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8 color=skyblue>옛날의 원주</font><p><br>
<p>
<font size=4 color=green><p>타향가서 원주 산다구하면 먼저 1군사령부<p>를 말하고 다음이 치악산 그리고 A,B,C라는 세줄기 길이름을 말한다
<p>이밖에 더 아는 것이 있다면 원주가는 길에서 보니 간현이란곳이 <p>놀 만해보이더라는 말들인데 이런말을 들을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서<p>글퍼 지는
<p>것을 누룰수 없다.
<p>내고장 원주에는 이상 세가지 밖에 인상적이 것이 없었던가?
<p>치악산 좋기는 하나 헐벗었다 1군사령부라 하지만 그것은 군사적인 <p>문제요 내고장이 지녀온 자랑거리는 아니다
<p>a,b,c도로- 기다란 거리에 새끼줄모양 늘어진 볼품없는 길 이름마저 <p>A도로 B도로 C도로로 불리는 형편이다
<p>인목대비도 원주사람이요 인렬황후도 원주사람이다 조선초기의 석학 <p>운곡 원천석 선생도 원주사람이라면 이은찬공도 원주사람이다 섬강<p>의 풍치와 고란초피는 청벽도 원주것이다 이런 원주렸지만 안내판에 <p>나타나는 기간도로 이름이 아직도 ABC도로 불린다
<p>각설 170년전만해도 원주는 노송이 무성한 기막힌 산골이었다
<p>지금 7,80년대의 고로들은 그때를 회상하여 인심도 좋왔고 나그네가 <p>하루쯤 묵고갈것을 청하면 어느집에서나 받아드려 정성것저녁도 대접<p>했다 한다
<p>그때의 원주에는 옥거리 사창거리 사직골 다박골 등의 거리이름이 있<p>었다 옥거리란 지금의 A도로 원성병원옆 리리사장앞에서 B도로로가<p>는 바로중간이 된다 이근방을 옥거리라 한것은 감영의 옥이 있었기 <p>때문
<p> 한간정동의 조그만 옥이 고목속에 당그런이 앉아있었고 단 한명의 <p>옥사정이 간혹 죄인이 있을때만 이곳에 와 있었단다
<p> 옥은 보통비어있는수가 많았고 간혹 한사람의 조인이 생겨 옥에 갇<p>히었다하면 원주바닥이 발근뒤집힌것 같이 사람들이 떨어나와서 조고<p>만 철창을 통해 죄수를 구경했단다 이옥은 왜정때로 들어와 경찰서<p>가 생기는 것과 함께 없어졌다
<p>강원감영 물루서 시공관까지의 위쪽을 상도리라했고 그아래쪽이 하<p>동리 지금의 역전은 유문이라하여 자두밭으로 소문났던고 원주역 뒷<p>쪽을 정지뜰이라 했는데 큰 소나무들이 욱어져있었고 지금의 단계동<p>을 모란애 무상골 백간이라 불렀다
<p>공설운동장뒤를 등진골 또는 뒨내라했는데 이곳에는 소나무와 낙엽<p>송이
<p>우거져서 사람들이 잘 다니지도 안았다..
<p>지금의 명륜동은 향교가 있었던 탓으로 향교골 개운동부근을 도말뻐<p>던이라했는데 이부근은 하천과 마주친 벌판으로 가시덤불과 오리나<p>무 수양버들이 꽉차있었다
<p>다시 그윗쪽에 구만이가 있었으며 봉천내 건너 경찰서앞서 봉산시장<p>쪽을 뱃말이라고 했다 이곳을 이전에는 배로 건너다녀서 뱃마을이라 <p>했단다 경찰서 뒷산은 봉살미라하여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고 그옆 무<p>징고개 아랫쪽에는 학봉정이란 정자가 있다
<p>지금 한전변전소가 있는곳은 가매기라했고 그밑을 일야미 또는 한뱀<p>이라고 했다 봉천내의 양쪽 둑에는 수양버들을 위시해서 여러가지 꼬<p>나무와 화초를 심어 옥같은 냇물가에 꽃이 필때면 이것이 원주의 큰 <p>구경거리였고 자연히 공원구실도 했다
<p>이렇던 원주에서 빼놓을수 없는 이야기는 남산의 송림과 도말버턴의 <p>가시덤불 뱃말의 숲 속에서 도깨비장난이 심해 고생들을 많이했다는 <p>가지가지의 전설이 있다는 점이다
<p> 그리고 지금의 평원동 한숲속에는 사형장이 있어 죄수들의 참형 혹<p>은 교수형을 집행했다...</font>
<p> 담에는 음... <font size=8 color=blue>오리골의</font><font size=8 color=black> 成 池 朴</font>
<p>에 대해서 이야기 할께여 그럼 빠이..<embed src="http://w2.hompy.com/masterhi/pdsdata/hi27.asf" hidden=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