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자의성은 변별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
소쉬르의 언어학이 갖는 혁명성은 결국 언어가 현실적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의적인 체계(le systéme arbitaire)’라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칸딘스키의 그림 〈구성 4〉를 보면 화면에서 각 형상들은 어떤 대상을 묘사함으로써 의미를 지니기보다는 다른 형상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의미를 지닌다. 그림의 중앙에 위치한 두 개의 검은 수직선을 중심으로 화면은 좌우로 분할된다. 오른쪽 화면에서 보이는 선의 완만한 굴곡이나 면과 색채의 팽창은, 왼쪽 화면에서 보이는 선의 급작스러운 변화나, 응축된 느낌의 면과 색채와 대비됨으로써 혼란스러운 전쟁의 상태와 대비되는 정토(평화로운 세상)를 함축한다. 이 그림에서 오른쪽 화면의 형상이 이러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그 형상 자체가 정토의 세계를 묘사하기 때문이 아닌 왼쪽 화면과의 관계를 통해서이다.
칸딘스키, 〈구성 4〉 Composition Ⅳ, 1911그림의 형상들은 묘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형상들과의 관계에 의해 의미를 지닌다.
소쉬르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언어 혹은 기호의 ‘자의성’을 확장하면 다음과 같다. 언어는 자의적인 방식으로 체계화되기 때문에 어떤 부족에서는 ‘아버지’와 ‘아저씨’가 아무런 구분이 없이 하나의 용어로 지칭된다. 물론 삼촌이나 외삼촌 등의 용어도 없다. 이 경우 부족의 모든 아저씨는 아버지이며 아버지도 아저씨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이는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이 부족의 임의대로 만들어졌다. 이는 곧 이 부족이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체계화하고 있음을 뜻하며, 동시에 우리와 전혀 다른 가족체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임의로 기호를 만듦으로써 다른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임의대로 어떤 언어의 체계를 만드는가에 따라서 다른 세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의 ‘자의성’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자의성은 그가 말한 ‘변별적 차이(l’écart différentiel)’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변별적 차이란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분해내는 매우 단순한 원칙을 말한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모터가 필수적이다. 만약 모터가 달린 자전거가 있다면 이는 자전거인지 오토바이인지 모호해진다. (물론 페달의 유무 등 다른 변별적 차이에 의해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변별적 차이란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분할 수 있게 만드는 자질을 의미한다. 소쉬르는 의미를 지닌 기호로서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칙을 이 단순한 변별적 차이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이러한 변별적 차이에 두 가지 차원에서 접근한다. 이 두 가지 차원이란 바로 ‘기표’와 ‘기의’의 차원을 뜻한다. 언어를 포함하여 의미를 지니는 모든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기표는 기호의 표현방식으로, 말의 경우 우리가 입으로 내뱉는 음성 이미지, 수화를 하는 손동작, 야구감독의 독특한 몸짓 등이 이에 해당된다. 기의란 이러한 기표가 뜻하는 바, 즉 기표를 통해서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개념을 의미한다. 미리 말해두자면 이때 기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현실적 지시대상(le référent)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선 기표의 차원에서 보자면 기표를 구성하는 것이 변별적 차이라는 사실은 매우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살’이라는 기표는 그것이 우리의 몸을 이루는 살과 어떤 관련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술’, ‘말’, ‘갈’ 등과 음운적으로 구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기표의 변별적 차이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즉 ‘나무’라는 기호는 ‘배’, ‘너무’, ‘나물’ 등 다른 기호와의 변별적 차이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뿐 나무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아가 이는 어떤 특정한 기표가 그것과 결합된 기의와 어떤 필연적인 관계도 없음을 보여준다. ‘나무(arbre)’라는 기표와 그것이 의미하는 개념(줄기와 가지에 목질 부분이 발달한 다년생 식물)의 결합에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도 없다.
이러한 변별적 차이의 원칙은 기의의 차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앞에서 암시하였듯이 기의는 기표가 제시하는 개념일 뿐 현실의 지시대상이 아니다. 나무라는 기표가 지닌 기의는 현실 속에 실재하는 나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줄기와 가지에 목질 부분이 발달한 다년생 식물’이라는 개념일 뿐이다. 어떤 부족의 언어에서는 풀과 나무를 구분하는 기표가 없기 때문에 나무가 풀이기도 하고 풀이 나무이기도 하다.
소쉬르가 직접 들고 있는 사례를 보면 이 사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영어에서 강은 river이며, 이 강이 바다와 합류하는지 혹은 다른 강과 합류하는지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불어에서는 바다와 합류하는 강은 fleuve이며, 다른 강과 합류하는 강은 rivière이다. 언어의 변별적 차이에 의해서 의미가 세분화됨에 따라서 현실에 대한 분류가 달라진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영어에서는 오징어(cuttle fish)와 문어(octopus)의 구분은 존재하지만 꼴뚜기, 주꾸미, 낙지를 구분하는 단어는 없다. 물론 이들에 대한 생물학적인 학명(주꾸미: octopus ocellatus, 낙지: octopus vulgaris)은 존재하지만 이는 일상적인 단어가 아니므로 사실상 그러한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언어적 구분의 부재는 곧 문어와 낙지에 대한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영어권의 외국인들은 대부분 낙지와 문어를 잘 구분하지 못할뿐더러 맛 자체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에게 낙지와 문어는 큰 문어와 작은 문어처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언어의 차이에 따라 세계를 달리 보게 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언어란 변별적 차이에 의해서 무수히 많이 생겨날 수 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언어적 체계를 형성하는가에 따라서 현실에서의 의미가 달라진다. 소쉬르가 힘주어 말한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깨닫게 된다. “대상은 관점에 선행하여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관점이 대상을 창조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언어의 자의성은 변별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