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런 단계를 거쳐서 마침내 그 위로 뻗는 가장 간단한, 위로 이렇게 잎이 있고 밑에 뿌리가 있는 이 본(本)이라는 모습으로 와요. 그리고 우리가 보는 암각화 나뭇잎에서 처음에는 암각화이니까 색이 없었겠지 하지만 색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일부 암각화에서는 색도 버리고, 그 다음에 더 가다가 보면 수많은 잎사귀도 버리고 그랬던 거죠. 처음에는 뿌리를 생각지도 못했죠.
이 다양한 단계에서 나중에 이 뿌리라는 ‘본(本)’ 자를 만들기 위해서 7천 년이 걸린 거예요. 이렇게 하나의 작은 글자도 7천 년의 역사로 이루어져 있는 거죠. 그 7천 년 사이에 사람이 엄청 고민했겠죠. 그러니까 엄청 단순화시켜 보는 거예요. 더 이상 단순화시킬 수 없는 경지로까지 단순화시켜 본 거죠.
심지어 한자에서 사람 인(人)자를 이렇게 그리는 것은 팔하고 다리만 이렇게 직립 모양으로 그린 건데요. 처음에는 사람의 머리도 그리고 눈도 그리고 코도 그리고 팔다리도 다 그렸다가, 눈 코 없애고 머리는 단순화시켰다가 손가락 같은 것도 단순화시켰다가 그렇게 해서 마침내 여기 人(인)까지 오는데, 이렇게 다리도 하나로 팔도 하나로 해서 그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데까지 오는데 무려 9천년이 걸려요. 그러니까 9천 년 동안 놀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엄청난 고민이 누적돼서 하나의 상징 기호가 만들어진 거예요.
특별한 경우를 새겼을 암각화의 문자
이걸 보면 옛날 분들이 엄청나게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어요. 실제로 암각화 같은 게, 신석기 또는 구석기 시대 때 돌에 뭘 새기려면 쉽지 않았을 것 아니어요.
비록 그것이 일상생활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 일상생활의 모습을 가볍게 볼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서 고래가 나오고 사냥을 하는 모습이 나왔다 그러면, 그 사냥하는 모습이 당시 구석기인들에게는 엄청 어렵거나 신석기인들에게도 엄청 어려운 거예요. 감히 토끼도 아니고 멧돼지 같은 걸 잡으러 다니는 것이 보이죠.
심지어 어떤 암각화에는 검치호(주-고양이과의 마카이로두스아과)는 뿔이 길게 나와 있고 힘은 별로 없는 대형 고양이인데, 이 뿔만 세 개 나와 있는 검치호를 잡기도 하고 막 이러거든요. 그런데 심지어 더 큰 동물도 사냥해요. 일상적으로 그걸 본 사람들은 “아!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사냥하고 거기서 먹이를 구했나 봐!” 그러거든요. 그런데 아니거든요. 물론 그랬죠. 그런데 그것은 정말로 특수한 상황에서 그렇게 잡았던 거예요. 일상생활에서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냥 나가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요. 그래서 두세 명씩 짝을 이뤄 분산돼서 작은 짐승 잡는 게 일상이죠.
그런데 마을에 회의가 있고 어떤 잔치가 있고 요즘으로 치면 축제가 있고 이러면 큰 동물 하나 잡아와야 되는 거죠. 그때 잡는 거예요. 일상적으로 잡았던 게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 이 일은 기념비적인 일이니까 암각화에 새겼던 거죠.
일상적으로 늘 했던 사냥을 그렸다 거나, 그들의 일상생활을 보여준다가 아니라,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특수하게 강조를 해서 보여줘야 되는 행사 같은 게 있을 때 그 일을 기록에 남긴 거죠.
굳이 비유하자면, 이탈리아 노래 중에서 모든 성악가들이 부르는 거 있죠. 산으로 통통통 올라가는 궤도 열차가 있죠. 이걸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푸니쿨라 또는 그게 왕복으로 두 줄로 돼 있으면 푸니쿨리 등으로 단수형이냐 복수형에 따라서 다를 텐데요. 그걸 만들고 노래까지 지었잖아요. 그 궤도열차를 조성하고 나서는 나중에 일상적으로 탔겠죠. 이미 만들었으니까요. 사냥도 매번 일상적으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푸니쿨리나 푸니쿨라처럼 특수한 일이 있었던 거죠.
