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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et L. Abu-Lughod
1.
트루아는 로마 시대의 요새가 있던 곳으로서 이미 5세기에 정기시를 개최했던 증거가 있으며, 더 이른 시기에도 그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롬바르디아 족이 6세기에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했을 때 일부 주민들은 북동 해안 석호 앞바다로 대피하여 베네치아 시를 건설했다.
(트루아는) 8세기에 카롤루스가 재통합을 시도하면서 트루아와 프로뱅은 행정 중심지로 선택되었다.
9세기 말에 북서 유럽에서는 초기 봉건제라고 할 만한 방위체제가 확립되었는데, 그것은 로마적, 게르만적 선례들을 융합시킨 것이었다. 한 세기 후에는 특히 프랑스와 저지대 지역에서 봉건제라고 불리는 사회형태가 실질적으로 재도화되었다. 페리 앤더슨은 그 시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특히 프랑스의 농촌에서는 지방 영주들이 새로운 이민족의 공격을 막아 내고 국지적인 권력을 수호하기 위해서 황제의 승인 없이 사적인 성과 요새들을 건설하느라고 동분서주했다. 성들이 건축된 새로운 경관은 농촌의 주민들에게 보호처이자 동시에 감옥을 의미했다. 농민층은 카롤루스의 통치 말기 이래로 이미 종속이 심화되고 있었는데, 결국에는 일반적인 농노의 지위로 추락했다.....봉건제는 다음 2세기 동안에 [북서] 유럽 전역에서 서서히 뿌리를 내렸다.
봉건제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견고한 기반을 구축했다. 소규모 교역 중심지들이 주군의 성곽 주변이나 수도원의 보호구역 내에서 성장하거나 부활했다. 이곳에서는 지방 영주들이게 상업상의 봉사를 하는 답례로 그로부터 특별한 시혜와 보호를 받았던 상인들에 의해서 상품들이 교환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주지 가운데 특히 중요 육로나 해로가 교차되는 곳에 위치한 몇몇 지점은 결국 정기시의 장소로서 혹은 내륙부까지 도달하던 "국제무역"에 소규모 상품을 공급하는 교환 장소로서 기능했다.
(10세기에) 트루아와 프로뱅의 경우에는 교환보다는 직물 생산의 중심지로서 더 큰 역할을 했다.
11세기에도 북서 유럽은 여전히 자급자족적인 봉건 영지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1223년에 티보 4세는 프로뱅 시민의 요처에 의해서 백작에 속한 사람(즉 그의 보호 아래에 있는 농노)이나 도시의 주민(자유로운 시민) 외에는 프로뱅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직물을 새산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포고했다.(Chapin)
티보 4세는 1230년 트루아에 특허장을 수여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제분소와 도시의 다른 경제적 사업들에 대한 독점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도시 내에 많은 재산도 소유했다(Gies & Gies) 도시민을 농노의 지위로부터 "해방한다"는 1242년의 그 유명한 특허장은 악명 높은 타이유 세(인두세, 원래 프랑스에서 영주들이 자의적으로 거두었던 부당 징세였으나 차츰 고정된 액수로 매년 징수되었으며, 중세 말부터는 국왕이 평민들에게 부과하는 직접세가 되었다/역주) 대신 개인의 재산과 토지에 대해서 그에 못지않게 부담스러운 세금을 부과했다. 1242년의 두 번째 특허장에 따르면 트루아는 12명으로 구성된 시참사회에 의해서 통치되어야 한다고 명문화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1317년까지 이 참사회가 구실을 했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Boutiot). 1270년 까지도 티보 5세는 자신을 여전히 상파뉴와 브리의 "국왕"으로 언급했고, 필시 그 도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가장 너다한 수익을 내던 두 가지 활동인 직물 상인과 은행가의 역할을 잘 구별되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두 역할은 단일한 사업가에 의해서 결합되었다"(Gies & Gies). 그 반면에, 상인-은행가와 노동자 사이의 격차는 점점 커졌다. 원래 거의 대부분의 숙련공은 동시에 상인으로서 활동하였으나, 13세기에 이와 같은 체제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트루아 상인들은 금전을....... 무엇보다 양모에 투자했으며.......[그러나 한 상인은 싼값에 대량으로 구입했고] 그 후에 다시 그것을 직공에게 공급하여 자신이 명시한 특정 종류의 직물을 만들게 했다. 그는 이론적으로 원모를 개별 직공들에게 판매했고 완성된 모직물을 되샀다. 하지만 그는 항상 동일한 직공으로부터 구입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한 명의 모직물 상인이 도시에 산재해 있던 공장을 가동시키고 있던 셈이었다(Gies & Gies)
이처럼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화되어가고 있었다.
