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리츠호텔의 ‘바 헤밍웨이’
1928년 처음 쿠바의 아바나를 방문한 헤밍웨이는 그 이후 30여년간 쿠바와 인연을 맺는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하다 돌아온 1939년에도 다시 쿠바로 돌아와 한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1942년 아바나 주재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그의 낚싯배를 이용해 쿠바 연안에서 그 당시 미국 서해안까지 출몰하던 독일의 유보트를 탐색하는 순찰 활동을 하겠다고 제안한다.
미국정부가 이 제안을 승인해 헤밍웨이는 다시 전쟁에 참전한다. 훈련된 선원과 기관총까지 갖춘 헤밍웨이의 순찰선은 실제로 여럿 척의 독일군 선박을 포착해 군에 보고했다. 이때의 경험은 헤밍웨이 사후 1970년 출간된 ‘해류속의 섬들(Islands in the stream)’이란 소설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2년 후 종군기자 신분으로 런던으로 건너가 1944년 6월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한다. 자신도 노르망디의 오마하 해변에 직접 상륙하겠다고 사령부에 요청했으나 승인되지 않아 제3군 사령관 패튼 장군 휘하 찰스 랜햄 대령이 지휘하는 미 22연대에 배속돼 파리 해방작전에 투입된다.
그리고 1944년 8월 헤밍웨이는 파리에 입성하자마자 곧바로 지프를 몰고 달려가 한 곳을 제일 먼저 탈환한다. 전쟁 전 헤밍웨이가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피카소, 마르셀 프루스트, 에즈라 파운드, 제임스 조이스, 헨리 밀러 등 수많은 예술가와 함께 어울리던 파리 리츠 호텔의 바였다.
역시 2차 대전에 종군 중이었던 전설적인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가 우연히 현장에 있었는데 헤밍웨이가 정훈장교를 비롯한 고위급 장교들에 둘러싸여 바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가 장군인줄로 알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나중에 다시 만나 함께 식사를 하면서 와인을 마신다. 이 바는 현재 ‘바 헤밍웨이’로 불린다. 필자가 세계의 유명한 바들을 찾아다닐 때 파리에서 제일 먼저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헤밍웨이가 해방시키기 전까지 리츠 호텔은 독일군이 징발하여 공군사령관 헤르만 괴링이 스위트룸에 묵으면서 사령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코코 샤넬은 전쟁 후 5년 동안을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35년간 이 호텔에 묵었다.
리츠 호텔의 바는 헤밍웨이에게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있는 곳이다. 1920년대 파리 생활 내내 드나들었고 전쟁 중에 바를 직접 탈환한 인연도 특별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10여년이 지난 1956년 이 곳을 다시 찾은 헤밍웨이는 호텔 측으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는다. 그가 1920년대 파리에 머물던 시절을 기록한 일기와 각종 기록이 담긴 귀중한 트렁크였다.
루이비통이 헤밍웨이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이 트렁크는 그동안 잃어버린 줄로 알고 있었는데 먼지 쌓인 지하 창고에 30년이나 방치되어 있던 것을 호텔에서 찾아 그에게 돌려준 것이다. 헤밍웨이는 여기서 찾은 기록을 바탕으로 1950년대 후반 파리 시절을 회상하는 작품을 썼다. 헤밍웨이 사후에 출판된 ‘파리는 날마다 축제(Movable Feast)’이다. 리츠 호텔 바는 그의 첫번째 장편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도 등장한다.
헤밍웨이가 22세에 8살 연상인 친구 누나와 결혼하여 낳은 장남 잭 헤밍웨이는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지만, 라이프스타일은 모험적인 면에서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잭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다니며 좋아했고, 2차 대전에도 아버지와 함께 참전해 CIA의 전신인 첩보부대 OSS 소속으로 유럽에서 복무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지만 이후 파리에서 생활한 덕분에 프랑스어도 할 줄 알았다. 파리가 독일 점령하에 있던 때에는 낙하산으로 침투하기도 했다. 2차 대전 말기에 작전 중 부상을 입고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독일의 항복과 함께 석방돼 1945년 5월 해방된 파리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다소 충동적이고 엉뚱한 부분에서도 두 사람은 닮았다. 따로 레지스탕스와 함께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이 파리를 향해 진격할 때 종군기자였던 헤밍웨이에게는 무기가 지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한달에 한 건 뿐인 기사를 송고한 후 시간이 남자, 따로 무기를 구하고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직접 모아 독일군을 생포한 적도 있다.
잭은 낙하산으로 파리에 침투할 때도 릴과 플라이 낚싯대를 가져갔다. 레지스탕스와의 작전을 마친 후에는 부대로 복귀하지 않고 강가에서 낚시를 하다 독일군 순찰대에 발견되어 거의 잡힐 뻔하기도 했다.
헤밍웨이는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쿠바로 돌아간다. 몇달 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이 패망하자 향후 원자 폭탄의 세계적인 확산과 원자폭탄이 가져올 잠재적인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기도 했다.
헤밍웨이가 쿠바에 머물고 있던 1947년 미국정부는 2차 대전에서의 활약을 평가해 그에게 ‘동성(Bronze Star) 무공훈장’을 수여한다. “포화가 빗발치는 전선에서 병사들이 겪는 난관과 승리의 현장을 생생하게 독자들에게 전한” 종군기자의 공로를 치하한 것이다.
잭도 2차 대전 중의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십자 무공훈장’을 받았다. 아들도 아버지처럼 술을 좋아했지만 아버지만큼 술이 세지 않았고 또 아버지만큼 많이 마시지도 않았다. 하지만 부자는 모두 와인을 좋아했다. 특히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와인을 마시는 것을 지켜본 잭도 나중에 아버지가 좋아했던 와인을 즐겨 마셨다. 다음 편은 헤밍웨이의 가족과 관련된 와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변연배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 / 뉴시스
첫댓글 후후껄껄 헤밍웨이가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유명한 소설 작품들은
아마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동서고금 유명 소설 ,시 작가들은 전부 술을 좋아해서
유명 작품,시들이 탄생 했다
술이 없으면 세상 발전도 없고 역사 발전도 없다 사람 인간 관계도 삭막하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