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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보들리 롤스(John Bordley Rawls)
존 롤스는 일평생 정의(Justice)만을 파고든 철학자이다. 그리고 무지의 베일은 롤스의 정의론에 핵심적으로 등장하며, 20세기 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다.
존 롤스는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시하는데, 롤스는 정의론에서 사회구성원들이 자신의 출신 계층과 신분 및 어떠한 사회적 결정이 자신에게 유리하고 불리한지를 모르는 가설적 상황에서, 즉 무지의 베일이 가정된 원초적인 상태 하에서 합의되는 법칙이 정의의 원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회적 합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각자가 타고난 특정한 사회적, 자연적 여건 등 우연적 요인들에 따라 자기에게 유리한 합의를 끌어내려는 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거나 득이 되는 주장을 합리화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가장 열렬히 토론하는 사람들의 신념 역시 심리적 경향성이나 정치, 경제적 상황, 문명 및 문화 수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무지의 베일로 이러한 특징적인 여건들(개인이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지위나 형편, 그가 타고난 천부적 재능 등)을 모두 가리고, 오직 시민들이 근본적인 사회적 선으로서 요구하는 공유물에만 관심을 하면 최소 노력으로 최대 효과를 얻는 선한 원칙들을 채택할 것이라는 것이다. 롤스는 무지의 장막이 쳐진 상태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재산, 사회적 조건을 알 수 없게 한다면 사회계약 후 어떤 계층에 속할지 알 수 없으므로 정의롭고 조화로운 사회계약을 체결하리라고 보았다.
이 원초적 입장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롤스가 말하는 정의의 두 원칙에 합의하게 된다.
첫째, 평등한 자유의 원칙
개개인은 기본적 자유를 최대한 누릴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타인 또한 동일한 자유를 누린다.
둘째, 차등의 원칙과 기회 균등의 원칙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모든 지위에 대한 기회 균등이 공정하게 이루어진 조건 하에서 존재해야 하며(기회 균등의 원칙) 가장 불우한 사람들의 편익을 최대화하여야 한다. (차등의 원칙)
참고로 롤스는 세 가지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도덕적, 정치적 입장의 근저에 깔린 정의의 제일 원칙 조명
-이들 원칙들이 공정하게 선택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한 정당화
이런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바로 존 롤스의 정의론이었다.
그는 공리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효율성을 강조하는 공리주의적 사회에서는 소수의 권리나 이익이 무시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공리주의 정의론에 대안을 제시하던 것은 직관주의였는데, 직관주의는 모호하고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었으므로 다른 대안이 필요했다. 이때 존 롤스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제시하였다. 이것을 사회정의론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원초적 입장, 무지의 베일이라는 개념적 모델을 내놓은 것이다.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정의의 기준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나라에서 수백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이 열풍에 힘입어 ‘정의’에 대한 관심과 함께 사회문제 해결에 있어서 ‘정의’가 최고의 기준점으로 떠올랐다. ‘정의 열풍’의 근원에는 우리 사회에 정의가 없기 때문이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까지 있었다.
지역사회의 갈등 이슈인 제2공항 건설 문제 역시 “건설을 추진하는 것이, 또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해 저마다 주장하는 정의의 기준과 생각이 다르다. 그 갈등 속에서 옳고 그름의 기준에 대해 혼란을 느끼는 도민들이 많다.
그래서 보다 근원적인 기준점으로 하버드대 존 롤스 교수는 자신의 정의론에서 정의의 원칙들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통해서만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ㆍ계층적 지위를 모르며, 자기가 어떤 소질이나 능력, 재능, 지위, 가치관, 체력 등을 타고났는지를 모르는 상황, 즉 원초적 입장에서만 적합한 합의가 도출될 수 있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자는 ‘역지사지’정신이다.
존 롤스의 정의론은 임마누엘 칸트의 의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의무론은 행위의 의지나 동기를 중시하고 결과보다는 주어진 원칙을 따를 것을 강조한다. 칸트의 도덕적 이상은 인간의 순수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칸트는 그 자체가 가치를 지니고 있어 무조건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정언명령에 의해 ‘보편적 법칙에 부합하게 행동하라’를 제시했다.