(주-"푸니쿨리, 푸니쿨라"(이탈리아어: Funiculì, Funiculà)는 1880년 루이지 덴자가 작곡하고 피피노 투르코가 작사한 나폴리 음악이다. 이 음악은 1880년 베수비오산에 건설된 최초의 강삭철도(Funicolare)를 기념하기 위해 작곡되어 바로 그 해 선보였다)
요즘 치면 잠수함 하나 만들어 갖고 SLBM을 쏴 올릴 만큼 뭔가를 했거나, 나로호를 쏴 올렸거나 그랬으면 암각화에 새길 일이 생긴 거예요. 굉장히 중요한 행사를 했던 것이지 일상적으로 매일매일 일기 쓰듯이 암각화를 할 수는 없는 거죠.
지금 전 세계에서 보고되고 있는 암각화로 인정되는 것이 3만 4천에서 5천 건 정도 돼요. 그 중에서 공개가 돼 있는 것은 7천 건 정도 되고 유의미하게 해석이 가능한 것은 한 5,400건 정도 돼요. 제가 분석한 건 5, 400개예요. 그런데 나머지 부분은 보고를 안 해요. 자기가 다 해석한 다음에 논문 하나 써서 자기 업적 올리고 나서 보고하는 그런 이상한 습성은 학계에 어디에나 다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암각화를 발견했으면 얼른 사진 찍어 갖고 공개해야 될 텐데요. 그것을 자기가 평생 잡고 해서 해석될 게 아니고 중지를 모아야 되는데 안 되는 거죠. 아무튼 옛날 사람들도 생각들을 많이 했다는 거예요.
오행의 경우
예를 들면 오행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에 오행이라 하니까, 순서야 어찌됐든 간에 물이 있고 불이 있고 쇠가 있고 흙이 있고 나무가 있고 그렇게 붙여요. 그러니까 이 오행을 물이면 물, 불이면 불로 그렇게 이해를 하는 거예요. 제가 늘 얘기를 비유해서 말하고 있는데, 오행은 도서 분류법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도 이러 이런 것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이걸 쪼개고 쪼개고 다시 쪼개고 하면, 생기고 머물고 허물어지고 다 흩어지는 걸 알아요. 그럼 ‘뭘로 흩어졌을까?’에 대한 고민이 왜 없었겠어요? 그 고민도 역시 7천 년 또는 그 이상 있었을 거예요.
우리에게 처음에 차가 있었고 차나무에는 그 이름이 안 붙여져 있었죠. 차를 다른 거로 만들어 먹었을 수 있죠. 그런데 어느 날 주로 그 나뭇잎을 따서 차를 만드니까 그 나무에게 차나무라는 이름이 나중에 붙죠. 차 보다도 먼저 있었던 그 나무에게 이름을 붙인 것은 나중인 거죠.
그런 예는 많아요. 예를 들어 수 없는 흩어져 가는 물질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쩌면 그들의 시선과 그들의 관찰을 통해서 그 분해돼 가는 가장 작은 미세한 물질들에 대한 이해가 있었을 거예요.
어떤 물질들을 보니까 흩어지거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때 상승 작용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부를 방법이 없는 거예요. 원소 기호로 이름을 붙인 것이 몇 백 년 안 되듯이, 부를 방법이 없다 보니까, 이것들을 통틀어서 이런 유형을 그냥 불이라고 하자! 그러니까 불이라는 분류 안에 미세한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물질들을 분류해 놓은 거죠.
이 물질들의 특징은 흩어졌을 때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다고 그때 가정했던, 더는 안 쪼개질 거라고 가정했던, 그 물질들의 기본 성질 가운데 버리고 버려서 이것은 위로 떠오르는 작용을 하는 것 같아! 그렇게 해서 이 물질들을 ‘불’이라고 분류했던 거죠.
그 다음에 툭툭툭 밑으로 떨어지는 물질들이 있으면 이걸 ‘물’이라고 분류했던 거죠. 물이 물이 아닌 거죠. 따라서 하나의 상징적 비유였던 거죠.
마치 에디슨에게 이해된 것은 화학 기호가 붙은 물질이 되고, 이해되지 않거나 분석되지 않는 것은 독약이라고 쓰여서 서가에 놓여 있었던 것처럼! 그냥 독약이라는 분류 안에 즉 물이라는 분류 안에 그런 원시적인 기초 분자 원자 같은 것들이 분류되고 있었던 거죠.
동시에 통통하니까 이건 ‘나무’라고 부르기로 한 거죠. 어떤 물질들은 계속 응어리를 지으려고 하는 특성이 있으니까 이것은 ‘쇠’라고 부르기로 한 거죠. 그리고 반대로 퍼져나가는 확장의 성질이 있는 요소 물질들은 그냥 분류해서 ‘흙’이라고 한 거죠. 흙이 흙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고 불이 불이 아니고, 나무와 쇠가 각각 나무와 쇠가 아니고, 그러한 물질들을 분류하는 방법이었던 거죠.
