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해설] 플라스틱 산호초 / 나희덕
플라스틱 산호초
나희덕
아주 가볍고 단단하고 질기고 반짝이고 게다가 값이 싼 새로운 물질에 인류는 열광했지
눈비에도 새지 않고 썩지도 않는 이 화합물에 녹을지언정 쉽게 부서지지 않는
땅속에바다속에공기속에벽속에박힌인터넷케이블 물을보내고저장하고걸러내는PVC관 나일론염화비닐아크릴폴리머섬유플리스섬유자일로나이트 폴리에스테르폴리우레탄폴리에틸렌폴리스티렌폼폴리카보네이트
우리는 모두 플라스틱 중독자
앤디 워홀은 플라스틱을 사랑한다고 플라스틱이 되고 싶다고 했지 다양한 폴리머들로 온몸을 감싼 채 걸어가는 우리는 플라스틱-인간
깊은 바닷속의 산호초도 미세 플라스틱을 삼키고 창백해져가고 있어 죽어가고 있어
산호초를 애도하기 위해 누군가는 바다 쓰레기를 녹여 플라스틱 산호초를 만들고 누군가는 모여 앉아 실로 산호초를 짜고 있고 누군가는 플라스틱 만다라를 그리고 있지 바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죽음을 알리기 위해
어쩌면 바다를 애도하기 위해 산호초들이 흰 옷을 입고 있는지도 몰라
점점 뜨거워지는 바닷속에서 산호초는 백색 플라스틱 화합물이 되어가고 점점 뜨거워지는 대기 속에서 인간은 색색의 플라스틱 화합물이 되어가고
결국 플라스틱 지층으로 발굴될 우리의 세기, 제기랄 썩지도 않고 불멸할
*마텐 반덴 아인드의 설치작품 〈플라스틱 산호초〉, 2008-2013년. -계간 《시와편견》2022년 여름호 ................................................................................................................................................................. 흙의 생명력에서 인류세의 퇴적물로 내가 시인으로서 살아온 여정 속에서도 ‘흙’은 핵심적인 물질이고 화두였다. 등단작 「뿌리에게」(1989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에서부터 ‘흙’이 화자로 등장한다. 대학교 2학년 학기 초였던가. 늦겨울 학교 뒷산에 올라갔다가 김을 내뿜으며 녹기 시작하는 흙의 생명력에 감전되어 이 시를 순식간에 써내려갔다. 내 속의 흙이 얼음에서 풀려나며 말하는 소리를 받아 적은 것이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로 시작하는 시를. 그때만 해도 대지의 충만한 사랑과 생명력이 내 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내 시 속의 ‘흙’은 점점 말라가고 푸석해지고 더 이상 생명을 키워낼 수 없도록 척박해져갔다. 그 불모성은 훼손되어가는 자연의 실제적인 상태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고, 세상에 부딪치고 상처 입으면서 만들어진 내면적 상태이기도 하다. 「뿌리로부터」(『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사 2014)에서는 나를 지탱해주던 대지적 기반으로부터 벗어나 더 희박한 허공으로 탈주하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뿌리를 향하던 마음이 뿌리로부터 벗어나 더 위태로운 실존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새로운 시의 자리를 찾는 길이라 여겼던 듯하다.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나는 이미 ‘연한 흙’이 아니라 뿌리에서 가장 멀리 도망치며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지난 삼십여 년 동안 나의 시는 과연 흙의 마음에서 멀어진 것일까. 다시 생각해보니, 그 불모화의 과정은 지구의 흙이 온통 파헤쳐지고 착취당하고 온갖 오염물질들로 끙끙 앓아온 과정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나의 내면과 시가 병든 흙과 함께 앓아 왔던 것 같다. 세계가 깊이 병들어 가는데 변함없이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는 서정시를 쓴다는 것이 오히려 더 기이하지 않은가. 흙의 생명력에서 시작된 나의 시세계는 오늘에 이르러 인류세의 퇴적물을 고통스럽게 직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 산호초」는 마르텐 반덴 아인드(Maarten vanden Eynde)의 설치작품 「플라스틱 산호초」(2008~2013년)를 모티프로 삼아 토양과 해양을 두루 오염시킨 ‘플라스틱’이라는 물질에 주목한 시다. “아주 가볍고 단단하고 질기고 반짝이고 게다가 값이 싼” 이 새로운 물질에 열광했던 인류는 이제 플라스틱 없이는 살 수 없는 ‘플라스틱 중독자’ 또는 ‘플라스틱-인간’이 되어버렸다. 점점 뜨거워지는 바다와 대기 속에서 많은 생명체가 위험에 처해 있고, 깊은 바닷속의 산호초에도 백화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시는 땅과 바다의 오염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산호초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세상에 알리는 예술가들의 작업을 후반부에 언급한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누군가는 바다 쓰레기를 녹여 플라스틱 산호초를 만들고/ 누군가는 모여 앉아 실로 산호초를 짜고 있고/ 누군가는 플라스틱 만다라를 그리고 있”다. 시적 화자의 탄식처럼 “결국 플라스틱 지층으로 발굴될 우리의 세기, 제기랄 썩지도 않고 불멸할” 것이지만, 그래도 파국을 막기 위한 예술적 수행성이나 실천을 포기할 수는 없다.
2000년대 이후 한국시에 나타난 변화를 떠올려보아도 그렇다. 자연이라는 매트릭스에 안주하거나 자연과의 낭만적 동일화를 넘어, 파괴되고 오염된 세계의 실상을 직시하고 증언하는 시들이 계속 쓰이고 있다. 그 시들은 상실의 고통 속에서 부르는 비가(悲歌)이자, 죽거나 희생된 존재들을 애도하는 만가(輓歌)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하데스에게 딸을 빼앗기고 스스로 불모의 땅이 되어 불렀던 슬픔의 노래다. 시는 순하고 부드러운 흙에서 태어났으나 더러워지고 병들어가는 흙 속에서도 끝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흙의 마음이 곧 시의 마음이기에.
―『문명의 바깥으로』 나희덕 시론집, 창비, 2023(47쪽~50쪽) ---------------------- 나희덕 /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파일명 서정시』『가능주의자』, 시론집『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한 접시의 시』, 산문집 『반통의 물』『저 불빛들을 기억해』『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예술의 주름들』 등.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