하지만 칸트는 보편적 법칙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롤스는 그 법칙의 내용을 채워보려고 시도했다. 처음으로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모인 원시적 인간들이 자신의 능력과 결함들을 전혀 모르는 ‘무지의 베일’ 뒤에서 어떤 정책과 제도를 자발적으로 선택했을까를 상상해 보았다. 그 가상에서 롤스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성공의 욕심보다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더 강하기 때문에 모두가 위험을 피하고자 소위 최약자-최혜분배원리에 동의할 것이라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어떤 정책을 정할 때는 가장 손해 보는 약자의 처지를 생각하고, 그들의 최대한의 이익이 먼저여야 한다는 것이다.그래야 누구나 동의하고 합의할 수 있는 원칙, 즉 정의의 원칙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제일 불리한 처지인 사람도 받아들일 정도의 방안이라면 다수를 위한 정책과 제도로 옮겨도 무리가 없다.
피자 한 판이 있습니다. 이걸 5명이 나눠먹는다 치죠.
피자를 자르는 담당은 사고실험에 응하는 당신입니다.
만약 자른 피자 조각을 맨 처음 갖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은 99:0.25:0.25:0.25:0.25 같은 말도 안되는 비율로 자를 수 있습니다.
나머지 인간들이 항의를 하든 말든 당신은 99를 먹고 배째라고 뻐길 수 있거든요.
하지만 당신이 꼴지로 피자 조각을 가져간다면?
당연히 1:1:1:1:1의 비율로 세심하게 칼질을 할 겁니다. 손해보지 않도록이요.
그러면, 당신이 피자 조각을 몇번째로 가지고 가는지 모르는 상태라면 어떨까요?
가장 안전한 선택은 자신이 가장 손해보지 않는 1:1:1:1:1 자르기입니다.
만약 내가 몇 번째로 피자를 고르는지 안다면,
가령 2번째로 가져가는 것을 안다면 최적 전략으로서
50:49:0.3:0.3:0.3 같은 비율을 끄적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모르는 상태로 피자를 자르기 때문에 가장 공평한 분배가 이뤄진다는 것이죠.
이것이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 이론입니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죠.
현실에서 이 이론을 적용해서 사람들 모아두고 위의 절차대로 설명을 다 마친 뒤
피자를 자르라고 하면, 개나소나 1:1:1:1:1을 골라야 할텐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25:25:25:24:1 같은 비율도 나오고
심지어 위에 적은 99:0.25:0.25:0.25:0.25마저도 나옵니다.
"이러면 내가 더 많이 먹을 가능성이 어쨌든 있는거아냐!"
"□□아 실패하면 넌 피자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쪼가리 쥐어야 된다니까"
하지만 20퍼센트는 혜자라고 부르짖는 사람들 귀에는 당연한 지적이 닿지 않습니다
무지의 베일은 선택시에 자신의 태생, 배경, 사회적 위치 등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이것은 현실에서는 이뤄지지 않는 제약이죠.
실제로 자기 사회적 위치를 모르는 사람은 지능이 매우매우매우 딸리는 머저리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머저리들은 머저리이기 때문에 자기가 1빠선택권을 쥐는 날이 올 것을 굳게 믿고
괴상한 자르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을 열광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래서 그 머저리들을 늘리기 위해 부유층들은 가스라이팅을 시도하죠.
언젠가 너도 한탕 할 수 있다고요.
철저히 계급투표, 이익투표하는 강남3구
철저히 감정투표, 배척투표하는 젊은세대
10년 20년 후에 누가 후회할까.
왜 가난한 사람이 보수정당에 투표하는가
사람은 왜 보수와 진보라는 서로 다른 정치 성향을 갖는가. 왜 가난한 사람이 보수 정당에 투표하는가. 부자가 진보 정당을 지지하는 ‘강남 좌파’ 현상은 어떻게 전 세계에 그리도 많은가. 왜 유권자는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이 되는가. 부동층은 대체 어떻게 공략해야 우리 후보를 찍어주는가.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고민해보았을 오랜 수수께끼들이다. 정치가, 언론인, 여론 분석가, 정치학자들이 저마다 가설을 들고 답을 찾아다녔다.
