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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저술명 | 등장 고승 | 인용문의 전거 | 비 고 |
1 | 勸修定慧結社文 | 龍樹菩薩 馬鳴菩薩 (天台)智者大師 (章安)灌頂 (金陵寶)誌公法師 四祖(道信) 元曉法師 李通玄 曹溪(慧能) (永嘉)一宿(玄)覺 裴(休)相國 圭峰(宗密)禪師 圭峰(宗密)禪師 圭峰(宗密)禪師 圭峰(宗密)禪師 百丈(懷海)和尙 仰山(慧寂)禪師 翼眞 閒靜/□筠 永明(延壽) □琪和尙 雲盖□智禪師 孤山智圓禪師 (承天)道原 飛錫和尙 永年/ 明義 曇慧 (四明)知禮 贊寧 | 大智度論 大乘起信論 十疑論註 隋天台智者大師別傳 大乘讚(景德傳燈錄 收錄) - 大乘起信論疏 (新)華嚴(合)論 六祖大師法寶壇經(宗寶 編) 禪宗永嘉集 大方廣圓覺經疏 圓覺經疏 法集別行錄 禪源諸詮集(별책 都序) 註華嚴法界觀門 - 仰山慧寂禪師語錄 翼眞記 祖堂集 (永明智覺禪師)唯心訣 - - (佛說)阿彌陀經疏 景德傳燈錄 高聲念佛三昧寶王論 五位修證圖 千手(千)眼大(慈)悲心呪行法 文殊偈(宋高僧傳) | 圓覺經 大集經 正法念經 淨明經 如來不思議境界經 般若經 (大佛頂如來密印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文殊(舍利)所說(摩訶)般若(波羅密)經 |
2 | 修心訣 | 曹溪(慧能) (淸涼)澄觀 歸宗(智常)和尙 臨濟(義玄) (大慧宗)杲禪師 圭峯(宗密) 圭峰(宗密) (承天)道原 永明(延壽) 永明(延壽) 贊寧 | (六祖大師)法寶壇經(宗寶 編)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禪門拈頌(慧諶 編)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大慧語錄 景德傳燈錄(道原 纂) 禪源諸詮集都序 景德傳燈錄 宗鏡錄 (永明智覺禪師)唯心訣 宋高僧傳 | 金剛(般若波羅密)經 圓覺經 華嚴經 |
3 | 眞心直說 | 馬鳴 護法 등 (僧)肇法師 (僧)肇 (金陵寶)誌公 三祖(僧讚) 四祖(道信) 慈恩 曹溪(慧能) 永嘉眞(玄)覺禪師 永嘉眞(玄)覺禪師 (淸涼)澄觀 李通玄 龐(蘊)公 裴(休)公 臨濟(義玄) 歸宗(智常) 圭峰(宗密) 圭峰(宗密) 洪州水潦和尙 淸溪洪進(進山主) 龍濟紹修(修山主) 永明(延壽) 永明(延壽) 大慧(宗杲) 雪竇(重顯) 灌溪(志閑) - (大)法眼(文益) 法燈 魏府(大覺)元華嚴 (承天)道原 贊寧 | 大乘起信論 成唯識論 肇論 寶藏論 十二時歌(景德傳燈錄 收錄) 信心銘 - - 六祖壇經(宗寶 編) (永嘉)證道歌 禪宗永嘉集 華嚴經隨疏演義鈔 新華嚴合論 -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註 臨濟錄 禪門拈頌 禪源諸詮集都序 景德傳燈錄(道原 纂) 景德傳燈錄 圓覺經疏(宗密) 圓覺經疏(宗密) 宗鏡錄 永明(智覺)(壽禪師)唯心訣 大慧語錄 明覺禪師語錄(惟蓋竺 編) 明覺禪師語錄(景德傳燈錄收錄) 續傳燈錄 - - 景德傳燈錄(道原 纂) 景德傳燈錄 宋高僧傳 | 金剛般若經 放光般若經 金光明經 淨明經 涅槃經 勝曼經 妙法蓮華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
4 | 圓頓成佛論 | 馬鳴 (元)曉公 義湘法師 六祖(慧能) 李通玄長者 賢首(法藏) 永嘉眞覺(玄覺) 淸涼(澄觀)祖師 (薦福承)古師 英邵武 大慧(宗杲)禪師 汾陽(善昭) | 大乘起信論 - (華嚴一乘)法界圖 法寶壇經(宗寶 編) 華嚴新(合)論; 華嚴大論 (修華嚴奧旨)妄盡還源觀 (永嘉)證道歌 - 禪林僧寶傳(覺範慧洪 撰) - 大慧(禪師)語錄 汾陽無德禪師語錄(楚圓 集) | 大方廣佛華嚴經 |
5 | 看話決疑論 | 馬鳴 (元)曉公 李通玄 賢首 曹溪(慧能)祖師 永嘉眞(玄)覺大師 (洪州)水潦 淸涼(澄觀) 圭峯(宗)密禪師 雲門(文偃) 佛眼(淸遠)禪師 普眼(□)道 長蘆(宗賾) 徑山(大慧)和尙 末山尼(了然) 智昭 守堅 | 大乘起信論 大乘起信論疏 (新)華嚴(合)論 大乘起信論義記 法寶壇經(宗寶 編) 法寶壇經(宗寶 編) - - 禪源諸詮集都序 雲門匡眞禪師廣錄 龍門佛眼禪師(語錄)偈 - - 大慧普覺禪師語錄 - 人天眼目 雲門(匡眞禪師)廣錄 | 般若經 大方廣佛華嚴經 圓覺經 |
6 | 法集別行錄 節要幷入私記 | 馬鳴祖師 僧肇 (金陵寶)誌公和尙 (元)曉公法師 元曉法師 義湘法師 李通玄 曹溪(慧能) 永嘉眞覺禪師 荷澤(神會) 淸涼(澄觀) 淸涼(澄觀) 淸涼(澄觀) (圭峰宗)密禪師 圭峰(宗密) 圭峰(宗密) 부오 裵(休)相國 (南陽慧)忠國師 石頭(希遷)和尙 (大隨)法眞 永明(延壽) 永明(延壽) (永明延)壽禪師 (承天)道原 (慧)洪 覺範 龍門(淸遠) 大慧(宗杲)禪師 | 大乘起信論 肇論 大乘讚偈 彌陀證性偈 華嚴宗要 華嚴一乘法界圖 (新)華嚴(合)論 六祖大師法寶壇經(宗寶 編) 永嘉證道歌 - 貞元(大方廣佛華嚴經)疏 (大)華嚴(經)略策 心要牋(景德傳燈錄 收錄) 法集別行錄 禪源諸詮集都序 圓覺經疏 華嚴錦冠 上密禪師行狀 景德傳燈錄 景德傳燈錄 法眞一和尙錄(法寶壇經 收錄) 宗鏡錄 萬善同歸集 (永明智覺禪師)唯心訣 景德傳燈錄 林間錄 龍門佛眼禪師(語錄)偈 大慧普覺禪師語錄(蘊聞 編) | 涅槃經 般若經 金剛經 維摩(詰所說)經 楞伽(阿跋多羅寶)經 華嚴經 圓覺經 佛頂經 密嚴經 如來藏經 十地論 拘那含佛傳法偈 大般涅槃經 首楞嚴經 |
