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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남북전쟁(南北戰爭, American Civil War, 1861년∼1865년)
“남북전쟁은 국가를 만들기 위한 비싼 전쟁이었다.”
제임스 러셀 로웰
“남북전쟁은 이 나라에서 전에는 결코 없었던 것인 국가적 의식을 만들었다.”
우드로 윌슨 28대 미 대통령, 1915년 현충일 기념사 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은 1861년 4월 12일부터 1865년 5월 13일까지 아메리카 합중국과 아메리카 연합국 사이에서 벌어졌던 내전이다.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앵글로 아메리카 최후의 전쟁. 그리고 가장 많은 미국인이 죽은 전쟁. 미국 독립 전쟁 이후 미국사상 최대의 위기이자 기회. 미국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2번째이자 마지막 반란이며, 최후의 근대전이자 최초의 현대전이다. 양 군의 군복 색상에서 착안해 푸른 외투(북군) 대 회색 외투(남군)의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American Civil War(미국 내전) 또는 그냥 The Civil War(내전)이라고 부른다. 후자는 미국에서 주로 쓴다. The는 종종 생략하기도 할 정도. 그러나 영국에서는 찰스 1세와 의회가 싸웠던 내전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남부측에서 부르던 명칭은 주(州) 간 전쟁 War between the States. 좀 더 노골적으로 친남부적 관점을 보이는 사람들은 War of Northern Aggression(북부 도발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건 적반하장 식이라 보수적인 레드넥들을 제외하고는 잘 쓰이지 않는다. 한국에선 주로 ‘남북전쟁’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본에서도 그렇다. ‘미국 내전’이라고 해도 됐을 텐데, ‘보불전쟁’처럼 남군과 북군이 싸우니 같은 원리로 지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남부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미국 연방정부에서 부르는 공식 명칭은 The War of the Rebellion, 즉 ‘그 반란 전쟁’.
스스로 분열된 집안은 바로 설 수 없다. 나는 이 정부가 절반은 노예로, 나머지 절반은 자유민으로 살아가는 상태를 영속할 수 없음을 믿는다.
(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 I believe this government cannot endure, permanently, half slave and half free.)
에이브러햄 링컨,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상원의원 후보직 수락연설을 하며(1858년 6월 16일).
전문가들 (미국 남북전쟁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노예제가 전쟁 전의 남부, 남부 노예주들의 분리 그리고 전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이론이나 반론이 있지 않습니다.
휴스턴 대학교 에릭 발터 역사학 교수
여러가지 요소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요인은 노예제이다. 다른 요인도 있지만 부수적일 뿐이고, 노예제가 없었으면 저런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노예제는 연방 시작부터 뜨거운 감자였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노예제는 도덕적으로 사악한 것으로 인식이 나빠지고 있었으며, 미국 독립선언문의 영향으로 인간이 최소한 자유, 생명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사상이 당시 미국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노예제와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였다. 이 때문에 독립하자마자, 노예제의 수익성이 덜 좋았던 북부에서는 노예제 폐지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바탕으로 뉴저지 주를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북부 주들은 1850년대까지 노예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기 이른다. 하지만 노예제의 수익성이 더 좋았던 남부주는 상황이 달랐고 이 때문에 ‘3/5 협정’, ‘20년간 국제 노예무역 허용’등 각종 타협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부는 꾸준하게 노예제 폐지로 가고 있었고, 이에 담배 등 상품작물의 수익성이 떨어져가던 버지니아 등 북쪽의 남부 주들은 슬슬 노예제 폐지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덜컥 조면기가 발명되면서 이 상황이 바뀌게 된다. 면화는 수요는 많았으나 씨앗 때문에 수확을 해도 대량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가 없었는데 조면기의 발명으로 이 과정이 수월하게 변함으로써 엄청난 수익율을 보장하게 된다. 그러나 조면기 덕에 면화 수요는 빠르게 늘었고 면 수확은 여전히 노예가 했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게 되어 노예제가 존속이 되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기후조건 때문에 면화 농장은 점점 남서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조지아가 중심이 되었던 면화 농업은 다시 미시시피와 앨라배마 주로 주도권이 이동했고, 이후에는 루이지애나가 급부상했다. 이 5개 주가 당시 미국 면화 생산량의 3/4 이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미국의 면화 생산량이 당시 세계 면화 생산량의 3/4를 차지했고. 때문에 노예제하의 남부에서도 서쪽으로의 노예제 확장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면화 경작지의 확대를 위해서는 노예제도 역시 그를 따라서 확장되어줘야 했던 것이다. 때문에 붙잡아 놓고 일을 시킬 수 있는 노동력은 남부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농장들이 서쪽으로 이전해가더라도 역사가 오래된 남부 주(버지니아 등)들에서는 노예를 ‘생산’하는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기 때문에 노예제 폐지 이야기가 쏙 들어가게 된다.
