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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조카 결혼식에 다녀왔다. 고속도로를 달려 반월을 지날 무렵, 내 눈길은 연신 아스라하게 펼쳐진 오른켠 들판에 가 닿았다. 바로 내가 초등학교 4학년부터 자란 화성군 반월이 스쳐지나갔고 있었다. 이 곳은 내 유년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움켜쥐고 있는 향수의 뒤안길이다. 지금은 안산으로 편입되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경기도 화성의 반월에 위치한, 인가라고 몇 호되지 않는 용담부리 부락마을이었다. 이곳에는 봄이면 마을 뒷산에 진달래가 올망졸망 꽃무리를 이루며 피어났고, 여름이면 산나리가 얼기설기 붉게 피어나 하늘과 키재기를 했었다. 가을이면 도토리처럼 생긴 가얌과 파리똥이라고 하는 뽀로스, 조선밤이 지천이었고 겨울이면 백설의 경이로움 속에 얼음판에 썰매질을 했던 기억이 있다.
뒷산은 야트막했고 정상에는 집채만한 너럭바위가 있었다. 봄이 오면 나는 그 바위 위에 올라가 납작 엎드려 학교 숙제를 하기도 했고 또 바위에서 뛰어내리면서 담력을 키우기도 했다. 또 산 아래에는 바위틈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약수를 콜라병에 받아 마시고는 했었다.
어린시절의 기억이 바람처럼 가벼워졌을 때 어느덧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예식 시간이 다가오자 결혼식장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큰매형의 부탁으로 작은 매형과 나는 축의금 접수대에 앉았다. 작은매형은 봉투 안의 지전을 꺼내 헤아렸고 나는 접수대장에 이름과 축의금을 받아 적었다. 그런데 접수대에 많은 인산인해로 인해 당황스러웠다. 축의금은 자꾸 밀려갔다. 접수대장에 적다보면 하례객들은 식권을 달라기도 하고, 주차요금 도장은 찍어달라기도 하고 식사를 안 할려고 하는데 기념품으로 교환이 가능하느냐 물으면서 일손을 더디게 했다. 게다가 지천명을 앞두면서 수전증이 심해져 이름 쓰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큰누나는 내가 글씨 쓰는 것을 보더니 '수전증은 여전하구나' 했다. 한참 축의금을 적고 있는데 조카가 달려와서 지금 단체 사진 찍는다며 빨리 예식장으로 들어오라며 보채고 있었다. 하지만 돈다발을 접수대에 두고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지를 않았다. 정신없이 축의금을 받아 적고 있을 때 예식장 직원이 오더니 다음 예식이 있으니 자리를 비워달라는 말을 듣고 정리할 수 있었다.
폐백실에 큰매형을 만났다. '매형, 축의금 접수하다가 시간되서 쫓겨났어요. 하례객도 많이 오고 자식 농사 잘 지어서 흐뭇하시겠어요. 매형은 그저 빛나는 웃음만 입가에 가득 달고 있었다. 사실 조카는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시골의 나무처럼 정작 올곧게 잘 자랐다. 한참 사업이 잘 나가던 매형에게 IMF는 큰 시련이었다. 부도가 나고 집안에 있는 가재도구마저도 차압 딱지가 붙여졌다. 하지만 조카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을 졸업했고 석사과정을 조교로 근무하면서 용돈을 벌면서 잘 채근해나갔다. 해병대에 입대해서도 이라크 파견을 지원해 제대 후 생활비를 마련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석사학위를 받자마자 근무조건 좋은 현대자동차에 취직했다.
- 누나가 돈이 없어서 걱정을 했는데 아무 신경 쓰지 말라고 해서 누나가 몸만 가지고 자식을 결혼 시킨다. 장손인 아들을 결혼시키는데 사는 것이 힘이 들어 미미한 예물 하나 해줄 수 없었던 큰누나는 내게 거칠었던 삶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온갖 풍상을 겪은 큰누나에게 있어서 조카는 커다란 버팀목이고 최씨 가문의 자랑으로 자리 할 것이다. 결혼식에 하례객 300명 이상이 왔고 그중 250 이상이 조카의 하례객이었다. 조카가 삶을 어떻게 이끌어왔는지를 문전성시를 이룬 하례객들이 대변해 주고 있었다.
폐백실에서 조카한테 절을 받으면서 제법 큰 돈을 넣어 주었다. 사실 축의금도 별도로 했기에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내게 있어서 큰 누나는 단순한 누나가 아니었다. 예전에 어느 일기에서 큰누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 큰누나는 파스칼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아무도 몰래 한 행동이 아름답다'라는 파스칼의 말을 실천하고 있다.
예식을 마치고 집에가는데 작은매형의 딸인 조카는 내 팔짱을 끼더니 '삼촌 저희 집에서 자고 가면 안되요?' 하면서 다 큰 처녀가 두손으로 내 팔짱을 껴고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매형의 조카 역시 이쁘게 잘 자랐다.
작은매형은 지게차 운전을 하는데 장기간 국내 경기 불황으로 한달에 수입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조카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내내 회장을 했고 명성있는 전문대 항공운항과를 학자금을 대출받아 다녔다. 또 졸업하기도 전에 대한항공 승무원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회사에서 대출을 받아 아빠 승용차도 사 주고 또 40평 넘는 집도 사 준 효녀다.
조카들은 다 잘 나가고 있는데 정작 우리 애들을 생각하면 가슴속에 뜨거운 덩어리가 하나가 곤두서 있는 것 같다. 친척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공부는 뜻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들은 게임에 빠져서 공부의 나래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공주대를 다니다가 재수를 해서 들어간 곳이 지방사립대였다. 그나마 위안이라고 한다면 70% 장학금을 받는다는 것이다. 딸 역시 스튜어디스가 되겠다고 하면서 간곳이 대한항공 스튜어디스를 한명도 배출하지 못한 지방의 전문대였다.
하지만 신발은 신어봐야 알고 여자 머리는 풀어봐야 한다.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지금이라도 우리애들이 제발 학과 생활을 열심히 하고 바르고 이쁘게 잘 컸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