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다녀간 것이다.
엄마가 모아 놓은 돈 봉투를 들고 집을 나가 한달이 넘도록 소식 한 번 없던 아빠는 이번에도 또 식구들 몰래 집에 들러 돈이나 돈이 되는 물건 따위를 찾으려 방 안을 뒤지다 갔을 게다.
어디 부터, 어느 것 부터 정리를 해야 할지 난감한 지경이지만 엄마가 오기전에 방 안을 말끔히 치워놔야겠다.
요즘들어 자주 야근을 하느라 부쩍 힘들어 하는 엄마가 집으로 돌아와 이렇게 난잡하게 어지러진 방을 보면 가뜩이나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은 엄마의 밤은 더욱 길어질 것이다.
연이는 아직도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
발그레한 두 볼이 볼록할 만큼 입 안 가득 밥을 담고 있어서인지 연이는 방으로 들어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연아, 오빠 안기다리고 왜 먼저 왔어? 비도 많이 오는데..."
아침에 연이가 우산을 갖고 있게 할 걸 그랬다.
입고 있는 옷 소매에 물방울이 맺혀 떨어질 만큼 연이의 옷은 축축히 젖어 있다.
"혼자, 그렇게 비를 맞고 오면 어떻게? 오빠가 걱정 했잖아"
"우... 오파, 오도이 티티하까바"
얼마나 많이 밀어 넣었는지 한 번에 삼키지도 못 할 밥을 오물거리는 통에 연이에게서는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도 못 할 말이 새 나온다.
하긴, 점심 때가 한참이나 지난 지금 시각에 먹성 좋은 연이가 배가 많이 고팠을 만도 하다.
얼른 젖은 옷 부터 갈아 입혀야겠다. 비 맞은 옷을 연이는 두어 시각은 족히 입고 있었을 게다.
방이 심하게 어지러진 통에 연이의 옷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책상에 있던 물건들을 어느정도 제자리에 채워 넣고 나서야 연이의 옷을 찾을 수 있었다.
"연아, 밥 다 먹었어?"
"웅, 오빠"
오늘은 간장을 알맞게 넣었는지 밥 색깔이 그다지 짙어 보이지 않는다. 어제와 달리 연이의 밥 그릇이 깨끗이 비워진다.
"오늘은 밥 잘 비볐나보네?"
"웅, 오빠가 가르쳐줘서 나 밥 잘 비볐어"
주렸던 배를 채워서일까,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던 연이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래, 그럼 이리와서 옷 갈아 입자. 젖은 옷 입고 있으면 감기 걸린다고 했어 엄마가..."
"웅"
내 앞에 선 연이는 두 팔을 하늘을 향해 곧게 쳐들고 내가 옷을 벗겨주길 기다리고 또 입혀주길 기다린다.
젖은 옷을 벗기자 연이의 작고 마른 몸이 드러난다.
항상 붙어 다녔으면서도 연이의 몸이 이렇게 작은 줄은 몰랐다. 연이는 또래의 여느 아이들 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
금방 밥을 먹어서인지 연이의 마른 몸은 배만 볼록하게 내밀고 있다.
옷을 벗겼어도 연이의 몸엔 물기가 배어있다.
수건으로 물 묻은 연이의 몸을 닦아 주면서 아빠에 대한 말로는 표현하지 못 할 분노와 증오가 생겨난다.
내가 조금만 더 컸어도 아빠가 우리를 괴롭히지 못 하도록 할 수 있으련만...
이런 아빠를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같이 따듯한 밥을 아빠 밥 그릇에 꾹꾹 눌러 담아 밤 마다 이불 속에 넣어 두고 자는 엄마를 이해 할 수 없다.
제자리에 있는 것 하나 없이 어지러진 방과 마루를 치우고 정리하는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종일 비가 내리는 탓에 덥지 않은 날인데도 불구하고 이마에 땀 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정도다.
연이는 어느새 텔레비젼 앞에서 곰 인형과 나란히 누워 잠이 들었다.
지직거리는 소리만 흘러나오는 텔레비젼을 켜둔 체 잠이 든 연이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이 힘들고 겁이 났을 것이다.
연이가 입었던 젖은 옷을 들고 다락을 내려간다. 엄마가 오기 전에 연이의 옷을 깨끗이 빨아서 널어놔야겠다.
지금 껏, 양말 몇 켤레와 방 걸레를 빨아 본 것이 전부지만 엄마가 하던 것 처럼만 하면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게다.
현숙이 이모가 기지개 켜며 방에서 나온다.