이 수수께끼 풀이에 도전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뜬금없어 보여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정치의 오래된 수수께끼들은 결국 ‘우리가 왜 그런 선택을 하는가’의 문제다. 그리고 인간의 선택은 과학의 연구 대상이다. 이들의 도전을 소개한다.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는 뇌과학자다. 뇌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메커니즘이 그의 연구 주제다. ‘인간의 뇌는 어떤 과정을 거쳐 정치적 선택을 내릴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런 연구 분야를 ‘신경정치학’이라고 부른다. 정 교수는 5년에 한 번 돌아오는 대선마다 신경정치학 실험을 설계해 연구한다. 2007년에 시작해 2017년, 세 번째 실험 결과가 나와 논문 발표를 앞두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슈로 정국이 떠들썩하던 지난해 연말, 정 교수는 아주 독특한 신경정치학 특강을 했다. 수강생은 사실상 한 명이었다. 질문이 유난히 많고 학습능력이 탁월했다. 정 교수가 더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대목은 따로 있다. “이분이 내 얘기를 듣고는 본인이 잘못한 사례를 자기 입으로 쭉 말씀하시더라고요. 조언을 구하는 리더를 여럿 만나봤지만, 아픈 지적을 들으면 결국 자기변명을 하는 리더가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그런 게 없더라고요.” 이 독특한 학생은 올해 대선에 출마했고, 지금은 청와대에 있다.
“우리 뇌는 생각보다 원시적인 방법으로 리더를 고릅니다.” 8월16일 자신의 개인 연구실에서 만나, ‘방송인’답게 능숙하게 사진 촬영에 응한 후 마주앉은 정 교수가 말했다. “미국에서 실험 대상자들에게, 다른 주의 얼굴을 처음 보는 하원의원 선거 후보들을 1초 힐끗 보여주고 누가 더 유능해 보이는지 물어보면, 결과가 실제 투표와 거의 일치해요. 몇 주간 캠페인을 보고 심사숙고한 투표 결과와 1초짜리 인상평 결과가 사실상 같다는 거죠. 심지어 아이들에게 물어도 그렇습니다. 후보들 사진에 선장 모자를 씌우고 ‘누구 배에 타고 싶어?’라고 물어도 실제 선거 결과에 꽤 근접하게 나옵니다.”
왜 그럴까. 정 교수는 세계적인 뇌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체감표지 가설’을 빌려 설명한다. 말하자면 ‘뇌의 즐겨찾기’ 가설이다.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최선의 합리적 판단을 내리려 들다가는 시간과 에너지를 너무 많이 잡아먹어서 오히려 최악의 결과를 낼 수 있다. 손해를 보거나 보상을 받는 등 과거 경험에 따라 뇌에 ‘즐겨찾기’가 새겨지면, 이제는 모든 정보를 심사숙고하는 대신 특정 신호에 특정 반응을 곧바로 꺼내 쓴다.
이 가설이 옳다면, 유권자의 판단 회로는 굉장히 빠르게 작동한다. 정치인은 이 초고속 즐겨찾기 회로에 좋은 이미지로 올라타야 한다. 이름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형용사 키워드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게 좋은 공약보다 어쩌면 더 중요하다. 우리 뇌는 옳고 그름보다는 좋고 나쁨에, 좋고 나쁨보다는 이득이 있고 없음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조차도, 직관이 심사숙고를 앞선다.