나중에 그런 것을 갖고 신기하게 혹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을 하죠. 자기가 뭐 대단한 거라도 만든 것처럼, “물은 불을 이기고” 또 “불은 나무를 이기고” 이렇게 하죠. 이게 어떻게 보면 자기 개인의 속에서 그냥 이용한 것에 불과한데, 역사적으로는 속류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그런 (속류적인) 오행 이론으로 남아 있죠. 그런 게 오행으로 남아 있고 오행이 사물 요소 인자 분류법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니까, 옛날 사람들은 그런 생각 못 했던 것처럼 되는 거죠. 그럴 리가 없거든요.
사대(四大) 이론
또 한 가지 우리 몸을 볼 때도 그래요. 몸도 당시의 이름이 그 사람들은 DNA인지 세포인지 알 게 뭐예요? 이름이 없는데요. 그러나 우리 몸이 무언가로 어떻게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한 이미지는 있었던 거예요.
그 이미지를 가지고 분류를 해요. 그 분류법이 바로 인도 같은 데서는 요소 사물 원칙으로 그렇게 됐던 것으로 사대(四大) 이론이라는 게 있었죠. 물, 불, 바람, 흙! 여기서 마찬가지로 바람이 바람이 아니죠. 물이 우리가 생각하는 물이 아니고, 흙이 또한 흙이 아니고, 이렇게 바람 물 불 흙 다 그 이름들과는 상관없는 거죠. 역시 무언가 형상을 이루고 있는 생명체, 그 생명체의 요소 물질 분류법인 거예요.
“이 네 가지가 한 번 모여야만 생명이 된다”라고 하는, 원시적 생명 구성 요소 이론을 갖고 있었던 건데요. 이게 또 영화 같은 데 나오니까 제5원소가 돼 가지고 이상해지죠. 어떤 여자 하나 가운데 놓고 물 불 해서, 제5원소 같은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거는 비과학적 픽션이죠.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을 너무 무지하게 생각했던 거죠.
옛날 사람들을 그렇게 무식했던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사람 하나 갖다 놓으니까 에너지가 발생하는 건 또 옛날 사람들을 얼마나 또 신비하게 생각한 거예요. 우리 현대인에게 옛날 사람들은 신비의 대상이자 무식했던 대상인 거예요. 서로 모순되는 성격으로 바라보고 있는 거죠. 그렇게 무식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신비하지도 않았고, 그들도 우리처럼 사물을 분석하고 분해해서 이해하고, 그들의 결합으로서 생명과 사물을 이해하려고 했던 습성은 똑같았던 거죠.
생명체에게 있는 공통적 요소
지난번에도 한번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우리도 제국주의적인 지배를 했더라면 우리에게
미래에 3강(强)의 미래는 오지 않아요. 세계 3강의 미래는 오지도 않고 한류도 지금 안 되겠죠. 한류가 되는 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소통해서 느끼는 거예요.
한국인들의 문화에는 폭력성과 제국주의성이 없구나! 놀라운 그 소통이 이루어지죠. 그 소통이 이루어지는데, 아무튼 소통이 이루어지는 그 근원과 대화가 되는 기본 물질 요소는 서로 따로 구성되고 있고, 서로 따로 구성돼서 별도의 생명체로 독립돼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 무얼까?”를 한번 생각해 보시면, 그건 기본적으로는 다 흙입니다. 반드시는 아닌데요. 왜냐하면 흙만 직접적으로 먹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재미있는 게 포랑산 양위화의 집에 가면, 그 동네 사람들이 다 포랑산 흙 색깔을 닮았어요. 느낌도 그래요. 그러니까 자기들이 먹고 있는 것이 색깔로까지 닮아 있어요.
몽고 때 원나라가 중국도 지배하면서 이슬람을 믿고 아랍에서 건너왔던 눈에 색깔이 있다고 했던 색목인 아랍인들이 있죠. 그들이 건너와서 중국의 운남 지역에 많이 살아요. 그리고 중국의 닝샤(宁夏)라는 데도 회족 자치구가 많아요. 이곳 회족이라는 게 이슬람 회회족(回回族. 주-중국 내 이슬람교도인 회족을 가리키는 말)을 말하는 건데요. 이들이 많이 살아요.
그들의 색깔이 아랍인들과 같은 뿌리인데도 불구하고 얼굴이 그냥 중국스러워요. 한족스러운 거죠. 물론 그렇다고 아랍스러운 그 모양새와 눈빛이나 이런 게 없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천년이 안 되죠. 600년에서 700년밖에 안 되는 세월 사이에 사람의 인종이 아랍인에서 동북아인으로 많이 바뀐 듯한 느낌, 그런 느낌을 줘요. 조금 울뚝불뚝 들어갔던 눈 부위도 둥그스름해지고, 심지어 어떤 일부 회족들은 한족을 닮아가요.
