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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회적인 전투의 승패를 가리고자 하는 것인가? 이것 역시 아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총사령관의 전술적 역량이다.
(물론 자마 전투처럼 장군의 역량이 비슷하면 전력의 차이가 승부를 가로짓지만,
만약 한니발이 기병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을 격퇴하고 승리하였더라면
그는 그 자신이 말했던대로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앞질러 당대 최고의 장군이 되었을 것이다.
한니발의 이 말은 전투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휘관의 능력임을 그대로 입증한다.)
필자가 총체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동양과 서양의 각 고대 문명의 수준의 차이다.
국가의 제일선에서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는 군대에는 그 국가의 총력이 집약되어 있다 할 수 있다.
병사와 장교들에겐 그 시대 그 문명의 가장 효율적이고 세련된 전략, 전술을 가르치며,
무장과 기타 장비는 그 시대 그 문명의 가장 최첨단의 과학 기술이 그대로 반영된다.
따라서 각 군대의 총체적 전력은 곧바로 그 문명 수준의 척도와도 같다.
필자는 양 군의 전력을 비교함으로써 양 문명 간의 수준의 커다란 격차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오.
(물론 양국의 전성기에는 3백년 이상이라는 큰 세월의 차이가 있으나
고대에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현대처럼 빠르지 않아 정체된 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고,
로마 멸망 후에 유럽은 오히려 쇠퇴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커다란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용납할 수 없다면 동시대의 비잔틴과 고구려의 군대를 비교해 보는 것은 어떨런지?)
2. 본론
(1) 양군의 총병력 비교
ㄱ. 고구려
- 고구려의 총병력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어서 추정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훗날 발해 무왕이 동생 대문예에게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령을 내리자 대문예는 명령을 거부하면서
"[전략]지난날 고려가 한창 강성할 적에 군사 30만으로 당과 맞서 싸운 것은[후략]" 라고 말한 것이
[신당서] <발해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분들이 고구려의 총병력을 대략 30만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당태종의 친정 당시 당군이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으로 진군하자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5부 중에 남부와 북부에서 모집한 15만 대군을 급파한다..
전 국토의 40%에서 15만이니 단순한 산술 계산으로도 총병력으로는 37만 5천이라는 숫자가 나오게 되는데 남.북부에도 수비군이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15만이 남.북부 군대 전체를 동원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따라서 고구려의 요격군과 상비군을 비롯한 총병력은 40만 이상이 되리라 사료된다.
(물론 이것은 고구려 후기에나 가능한 수치이고, 그 이전의 총병력은 기록이 전무하여 추정조차 불가능하다. 한 작전에 얼마의 군대를 투입했다는 단편적인 기록은 부분 부분 있으나 총병력을 추정하기엔 역부족이라 할 수 있다.)
ㄴ. 로마
- 로마는 전통적으로 상비군을 주둔시키지 않았고 필요에 따라 군을 모집하였는데
[로마사]에 의하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기원전 3세기에 병역 연령에 해당되는 남자가 대략 75만 명 가량이었다고 전하며, 그와 동시대이자 전대미문의 위기였던 제2차 포에니 전쟁 때에 10여개 군단을 운용한 것을 보면 마리우스 개혁 이전까지 로마가 한번에 동원할 수 있던 총병력은 10~15만 가량으로 보여진다.
(마리우스 이전에는 로마 연합이 건재했으므로 이것은 순수 로마군이 아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내전이 있던 기원전 1세기에는 양 군을 합쳐 50만 가량까지 병력이 늘어나기도 하지만 일시적인 군대일 뿐이었고 실제로 내전 후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대폭 축소하며 상비군을 상설한다. 그 때부터 오현제에 이르기까지 약 25~30개 군단, 대략 30~40만의 군대를 각 방어선에 나누어 배치한다.
로마 군단(Legio)의 주력은 말 그대로 중장 보병대인 군단병(Legion)이었는데 서기 3세기 이후 게르만족 기병의 침입에 대비하느라 기병이 군의 주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또한 카라칼라가 속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군단병과 상비군의 구분은 사라지게 되고,
군인 황제 시대를 거치고 게르만족 침입에 대응하면서 병력은 40~50만 가량으로 크게 늘어나게 된다.