그러니 신경정치학자에게 정치인의 메시지 스타일로 가장 나쁜 사례를 수집하라고 한다면, 그 연구자는 거의 틀림없이 변호사를 예로 들 것이다. 옳고 그름에 집착하고, 상대의 주장에서 허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세세한 디테일에서 승부를 내려 한다. 2016년까지 변호사 출신 정치인 문재인의 메시지 스타일이 거의 정확히 이랬다. 2013년 노무현·김정일 정상회의록 공개 논란, 2016년 10월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회고록 논란, 2016년 11월 JTBC 손석희 앵커와의 단독 대담 등 ‘메시지 참사’로 불릴 만한 몇 차례 사례에서, 문 대통령은 신경정치학의 기본 원칙을 신기할 만큼 잘 피해갔다. 정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신경정치학 관점의 조언을 받은 후에 문 후보가 〈썰전〉에 나갔는데, 접근법이 완전히 달라져서 놀랐어요. 학습능력이 좋고 조언을 들으려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이 ‘뇌의 즐겨찾기 가설’은 당파성 강한 유권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진보든 보수든 정치 성향이 뚜렷한 유권자는 굳이 심사숙고할 필요 없이 간단한 표식만으로 결정하지만, 부동층은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놓고 심사숙고하지는 않을까. 그렇지 않다는 게 정 교수 연구팀의 결과다. 부동층도 비교적 초기에 후보에 대한 호불호를 형성한다. 그 흐릿한 호불호는, 격렬한 선거 캠페인과 숱한 돌발 이슈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정재승 교수와 마인드브릭 디자인랩(신경과학 스타트업)은 올해 1월께부터 부동층 피험자를 모집했다. 아직 대선 구도조차 불투명하던 시기였다. 리얼미터와 제휴해 전화 4만6992통을 걸어 4363명이 응답하는 대형 여론조사를 돌렸다. 그중에서 부동층을 추리고, 거기서 실험에 참가하겠다는 부동층을 다시 추리고, 결국 실제로 실험장에 나타난 부동층 유권자가 최종 실험 대상이다. 그게 106명이었다. “이런 실험에선 상당히 큰 숫자라고 보면 됩니다(웃음).”
유권자 스스로도 감추려 하거나 알지 못하는 호불호를 어떻게 측정한다는 걸까.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모니터 왼쪽에는 ‘문재인’, 오른쪽에는 ‘안철수’라고 쓰인 버튼을 띄웁니다. 피험자들에게 얼굴 사진을 보여줍니다. 문재인 얼굴이면 왼쪽 버튼을, 안철수 얼굴이면 오른쪽 버튼을 클릭하면 됩니다. 아주 쉽죠.”
정 교수는 실제 실험 이미지를 띄워가며 말을 이어갔다. “그다음으로, 왼쪽 버튼에 ‘문재인 또는 좋다’, 오른쪽 버튼에 ‘안철수 또는 싫다’라고 써요. 자, 그 상태에서 문재인 사진이 모니터에 뜬다고 생각해보세요. 피험자는 당연히 왼쪽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부동층이라곤 했지만 문재인을 내심 싫어한다면? 왼쪽 버튼을 누르는 속도가 느려집니다. ‘좋다’라는 단어는 규칙상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그래도 자기 마음이 브레이크를 걸거든요.”
문재인을 내심 좋아하는 피험자라면, 사족으로 달린 ‘좋다’에 거의 방해받지 않는다. 사족이 없는 실험의 반응시간과 차이가 없다. 하지만 내심 싫어하는 피험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많이 싫어할수록, 더 느려진다. 거꾸로 문재인을 좋아하는 피험자라면, ‘문재인 또는 싫다’라는 보기 앞에서 더 오래 주저한다. 반응시간을 측정해봐도 마우스 궤적을 측정해봐도 결과는 같다. 나도 모르는 나의 호불호가 측정 가능하다.
이 실험을 조합(‘문재인 또는 싫다’ 버튼)과 좌우 위치(문재인 버튼을 오른쪽으로)를 바꿔가며 반복하면 아주 흥미로운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오른쪽 그림). 가운데 점선이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에 대해 선호도가 정확히 중립인 지점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기울면 문재인 선호, 오른쪽으로 기울면 안철수 선호다. 중앙에서 더 멀어질수록 선호의 강도가 크다는 의미다. 통계 보정 결과, 점선 주위에 몰린 ‘중립 성향’은 36.2%였다. 부동층 중에서도, ‘진짜 부동층’은 셋 중 한 명 정도였다. ‘문재인 선호’는 48.9%, ‘안철수 선호’는 14.9%였다. 여론조사에서 부동층이라고 응답하는 유권자들도, 절반 정도는 문재인 후보에게 좀 더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다.
현실정치 변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진 짝짓기 놀이’가 과연 실제 선거에서 의미가 있을까. 연구팀은 대선이 끝난 후 피험자들에게 실제 투표 결과를 요청했다. 실험 결과와 비교해보니 일치도가 78.6%였다. 대선이 100여 일이나 남은, 선거구도조차 확정되지 않은 시기에, 사진과 보기를 짝짓는 시간을 잰 결과가 부동층 피험자들의 표심을 80% 가까이 예측했다.