두 번째는 노예 가격이다. 이 시기는 미국 남부를 제외하면 유럽 등 소위 근대화된 국가에서는 노예 무역이 끝장난 시기였다. 미국도 노예 수입은 이미 1808년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플로리다, 텍사스와 멕시코를 통한 불법 수입이 등장하였고, 이건 당시 주간 거래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가격 폭등에서 알 수 있듯이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이후 노예 생산 단계로 접어들어서야 노예 가격 폭등이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남북전쟁 시기까지도 노예 가격은 꾸준히 상승세였다.
이는 노예 수입이 대부분 끊겼다는 것이다. 이런 공급의 급격한 감소와 면화 산업의 발달이 더해지면서, 시장 원리에 따라 노예 가격이 꾸준히 치솟고 있었다. 담배 농업이 무너졌다가 면화 농업이 다시 각광받기 시작한 1800년에서 1850년 사이 노예 가격은 약 50달러에서 800~1,000달러까지 상승했다.
이후 갈수록 노예의 생산력보다 노예 자체의 가치가 좀 더 부각되고 있었다. 1850년대 무렵 노예들의 가치는 당시 기준으로 약 20억 달러 정도였는데, 이건 남부가 소유한 총자본의 약 1/4이며 연방 예산의 10배 정도였다. 면화 작물의 가치도 이것의 1/10 정도밖에는 안 되었다. 이처럼 노예는 비싼 재산이었고, 노예제 폐지는 그 재산을 통째로 증발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비싼 노예 가격 때문에 전쟁 직전까지도 남부에서 노예를 거느리던 사람은 백인들 중에서도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던 상위 5% 미만의 대부호들이나 하는 것이었고, 백인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대다수 중소 자영 농민들은 노예를 부린 적도, 부릴 일도 없었으나, 오히려 이 하위계층들이야말로 노예제 폐지에 가장 격렬하게 그리고 가장 끝까지 저항한 부류였다. 남북전쟁의 발발 원인에는 경제적 요인도 있었지만 정치적, 가치관적 문제가 더 중요했다.
이런 도덕적 논란은 당시 미합중국이 브라질과 스페인령 카리브 섬들을 제외하면 백인 문명권에서 유일하게 노예제를 굴린다는 것 자체가 큰 원인이었다. 초기에는 노예의 필요성에서 시작했을지 몰라도, 이것이 외부의 시선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흑인 노예들의 존재를 통해 자신들의 인종적, 문화적 우월성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도덕적인 부분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같이 당대가 배경인 소설들이다. 작중 핀은 친구인 흑인 노예가 도망나온 것을 보고 갈등하는데, 왜냐하면 도망나온 노예를 고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도덕과 신앙이 주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 시선을 신경쓰는 모범생도 아니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간섭 없이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을 좋아하는 부랑아인 핀이 결국 내가 지옥에 가겠다고 굳은 결심을 해야 친구인 도망 노예를 도와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 당시 남부의 도덕관이었다.