ㄷ. 종합 및 비고
- 고구려와 로마는 시대가 겹치기는 하지만 단순히 동시대로 비교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다.
서기 1~2세기는 이른바 팍스 로마나로 로마의 전성기이지만 고구려는 건국 초기에 불과했고,
고구려의 인구나 총체적 국력에서 최고 전성기였던 영양왕 치세의 고구려 시대에 로마는 멸망한지 오래요.
따라서 각 전성기 시대를 비교해 보는 수밖에 없다.
위에 서술하였듯이 고구려도 작게 30만에서 크게 40만 이상까지 병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고, 로마는 최전성기인 오현제 시대 중에서도 다키아 정복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이 있었던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총 28개 군단으로 군단병 18만명, 보조병까지 합치면 35만 가량의 병력이 있었다.
따라서 총병력은 고구려가 앞서는 듯 하지만 정확한 수치가 아니므로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의 국력이 심하게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로마 시민만 5백만에 속주만까지 합쳐 5천만이 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고,
전국에 걸쳐 잘 짜여진 행정망을 구축하고 구석구석까지 중앙 정부의 손길이 닿았으며
15만km에 달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무역로를 안정화시키는 등
현재 유럽과 서아시아,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상업 네트워크의 구축으로 경제력이 발달하였다지만
그 총병력이란 오히려 전체 인구 5백만 미만의 고구려보다 적거나 비슷하다.
총병력으로 그 국가나 문명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총병력이란 단순히 군사력을 의미하지 않고 그 군대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국가의 경제력과 기술력,
행정망의 수준 및 중앙 정부의 지배력 등 총체적인 국가 수준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군대 보급을 담당할 식량과 무기의 대량 생산 기술 및 그것을 부담할 경제력이 부족하고
신라 말기처럼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사라지고 행정망이 엉망으로 무너져 내리면
인구가 수억명에 달한다고 할지라도 군대는 1천명을 운용하기도 힘들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의 국가에는 적용되지 않소.)
서양 문명이란 것이 로마 멸망 후 근대 이전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지리멸렬한 유치한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로마의 문명과 국력이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보여 실제보다 상당히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오.
실제로 고구려도 북방 민족-중국-한반도를 잇는 국제 무역의 중점이자 중계 무역권도 가지고 있었으며,장수왕 시대부터 대륙과의 전쟁은 사라지고 평화와 경제력 상승으로 크게 번영하게 될 뿐더러, 그랭이 공법 등에서 보여지는 독특한 축성 및 건축 기술과 벽화에서 보여지는 특유의 프레스코 기법, 그리고 조선 시대까지 사용된 천문도를 독자적으로 그릴 정도로 천문학이 발달되었으며 중국과는 다른 천하관과 내세관을 가진 중국과는 구별되는 또다른 빛나는 문명국이었다.
(2) 양군의 병종 및 무장 비교
ㄱ. 고구려 : 6~7가지 병종
- 고구려군의 무장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안악 3호분 벽화를 바탕으로 설명한
임용한 교수님의 [전쟁과 역사 - 삼국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필자의 내용을 추가하여 서술하겠소.
(이것이 의장대이냐 실제 군대이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오만 이것마저 묵살하면 아예 자료가 없다. 참고로 안악3호분은 동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4~5세기 가량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참고로 고구려군이 사용한 칼은 직도인 환두대도가 대부분이었다.
a. 중무장 보병 1
- 머리에 투구를 쓰고, 소매가 반팔인 미늘갑옷을 상체에만 입었으며,
어깨에는 갈고리 창을 메고 허리에는 칼을 찼으며, 가늘고 길쭉한 방패를 들었다.
가늘고 길쭉한 방패로 촘촘한 밀집 대형을 짜서 적의 기병 돌격을 저지하고
갈고리 창으로 기사를 말에서 끌어 떨어뜨리는 대기병용(對騎兵用) 중장 보병대가 아닌가 싶다.
b. 중무장 보병 2
- 위에 쓴 중무장 보병과 동일하나 방패가 둥글고 좀 더 넓다는 것이 다르다.