1285년 일단 이(상파뉴) 영토들이 프랑스 국왕의 관할하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전까지의 독점적인 지위를 어느 정도 상실하는 것은 불가피 했다. 병합으로 인해서 정기시 도시들은 그 특별한 지위를 잃어버렸고, 많은 정기시 활동이 다른 곳들로 이전되었다. 결국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리옹이 자연스러운 회합 지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상파뉴 정기시을 쇠퇴하도록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은 플랑드르와의 정치적 분쟁에 있었다. 플랑드르 상인들은 그 분쟁 기간 동안에 실제로 정기시에 참여하는 것이 봉쇄되었다. 최종적인 요인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프랑스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플랑드르 지역에 이를 수 있도록 한 대서양 항로의 발견에 있었다.
트루아의 경우에는 다소 차이를 보였는데, 비록 직물업이 경제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 도시는 공업보다는 상업과 금융상의 기능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이 도시는 백작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봉건 영즈, 산업가, 금융가 사이에 경계가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다. 중세 유럽 도시를 "자치적인" 것으로 묘사하려는 많은 노력이 있기는 하지만, 13세기의 도시는 지방적인 봉건제와 깊이 얽혀 있었음이 강조되어야만 한다(Evergates)
(13세기)유럽에서는 은이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고 중동에서는 금이 사용된 반면에, 중국 에서는 동화銅貨가 정화(正貨, 본위화폐)로 선호되었다.
1293년 제노바의 해양 교역은 같은 해 프랑스 왕국의 전체 세입보다 3배나 많았다.(Lopez)
13세기 이전에 중동과 인도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국제적인 상거래에서 선호되었던 정화는 금화였으며, 이는 최초로 비잔티움에서, 그리고 뒤이어 이집트에서 주조되었다. 몇몇 이탈리아 도시들(피렌체와 제노바)이 자체의 금화들을 주조한 것은 13세기 중엽 이후에 이르러서였다. 그나마도 이것들은 이미 유통되고 있던 중동의 금화들을 대체하기보다는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이로의 번영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는 1320년대였다
유럽에서는 이전에 주변부에 속했던 잉글랜드가 흑사병 이후에 "사망률"이 대륙보다 낮았다는 점 때문에 좀더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이탈리아 반도는 중동과의 교역과 왕래가 빈번했기 때문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시기에 힘을 회복하여 여러 도시들이 16세기 초까지 번성했고 생동감이 넘쳤으며 그 후로도 계속해서 지중해 교역을 주도했지만, 동지중해가 더 이상 동방에 이르는 유일한 톨로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 요인까지 겹쳐, 지중해는 주요한 항로로서의 역할을 계속 담당할 수 없었다. 흥미롭게도 13세기 말에 북대서양 교역을 개척한 것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갤리 선이었다.
1143년 코란이 마침내 서양어로 번역.
[서양 철학에서의 변화는] 대부분 12세기 4분의 3분기에 톨레도에서 일하고 있던 소수의 헌신적인 번역자들의 노력의 결과였다. 그들은 알-킨디. 알-파라비, 아비첸나 등 위대한 이슬람 철학자들의 저작들을 서양에 소개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서 서양은 최초로 그리스의 철학적, 과학적 사상 전통을 상당한 정도까지 이어받는 것이 가능해졌다....그 업적들 가운데에서 많은 부분은 12세기 말에 이르러 라틴 어로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저작들의 사상과 용어가 라틴 신학에서 인정을 받았던 것은 비로소 1230년경 이후였다....앞선 세대의 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름과 나란히 아비첸나의 이름이 인용된 것을 보았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으며..(Southern)
2.
북동부 프랑스에서느네 개의 도시로 이루어진 상파뉴 정기시가 주역이었는데, 트루아와 프로벵은 교역과 생산의 중심지였고, 바르-쉬르-오브와 라니는 그보다 소규모로 시장 중심지였다. 플랑드르 직물 생산 지역에서는 브뤼즈가 가장 중요한 상업과 재정의 중심지였고, 헨트가 주요 공업도시였다.