우리도 보면 여기 혹시 인동(仁同) 장씨(張氏) 계시나요? 저기 대월국, 오늘날의 아랍에서 들어온 성씨 가운데 인동 장씨가 있죠. 인동 장씨들을 보면 피부가 약간 희고 좀 맨들맨들하죠. 그리고 눈이 어딘가 살짝 서양인스러운 그런 느낌이 있는 분들이 있죠.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요.
아무튼 그렇게 남아 있는데 그것을 구성하는 게 뭐냐 하면, 다 흙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먹은 흙! 직접적으로 흙을 먹기도 하죠. 그리고 실제로 웬만큼 소화에 큰 지장이 없는 흙을 먹으면 다 소화돼서 나오지 충수염 걸리지도 않아요. 흙을 먹어서 맹장에 걸려 가지고 복막염이 되고 그러는 경우, 그럴 것 같으면 저기 시골에서 산 사람들 같은 경우에 진즉 충수가 터져가지고 복막염을 한 두 번은 앓았 서야 되겠죠.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흙을 직접 먹어도 문제는 없는데 먹어가지고 큰 도움이 안 되니까 흙보다는 돌려서 먹는 거죠.
직접 먹지 못해 돌려 먹는 패턴
우리가 돌려서 먹는 것 중에 제가 종종 예를 드는 게 철명계라는 닭이 있어요. 미신에서 시작하죠. 아니 미신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람이 구리를 먹으면 좋다고 해요. 그런데 구리를 먹으면 죽죠. 구리를 먹으면 죽으니까 어떡하죠? 꾀를 내봤어요. 다른 것에게 구리를 먹이는 거죠. 그러면 그게 죽어요. 그러니까 여러 번 돌리기를 해요. 먼저 개구리한테 먹여요. 강제로 집어넣는 거죠. 개구리가 구리 먹었는데 살겠어요? 발버둥을 치죠.
심지어 철명계를 만드는 방법은 중국 광동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어요. 아마 광동 문화가 한국으로 전해진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냥 개구리에 구리를 집어넣고 개구리가 퍼덕대면 그걸 뱀에게 줘요. 중국에서는 개구리한테 구리를 먹이고 그걸 못 뱉게 주둥이를 싸매요. 그걸 뱀에게 줘요.
그렇게 먹이고 나면 뱀도 못 견디죠. 뱀이 몸을 비틀죠. 그러고 나면 뱀을 잘라요. 그것을 닭한테 줘요. 그럼 닭도 못 견뎌 해요. 살긴 살아요. 닭이 일단 머리 부분에 털이 다 빠져요. 눈이 뻘개지고 성대가 이상해져서 쇳소리를 내면서 8킬로까지 소리가 들려요.
이제 그 다음에 그 닭을 먹어요. 실제 잔인해 보이지만 우리가 먹고 있는 게 다 그런 식인 거예요. 나무가 흙을 먹어요. 그러면 그 나무 또는 그 나무의 일부분 또는 풀의 일부분을 다른 동물이 먹어요. 그 동물을 또 다른 동물이 먹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그 동물을 사람이 먹어요.
풀을 초식 동물이 먹고 초식 동물이 직접 사람한테 먹이가 되거나 아니면 육식 동물한테 먹히고 또 다시 먹이가 되거나, 결국은 풀이 먹었든 나무가 먹었든 그 흙을 돌려서 먹는 거죠. 돌려진 성격이 어떻게 돌려졌는가 돌려지는 과정에서 열을 가했는가 아니면 분쇄를 했는가에 따라서 식생활이 달라지는 거죠.
흙 너머의 흙 그 이름은 살
그래서 모양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가 먹고 있는 기본적인 것은 흙이에요. 이 흙이 모이죠. 흙이 덩어리가 지어져요. 그 덩어리가 지어진 흙을 우리는 ‘살’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늘날 미트(meat)라는 뜻은 아니에요. 고기라는 뜻은 아니고, 흙이 생명화 되어지도록 뭉쳐진 영역, 그러니까 흙이 사람의 생명의 영역으로 변환된 그것을 우리가 살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영어를 번역했을 때의 살은 아니에요.
‘살’이라는 게 앞에서 말한 지수화풍 중에서 바로 ‘지’예요. 우리는 살이라는 말을 일찌감치 갖고 있었고, 어떤 문화권에서는 살이라는 말이 없을 때, 비록 인간화됐지만 그 본성은 흙이다 해서 흙이라고 부른 거예요.
지수화풍에서 흙이다 뭐 토(土)다 하는 것, 여기서 기본적으로 ‘토’와 ‘지’는 많이 다릅니다만, 굳이 뜻을 따지자면 ‘토’는 물질적인 영역이고 ‘지’는 인문학적인 영역이에요. 그러니까 엄밀하게 보면 신토불이(身土不二)이지, 신지불이(身地不二)는 아니에요.