따라서 이 보병의 대형은 위 보병의 대형보다 간격이 넓어 칼을 휘두르는 백병전에 편리했을 것이므로 원형 방패를 든 그리스나 타원형 방패를 사용한 (초기)로마군처럼 대보병용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c. 경무장 보병
- 경장 보병은 도끼를 사용하는 도부수(월수)를 사용했는데, 거의 갑옷이나 기타 무장을 하지 않았다.
갑옷도 걸치지 못한 수준이니 사회적 신분이 매우 낮았을 것이고 전투 능력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일선에서 적과 부딪히기보다는 2선에서 말에서 떨어지거나 넘어져서 아군 행렬의 뒤로 쳐진 적을 공격하거나, 로마군의 경장 보병처럼 중무장 보병 대열 사이를 오가며 적을 공격하기도 했을 것이며, 또한 적이 설치한 녹각을 부수거나 진지를 설치하는 등 사역부대로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차산 보루를 비롯하여 고구려 군사 유적에서 반드시 도끼도 발견되는 것을 보면 필수 부대였던 모양인 것 같다.
d. 궁병
- 120~127cm 정도 길이의 강력한 맥궁을 사용했으며, 소매가 아예 없는 미늘갑옷을 입었고, 투구를 쓰지 않았는데 시야의 확보 때문일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고구려 산상왕 시대에 각궁이 등장하게 되는데 제조 방법이 복잡하고 단가가 매우 비싸 고구려의 전(全) 궁병이 각궁으로 무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지만 일부 정예부대 및 장교와 무사들은 각궁으로 무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 중장 기병
- 병사 전신과 말의 전신을 감싸는 미늘 갑옷을 입어서 공기에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밖에 없었고, 고구려 특유의 길이 5.4m, 무게 6~9kg의 기병용 장창(삭; lance)을 들고, 허리에는 칼을 찼다.
(중국이나 유목 민족은 4m가량의 삭을 사용했다 하오)
고구려는 풍부한 철광을 소유하여 중장 기병이 전 병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실제로 동천왕이 관구검군과 싸울 때 2만의 군대를 동원하였는데 그 중 철기(鐵騎)가 무려 5천으로,
단순한 숫자만으로도 전군의 1/4나 차지하므로 전군의 주력을 차지하기에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동천왕의 철기가 단순히 정예기병이냐 중장기병이냐는 논란은 있으나 철기 5천을 선두에 세우고 결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중장기병으로 필자는 보고 있다.)
f. 경기병
- 안악3호분 벽화를 보면 갑옷을 전혀 걸치지 않고 활만으로 무장하고 있으나
남포의 약수리 벽화에는 창을 든 경기병도 보여 정확한 실체를 알기는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중장 기병과 대비되는 경기병이 운용되었다는 것이며,
중장 기병의 돌격을 엄호하고 적을 교란시키는 기동 작전을 펼쳤을 것이다.
ㄴ. 로마 : 3~4가지 병종
a. 중무장 보병(군단병; Legion)
- 원래 가로 1.2m, 세로 1.5m 가량의 타원형 방패를 들었으나 나중에 직사각형 모양의 방패로 바뀌게된다.
2~3m 길이의 창과 투창을 각각 한 자루 씩 소지하였으며 제3열의 트리아리(Triarii)는 투창을 소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래 단날 장검을 사용하였으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스페인의 양날 단검을 받아들여
'Gladiator(검투사)'의 어원까지 된 그 유명한 글라디우스(Gladius)를 주무장으로 소지하게 된다.
b. 경보병(유격병; Velites)
- 거의 갑옷을 착용하지 않고 칼과 투창, 원형 방패로 무장한 보병으로 가장 가난한 4~5계급의 시민으로 구성되었다.
1개 군단의 1만여 명 중 1200명으로 중장 보병의 전열에 위치하여 최초의 접전을 맡았으나
마리우스 개혁 이후에는 편제에서는 사라지고 마요르카 투석병 등 외국 동맹군을 우군으로 활용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 군제 개혁 이후에는 아예 독립성을 잃고 사라지게 되며, 속주민으로 구성되며 기병, 보병 등 여러 병종이 섞인 보조병(Auxiliaris) 안에 편제된다.