이탈리아 인들의 등장으로 정기시가 성립했으며, 1350년에 그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된 것은 정기시가 쇠퇴했다는 신호였다.
13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자기들의 화폐를 주조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플과 이집트의 금화를 사용했다.
12세기 후반에 이탈리아의 대상들은 무리를 지어 상파뉴 6개 정기시 각각을 향해서 여행했다.
악명높은 롬바르디아 인들처럼 일부 환전과 금전대부를 전문적으로 취급한 자들도 나타났지만,
13세기 중엽까지 상파뉴 정기시는 유럽의 교역에서 가장 중요한 집산 지였다.
정기시의 쇠퇴... 요인들 가운데에는... 이탈리아 상인들로 하여금 직접적인 여행을 중단하고, 고향에 머물면서 서신 왕래, 현지 "대리인", 지급어음을 통해서 사업을 수행하도록 했던, 상거래 방식읩 변화를 들수 있다.
이미 1262년에 바폼에서 국경 관세징수과에 의해서 냉대를 받았던 플랑드르 상이들은 일시적으로 정기시를 집단 거부한 일이 있었다(Bourquelot).앙리3세의 사망(1274)으로 백작령의 통치는 섭정(아르투아의 블랑쉬)의 손에 놓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고유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프랑스 국왕과 동맹을 맺었는데-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었던 랭커스터 공작을 통해서 잉글랜드 왕가와 동맹관계에 들아갔던 점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동맹자의 이해관계는 사실 상파뉴와 브리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대립했다.(Chapin).뒤이어 전개된 프랑스 국왕과 플랑드르 사이의 전재은 정상적인 상거래의 수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했다.그러나 중대한 전환점은 상파뉴와 브리의 백작령이 결국 프랑스 국왕에게 합병되었던 1285년이었다. 왕위 계승자 필리프는 1274년 나바르 왕국을 그의 '보호' 아래 두었고, 미성년이었던 앙리 3세의 딸 잔을 대신하여 상파뉴와 브리의 백작령을 차지했다. 1284년 결국 그녀는(블랑쉬)는 필리프와 결혼했고, 1년에 필리프가 프랑스의 국왕이 되자 샹파뉴 독립의 마지막 자취는 영구히 사라졌다(Boutiot) 플랑드르 상인들이 정기시에 도착하기까지 겪는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들은 1302년부터 1304년까지 빈번한 공격에 시달렸으며, 1315년에는 아예 출입이 금지되었다.(Bautier). 그 후에 다시 출입이 허용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점진적으로 증가하던 수입세를 지불해야만 했다.(Bourqu
elot). 이는 국왕에게 좀더 수지맞는 해결책이었다. 게다가 일단 왕실이 상파뉴와 브리를 흡수한 후에는 프랑스 정부가 이탈리아 상인들이 정기시에 접근하는 것은 제안했다. 이것이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브뤼주로 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동기를 강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1297년까지 브뤼주와의 정기적인 해상 연결이 이루어지지는 못했으나(Braudel), 이미 1277년에 이탈이아 상인들은 신항로 개척에 성공한 상태였다(Braudel).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제노바가 좀더 크고, 좀더 항해에 적합한 선박을 건조한 덕분이었다.(Byrne) (중략) 베네치아 인들은 알프스를 넘어 독일에 이르는 더 나은 육로를 개발했는데, 이것이 프랑스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데에 기여했다(Braudel)
[정기시 쇠퇴의] 결정적 요인이... 생산 중심지에 가까운 플랑드르에 이탈리아 인드이 정착했기 때문" 인 것으로
트루아는 교역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으나, 또다른 도시화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규모는 작지만 14세기 후반까지 상업적, 공업적 기능을 계속 유지했다. 프로뱅 역시 도시를 지탱할 다른 수단을 가지고 있어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샤팽이 근의 저서에서 샹파뉴 정기시의 도시들에 대해서 상세히 지적했듯이, "정기시의 장소가 필연적으로 도시로 성장하지는 않았다"(Chapin). 이 주장은 바르-쉬르-오브와 라니의 경우 일단 정기시가 사라지자, 그대로 쇠퇴한 것에 의해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브뤼즈의 경우 성공은 자연적인 재해가 이 도시를 압도하기 전까지-침적토가 이 도시의 바다로의 접근을 차단하여 문자 그대로 역류에 좌초된 채로 남겨지기 전까지-단지 짧은 기간 동안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투루아의) 시민들(부르주아)은 면제 또는 구매를 통해서 영주의 인두세(타이유 세)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백자의 허가없이 그 지역 밖에 있는 자신과 유사한 자유민과 혼인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과세 대상이었으며, 여전히 많은 주요 기능들을 독점하고 있는 백작에게 특별세와 인허가료를 지불해야만 했다. 지주 귀족은 정기시로부터 수입을 거두어들였고 부동산 투자와 귀족적이지 않은 일에 깊이 관여했다.