구성 요소로서의 흙과 사람의 몸이 같다는 거지, 내가 살고 있는 데가 그것이 내 몸과 같다는 것은 아니죠. 물론 가까운 데가 더 가깝겠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신지불이는 아니에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토불이를 신지불이처럼 해석을 하고 있죠. “내 고향 것이 좋은 거야!” “내 것이 좋은 거야!”라고.
그런 개념보다는 우리의 몸이라는 것이 몸뚱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흙과 동일하다라는 의미인데, 바로 그때 신(身)의 뜻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살인 거죠. 그리고 인도인들은 그걸 흙이라고 분류한 거죠. 근본적으로 흙이니까요. 그런데 이 흙이 뭉쳐야 돼요. 반죽이 돼야 돼요. 반죽이 돼야 되려면 뭐가 있어야 되느냐 꼭 물이 있어야 돼요.
물 없으면 반죽이 안 돼요. 흙이라고 하지만 흙 속에서 반죽 안 되는 흙들도 있죠. 그건 아직까지 생명이 될 수 있을 만큼, 어떤 생명은 고사하고 형상이 될 수 있을 만큼 준비가 안 된 거죠.
우리가 흙이라고 하면 그 가운데 모래도 있고 바위도 있고 저기 지하에 있는 광물질도 있죠. 그런데 그 광물질들이 물이 들어간다고 뭉쳐지지 않죠. 형상도 안 돼요. 생명은 한참 후에 얘기인 거죠. 아직까지 그 생명과 만날 준비가 덜 된 거죠. 모래처럼 바람을 덜 쐤거나, 모래여서 그렇죠. 아직 뭉쳐질 만큼의 흙이 안 된 거예요.
흙도 그러니까 수많은 단계가 있는 거예요. 뭉쳐져서 바로 형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있고, 심지어 한 바퀴 돌아서 일정한 부분에 이르게 되면 우리가 흙이라고 부를 수 있는 흙이 되어서 생명의 요소까지도 될 수 있는 것도 흙이라고 봐야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묵을 진(陳)자 또는 나아갈 진(進)자를 써도 되고요. 진화가 됐느냐 덜 됐느냐에 따라서 광물질도 있고 모래도 있고 바위도 있고 흙도 있고, 흙 이상의 흙도 있는 거죠. 흙 이상의 흙이 결국 인도 사람들은 그런 것이 우리 몸의 ‘살’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우리 살이라는 게 그런 걸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광물질은 세월에서 아직 우리하고 만날 준비가 안 된 거죠.
구리를 직접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세월이 엄청 흐르면 그것들도 형상을 이룰 수 있는 소재가 되고 물과 반죽이 될 수 있겠죠. 우리 말로 바위를 뭐라고 그러죠? 바위라는 말은 우리 말 아닙니다. 물론 우리 말이기도 한데요.
지난번에 술 얘기 드렸죠. 술 이름이 누루도 있고, 술도 있고, 아레끼도 있었죠. 뭘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그랬는데 바위도 그런 거예요. 그러면 바위는 뜻이 뭘까요? 바위도 있고 돌도 있고 뜻이 다 다른 거죠.
아무튼 이 얘기를 하자고 하는 건 아닌데요. 일본은 바위를 뭐라고 읽죠? 읽을 때 이시(いし-石)라고 읽죠. 우리는 그렇게 두 음절이 오면 뒤에 있는 모음을 버린다고 그랬죠. 우리는 ‘잇’이 되는 거죠. ‘잇’이 되는데 남아 있는 용례가 이끼밖에 없어요. 이끼가 ‘돌 옷’이라는 뜻이에요. 이끼의 앞에 있는 ‘이’가 돌, 뒤의 끼가 ‘옷’이에요. 이끼가 돌 옷이라는 뜻인데 거의 안 남아 있는데 남아 있는 데도 있더라고요.
아무튼 바위는 아직 기다려야 되는 거죠. 그런데 기다릴 뿐 그들이 생명을 이루거나 형상을 이룰 수 있는 미래적 가능성까지 차단돼 있다는 건 아니죠. 그들은 먼 미래에 더욱더 진화가 되고 더욱더 섬세해지고, 물과 만나서 외부적 압력에 의해 만들어지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형상이 되죠. 물만 있으면 그 물과 결합돼서 자기들끼리 스스로 생명을 만들 만큼의 요소로 된다고 본 거죠.