또한 로마가 궁병을 어떻게 운용하였는지의 기록은 없으며 다들 추측만 하고 있는데,
중장 보병이나 경보병처럼 편제화된 기록이 없으나 활용한 것만은 알려져 있어
위에 서술한 경보병이 궁병의 역할도 대신했거나 경보병 안에 궁병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고 있다.
c. 기병
- 오직 경기병대 뿐이었고, 갑옷은 거의 착용하지 않았고 활도 사용하지 않았소.
무장 역시 빈약해서 투창과 칼, 원형 방패 뿐인데다가 등자가 없었으므로
고작 있는 창으로도 진형을 허무는 충격작전을 할 수 없었고 접근하여 던지는 것이 고작이었소.
로마에서는 기병의 기동성과 돌파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여 기병 전력에 가치를 두지 않았으므로 전투시에는 기병끼리의 전투에만 활용되고 우회 전법 등으로 기병의 기동성을 활용할 줄 몰랐으며, 기동성을 활용한 것으로는 패퇴하는 적을 추격하는 데에 사용했던 것 뿐이었다.
소위 '천재적 명장'이라는 한니발과 스키피오 이후에는 기병 우회 전술이 활용되었으나
위에 서술했듯이 무장의 빈약함으로 인해 전력이 약하여 보병보다 큰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마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개혁 뒤에는 로마 시민으로 이루어진 기병은 거의 사라지고
게르만, 갈리아, 누미디아 등 기마 민족의 군대를 우군으로 활용하거나 보조병 휘하에 편제되었다.
ㄷ. 종합 및 비고
- 일단 병종의 수에서 고구려가 로마의 2배에 달하므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의 범위가 훨씬 넓고 유기적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로마군이 가지지 못한 고구려군의 중장 기병, 궁기병, 대기병용 중장 보병 등은 강력한 전력이고, 특히 고구려 중장 기병은 로마가 상대하던 파르티아나 페르시아 중장 기병과는 차원이 달랐으며 궁기병은 360도 전방(全方)으로 사격할 수 있는 파르티아 사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무용총 수렵도에서 파르티아 사법을 알 수 있소. 몽골의 궁기병을 떠올리면 된다)
로마군으로서는 이런 고구려군 부대에 마땅히 대응할 만한 병종이 없었고 코끼리 부대처럼 기존의 병종으로 전술적으로 대응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저 속수무책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각 병종의 질(質)의 면에서도 대부분 고구려군이 로마군을 압도한다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로마의 기병대는 등자도 없고 칼과 창만 든 경기병이라 충격작전을 감행할 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기병대도 고구려의 중장 기병이나 궁기병에 적수가 될 수 없다.
게다가 고구려 궁병은 독립적인 편제를 이룰 정도로 수가 많고 강력한 맥궁과 각궁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므로 존재조차 불분명하며 조잡한 단궁으로 무장한 로마 궁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으며,
갑옷도 거의 걸치지 않았던 로마 기병은 고구려 궁병의 일제 사격에 추풍낙엽하게 될 것이다.
또 로마군은 궁병의 전력에 의미를 두지 않고 별로 활용하지 않아서인지 로마군 스스로도 궁병에 약했다.
일례로 크라수스의 4만여 정규 군단이 파르티아의 2급 부대이고 수도 얼마 되지 않는 궁기병대에게
도주한 카시우스의 5백 기병대를 제외하고 크라수스 이하 전군이 완전히 전멸당한 카라이 전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다만 고구려 중장보병의 숙련도나 사회적 위치 및 군사제도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숫자로 전군의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그 많은 숫자가 귀족이나 전문 무사들로 구성될 수는 없었으므로 일반 백성들로 이루어진 징집병일 가능성이 크며 따라서 항시 훈련을 받고 사회적 신분도 높았던 로마 군단병보다는 전투력이 떨어질 수 있다.
(단 아우구스투스의 상비군 창설 이전에는 로마도 징병제였으므로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음)
(3) 양군의 편제 비교
ㄱ. 고구려
- 고구려의 편제 방식에 대해서는 기록도 없고 알려진 바가 없다.
이것은 고려 이전의 고조선, 부여, 백제, 신라, 676년 이후의 대신라 등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현존하는 자료가 있는 고구려와 가장 가까웠을 뿐더러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대내외적으로 선전했던 고려의 편제를 참고해 보겠다.
