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와 로맨스 사이에서
1. 유년기와 청년기
1934년 인디아나주에서 태어난 러시아계 유대인이었던 폴락의 유년기는 그렇게 행복하진 않았다. 시드니 폴락이 어렸을 때 부모는 이혼했고, 알콜중독이었던 어머니는 폴락이 16살 때 세상을 떠났다. 전직 권투선수였던 아버지는 약사 일을 하고 있었다. 인디아나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폴락은 18살 때 뉴욕으로 무작정 상경한다.
스무 살 때까지 뉴욕에서 네이버후드 연극학교(The Neighborhood Playhouse School of the Theatre)를 다닌 그는 제대 후 다시 학교로 돌아가 연극 가르치는 일을 했고, 학생 중 한 명인 클레어 그리스울드와 1958년 결혼했다. 당시 폴락의 나이 24세. 이후 그들은 세 명의 아이를 낳으며, 폴락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을 해로했다.
2. 배우, 시드니 폴락
그가 엔터테인먼트와 처음 조우한 분야는 연극이었고, 그는 연출자 이전에 배우였다. 이후 1962년에 <워 헌트>로 영화배우가 된 그는 그 영화에서 평생의 동지를 만난다. 바로 신인 시절의 로버트 레드포드. 이후 영화감독이 된 폴락은 총 7편의 영화에서 레드포드와 작업했다.
시드니 폴락은 감독 이전에 성실한 배우였다. 연극에 이어 1959년부터 TV에서 활동했던 ‘배우 폴락’은 영화배우로서 <투씨>(82)나 <랜덤 하트>(99) 같은 자신의 영화는 물론, 다른 감독의 영화에도 곧잘 출연해 감초 조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아마 그의 연기가 가장 빛났던 영화는 우디 앨런의 <부부일기>(92)일 것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우디 앨런과 ‘지식인 속물 캐릭터’의 완벽한 호흡을 맞춘다. 원래는 우디 앨런이 캐스팅 물망에 올랐던 <아이즈 와이드 셧>(99)의 빅터 지글러 캐릭터로는 블록버스터 엔터테인먼트 어워즈의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연출이나 제작만큼이나 연기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시드니 폴락은 최근까지도 <메이드 오브 오너 Made of Honor>(08) 같은 영화에 출연했으며, <소프라노스>나 <윌 & 그레이스> 같은 미드에도 이따금씩 얼굴을 내비쳤다.
3. 동지, 로버트 레드포드
시드니 폴락이라는 감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바로 로버트 레드포드다. 어쩌면 레드포드는 폴락의 영화적 분위기를 결정지은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1962년 <워 헌트>에서 배우로 만난 레드포드와 폴락은, 이후 일곱 작품에서 함께 한다. <저주받은 재산>(66) <제레미아 존슨>(72) <추억>(73) <콘돌>(75) <일렉트릭 호스맨>(79) <아웃 오브 아프리카>(85) <하바나>(90) 등이 감독 폴락과 배우 레드포드가 만난 작품들. 심각한 드라마에서 서부극까지, 스릴러에서 잔잔한 로맨스까지 레드포드는 폴락과 다양한 캐릭터를 창조했는데, 레드포드가 폴락의 영화에서 보여준 스펙트럼은 시드니 폴락이라는 감독의 스펙트럼과 거의 그대로 겹친다. 예외가 있다면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을 맡았던 코미디 <투씨>(82) 정도?
한편 폴락은 폴 뉴먼, 더스틴 호프먼 같은 톱 스타들과 함께 했고, 나탈리 우드, 제인 폰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페이 더너웨이, 메릴 스트립 같은 A급 여배우들과 작업했다. 시드니 폴락은 할리우드의 스타 시스템을 가장 잘 활용한 감독 중 한 명인데, 그의 영화에서 스타들은 각자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으며, 이것은 연기자 출신인 폴락의 뛰어난 솜씨로 평가되고 있다.