부동층 성향 조사, 실제 투표와 80% 정도 일치
정재승 팀은 지난 4월에 홍준표 후보까지 추가하여 유사한 실험을 한 번 더 수행했다. 그 실험의 부동층 표심 예측 결과는 정확도 82.3%였다. 이 4월의 데이터를 기준으로, 리얼미터와 함께 실제 선거 결과 예측을 시도했다. 그 예측 값은 문재인 42.7% 홍준표 22.8% 안철수 19.1%였다. 실제 선거 결과는 문 41.1% 홍 24% 안 21.4%였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흐릿한 호불호도, 전쟁 같은 선거 캠페인 기간을 상상 이상으로 잘 버텨낸다. 이들에게 ‘즐겨찾기’를 설정하는 초기 입력 값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기자는 80% 확률로 투표로 이어지는 부동층 데이터라면 영혼이라도 팔아 구하려 들 선거 전략가를 몇 떠올렸다.
정치에 대해 탐구하는 과학은 부동층보다 더 넓은 대상에 질문을 던진다. ‘왜 누구는 진보주의자, 또 누구는 보수주의자가 되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에 답을 찾으려면 여러 학문의 협업이 필요하다. 우선은 다시 신경정치학부터 시작하자.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뇌가 좀 달라요.” 정 교수가 말을 이었다. “똑같은 자극에도 보수주의자의 아미그달라(amygdala·편도체)가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여기는 공포 반응을 관장합니다. 보수주의자가 공포에 더 민감하죠. 반대로 진보주의자는 인슐라(insula·뇌섬)가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여기는 역겨움을 관장하는데, 사회적 불공정을 볼 때도 반응하지요. 이들은 강자의 특권이나 약자의 부당한 고통에 뇌가 더 민감합니다.” 정치 노선이 오로지 개인의 후천적 선택이며 합리적 개인은 두 노선을 이슈에 따라 넘나들 수 있다는 통념에, 신경정치학은 의문을 제기한다.
이 바통을 이어받는 것은 사회심리학이다. 서구 과학계는 정치 성향이 어느 정도까지는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연구를 여럿 생산해내고 있다. 가장 유명한 연구 중 하나는 2003년에 나왔다. 사회심리학자 존 조스트 등 연구자 네 명이 발표한 결과는 이랬다(크리스 무니의 저서 〈똑똑한 바보들〉 3장에서 재인용). 진보주의자에 비해 보수주의자들은 더 성실하다. 죽음을 더 두려워한다. 인지적 종결욕구가 더 강하다. 즉,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끝내고 싶어 하는 성향이 더 강하다. 새로운 경험에 덜 개방적이다. 다시 말해, 더 폐쇄적이다.
논문 저자들은 “불확실성과 두려움을 해소하고 싶은 인간의 깊은 욕구”를 보수주의의 뿌리로 보았다. 보수주의자의 뇌가 두려움에 더 민감하다는 신경정치학의 발견과 접점이 있다. 반대로 진보주의자를 가장 잘 특징짓는 심리적 특성은 ‘개방성’이다. 지적 유연성, 호기심, 새로운 경험에 열린 마음, 위험 감수 성향 등을 포괄하는 성격 특성이다. 정재승 교수도 비슷한 말을 했다. “오픈마인드(개방적)일수록 더 진보적인 경향은 여러 연구에서 측정됩니다.”
그런데 왜, 두려움과 종결욕구는 보수주의자의 특징이고 불확실성과 개방성은 진보주의자의 특징이 되었나. 신경정치학과 사회심리학은 다른 연구 방법을 사용해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지만, 왜 그런지를 밝히는 것은 이 접근법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여기서부터 연구자들은 ‘진화’의 관점에 기댄다. 도덕 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는 인간이 잡식동물이라는 데 주목한다.
