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아, 시월아!
2018. 11. 금계
우리 집 옥상에서 바라본 양을산 하늘
왜 시월을 상달이라 부르는고. 날씨 좋고 경치 좋고 살기 좋으니 상달이지.
무지무지하게 더웠던 여름이었지만 그 덕에 먼지가 범접하지 않았다던가.
천고마비의 계절,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우러러 본다.
시월아, 시월아! 너는 어찌 이리 찬란해서 나를 슬프게 하느냐.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짧은 자의 비애를 아느냐.
시월아, 저 푸른 하늘을 천 년 만 년 우러를 수 없는 자의 한숨이 들리느냐.
팔영산의 여름 - 수묵담채 - 이범수
특히 팔영산 그림이 왈칵 반갑네.
왼쪽 높은 봉우리 너머에 나 근무하던 학교 있었네.
벌써 48년 전 이야기가 되어버렸네.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뛰놀고, 문저리들은 수문 언저리에서 놀았지.
문저리 낚시광이던 내 별명은 문저리 조 선생이었지.
지난여름에 열렸던 이범수 선생의 전시회 도록을 들여다보네.
십 년 가까이 신명에서 해직당해 싸우던 사람의 아픔은 저 그림 어느 구석에서도 보이지 않네.
그의 복직과 무사한 정년퇴직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네.
어머님 요양병원에 들렀다가 전남대 용봉탑을 찾았네.
인문대 거리에는 김남주 기념홀 건립 추진 포스터가 나붙었네.
나와 동갑! 똑똑한 사람은 일찍 죽는 법!
학교에서 빨리 돌아와 소 풀 뜯겨라. 늦게 오면 다리몽둥이 부러버릴란께.
시인의 아버지 말씀이 귀에 쟁쟁하네.
전남대학교 호수! 나는 이 학교를 안 다녔지만 이 호수를 끔찍이 사랑한다.
언제나 고즈넉하고 안온하고 넉넉하고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흙길을 걷는 이 플라타너스 거리는 단연 일품이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김현승)
성묘가 10월로 늦어졌네.
가족이라 해도 산소가 아니면 뿔뿔이 흩어져 함께 모이기 어렵네.
사진 속 얼굴들이 10년 전보다 훨씬 늙수그레하네.
태평사는 태평할까.
성묘 끝나고 가까운 태평사에 들러보았네.
태평사로는 유난히 태평스런 가을볕이 쟁강쟁강 쏟아졌네.
김 선생 모친상, 장지까지 따라갔네.
곡성군 삼기면, 김 선생 고향 언저리.
올해에도 조물주 은총이 깊어 따스한 햇볕을 흡족하게 퍼부어 내렸음을
저 노란 벼와 벼 베어낸 그루터기에서 역력히 느꼈다네.
마을 동각 옆 유난히 하얀 교회 탑이 참 시골스러워 보였네.
해직 동지가 왜 동지인가, 동지라면 의리가 있어야제.
셋이는 장례식 첫날 새벽 세 시까지 화투를 치고,
왼쪽 문 선생은 그 다음날도 장례식장 술에 취하고,
오늘은 또 사진 찍어준 고 선생까지 넷이 장지에 따라왔네.
장지에서 점심 먹고 지리산 달궁으로 갔네.
그 우울했던 해직 시절,
우리는 여름만 되면 온 가족을 더불고 달궁으로 기어들어
부어라 마셔라 웃고 떠들며 헛헛함을 달랬지.
청산녹수는 변함이 없어 여전히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울창한 나무들은 슬슬 단풍으로 치장할 준비하고 있었네.
30년 전에도 이 식당에서 먹었을까.
원조 토종흑돼지에다 삼 년 묵은 묵은지, 산채정식에 산약초 백숙,
우리가 찾아간 달궁식당에는 먹고 싶은 것들도 참 많았네.
점심을 먹은 뒤라 더덕구이 한 접시에 소주를 마셨네.
그러고 보니 동지들이 함께 무리지어 놀러 다니던 때가 벌써 30년이나 흘렀군.
더덕구이에 곁들인 묵은지와 지리산 온갖 잡꿀을 탄 커피가 별미였네.
성삼재에서 바라본 지리산, 어머님 품속처럼 포근한 지리산,
억새꽃이 가벼이 흔들린다. 지수화풍, 지수화풍, 화엄세계, 대동 세상.
햇볕은 만물을 살찌우고, 바람은 삼라만상을 움직인다.
은어회를 빼놓고 섬진강 압록을 논하지 말라.
일 년에 몇 차례씩 은어를 먹지 않고는
입안의 기강이 해이해진다.
저녁은 압록 사계절 식당에서 은어회와 참게탕을 먹었다. 술도 한 잔 걸치고.
쫄깃한 은어회와 고소한 참게탕이 아주 그냥 죽여줬다.
30년 전 나는 술만 취하면 지리산 언저리에서 고성방가를 했었지.
“꽃 한 송이 꺾어다가 누구한테 드릴까요,
사랑하는 양순 씨에게로.......“
뜻 맞고 분위기 맞는 퇴직 선생들끼리 모임을 만들었지.
그 이름도 거룩한 화백회(화려한 백수 모임).
이번 모임에는 여덟 명만 참석하고 네 명이나 빠졌네.
늙으니까 빠진 사연도 가지가지.
몸이 불편한 두 사람, 사모님 모임에 따라간 한 사람,
또 한 사람은 서울에서 손자 손녀 돌보느라고.
내소사 입구 역시 가을볕이 푸짐하기도 하여라.
참말로 여행 다니기 좋은 날씨로구나.
내소사 뒷산은 울뚝불뚝한 바위들이 볼 만하여라.
오메, 귀엽기도 해라!
유치원생들이 선생님 따라 졸랑졸랑 내소사까지 소풍을 나왔네.
나는 1951년 그 전쟁 통에 나주교회 유치원을 다녔어.
살기도 어려운데 정말로 대단한 부모님이셨지.
유치원생들을 볼 때마다 고마운 부모님이 생각난다.
내소사 절 마당 거목들도 차츰 노란빛으로 바뀌고 있네.
옛적에 내장사, 송광사 단풍 구경 다니던 추억이 새롭네.
전 선생의 설명이 길어진다. 꽃대 하나에서 꽃 하나씩 피면 구절초, 꽃대 하나에서 비어져 나온 작은 가지마다 꽃이 피면 쑥부쟁이. 나는 무식한 놈이라 도통 구별이 어렵다. 안도현 시인한테 절교를 백 번 당해도 싼 놈이다.
무식한 놈 (안도현)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다음 호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