노예를 가진다는 것 자체로 부유함과 우월함의 상징이 되는 것이 이 시기 남부 백인 사회의 모습이었다. 앤드루 잭슨처럼 가난한 백인 남성이 돈 벌어서 플렌테이션을 사고, 노예를 부리는 것이 이 당시 남부의 ‘아메리칸 드림’이였다. 게다가 이 시기 미국 남부는 유럽 귀족 사회를 모방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대부호들은 자신들과 노예를 통해 유럽식 귀족과 평민을 구현했고, 이런 상류층의 문화는 하류층으로 전파되었다. 실제로 남부를 지배하던 대농장소유주들과 이들과 밀착한 남부교회들은 노예를 부릴 꿈도 못 꾸었던 가난한 백인 자영농들에게 아무리 못나고 가난해도 백인은 깜둥이보다 훨씬 우월하다라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주입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남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가난에 시달리던 백인자영농, 빈민들의 분노가 대부호들을 향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장치였다. 따라서 북부에서 노예제 폐지론이 득세하자 남부 엘리트들은 이걸 방치하면 자기들의 사회적, 문화적 우위를 완전히 상실한다고 판단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를 주입당했던 남부의 자영농들, 하류층들은 정작 자신들은 지킬 노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의 막바지까지 가장 격렬하게 싸운다. 그래서 미국 역사학자들은 전쟁 전 남부사회를 ‘노예 사회 (Slave Society)’라고 정의한다.
정치적으로 민주당과 공화당&휘그당의 대립 구도도 하나의 요인으로 볼 수 있다. 백인 남성이라면 1인 1표라는 규칙이 노예주들에게는 조금 다르게 적용되었다. 노예 1명당 3/5표로 계산이 되었고, 북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남부는 이를 통해 북부를 견제해나갈 수 있었는데 공화당이 노예제를 폐지하여 해방 노예 중 남성에 대한 투표권이 부여되면 공화당 지지 세력이 남부에서 강해지며 민주당의 지역 지지 기반을 잃을 수도 있다는 판단도 존재했다. 실제로 노예제 폐지 후, 해방 노예들의 지지와 표는 공화당으로 향했다.
미국의 정치의 가장 큰 장점은 타협이다. 건국 초부터, 코네티컷 타협을 통해 국가의 기틀이 정해졌다. 노예제라는 명분 아래 발생한 남북전쟁은 확실한 해결책보다는 문제를 빠르게 봉합하려는 정치적 타협들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이처럼 남북전쟁의 배경은 근본적으로 노예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예제로 인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상황들을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부족하다.
남북전쟁 종결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남부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남북전쟁에 노예제는 구실일 뿐이고 다른 배경이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를 Lost Cause라 한다. 주로 주장되는 것은 남부에 불리한 관세 문제나 연방정부의 주의 권리 침해 등이 있다.
그러나 전쟁 바로 전 당시 미국 관세는 1830년대 이후로 가장 낮았으며, the Morrill tariff조차도 노예주 민주당원들이 의원직을 사임해서 통과된 것뿐이다. 만약 저 민주당원들이 그대로 남았으면 그대로 통과 못 했고 타협안이 나왔을 확율이 높으며, 민주당원들조차도 연방정부가 지속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저들이 정권을 잡았다면 어느 정도 조정은 불가피했다. 게다가 1830년대 관세분쟁이 증명한 것처럼 사우스 캐롤라이나같은 매우 소수주들을 빼고 분리독립을 추구할 정도로 큰 불만은 아니었다. 남부연맹 부통령인 알렉산더 스테펜은 관세는 메사추세츠와 타협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님이라고 했다.
‘주 정부의 권리’나 ‘남부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라는 것도 ‘Lost Cause’미신이다. 일단 남부 노예주들은 1850년 도망 노예법을 밀어붙일 때 저항하는 북부 주들의 '주 정부의 권리'에 별 신경 안 썼고, 결국 이들이 ‘주 정부의 권리’를 따질 때는 거의 주에서 노예주를 마음대로 하는 권리를 의미했기 때문에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노예제였고,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차이’도 결국 근본적으로는 노예제 때문 이였다.