플랑드르의 저지대 지역(오늘날의 벨기에 서부)에는 바이킹의 침입이 마침내 누그러진 후, 그전에 해안 지역을 떠나갔던 인구가 다시 찾아들었고, 상인들에게 다시 좀더 안전한 육상과 해상의 노선이 가능해지면서도시 발전의 융성기가 도래했다.
주변 지역에서 소박하게 시작된 공업화가 확대되면서 도시화의 진전을 선도했고, 이것이 직접적으로 도시의 상업적 기능의 성장을 이끌었다.
13세기 플랑드르의 두 주요 도시는 이 과정에 대한 아주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둘 가운데 큰 도시는 헨트(Ghent. 프랑스 어로 강(Gand])로 파리와 더불어 북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중 하나였다. 비록 헨트가 곡물을 다른 선박으로 옮겨 싣고 정기시를 개최하는 역할도 했으나, 이 도시의 경제는 처음부터 품질이 좋은 직물의 생산에 기반했다. 그로 인해서 헨트의 발전은 직물의 수요 증대와 밀접하게 연관되었고, 그 생산이 절정에 달했던 13세기와 14세기 초에는 도시 노동인구의 3분의 1에서 2분의 1까지 이 분야에 고용되어 있었다.
제2의 도시는 브뤼즈였는데, 이 도시는 헨트보다 규모(주민 4만 명)는 작았지만 점차 국제간 상업과 금융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13세기 후반에 브뤼주에 직항로를 개발하자, 브뤼주에서는 점차로 상어과 금융의 기능이 도시 발전의 추진력이 될 정도로 확대되어갔다. 하지만 그 번창하던 항구들이 침적토에 의해서 가로막히게 됨으로써 그 기능들도 쇠퇴하게 되었고, 결국 무대는 안트베르펜(플랑드르 어로 아트베르펜[Antwerpen]. 프랑스 어로 앙베르[Anvers], 영어로는 애트워프[Antwerp])으로 이전되었다.
13세기에 일면, 이프로 그리고 아마도 헨트에서도, (무력해진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생산업자들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던) "상픙계급"은 도시의 교외 지역에 살고 있던 프롤레타리아트화한 직물 노동자들을 "말썽을 일으킨다"는 명목으로 의도적으로 "성벽 바깥 지역으로 추방했다."
벨기에의 정기시는 금융거래의 중심지였다. 플랑드르의 시장은 의무적으로 문서를 통해서 중요한 상거래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소위 정기시 어음은 상거래 관행에서 최초의 이탈리아화 물결과 그에 뒤이은 환어음들이 융성한 결과로서 14세기에[서야] 쇠퇴했다. (van Houtte)
플랑드르의 상인/생산업자들이 12세기 초에 상파뉴 정기시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같은 세기 중엽에 이프르나 헨트보다는 아라스나 두에 출신의 상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플랑드르의 다수의 직물 생산 도시 출신의 상인들이 트루아와 프로뱅에 "상관들"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상파뉴와 브리 백작령을 병합한 프랑스의 국왕과 플랑드르 백작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서 13세기 말에는 상파뉴 정기시에서 이탈리아 인들에게 플랑드르 직물을 판매하는 것이 방해를 받았다. 이는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브뤼주까지 직항로를 연장할 동기를 강하게 부여했는데, 그들은 최신 발명품인 대형 갤리 선을 통해서 직항로를 우행할 수 있었다.
1280년에 사실상 플랑드르의 모든 직물업 도시들(헨트와 브뤼주를 포함하여)에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기 위해서 거리로 뛰쳐나갔다.