흙과 물이 만나면 생기는 열
그래서 흙과 물, 이 두 가지로 (형상을 이루는 기본 요소로) 일단 봐요. 그런데 이렇게 하니까 물과 흙이 만나서 일반 덩어리를 이루든 아니든 반드시 발열이 되더라는 거예요. 그 발열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템퍼러처만은 아니에요. 온도만은 아니라는 거죠.
크게 생명으로 보면 생기나 온기! “온기 가득하다” 혹은 “생기 가득하다”처럼, 뭔가 에너지 작용이 이루어지면서 원래 흙이 있던 그 흙의 온기로부터 좀 이탈하더라는 거예요. 그 이탈하는 정도에 따라서 살의 섬세도와 살의 진화도가 다르더라는 거죠.
이러한 것이 있었으니까, 이러한 것을 비유적으로 해서 사람을 흙으로 빚은 거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흙으로 빚으려면 물 없이 어떻게 흙으로 빚어요? 흙가루는 그 자체로는 빚을 수가 없죠.
우리 말로 찰흙을 뭐라고 그러죠? 찰흙은 콩팥처럼 나중에 만들어진 말이에요. 이렇게 찰기가 있는 흙을 뭐라 그러죠? ‘쪼다’라 그러죠. 쪼다! 그러니까 이게 흙덩어리라는 말이에요. “야 이 쪼다야!” 하는 말이, “야! 이 흙 뭉쳐 놓은 것 같은 인간아!” 이런 뜻이죠.
찰흙이 그렇죠. 참 흙, 찰진 흙! 그걸 쪼다라고 그러죠. 그런데 쪼다가 욕으로 쓰이면 사람이 쓰기에 따라서야 얼마든지 쓸 수 있죠. 그래서 쪼다가 돼야 빚을 것 아니에요. 일반 흙 중에서도 최소한 쪼다보다는 더한 흙으로 빚었다고 해야 설화나 신화도 말이 되잖아요.
열과 불 그리고 플로기스톤
그러고 나면 이 열은, (열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 열이 발생하는 열과 유사한 개념으로 하다 보니까 불이라 그런 거예요. 불이 꼭 열은 아닐 수 있어요. 불은 불이죠. 그러니까 온기 즉 무언가 에너지가 발생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의 초기적 원형에는 우리가 떼는 이 나무도 있잖아요.
나무도 있지만 무얼 불이라고 했느냐? 그것은 전부 다 중동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해서 서양으로도 가고 우리에게도 남아 있어요. 불이라는 의미 원래 온도로서의 불이라는 의미와는 단어가 달라요. 우리는 그걸 불이라고 그러는데 오늘날 파이어가 아니에요.
불은 라틴어로 번역하면 플로기스톤(phlogiston)에 가까워요. 플로기스톤이라고 들어보셨죠? 생체 에너지 막 타는 그런 그림이 있는데요. 중세 산업혁명이 있기 전까지 이른바 근세과학이 나오기 전까지는 생명의 근원을 프로기스톤(플로기스톤)으로 봤잖아요.
(주- 한 원소가 물질이 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원소라고 발표하고 그리스어 '플록스(phlóx, 타다)'에서 이름을 따 '플로지스톤(플로기스톤)'이라 이름지었다. 플로지스톤은 모든 타는(가연성) 물질에 들어있는 입자로, 물질이 연소할 때 빠져나간다. 연소 후 물질의 질량이 감소하는 것은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플로지스톤이 모두 빠져나가면 연소 과정이 끝나며, 다시 연소하지 않는다)
그 플로기스톤의 뒤에 있는 ‘기스톤’ 이런 것은 아랍을 거치면서 동유럽을 거치면서 붙어진 말이에요. 엄밀하게는 ‘프로’죠. 프로는 불이죠. 같은 말이죠. 그 불이라는 말을 플로기스톤처럼 이해하면 좋을 것 같아요.
원시적으로 쓰였던 불의 의미를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손도 쬐고 음식도 하고 하는 그 불, 즉 파이어보다는, 오히려 플로기스톤에 가깝게 이해하는 게 원래 불의 의미였다고 생각하면 불이 발생하는 거죠.
불이 발생하니까 전체적으로 무언가 움직여요. 움직이는 움직임이 이어져 움직인다는 건 뭐죠? 그 사물의 전체적인 요소들이 이어져 있다는 거죠. 그 요소들이 따로따로 놀고 있는 게 아니라 요소들이 뭔가 서로 연결됐다는 거죠. 움직인다는 거예요. 그 움직이는 것을 우리 말로 번역하면 ‘신경'이에요. 아니 한자어죠.