후대 컬럼비아 대학을 중심으로 한 친남부 역사학자들은 더 나아가 "남북 전쟁은 노예제를 두고 남부가 일으킨 반란이 아니라 각 주의 권리를 짓밟기 위해 북부 연방 정부가 시작한 전쟁이다"라는 극단적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면 막상 전쟁 이전과 당시, 직후에서 남부 동맹측 주요 정치인, 언론인, 장군들의 발언들을 조합해 보면 남부 동맹의 대의는 명백하게 노예제와 백인 우월주의의 사수였지, 주의 자주권 따위 거창하고 세련된 명분이 아니었다. 노예제와 상관없이 주의 자주권이 문제였다면 앤드루 잭슨 시절 사우스 캐롤라이나가 연방 탈퇴 드립을 쳤을 때 같은 남부 주들이 전부 다 이를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부, 특히 영국과의 교역에 깊게 의존하던 뉴잉글랜드 지방의 주들도 미영전쟁 당시 주의 자주권 드립을 치며 연방의 전쟁에 비협조적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뉴잉글랜드가 반란을 일으키고 독립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관에 비판적인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이 사관이 노예제 문제를 희석해 남부동맹을 미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 제퍼슨 데이비스 같은 남부 인사들의 사후 변명과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에드워드 폴러드, 더글러스 프리먼 등 친남부적 역사학자들이 확립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국가의 탄생 같은 프로파간다성 대중 매체를 통해 재생산된 관점이라 주장한다.
남북전쟁 전의 타협과 무산
노예제로 인한 남북갈등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매우 심해졌다. 노예제의 도덕적 취약성 때문에 노예주 의원들은 당을 가리지 않고, 노예제 대한 국민들의 청원을 미국 국회에서 토론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는 횡포를 부렸고("Gag rule"), 노예제 반대/폐지론이 담긴 신문들을 배포하는 것을 남부에서 근본적으로 막았으며(언론의 탄압), 냇 터너(Nat Turner)의 반란 이후로는 노예 관련 법들을 더 잔혹하게 강화했고, 노예제와 노예제를 찬성하는 의원을 비꼬며 비판한 찰스 섬너(Charles Sumner) 의원을 국회의사당 내에서 기습적으로 습격하여 지팡이로 거의 죽도록 패는 민주주의와 정면 대치되는 정신나간 짓을 했으며, 북부 주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1850년 탈주노예법 같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탈주 노예를 잡기 위해 온 노예 사냥꾼들에게 협력할 것을 강제하는 등 북부 자유주들에 대한 남부 노예주들의 횡포가 너무 심했다. 한편 남부주들은 냇 터너(Nat Turner)의 반란같은 노예들의 저항 때문에 항상 노예반란을 매우 두려워 했고, 북부 노예 반대론자/폐지론자들이 이런 노예반란을 부채질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북부 자유주들을 매우 증오했다. 프레드릭 더글라스 같은 도주 노예출신 흑인 노예 폐지론자들의 대두와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같은 반노예제 문학작품들의 인기 등으로 노예 폐지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노예제에 대해서 점점 더 방어적으로 변해간다.
