉헌된 후 일생 동안 기도하고 노동하고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한 영국 출신의 베네딕도회 수도자였으며 그의 학문적 업적으로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그의 지혜와 학문을 인정하여 교회는 성인에게 ‘존자尊者(Venerable)’라는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성인은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참으로 겸손하였으며, 영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1899년 교황 레오 13세는 성인을 교회 학자로 선언하였고, 성 보니파시우스는 성인을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 ‘우리 스승이신 베다 존자’라고 불렀습니다. 성인은 단체 신곡의 천국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영국인이기도 합니다. 이런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성인의 삶을 대하면 정신도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이미 1300년전 성인이지만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인간”, 바로 가톨릭 교리서 맨 처음, 제1부 제1장의 소제목입니다. 바로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인데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 있음을 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에 대한 책임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무지는 결코 누구탓도 아닌 순전히 내탓이니 평생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하느님 공부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가톨릭 교리서도 인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늘 인간을 당신께로 이끌고 계시며,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와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교리27항)
이렇듯 자명한 하느님을 모르는, 또 잊고 지내는 태만의 무지가 인간의 근원적 비극이자 불행임을 깨닫습니다.이런 측면에서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가 아테네 시민에게 한 강론은 참 공감이 갑니다.
“세상과 그 안에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모든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으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 역시 무지에 대한 결정적 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찾는 이들의 마음은 기뻐하여라.”(시편105,3) 비록 인간은 하느님을 잊거나 거부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모든 이를 끊임없이 부르십니다. 바로 이에 대한 응답이 우리의 당연한 하느님 공부이며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해주시는 분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는 파스카 예수님이자 주님의 성령입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진리의 영,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살아 계신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예수님의 것이요, 성령께서는 예수님에게서 받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성령을 통해 당신께 대한 앎을 날로 깊이해 주시어 당신과의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참나를 살게 해 주십니다.
참으로 우리 영혼이 성령을 통해 늘 주님 안에 머물 때 진정 지혜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이끌어 주시는 진리의 영, 성령입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무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아름다운 성령의 사람들로, 진리의 사람들로 살게 하십니다. 성령 안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날로 일치의 관계를 깊이해 주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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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3NhQjw1Zi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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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요한 16, 12)
사랑은
이런 것이다.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받아들일
때까지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삶을 깨닫게
하는
진정한 힘
사랑의
진리이다.
진리는
하느님의
것이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계신
진리이시다.
진리는
서두르지
않는다.
느림과
빠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의 참된
결행(決行)이다.
지금과
나중 사이에
이끌어가시고
알려주시는
성령이 계시다.
이 좋으신
진리의 영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주님이시다.
진리의 영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기쁜
여정이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진리의 영을
인정하고
믿는 실천이다.
사랑은
기꺼이
가장 좋은 것을
내어주는
실천이다.
예수님과
성령의
관계처럼
서로 돕는
사랑의 관계이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알려주시는
진리의 영이
계시기에
우리의
모든 길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나눔의 길이
된다.
지금과
나중을
이어주시는
진리의 영께서
모든 진리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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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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