고려군의 최소 단위는 25명으로 이루어진 '대(隊)'로 종9품인 '대정'의 지휘를 받았고,
그 상위 단위는 50명으로 이루어진 '오(五)'로 정9품인 '교위(또는 오위)'의 지휘를 받았으며,
그 위로 다시 200명의 단위부대가 있어(이름은 전하지 않소) 정6품인 '낭장'의 지휘를 받았고,
낭장 다섯개 부대가 모여 1천명의 '영(領)'을 이루고 정4품의 '장군'이 지휘관으로, 정5품의 중랑장 2명이 부장으로 있었으며, 이 '영'이 여러개 모여 좌우위, 신호위 등의 독립 부대를 이루어 편성되었다.
정리: 25명 대(隊) - 50명 오(五) - 200명 낭장 부대 - 1천명 영(領) - 개별 독립 부대
실제로 고구려가 이렇게 세밀한 편제를 이루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례가 하나 남아 있다.
645년 당 태종의 친정 당시 당군이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으로 진군하자
연개소문이 북부와 남부의 군대 15만을 지원하여 안시성 남방에서 벌어진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당군을 크게 압박하여 당태종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설 정도로 선전하였으나
당군의 장손무기가 전투 전에 고구려군 후방에 매복해 있다가 후위를 덮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패하게 된다.
이 때 고구려군의 총사령관인 고연수가 3만 6천 8백의 고구려군을 이끌고 투항하는데, 당 태종 이세민은 여기서 3천 5백 명의 장교급 무사들을 빼내어 본토로 후송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한다.
(나머지 3만여를 석방한 것은 장교가 없으면 전혀 쓸모없는 군대가 되기 때문이오.)
36800÷3500≒10.5, 곧 10명당 한 명 꼴로 하사관급 지휘관이나 장교가 배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ㄴ. 로마
- 로마의 편제는 약 서너 차례의 변화가 있는데 팽창기인 마리우스 개혁 이후 카이사르 시대까지,
전성기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서 오현제 시대까지의 편제를 서술하겠다.
마리우스 개혁 이후에는 백인대(Centuria)를 묶어주던 마니풀루스(Manipulus)가 의미를 거의 상실하고,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의 지휘를 받는 코호르스(Cohors)가 중추로 떠오르게 된다.
백인대장(Centurion)의 지휘를 받는 100명의 백인대가 2개 모여 마니풀루스를 이루고, 다시 마니풀루스가 3개 모여 트리부누스 밀리툼의 지휘를 받는 600명의 코호르스를 구성한다.
(마니풀루스는 이름만 남고 지휘관도 없어 사실 유명무실했소)
다시 코호르스가 10개 모여 레가투스(Legatus)의 지휘를 받는 6천명의 군단(Legio)을 구성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 군제 개혁 이후에는 거의 똑같지만 각 군단의 제1코호르스의 6개 백인대만 160명으로 구성되었고, 나머지 제2~10코호르스들의 총 54개 백인대는 80명으로 구성되었다.
정리: 80~160명 백인대 - 480~960명 코호르스 - 6000명 군단
ㄷ. 종합 및 비고
- 로마군이 마케도니아 및 그리스군의 팔랑크스(Phalanx)보다 뛰어난 점이 바로 백인대를 중추로 하고코호르스를 최소 전략 단위로 삼음으로써 유기적인 전술이 가능했다는 점인데, 위에서 서술했듯이 고구려에 비교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하오.
거의 10명당 한 명의 지휘관이 있었던 고구려군은 훨씬 유기적이고 종합적인 전술이 가능했을 것이다.
(4) 양군의 전술 비교
ㄱ. 고구려
- 사실 고구려만의 전술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전무(全無)하다.
위에서 서술한 병종을 참고로 하여 매우 정석적인 전술을 서술해 보겠다.
일단 궁병대를 제일선에 배치하여 화망을 구성하고 일제 사격하여 아군의 기병을 엄호하는 한편
적의 기병 돌격을 무너뜨리고 예봉을 꺾으며 보병의 진격도 막게 된다.