가장 큰 문제는 자유주와 노예주의 숫자다. 미국은 웬만하면 북부 자유주들과 남부 노예주들의 숫자를 맞춰서 정치적 밸런스를 유지해 왔었다. 이 때문에 미주리 협정이 채결됐는데 한마디로 미주리 주는 노예주로 하되 미주리 북쪽은 자유주, 남쪽은 노예주로 하자는 것이 그 골자였다. 자유주들이나 노예주들이나 불만이 대단했지만, 여기까지는 그래도 넘어갔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등 서부주들의 가입으로 저울이 급속도로 자유주들에게 기울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몇 년 뒤 남부 노예주들과 북부 민주당은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을 통과시킨다. 한마디로 미주리 북쪽은 자유주로 하기로 해놓고, 캔자스는 투표로 자유주가 될 것인지 노예주가 될 것인지 결정하자는 것이였는데, 북부 주들은 이것을 남부 노예주들의 배신으로 여겨 매우 분개하였다. 그럼에도 캔자스에서는 노예제가 별로 인기가 없었고, 그 때문에 남부 주들에서 노예제 찬성론자들이 적극적으로 캔자스에 이민을 가서 노예제 회의론자/폐지론자/반대론자들을 공격한다. 이 때문에 로렌스 학살(Lawrence Massacre) 등 노예제 찬성론자들로 인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나게 되고, 이에 분노한 자유론자들이 반격을 하는 등 노예제 때문에 캔자스는 사실상 내전상태에 돌입한다. 이것이 ‘Bleeding Kansas’다.
게다가 원래는 평화로운 노예제 폐지론자였으나, Bleeding Kansas, 찰스 섬너(Charles Sumner) 의원의 피습사태등을 지켜보고 유혈혁명만이 노예해방의 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존 브라운(John Brown)이라는 사람이 아들들과 지지자들을 규합해서 연방정부의 무장창을 습격해서 흑인노예들을 무장시킬려고 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남부 노예주들은 ‘북부 자유주들이 흑인 노예들을 자극해서 인종 대전쟁을 이르켜 우리를 다 죽이려고 한다.’라는 의심병이 더 심해지고, 북부 자유주들은 ‘중앙정부도 노예제 편이다. 정부를 갈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어 간다.
이에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Dred Scott v. Sandford’ 판결을 내리는데, 판결 내용을 요약하면 ‘미국 내에서 흑인은 남의 자산은 될 수 있어도 시민이 될 수가 없고, 미국은 헌법적으로 노예를 인정하니, 미국 연방정부가 연방영토에 노예제를 금지할 수 없다. 노예주들은 노예를 노예주든 자유주든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다.’ 이 판결은 일부 북부 주에서 흑인을 주 시민으로 인정한다는 걸 무시한 처사였으며, 미국 연방이 노예제를 일부 연방영토 및 해상에서 금지한 사례도 무시했고, 미국은 그냥 노예 국가라는 걸 연방대법원이 인증한 꼴이 되어 버렸으므로 자유주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불만을 근거로 남부 노예주들은 북부 자유주들 역시 노예제에 대해서 중앙정부에 굽힐 의사가 없다는 걸 확신한다.
이렇게 북부 자유주들과 남부 노예주들이 반목하면서 대망의 1860년 대선이 열린다.
사실상 공화당 vs 민주당이었는데 젊은 공화당은 사실상 북부 지역당이였다. 정확하게는 ‘당’이라고 보다는 망한 휘그당, 반이민자 성향의 Know Nothing, 반 노예제 Free-Soiler 등 서로 성향이 다른 정치집단들이 단지 ‘반 노예제, 남부 노예주들의 횡보 타도’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연합정당(Coalition)에 가까웠다. 공화당은 미헌법이 중앙정부가 노예제가 현재 이미 존재하는 지역들은 간섭할수 없다는 걸 인정 하되, The Northeast Ordinance 등 사례를 들면서 연방정부가 아직 주정부가 성립되지 않은 연방정부의 땅들에 대해서는 노예제를 폐지할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반 노예제 당으로써 현재 연방정부 땅에서는 노예제를 폐지하겠다라는 것을 공약으로 삼았다. 즉, 공화당의 목적은 노예주들이 정치적으로 앞으로 우위에 설수 없게 정치적 사형선고를 내림과 동시에 장기적으로 노예주들을 자유주들로 둘러싸서 노예주들이 어쩔수 없이 스스로 노예제를 포기하도록(‘put it in course of ultimate extinction’) 만드는 것이였다.