잡식동물에게는 특유의 딜레마가 있는데, 새로운 음식에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과, 정보가 없는 음식에서 독과 기생충과 미생물의 위협을 받아야 하는 가능성이다. ‘새로운 음식에 개방적인 전략’은 더 많은 영양분과 더 많은 위험을 동시에 제공한다. 반대로 ‘새로운 음식을 두려워하는 전략’은 더 안전하고 더 배고프다. 장단점이 있는 두 태도는 둘 다 현대 인류에 남아 있다. 더 개방적인 성향이 진보주의로, 더 두려움에 민감한 성향이 보수주의로 이어진다고 하이트는 본다.
“글쎄요. 저는 여전히 더 나은 설명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심리학회 연차학술대회가 열린 8월17일 세종대학교. 대회 첫날 강연자 중 한 명으로 초대된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대회장 인근 카페에서 특유의 시니컬한 문장으로 말했다. 전 교수는 한국에서 진화심리학으로 처음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다. 이 학문의 개척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 버스가 그의 스승이다.
그는 좌우 일차원 축으로 진보와 보수를 구분할 수 있다는 통념에 회의적이다. 대신 그가 선호하는 설명은 이렇다. “최신 연구들을 보면, 사람에게는 쟁점이 형성되는 영역이 적어도 세 개가 있다고 합니다. 경제 영역, 사회집단 차별 영역 그리고 번식 전략 영역. 셋 다 진화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은 각각의 영역에서 어떤 전략을 택할지 신중하게 고려하죠. 그런데 실험을 해보면 이 셋이 같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 영역에서 진보적이라고 그 사람이 사회집단 영역에서도 진보적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가난한 보수’와 ‘엘리트 진보’가 발생하는 이유
이런 의미다. 경제 영역에서 가난하거나 학력·인종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은 자원 재분배를 지지하는 성향이 더 높다. 진보적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이 영역에서 진보적인 가난한 백인은 사회집단 영역에서 보수적일 수 있다. 성·인종·종교 등 집단 간 차별을 유지하는 것이 자기에게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는 보수의 태도다. 번식 전략은 어떨까. 가난한 남성이라면 성적으로 개방적인 사회에서 추가적인 이익을 볼 가능성이 높지 않다. 성적 엄숙주의를 지지하는 보수파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난한 사람이 보수당을 찍는 것이 비합리적이라고들 흔히 말하는데, 경제 정책만 보면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보수당은 사회집단 간 차별을 유지해주기 때문에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는 중요한 이익을 제공합니다. 더욱이 성적 엄숙주의도 가난한 사람에겐 상대적으로 도움이 되지요. 세 가지 쟁점 영역 중 둘에서 보수당 노선과 일치한다면, 그 사람이 보수당 지지자가 될 확률은 낮지 않죠. 신기하거나 비합리적인 일이 아닙니다. 정치적 판단이 이루어지는, 진화적으로 중요했던 영역이 적어도 셋이 있다는 접근법을 택할 때, 미스터리라고 생각했던 현상이 꽤 명쾌하게 설명됩니다. 트럼프를 당선시킨 쇠락한 백인 노동계층을 이 관점으로 다시 보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강남 좌파’는? “마찬가지죠. 상속자보다는 고학력자와 같이 자기 능력으로 출세한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이 사람은 경제 영역에서 자원 재분배 정책으로 손해를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사회집단 차별이 사라질수록 대단히 큰 이득을 봅니다. 개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연령이든 지역이든 인종이든 종교든 자신이 유리하지 않은 사회적 차별이 철폐될수록 이익이죠. 어느 나라건 고학력자의 진보 성향이 두드러지는 것은 특히 이런 이유라고 봅니다.”