양모가 점점 더 많이 원산지(잉글랜드-옮긴이)에서 사용됨으로써 수출에 돌릴수 있는 물량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1277년 제노바 인들은 최초로 새로운 대형 갤리 선을 타고 지브롤터해협을 통과하여 포르투갈과 프랑스 해안을 따라 올라가 북해까지 항해를 완수했고, 브뤼주와는 짧은 운하로, 헨트와는 좀더 긴 운학로 연결되어 있던 담에 정박했다.
이탈리아 인들은 브뤼주의 경제적인 역할을 수출입과 생산으로부터 진정한 집산지-즉 상품뿐만 아니라 화폐까지 담당하는-로 실질적으로 변모시켰다. 그로 인해서 브뤼주는 직물업이 쇠퇴한 후에도 유럽의 금융거래소로서 존속했다.
13세기말...유대인, 그리고 후에 롬바르디아 인과 카오르 인은 본질적으로 전당업자로서 귀족들과 부르주아를 상대로 극도로 높은 이율(연리 30-40포센트)로 돈을 빌려주었다.
플랑드르의 직물업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이탈리아 인들은 그들의 자본을 다른 좀더 유리한 투자처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슬루이스의 수로 침적토화로 인해서 항구 이용이 불편해지면서, 이탈리아 인들은 행서지-따라서 대리인의 사무소도-를 동쪽의 안트베르페으로 옮겼다. 이곳은 흘수가 깊은 배에 적합한 항구였으며, 더불어 당시 프랑스가 아니라 독일을 관통해서 뻗어 있던 대륙 교역로의 획득에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Brulez and Craeybeckx)
1316-1317년의 기근
1348-1349년의 전염병에서 다른 장소들, 특히 이탈리아의 항구들은 플랑드르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희생을 겪었지만 다시 부흥했으며, 국제적인 교역에서 수세기 동안 활발한 역할을 좀더 계속했다.
이탈리아 회사에 의해서 축적된 금융자본은 예약 구매라는 형태로 지방의 산업에 대출되었다. 그러나 직물업이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자, 그 자본은 쉽게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다. 브뤼주의 상인들은 "수동적인" 대리인이 되었으므로, 점점 자발적인 결정을 내리고 결과를 통제했던 이탈리아 "다국적 회사들"을 제어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제노바가 최종적으로 굴복했던 14세기 말까지
(제노바는)1061년에는 샤르데냐와 코르시카의 이슬람에 대항하여 원정을 떠났고
1087년에 이도시(마흐디야:파티마 왕조의 구舊수도)를 단기간 점령했고, 공납을 강요했으며, ㄱ와 더불어 이슬람 통치자로부터 최초로-최후가 아니라-교역상의 특권, 즉 관세 면제를 얻어냈다.
11세기 말에 제노바 인은 사실상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했고
(베네치아는)1080년에 드디어 아드리아해 아래쪽을 통제하던 노르만 왕국의 봉쇄를 뚫고 지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베네치아는 비잔치움 제국의 함대를 구조함으로써 중요한 해로를 확보한는 것을 거들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1082년 비잔치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로부터 제국 전역, 그리고 트깋 기독교 세계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번영한 도시이자 중앙 아시아로 통하는 관문이었던 가장 중요한 도시 콘스탄티노플에서 말 그대로 완전한 교역 특권과 관세 면제를 보증하는 특별한 증서(금인칙서(를 수여받았다(Lane)
1187년에 살라딘은 십자군을 물리쳤으며, 이슬람 교드들은 티베리아스(이스라엘 북부 도시/역주), 야파, 아스칼론, 가자 그리고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을 재정복했다.
라틴 인(즉 이탈리아 인)의 무차별적인 대량학살이 발생했던 1182년에 분노가 폭발
13세기는 문화, 정치, 산업(특히 조선업과 수송 분야), 상거래에서 베네치아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제노바도 그에 못지않았았으며, 제노바가 패권을 쥐고 있던 북아프리카와 북서 유럽 지역-이 지역에서는 뤼벡보다 상파뉴에서 교역이 훨씬 더 활발했다-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경쟁자가 없었다.... 제노바는 13세기가 끝날 무렵에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서양과 브뤼주로 진출함으로써 그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제노바와 베니치아는 모두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와 공해상이나 본토의 방어를 위해서 과세 대신에 "공채"제도를 활용했다. 심지어 1200년 이전에도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공채제도를 발전시켰고, 그 제도에 의해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코뮌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13세기 동안에 베네치아와 피렌체에서는 강제적인 공채제도가 유행했는데,
13세기가 도래하지 이전에 베네치아에서는 콤멘다(commenda) 또는 콜레간차(colleganza)라고 불리던 하나의 변형이 발전해왔다.