한편 민주당은 북부와 남부 간에 의견 통일이 안 됐다. 북부 민주당은 노동자 당이자, 아일랜드 이민자들 및 해외 이민자들 당이였다. 이들은 노예제에 대해서 소극적 지지 혹은 현상유지에 가까웠고, 관심은 대륙횡단 열차 등 경제적인 곳에 더 많았다. 그러나 노예제를 선거에 써먹지 않은 건 아니라. 공화당을 '흑인 공화당'이라고 비난하고 집요하게 북부 백인들의 백인 우월주의에 호소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남부 민주당에게는 이것조차 부족했다. 남부 민주당, 실질적으로 강경 노예제 찬성론자들이자 남부주 분리독립론자들(‘Fire-Eaters’)은 북부 민주당의 소극적 지지가 아니라 완전하고 적극적인 노예제 지지를 원했다. 그런데 남부 노예주들의 횡포가 너무 심해서, 아무리 보수주의라고 하더라도 ‘자유주의’ 사상이 팽배하던 북부에서는 적극적인 노예주 지지는 인기가 없었다는 것이였다. 이 때문에 민주당의 패배는 예정되어 있던 수순이었다.
이렇게 공화당의 링컨이 남부주에서 선거인단 단 1명도 얻지 못 했는데도 불구하고 대선을 이기자 남부주들은 권력의 추가 남부에서 북부로 넘어갔음을 느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공화당 같은 북부의 공세에 노예제가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느꼈다.
이에 남부주들은 링컨이 대통령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적극적으로 연방정부의 조폐국에 있던 금을 훔치고, 연방정부의 항구와 요새들을 점령하고, 친 연방정부 성향의 정치인들을 폭력으로 쫓아내면서, 군대를 모집하는 등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이에 링컨은 첫 번째 취임식 연설에서 남부 노예주들의 명백한 반란활동들은 무력을 불사해서라도 진압할 것을 경고하면서도, 헌법적으로 본인은 남부 내의 노예제에 대해서 간섭할 생각이 없으니 연방으로 돌아오라고 남부 노예주들을 설득하려 시도하나, 결국 같은 취임식 연설에서 링컨은 연방 영토 내의 노예제 폐지에 대해서 물러날 생각이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써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남부 노예주들이 원하는 건 최소한 연방영토에서 노예제가 허용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 자기들처럼 북부도 스스로 노예제 문제에 대해서 언론 통제하는 걸 원했다.
이 두 포지션은 양립이 불가하였고, 남부 연맹측이 연방정부의 영토였던 섬터 요새를 폭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된다.
미주리 협정(1820)
이런 양측의 갈등을 중재한 것이 남북전쟁을 적어도 50년 이상 늦췄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이었다. 클레이는 1819년 메사추세츠 주의 분할, 자유주로서 메인 주의 독립, 1820년 ‘미주리 협정’을 통해 위도 36도 30분선을 중심으로 남쪽은 노예주로, 북쪽은 자유주로 결정하면서 양측간 비율을 1:1로 맞춰 갈등을 수습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84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 이후 텍사스, 캘리포니아, 유타 주 등의 새로운 주가 편입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새로운 주는 남측에 위치했으나 노예제가 금지된 자유주였고 이들의 미국연방 가입으로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남부의 반발로 연방 붕괴의 조짐까지 보인다. 이때 백가쟁명으로 각종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는데, 헨리 클레이는 30년 만에 소위 대타협(Great Compromise, 1850)을 제안한다.
클레이의 안은 다음과 같다.
1)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 편입한다.
2) 유타 주와 뉴멕시코는 주민투표에 의하여 노예주의 유지 여부를 결정한다.
3) 워싱턴 D.C.의 노예주는 유지하되, 노예 시장을 없앤다.
4) 36도 30분 이북 텍사스의 영역을 뉴멕시코 준주에 양도하고, 정부는 그 대가로 텍사스 주에 멕시코와의 전쟁에서부터 나온 비용을 지불한다.
5) 도망노예단속법을 강화한다.