세 쟁점에서 보수당은 각각 경제적 자유주의, 차별 묵인, 성적 엄숙주의를 대변한다. 반면 진보당은 자원 재분배, 차별 철폐, 성적 자유주의를 대변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진보당과 보수당 중 누구를 지지할지는, 세 쟁점에서 그가 가장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노선이 무엇인지에 따라 정해진다. 세 쟁점에서 일관성 있는 진보·보수의 태도는 오히려 예외다. 진화적으로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영역에서 각각의 정치적 판단이 이루어지고, 그 조합이 일종의 확률적 조건으로 개인에게 주어진다. 전중환 교수가 들려준 이 진화적 접근법이 기존 정치이론을 대체할 만한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미스터리로 불리던 질문들에 꽤 일관성 있는 대안 가설을 던지는 것은 분명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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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로서의 정치체제를 이야기할 때 기본사항으로 회자되는 것이 1인 1표, 보통‧직접‧비밀‧무기명 선거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인해 어떤 사안이건 결국 가난한 자의 이익으로 결론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투표권자 모두가 당연히도 계급 투표를 하리라 여겼던 거죠. 하지만 2021년 기준 한국의 상위 1% 평균 소득은 4억 5,856억 원이었던 반면에 하위 80%의 평균 소득은 870만 원이었습니다(장혜영, 2023). 53배의 격차였습니다. 만일 실제로 모두가 계급 투표를 했다면 빈부 격차는 지금처럼 이렇게 벌어지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진보정당들이 원내 과반수의 의석을 차지했을 것이며, 어떻게든 최저임금의 수준을 높였을 테니까요.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 선택이라는 계급투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막혀 있습니다. 그것은 지역일 수도, 국가관일 수도, 경제 상황일 수도, 당선가능성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고려 사항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고려 사항을 작동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가장 쉬운 예로 일용직 노동자의 투표 시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일용직 노동자는 투표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일터에 나가게 됩니다. 그가 투표를 하겠다는 건 하루 일당을 포기하겠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입니다. 퇴근 후 투표에 참여할 수도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건 일터가 가까운 데로 잡힌 날에만 해당됩니다. 사전투표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전투표일에도 일을 나갑니다. 물론 법으로만 따지자면 투표시간이 보장됩니다. 이를 위반하는 고용주는 과태료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법이 일용직 노동자들한테 현실적으로 적용될 것이라 생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제주신문. 2017).
현대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자본의 영향력이 더욱 직접적입니다. 2010년 미국 대법원은 슈퍼팩(SuperPAC: 특별 정치활동위원회)을 통해 선거자금을 무제한으로 모으는 것이 불법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기업들이 정치광고에 무제한으로 돈을 쓸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죠. 실제로 2015년 상반기 슈퍼팩 모금액 3억 1,368만 달러의 절반은 1인당 10만 달러 이상을 내놓은 300여 명의 돈으로 채워졌습니다. 이에 대해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대통령은 미국의 정치제도가 과두제로 변해버렸다고 비판합니다. 기업이 낼 수 있는 제한 없는 정치자금은 무제한의 기업 뇌물이라면서 말이죠(국민일보. 2015).
민주주의가 자본으로부터 받는 위협은 더욱 넓고 은밀합니다. 박영선 전 의원에 따르면 하루는 삼성그룹 퇴직자라고 밝힌 한 남성이 찾아와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하드디스크를 조사하니 최신 휴대폰 시제품을 선물한 명단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선물이 행해졌는지 확인된 바는 없지만, 그 명단에는 판검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팟캐스트에서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자그마한 선물 받을 것 때문에 수사나 판결할 때 영향을 받는다면 큰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또 같은 인터뷰에서 퇴임 전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대화를 전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권력이 이제 재벌에게 넘어갔다며 한탄했다고 합니다(노컷뉴스, 2015).
<지젝(Zizek)!>을 만든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에스트라 테일러(Astra Taylor) 역시 노 전 대통령과 같은 진단을 합니다. 다만 그는 노 전 대통령과는 달리 희망적입니다. 아마 대통령이었던 현실 정치인과 감독이었던 창작자의 차이일 겁니다. 그는 아테네인이 생각하는 인민의 지배를 가난한 자들에 의한 지배로 단순화시킵니다. 아니, 단순화시켰다기보다는 민주주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보는 게 옳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자본주의로부터 민주주의 구하기’라는 무시무시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말합니다. 형식적인 1인 1투표제만으로는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에스트라 테일러, 2020).
1인 1표만으로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자본은 전방위적으로 1인 1표라는 수단을 그대로 놓아둔 채 결과를 유리하게 바꿉니다. 1표를 행사하는 1인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죠. 철학자 이진우의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누가 착취자인지도 모른 채,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착취당하고 있다는 진단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빈부격차의 원인이라고 합니다(이진우,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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