4. 감독, 시드니 폴락
‘연출자 폴락’을 단련시킨 곳은 영화 이전에 TV였다.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수많은 TV쇼를 전전하며 연출자로서 역량을 쌓았던 그는 <슬렌더 쓰레드 The Slender Thread>(65)로 영화감독이 된다. 시드니 포이티에, 앤 밴크로프트 같은 굵직한 연기자들이 출연한 드라마였다.
할리우드에 시드니 폴락이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영화는 그의 두 번째 작품인 <저주받은 재산>(66)이었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각색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로버트 레드포드와 나탈리 우드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폴락을 할리우드 주류 감독으로 만든 견인차였다.
그의 전성기는 1970년대와 1980년대였고, 1969년에 나온 <그들은 말을 쏘았다>는 ‘폴락의 시대’를 연 신호탄이었다. 이 영화는 당시 할리우드를 뒤흔들던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한 축을 이루는 작품이었으며, 폴락은 첫 오스카 감독상 노미네이션의 영광을 안는다. 제인 폰다, 수잔나 요크, 기그 영 같은 배우들에게 찬사와 수많은 트로피가 쏟아졌는데, 그 배후엔 배우 출신이었던 폴락의 뛰어난 연출력이 있었다.
서부극 <제레미아 존슨>(72)으로 1970년대를 연 폴락은 <추억>(73) <야쿠자>(74) <콘돌>(75) <일렉트릭 호스맨>(79) <폴 뉴먼의 선택>(81)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1982년의 <투씨>는 시드니 폴락의 최고 흥행작. 1억7,7290만 달러를 벌어들인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여장 남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코미디였고 폴락은 두 번째로 오스카 감독상 후보에 오른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85)는 시드니 폴락 영화 인생의 정점과도 같은 영화. 폴락은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이후 서서히 하강기를 겪은 그는 <하바나>(90) <사브리나>(95) <랜덤 하트>(99) 그리고 최근엔 <인터프리터>(05)까지 꾸준히 작품을 내놓았지만, 뭔가 맥이 빠지는 영화라는 게 중평이었다. 존 그리샴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야망의 함정>(93)은 폴락의 필모그래피 후반부를 대표하는 작품. 1억5,835만 달러를 거둬들인 흥행작이었지만, 시드니 폴락이라는 이름이 존 그리샴(원작자)과 톰 크루즈(주연)의 이름에 조금은 가린 느낌이다. 폴락의 유작은 다큐멘터리인 <스케치 오브 프랭크 게리>(05).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의 삶을 담았다.
5. 제작자, 시드니 폴락
시드니 폴락은 제작자로도 꽤 좋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1974년 자신의 연출작인 <야쿠자>의 제작도 맡으면서 시작된 프로듀서 경력은 1990년대부터 자신의 영화를 본격적으로 벗어난다.
스티브 클로브스 감독의 <사랑의 행로>(89), 알란 J. 파큘라 감독의 <해리슨 포드의 의혹>(90), 루이스 만도키 감독의 <하얀 궁전>(90),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환생>(91), 이안 감독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95), 기네스 팰트로 주연의 <슬라이딩 도어스>(98),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99)와 <콜드 마운틴>(03) 등이 모두 시드니 폴락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영화들. 어쩌면 그는 1990년대에 감독으로서 하강기를 맞이했지만, 그것을 제작자로서 극복했을지도 모른다.
↑ 그들은 말을 쏘았다 1969년
↑ 제레미아존슨 1972년
↑ 추억 1973년
↑ 투씨 1982년
↑ 아웃 오브 아프리카 1985년
↑ ‘아웃 오브 아프리카’ 로 제58회 오스카 작품상 감독상 수상
↑ 부부일기 1992년 (배우 시드니 폴락)
↑ 야망의 함정 1993년
↑ 콜드 마운틴 2003년 (제작자 시드니 폴락)
↑ 인터프리터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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