그러나 5항에서 다시 갈등이 발생한다. 강화된 도망노예단속법으로 소위 노예사냥꾼들이 등장하면서 추노 자유주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가택수색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이에 북부주들은 체포당한 노예에게 재판받을 권리를 줘 시간을 끌 수 있게 하는 주법을 만들어 반항한다. 거기다 작가 해리엇 스토우도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소설로 노예제의 비도덕성을 꼬집었고, 소설이 널리 알려지면서 남북전쟁을 가속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양측의 갈등은 스티븐 더글러스가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을 제안하게 되며 다시 불거진다. 미주리 협정에 따라 준주에서 주로 승격될 캔자스는 자유주로 편입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더글러스는 인민주권의 논리에 따라 각 주의 주민들이 노예제 존폐여부를 투표로 결정하게 하자는 내용을 이 법안에 넣었다. 각 주의 주민들이 인민주권에 따라 스스로 투표를 하여 노예제의 존폐여부를 결정하게 해서 골치아픈 노예제 문제에서 손을 뗀다는 게 목적이었지만, 이 때문에 더글러스는 북부에서 큰 비난을 받았다. 북부는 이제 아예 노예제의 완전 폐지를 주장하고 있었고 또 만약 투표로 캔자스가 노예제가 될 경우 대타협의 36도 30분 이북에 노예주가 떡하니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1850년의 협정이 무효화되고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이 통과되면서 또다른 갈등이 시작된다.
바로 캔자스를 노예주로 만들기 위하여 바로 옆 주였던 미주리에 사는 노예 주인들이 대거 캔자스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이를 막기 위해 이번에는 북부의 노예 해방운동가들이 대거 캔자스로 이동하며 맞불을 놓았다. 이들 모두 무장을 한채 왔고 개중엔 심지어 대포를 끌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양쪽 모두 개표 조작과 협박을 서슴지 않았고, 결국 미주리 상원의원까지 합세해 부정선거를 한 끝에 캔자스는 노예주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캔자스 땅의 대부분의 농부들과 주민들은 노예주의자가 아니었다. 결국 또 문제가 터지는데 캔자스가 노예주가 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자유주의 마을 로렌스가 노예제 지지자들에게 불태워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에 대한 복수로 급진 해방론자였던 존 브라운과 그 아들들이 노예제를 지지하는 농부 5명의 손을 자르고 칼로 가슴을 찔러 죽이는 사건이 터졌고 사실상 캔자스는 피흘리는 캔자스(Bleeding Kansas)라 칭하는 준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이때 미주리 협정을 파기하는 판결이 연방대법원에서 내려졌는데, 이것이 바로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Dred Scott v. Sandford) 판결이었다. 이 판례의 당사자였던 드레드 스콧(Dred Scott, 1795~1858)은 흑인 노예로 버지니아 주 출신이었다. 본래 그를 소유하고 있던 피터 블로(Peter Blow) 가문은 후에 앨라바마 주로 이주했으나 농사에 실패해서 다시 미주리 주로 이주했고 스콧은 그곳에서 미군에서 복무중이던 의사 존 에머슨(John Emerson)에게 팔렸다. 에머슨은 군 복무중이었으므로 자주 거주지를 바꿨고, 자유주였던 일리노이, 위스콘신 준주(현재의 미네소타 주)에서 장기간 거주했기 때문에 자유를 달라는 청원을 낼 수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에머슨이 노예주였던 미주리 주로, 그 다음에는 루이지애나 주로 전출되었고, 이때 스콧은 결혼했다. 에머슨도 아이린 샌드포드(Irene Sanford)와 결혼했는데 에머슨이 1843년에 사망하면서 아내였던 아이린이 모든 재산을 상속받았다. 스콧과 그 부인도 마찬가지였는데 처음에 스콧은 자신에게 자유를 주면 현 시가로 7,000달러인 300달러를 지불하겠다고 했으나 거부당하자 1846년, 지역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세인트루이스 순회법정에 소송을 제기했다. 1847년에 진행된 재판에서는 스콧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왔으나 전문 증거가 나왔기 때문에 재심이 결정되었다. 