불이 발생하면 움직이고 움직이는 것이 곧 신경(神經), 신경의 우리말 ‘가물’
우리 말로는 뭐죠? 가물이어요. 가물가물할 때의 가물이고, 옛날 사람들의 생각에 따르면 머리로 들어오는 구멍이 가마였고 가물가물한 것은 가만히 있어야 잘 느끼게 되죠. 가물가물한 이러한 것들이 가만히 있을 때 가마를 통해서 잘 들어오는 것을 정리하면 이것이 바로 명상 수행이에요. 이것을 한자로 다듬으면 그렇게 되는 거죠.
그리고 영정치원(寧靜致遠), 고요하고 조용해야만 멀리 이른다! 이런 개념들이 그러한 과거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자기들이 쓰고 있는 한자 등등의 영역에서 문화화 한 것이에요. 이건 인도도 그렇죠. 가물가물한 것을 한자로 신경이라고 두더라도, 신경이 자기 몸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을 잘 느끼려면 희한하게 공통적으로 다 조용히 있으면 느껴진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가물이라고 했고, 부사로 두 번 반복하면 신경이 움직이는 것처럼 가물가물 느껴지다가 말다가 느껴지는 듯 아닌 듯한. 아무튼 그런 가물이 발생한다는 거예요. 그 가물을 번역할 방법이 없었던 거예요. 가물이란 말도 없던 시절이었을 수도 있고 심지어 한자권에서는 당연히 없었겠죠.
하다 하다 안 되니까 ‘바람’이라고 그런 거예요. 풍류(風流)는 우리가 생각하는 풍류는 이상한 풍류입니다마는, 바로 가물를 이해하는 것이 풍류예요. 내 몸 안에서 내 가물을 느끼고 이해하고 감지하고 그리고 그걸 이용할 줄 알고! 우리가 가마나 고마를 신(神)으로 번역하지만, 그렇게 그 가물을 번역하고 나니까 검을 흑(黑)자 갖고 번역이 안 되잖아요.
검을 흑이죠. ‘검다’라는 건 뭐죠? 그것도 한 편의 색칠해진 가마색인데, 가마곤이 신조(神鳥) 즉 신새이고, 그 가마곤이 까마귀이죠. 어떻게 하면 이제 그 가물가물하는 것을 번역하느냐? 한자로 하다 보니까 나중에 별도의 검다라는 뜻의 한자를 찾아낸 거예요. 검을 현(玄)이죠. 그래서 그것을 ‘가물 현’이라고 그러죠. 옛날 분들이 가르치면 ‘거물 현’하고 가르치면 이미 현대화가 많이 되신 훈장님이 가르치신 거예요.
연세 드신 분들이 혹시 어릴 때 천자문 배워봤다면, 어른들이 ‘가물 현’이라고 읽었던 것이 기억나실 거예요. 그런데 표준화가 되면서 현(玄) 자가 이 ‘검다’라는 뜻이 된 거예요. 현묘(玄妙)하다 할 때 이것도 가물가물하다는 거예요. 가물가물하게! 참 신경계처럼 묘하다 이런 의미죠.
가물과 바람 그리고 풍류
그래서 크게 보면, ‘살 물 불 가물’인데, 이 가물은 바람이라고 하고 있는 거죠. 그 바람이란 말 자체가 가물과 다르긴 합니다마는 바람의 어근을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아요. 일본과 만주에서는 바람을 바람이라고 부르지 않고 ‘후루’에 가깝게 부르게 되죠.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이 윈드예요. 원래 ‘바람’은 그런 윈드가 아니에요. 뭔가 생체 안에서 연결되어 있는 신경 작용을 바람이라고 그래요. 그것의 흐름이 풍류(風流)이고요.
풍류라는 게 유불선을 합한 듯한 것을 말했듯이, 결국 그것을 이해하는 어떤 흐름이 있었다라는 얘기죠. 그리고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 (주- 신라 최치원이 난랑비 서문에서 언급한 개념), “나라에 가물가물한 정도의 묘한 어떤 길이 있었다.”
그러니까 유물선의 내용을 다 통합할 정도로 섬세하게 이론화된 길이 있었다! 실행화 돼 있었다! 그걸 풍류라 부른다! 풍류 즉 바람의 흐름이라는 것의 그 바람이 윈드가 아니라는 거예요. 후루가 아니라는 거예요. 후루룩 하고 추풍령에 들어가는 그 바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추풍령의 풍자가 바람 풍자 아니라고 제가 말씀드린 거 기억나시나요? 그 옛날 발음으로 추풍(秋風)을 읽으면 ‘초바’예요. 일본 애들이 들어오고, 조선시대 사람들이 그냥 하다 보니까 ‘가을 바람’으로 그냥 해버린 거예요.
옛날에 한국의 3대 메밀산지 봉평과 장평 그리고 제주도와 추풍령이죠. 그 중에서 초바라는 게 우리가 지금 메밀이라고 부르는 산지의 이름으로 써요. 그래도 간접적으로 이상하게 왜곡돼서 불리고 있는 게 추풍령이죠. 가을바람이 막 불어오는 고개가 아니에요. 지나갈 때 거기에 하얗게 메밀꽃 피는 동네예요.