적의 중앙 진격이 시작되면 궁병은 중장 보병 대열 뒤로 후퇴하여 접전 직전까지 사격하고
사격이 끝난 후에는 활을 버리고 칼로 무장하여 후위를 맡았을 것이다.
양익에 나뉘어 배치된 중장 기병은 적의 측후방을 노려 쐐기꼴이나 사각 밀집 대형을 짜고 돌격하는 한편, 경기병은 중장 기병과 함께 이동하면서 그들을 적 궁병으로부터 엄호하면서 빠른 기동력으로 적의 측후방을 교란시켜 중장 기병이 돌격할 수 있는 빈틈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적 보병의 전력이 약하거나 지형의 상황에는 중장 기병이 중앙에 배치되어 전면 돌파에 나설 수도 있다. 적이 중장 기병을 보유하고 있다면 중장 기병끼리 맞상대를 시킬 것이나 로마는 중장 기병이 없으므로 무효)
중장 기병이 전면(前面) 돌파나 측후방 돌파에 성공하면 강력한 중장 보병대가 따라들어가
중장 기병의 후위를 엄호하면서 적의 진형을 완전히 뭉개놓거나 적 진형을 빠르게 종단하여
적의 좌군과 우군을 분리시켜 두개의 포위진으로 빠르게 격멸시키게 된다.
이런 전술은 완전히 정석적인 기본 중의 기본이고,
유명한 [손자병법], [육도], [삼략], [오자병법], [이위공문대] 등을 포함한 '무경칠서'의 병법서들이나 그 외에도 [손빈병법] 등 고구려 멸망 이전에 쓰여진 수많은 병법서들을 보면 근대 이전의 서양 군대는 조폭 싸움에 지나지 않는가 하고 느낄 정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동양 병법의 진수를 알게 된다. 중국의 이러한 정교하고 절묘한 병법을 고구려 역시 터득하고 있었고, 중국군과 야전에서 싸워 이길 정도로 자유자재로 구사했다고 볼 수 있다.
ㄴ. 로마
-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하기 전에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 군대를 깔보았는데 그 이유는 기병은 수도 매우 적고 활용할 줄도 모르며 보병 위주일 뿐이며 전술이라곤 좌익이 방패로 방어가 불가능한 우익을 제압하는 전술 뿐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실제로 이것은 누구나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페르시아가 그리스 육군에 패배한 것은 마라톤과 플라타이아이 전투로 단 두 번 뿐이고,
그 두 전투에서도 그리스군이 페르시아군에 비해 숫적으로 크게 열세가 아니었다.
또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지상에서의 저항을 포기하고 아테네 시(市)를 완전히 포기했소이다.)
로마도 그리스와 크게 전술이 다르지 않았는데 편제가 좀 더 세분화되어 상대적으로 유기적이었다는 점과 벨리테스(Velites), 하스타티(Hastati), 프린키페스(Principes), 트리아리(Triarii)의 4열로 나뉘어 각자 임무가 다르고 각 대열 사이로 각 열이 오가며 유동적인 전투를 할 수 있었다는 점만 향상되었다.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에는 이 3중 대열은 사라지고 각 군단의 10개 코호르스를 4-3-3 포메이션으로 3열로 배치하였다.)
기병도 기병끼리만 싸우고 적 기병을 격퇴해도 적 본진을 포위한다거나 하지 않고
패주하는 기병을 추격하는 등 기병을 활용한 포위 작전을 사용할 줄 몰랐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이후에는 기병의 기동성을 활용한 우회 작전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지만
끝까지 등자를 모르고 중장 기병을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기병의 돌파력을 활용하지 못했다.
로마군의 기본적인 전술을 다음과 같다.
제일선에 위치한 경보병(유격병; Velites)이 투창을 던지고 화살을 날리는 등 접전을 시작하고
중장 보병대가 진격하기 시작하면 경보병은 중장 보병대 대열 사이로 빠져나가 후방에 위치한다.
일단 중장 보병대의 제일선에 위치한 하스타티가 20m 정도 접근하면 투창을 던지고 칼로 백병전을 전개하며, 적절한 때를 맞추어 최정예인 프린키페스가 다시 전선에 투입된다.