1850년, 미주리 주 법원에서는 스콧과 그 부인이 자유주인 일리노이 주와 위스콘신 준주에서 오랫동안 거주 중인 때 불법적으로 노예 상태에 있었으므로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판시하였으며, 아이린은 이에 불복하고 상소하여 미주리 주 대법원에서는 1852년 한 번 자유면 언제나 자유(once free always free)가 아니라고 하여 하급 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28년간의 판례도 뒤집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미주리 주의 법에 따라 에머슨 농장의 권리는 아이린의 남자형제였던 존 J.A. 샌드포드(John F. A. Sanford)에게 있었고, 샌드포드는 뉴욕시민이었다. 따라서 스콧의 변호사들은 관할권이 다르다는 근거로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하여 스콧은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 지방법원에서 패소하자 다시 상소를 하여 연방 대법원까지 갔으며 이것이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 사건. 연방 대법원은 노예는 시민이 아니므로 고소할 권리조차 없으며, 비록 북부주가 자유주라고 하나 이것은 개인의 재산을 침해하는 권리이므로 무효이며 미주리 협정 자체가 무효라고 7-2로 스콧의 패소를 판결했다. 이 판결은 존 마셜 대법관이 마버리 vs 매디슨 사건에서 최초의 위헌법률심판을 내린 이후 대법원이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의회의 권한을 무시한다는 문제가 불거져서 무려 50년 동안 위헌 법률심판이 벌어지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판결이었기 때문에 충격이 엄청났으며, 연방 대법원의 판결 중 역사상 최악의 판결로도 손꼽힌다. 스콧과 부인은 판결에 따라 아이린에게 돌아가야만 했다. 대법원장과 다수의견에 참여한 대법원 판사들은 이 판결이 지긋지긋한 노예제 논쟁을 종료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생각했지만, 남부는 이 판결을 들고 기세등등하게 북부를 공격했고, 북부는 애초에 시민이 아닌걸로 판결을 냈으면 거기서 끝이니 다른 결론은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북부와 남부의 노예 폐지론자와 존속론자 간의 갈등을 가속화시켜 전쟁 직전까지 상황을 악화시킨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남북의 대립이 악화되면서 이전까지는 비교적 이성적으로 타협을 시도하려고 했던 정치인들마저 분열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사건이 1856년 상원의회에서 일어난 찰스 섬너 의원의 구타 사건으로, 남부인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 하원 의원 프레스톤 브룩스가 상원으로 난입하여 자신의 친척인 앤드류 버틀러 상원의원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북부인 매사추세츠 출신 상원 의원인 섬너를 지팡이로 무자비하게 구타한 것이었다. 이때 남부 출신 상원의원들은 주위를 둘러싼 채 서로 희희낙낙거리며 구경했으며, 브룩스와 함께 입장한 동료 하원의원들은 권총으로 다른 의원들을 위협하는 등 의회마저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다. 섬너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의 상황에 이르렀고, 이후 약 3년 동안 공직을 수행하지 못한 채 혼수상태에 빠졌다. 브룩스는 이후 섬너의 동료 앤슨 벌링게임의 도발에 넘어가 결투를 신청했다가 갑자기 시시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결투를 거부하여 망신당하고 스스로 정계에서 물러난 뒤 곧 죽는다. 섬너는 남북전쟁 이후 남부를 벌하자고 주장하는 급진 공화당의 핵심 인물이 된다.
상원의장 각하, 저는 미시시피 주가, 그녀의 주민들이 모여 내린 엄숙한 결단에 의거해, 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확보하였음을, 의회에 공표하기 위하여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I rise, Mr. President, for the purpose of announcing to the Senate that I have satisfactory evidence that the State of Mississippi, by a solemn ordinance of her people in convention assembled, has declared her separation from the United States.)
제퍼슨 데이비스, 미국 의회에서 미시시피 주의 연합 탈퇴를 선언하며(1861년 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