우리가 밀이 들어온 게 조선 후기인데요. 아무리 빨리 잡아도 16세기 전에 밀이 들어오질 않았는데요. 그러면 메밀은 한참 전부터 있었는데 이게 얼마나 억울해요? 나중에 들어온 애 이름에다가 메 자 붙여가지고, 산(山) 메 자 붙여가지고 산밀이라는 건데요. 밀이라는 게 들어와 가지고 원래부터 있던 이름을 뺏아버린 거예요. 그리고 오히려 자기 이름을 붙여가지고 산밀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원래부터 있던 것인데,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 버린 게 이름에서 보면 메밀인 거죠. 심지어 메밀은 예쁜데 어디 가면 아직도 모밀로 돼 있는 데가 있어요. 그런데 모밀도 맞는 말이에요. 원래는 좀 정확하게 하면 메밀이 표준화이고, 모밀은 각진 밀이었단 얘기예요. 동글동글한 밀이 아니고 모가 난 밀이었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모밀도 엄밀하게 그렇게 틀렸다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이름이라는 게 우리 말이 쓰이던 의미가 많이 사라지니까 이상한 말이 되고 있죠.
지금 ‘바람’이라고 하면 누구나 윈드를 떠올리죠. 피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라고 하면 블러드를 떠올리죠. 하지만 피는 피예요. 우리가 ‘꽃이 피다’ 할 때처럼, 몸이 피어나게 하는 동력으로서의 피이지 그게 블러드는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다 블러드라고 생각하죠.
살을 미트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물고기라고 그러면, “이거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그러죠. 자기가 고기라는 이름을 잘못 해석했다고 생각 안 하고 그러죠. “물고기를 ‘워터 미트’라고요. 세상에 살아있는 고기에 대해 ‘워터 미트’가 무엇입니까? 이건 문화적으로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이러는데요. 우리가 심한 게 아니라, 고기에 대해 서양어 번역을 하면서 미트로 이해하고 계신 거예요. ‘워터 미트’가 아니라 ‘워터에 사는 생명체’인 거예요. 고기가 생명체라는 뜻인데, 고기를 미트라는 소재로 생각하는 거죠.
거시와 무시
아무튼 그렇게 생명이 이루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네 가지예요. 역사적으로 이 네 가지에 대해서는 순서를 굳이 정하지 않아요. 이 네 가지는 기둥처럼 있어요. 그러니까 살이라는 흙이 물을 만나서 뭉치고, 뭉치자마자 온기가 발생해서 거기서 무언가의 첫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 에너지가 몸 전체를 움직이게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거시’를 만드는 거죠.
거시라고 그러죠. 우리가 생명의 원초적인 생명을 우리가 ‘거시’라고 부르죠. 들어보셨나요? 낚시하는 분들은 ‘거시’라는 말을 아시죠. ‘거시’에 해당되는 것이 뱃속에서 나오잖아요. 우리 뱃속에서 회충 같은 게 나오잖아요. 그걸 뭐라고 부르죠? 회충(蛔蟲)은 한자잖아요. 아니 한자 들어오기 전에 배에서 회충이 안 나왔나요? 우리 말이 없었겠어요? 그것을 ‘거시’라고 그래요.
그게 거시인데, 이건 자기가 알아서 그냥 꿈틀꿈틀거리면서 어떤 늪 같은 영역, 물 같은 영역을 몸의 이동을 통해서 헤엄쳐 가는 거예요. 그런데 떠서 가지는 못해요. 그런 초기적인 것을 것이라고 불러요. 그 자체가 생명이라는 말인데, 가장 원초적인 생명이란 말의 우리 말로 ‘거시’예요.
그런데 거기에 다리가 달려요. 꼼지락거리고 막 가요. 그건 뭐라고 그러느냐 ‘무시’라고 불러요. 바다 낚시를 가면 지렁이로 낚시할 때 있죠. 파란 지렁이 있고 빨간 지렁이 있죠. 빨간 지렁이는 소고기보다 비싸죠. 아마 비쌀 걸요. 그것도 마른 것은 아니고, 제대로 통통한 것은 비쌀 걸요. 그걸 혼무시라고 그러고, 청무시라고 그러죠.
‘무시’라는 것들은 가만히 보면 다리가 있어요. 아주 섬세하게 있어요. 그래서 없는 것은 ‘거시’이고, 있는 것은 ‘무시’라 하죠. 경상도에서는 말이 바뀌어 가지고 껄뺑이라고 그러기도 해요. (2회차 1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