만약 군단의 중추이자 최정예인 프린키페스가 돌격했는데도 승부가 나지 않거나 아군이 밀리면
베테랑인 트리아리가 창으로 밀집대형을 짜서 수비대형을 갖추고 아군을 엄호할 태세를 갖추면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는 트리아리 대열 사이로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하고 트리아리와 함께 총반격을 감행한다.
적군이 패주를 시작하면 경보병이 다시 전열에 복귀하여 기병과 함께 적을 추격한다.
ㄷ. 종합 및 비고
- 로마군은 경보병과 경보병, 중보병과 중보병, 기병과 기병 식으로 같은 병종끼리만 부딪히게 했고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전술로 종합적인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서양 고대에는 오직 알렉산드로스만이 예외)
좌군, 중군, 우군 등으로 나눠 중군이 뒤로 약간 물러나 좌군과 우군과 함께 삼면 협공을 하거나
약체를 좌군에 편성하여 최대한 버티는 한편 강군으로 우군을 편성하여 적 좌군을 깨고 포위하는 등 전체적인 대국(大局)을 보아 하나의 승리를 이끄는 법을 몰랐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병종끼리 싸워 보병은 지고 기병은 이기는 식으로 병종 별로 승부가 나서 전체 승패 구분이 모호해 지는 등 종합 예술인 전투를 안 좋은 의미에서의 세분화로 해체시켜 버려 비효율적인 전술을 활용했단 말이다.
손자(아마도 손빈)가 왕의 경마 내기에서 우리의 상마(上馬)를 상대의 중마(中馬)와, 우리의 중마(中馬)를 상대의 하마(下馬)와, 우리의 하마(下馬)를 상대의 상마(上馬)와 겨루게 함으로써
비록 한 번 지게 되지만 전체 내기에서는 이기게 되는 전략을 설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중국과 고구려를 비롯한 동양에서 이런 유기적인 종합 전술을 사용했다면, 그리스, 로마를 비롯한 서양에서는 그저 상마와 상마, 중마와 중마, 하마와 하마를 상대하게 함으로써 확실한 시나리오 없이 세부 승부도 모호해지고 전체 승부도 모호해지는 유치한 수준에 머물렀다.
오로지 알렉산드로스만이 이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며,
소위 '천재적 명장'이라는 피로스, 한니발, 스키피오, 카이사르 등은 그나마 나았지만
좀더 세밀하고 복잡한 동양 병법에 비교하면 초보적인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아마 동양 고대의 평범한 장군이 서양으로 갔다면 또다른 '천재적 명장'이 되었을 것이며,
서양 고대의 '천재적 명장'이 동양으로 갔다면 연대장급 지휘관 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3. 결론
- 위 서론과 본론에서 할 말을 다 해버려서 그다지 쓸 말은 없으나
로마의 국력과 문명 수준이 과장된 점은 다시 한번 지적하고 싶으며
고구려가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군사력만 강력했던 나라가 아니라
중국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빛나는 동양의 문명국가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서론에서 설명했듯이 한 국가의 군대의 수준은 곧 그 문명 수준의 척도가 되는데
위 본론에서 비교한 것처럼 고구려 군대는 거의 모든 면에서 로마 군대를 압도했다.
이른바 고구려의 문명이 근대 이전 서양 문명의 최고봉에 달한다는 로마의 문명을
앞선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못하지는 않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더 강력한 중국이라는 거대 세력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축소되어 받아들여지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록이 별로 없고 우리가 살지 않는 영토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리고 지지부진한 역사 교육을 받아왔기에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을 뿐이지
역사적 기록에 충실하여 데이터를 입력하면 위와 같은 결과를 알게 된다.
알면 알게 될수록 그 위대함을 깨닫게 되는 고구려에 대해 지식적 욕망의 타오르는 불빛이
사그러질 정도로 고구려에 대해 정확,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그날이 오도록 노력하고 싶다.
첫댓글 넘 길어요..ㅡ_ㅡ;;;
말씀이 너무 훌륭합니다. 그럼요, 우리 고구려가 어떤 나라인데요. 저 또한 고구려의 총병력을 어림짐작 해보았는데 고구려가 멸망 당시 인구가 호수 70만 호에 350만 명이라하니까, 적게는 30만에서 60만까지도 볼 수 있지요.
고구려멸망당시 69만호 176개성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