1380년에 베네치아의 키오지아 섬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준비를 하던 제노바 인들이 결정적으로 패배함으로써 끝이 났다. 토리노 강화조약(1381)은 지중해 그리고 특히 오리에트 교역에 대한 베네치아의 독 점적 지배라는 유산을 남겼다.
이집트에서는 맘루크 술탄이 10년간의 공위 기간(1250-1260)을 거친 후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 제국에 도달하려는 제노바 최초의 진정한 시도가 1291년에 있었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비발디 형제의 선박이 일주에 성공했더라면, 제노바 인들은 두 세기 후 포르투갈인들이 성취하게 된 세계체제에서의 역할을 담당했을지도 모른다). 제노바가 북해 연안의 국가들, 즉 잉글랜드 및 플랑드르와 상업적인 해상 연결망을 확립했던 것 또한 13세기였다. 그 당시까지 이슬람 교도들이 지브롤터 해협의 통행을 얼마간 통제했을지라도, 제한된 수의 제노바 선박은 언제나 그곳을 통과했다. 그러다가 1293년에 카스티야-제노바 연합 함대에 의해서 이슬람 해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하자, 브뤼주와의 직접적인 교역은 정기적인 형태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베네치아가 다시 확장공사하기 시작한것은 1473년이었다. 제노바가 다시 확장공사하기 시작한것은 1461년이었다.
(제노바의)해군이 베네치아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한 사건-최초로 1378년과 1384년 사이에
이 도시들의 최초의 반응은 이런 더 작아진 시장에서 더 커다란 몫을 확보하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 사이의 사투가 확대되었고, 그와 더불어 "보호세"라고 불리는 비용도 증가했다(McNeill). 선박의 수용량 가운데 점점 더 많은 부분을 무기와 병사들에게 할해해야만 했고, 이는 수송비를 상승시켰다. 마찬가지로 선박과 화물은 파괴와 포획의 위험이 더욱 높아져갔으며, 이 또한 상품을 항구에서 찾는 최종적인 비용을 부풀렸다. 베네치아가 지중해 노선에 대한 실질적인 독저을 확립하고 나서야 비로소 교역이 더 안전해졌다.
동쪽으로 가는 중앙 노선이 쇠퇴함으로써 페르시아 만과 홍해 두 노선 사이의 오래된 경쟁에 파가름이 났다. 홍해가 그 후 수세기 동안 지배적인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바이바르스는 시리아를 재정복하기 위해서 사실 금장칸국의 제3대 칸이자 이슬람으로 개종한 최초의 몽골 군주였던 베르케와 동맹을 맺었다.
이집트를 다스린 노예 엘리트에게 지속적으로 새로운 병사들을 보급했던 것은 이탈리아 해상 국가들이었다. 봉건적 지위도 정치적 지위도 상속될 수 없고 계속 새로 재창조해야 했던 이 독특한 제도에, 이탈리아 인들은 그 체제의 강력함을 유지하는 데에 절대로 필요했던 인력을 공급했던 것이다. 그것의 대가가 바로 이집트에서 계속 교역을 할 수 있는 권리였다. 공교롭게도 이탈리아의 교역 국가들은 그들과 동방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을 봉쇄했고 운송되는 화물에서 매우 높은 비용을 거두었던 바로 그 국가(이집트)를 워조했던 것이다.
제노바 상인이 육로로 키아이에 갔다는 증거는 1344년이 마지막이었고,
맥닐(McNeill)은 흑사병이 몽골리아까지 직접 전파된 것이 아니라, 중국 내지에서 1331년에 시작했으며 거기서부터 육로로 그리고 나서 바다로 퍼져났다고 생각한다.
플랑드르의 직물 공업이 1320년대 말이면 고전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의 금융업계에서 경제의 수축(큰 파산 사건들을 포함하여)이 1330년대 말과 1340년대 초에 이미 시작되었다... 몽골 제국 내의 유럽 상인들과 선교사들에 대한 부분에서도 그들에 대한 언급이 1330년대 말이면 줄어들기 시작하고, 14세기 중엽에는 거의 없었졋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