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문턱에 이르니 마음이 갈대처럼 나부낀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채 중간 지대에 선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귀동냥을 하게 되었다. …
/일러스트=박상훈
특별히 분방한 리듬의 시대를 연 가수 장기하와 장영규(‘이날치 밴드’의 리더), ‘윤스테이’라는 관찰 예능에서 활약 중인 윤여정을
보면 미소가 절로 나왔다.
장영규는 ‘범 내려온다’는 김치 웨스턴 그루브로 세계인을 막춤의 세계로 안내했다. 별주부와 토끼의 추격전을 담은 이 판소리는
뉴웨이브 리듬을 타고 유튜브로 쭉쭉 뻗어나갔다. 장영규는 자신이 오직 잘 섞었을 뿐이라고 했다. 물과 철이 섞이듯 판소리와 신
스팝을 섞고, 한복과 ‘추리닝’을 섞고, 막춤과 현대무용을 섞었다. 비빌수록 그 맛과 멋은 화사하게 살아났다. 리듬의 달인은 말했
다. 고인 물로 썩지 않으려면, 다가오는 인연에 몸을 열고 여러 장르와 어울려 놀아보라고. “판소리를 하루에 한 번씩 듣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런데 고리타분한 포장을 걷어내니 전통이 이 시대에 가장 앞선 팝이었어요.”
장영규가 미묘한 엇박자의 리듬이라면 장기하는 선명한 요약의 리듬이었다. 그는 산울림을 따라 했고, 송골매를 따라 했고, 하루
키를 따라 했다. 베꼈지만 다른 것. 겉은 외갓집 참외처럼 친숙하지만 알맹이는 더 달고 찝찔한 것. 새로운 닮은꼴. 그렇게 이 시대
에 어울리는 효율적인 관찰의 천재로 장기하는 ‘싸구려 커피’ 같은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전통과 세대의 경계가 풀리자 관계는 더
오묘해졌고 리듬은 더 독특하게 발견되었다.
지방 고택에서 외국인 투숙객만 받는다는 콘셉트의 관찰 예능 ‘윤스테이’의 윤여정은 어떤가. 그의 ‘늙음’은 국적과 언어가 섞이면
서 더욱 명랑하게 무르익었다. 외국인들은 75세 윤 사장을 향해 ‘귀엽다’ ‘사랑스럽다’를 연발했다. 오징어 먹물 요리에 놀라 “나
독살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 손님에게 “오늘은 아니고… 내일쯤. 체크아웃 하면 알 수 없고”라며 만담하듯 받아치는(그것도 영어
로) 기지 넘치는 할머니라니! 윤여정은 육십 대가 되면서부터 관용구처럼 ‘나는 늙은이야’라는 말을 달고 살지만, 갈수록 에고는
줄고 애교가 늘어나는 이 어른을 보고 있으면, 관록의 정수는 유머가 아닌가 싶다.
……
머나먼 우주에서 바라보면 젊음이나 늙음조차 고정된 생물학의 범주가 아니라 ‘얼마나 잘 섞여 살고 있나’ 하는 화학의 신비 안에
있을 뿐이다. 놀라움을 주는 ‘새것’과 안도감을 주는 ‘헌것’이 만나면 세상은 얼마나 더 흥겹고 풍성해질까. 젊은이의 새로움은 깊
어지고 늙은이의 지혜는 산뜻해질 테지. 지구의 물은 더 좋아지고, 우주는 더 찬란하게 꿈틀대겠지.
/ 조선일보 [김지수의 서정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