이모는 오늘 따라 유난히 늦게 일어나 방에서 나왔다. 어제 늦잠을 잔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오냐, 학교 잘 갔다 왔냐?"
"네"
이모는 박혜숙 선생님과 비슷한 또래인데도 목소리 부터 다르다.
걸죽하고 괄괄한 목소리를 내는 현숙이 이모는 늘 단정하고 상냥한 박혜숙 선생님과는 달리 속살이 훤히 보이는 허름한 옷 차림에 짙은 화장을 하고 남자 손님을 맞던가, 아니면 지금 처럼 부시시한 얼굴로 긴 라면 머리를 어깨 까지 늘어 뜨린체 마루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가 하는게 전부다.
주인 할머니가 자리를 비운 수돗가에 돌 의자를 깔고 앉아 옷 가지를 물에 적시고 비누질을 한다.
걸레를 빠는 일 처럼 쉬울 거라 생각했지만, 고작 연이 몸집 만큼이나 작은 티셔츠와 반바지 두벌을 빠는 일 조차도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는다.
빨래 판을 깔고 엄마가 하던 것 처럼 옷을 비벼대자 팔과 다리는 온통 비누거품으로 범벅이 되고 만다.
엄마는 밤 늦게 까지 좀약 공장에서 일을 하고 돌아와서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이렇게 힘든 일을 계속 해 온 것이구나.
"현이, 뭐 하냐?"
현숙이 이모가 목에 수건을 두르고 칫솔을 입에 문체로 수돗가로 다가온다.
이모는 이미 가슴팍 까지 비누거품을 묻히고 있는 나를 보고는 칫솔을 빼들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너, 뭐하는 거야 이 새끼야?"
"빨래 해요"
"네가 무슨 빨래를 한다그래? 수돗가만 어질러 놨구만"
내가 무슨 잘 못이라도 한 것 처럼 인상을 쓰며 화를 내는 이모를 보자 뭐라 변명할 거리를 떠올리지도 못 한체 주눅 부터 든다.
그러고보니, 말끔하던 수돗가는 그새 비누거품으로 얼룩져진 내 옷 처럼 순식간에 어지러져 있었다.
현숙이 이모가 물 한 모금으로 입을 헹구고는 나를 밀치며 돌 의자를 빼앗아 앉는다.
"저리 비켜 이 녀석아, 니 까짓게 무슨 빨래를 한다고 그러고 있어?"
큰 잘 못을 한 것도 아닌데 수돗가로 오자마자 내게 화를 내는 이모가 못 마땅하지만 성질 고약한 이모에게 대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 옷도 벗어 이 새끼야, 빨래를 하는게 아니라 지 옷만 더 더럽히고 앉았네 이 놈이"
이모는 빨래 판을 짚고 돌 의자에 앉아 연신 나를 향해 불퉁거리더니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와 바지까지 벗겨내 빨래 판 위에 던져 놓는다.
엄마는 오늘도 야근을 하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연이에게 아빠가 다녀간 것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지만,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엄마에게 달려가 안기는 연이가 불안해 보이기만 한다.
품에 안긴 연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오는 엄마는 지친 기색 보다는 오히려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있다.
엄마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를 와락 끌어 안으며 엉덩이를 토닥인다. 어찌나 손에 힘을 많이 주었는지 엉덩이가 아프기 까지 하다.
"엄마, 왜 그래? 아프잖아"
엄마는 내 엄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더욱 세게 끌어 안는다. 그리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내 볼에 엄마 볼을 맞대고 부벼대기도 한다.
"엄마가 우리 아들 이뻐서 그러지. 엄마 힘들까봐 빨래 까지 했다면서 우리 현이가?"
"응?"
엄마 얼굴이 왜 이렇게 밝은지 그제서야 알았다.
현숙이 이모가 내가 빨래를 하려 했던 것을 엄마에게 이야기 한 모양이다.
연이는 샘이 나는지 나를 안은 엄마의 팔을 잡아 당기려 한다.
엄마에게 현숙이 이모가 대신 빨래를 해 준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따듯하게 느껴지는 엄마의 품에서 조금 더 머물러 있고 싶기 때문이다.
첫댓글 와우~ 도둑이 아니라 아빠였네여..=ㅁ=^ 그 아빠는 정말 짜증난다는+ㅁ+!! 그런데... 재미있잖아요~>ㅁ<!! 다음편도 기다리겠습니다아~^ㅁ^!!
너무 재미있게 읽고 가요 ... 항상 감동을 받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