7 | 誡初心學人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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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六祖法寶壇經跋 | 湛默 南陽(慧忠) 曹溪(慧能) | 修禪社內 首座 - 六祖大師法寶壇經(宗寶 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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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華嚴論節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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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維摩經 法華經 涅槃經 瓔珞經 梵網經 華嚴經 |
부록 | 念佛要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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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小野玄妙, 불교의 美術과 歷史 |
| 牧牛子法語頌 | 有僧 |
| 寶鼎, 念佛要門科解(駒澤大소장) |
| 碑銘 | 金君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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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序·跋 | 文定 李忠翊 大天 界蒙堂 無衣子 慧諶 崔沆 蘿月堂 孤翁 漢巖 重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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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의 저술들에 인용된 고승들은 그가 간접적으로 만나 교감한 이들이다. 그의 저술에 인용한 글들은 저자의 저술을 직접 보고 적은 글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천복 승고의 경우처럼 각범 혜홍이 그를 비판한 글을 지눌이 다시 인용한 경우도 보인다. 그는 이들 대소승 경전과 논서 및 교장(장소류)의 저자들로부터 그의 철학과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지눌은 권수정혜결사문에서 인도의 보살(용수, 마명) 등의 여러 논소들을 비롯하여 중국의 선사 [(금릉보)지공, (천태)지자, 장안(관정), 사조(도신), 조계(혜능), 영가(현각), 규봉(종밀), 백장(회해), 앙산(혜적), 영명(연수), (사명)지례, 익진, 운개(□지), 찬녕, 종보, 고산(지원), (승천)도원, 영년, (명의)담혜], 법사(찬녕), 거사(이통현, 배휴)와 신라의 법사(원효), 고려의 선사(한정/ □균) 등의 저술을 인용하면서 이들과 간접적으로 교감하고 있다. 이들 저자들은 모두 지눌보다 앞서 살았던 이들이며 그는 이들의 사상을 원용하여 권수정혜결사문에서 자신의 정혜관 즉 선교관을 피력하고 있다.
이 저술에서 지눌은 특히 규봉 종밀의 대표작인 원각경소(圓覺經疏)와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 및 선원제전집(禪源諸詮集(별책 都序)과 주화엄법계관문(註華嚴法界觀門) 등을 여러 차례 원용하고 있다. 종밀의 이들 저작은 우두종 선사에서 화엄종 5조로 탈바꿈한 그의 사상적 편력처럼 선(禪)과 교(敎)의 접점과 통로가 모색되어 있는 서물들이다. 이들 저작들이 지닌 성격은 고려 중기불교가 처한 현실을 해결하는 데 커다란 지남이 될 수 있었다. 지눌은 그의 저작들을 깊이 읽고 ‘선교 일원’을 확립하기 위한 자신의 사상적 밑걸음으로 원용하였다.
또 지눌은 수심결에서 그가 자주 원용한 여러 경론들과 함께 조계(혜능), 청량(징관), 규봉(종밀), 임제(의현), 귀종(지상), 대혜(종고), 영명(연수), (승천)도원, 찬녕 등 고승들의 저술을 통해 이들과 깊이 교감하고 있다. 이러한 교감은 그의 철학과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짐작된다.
지눌의 수심결에서는 선교의 통합을 모색하였던 규봉 종밀과 영명 연수의 저술들을 두어 차례 인용하고 있다. 그는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道原 纂)에 실린 규봉의 글과 또 다른 그의 대표작인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 의거하여 ‘선교 일원’을 도모하고 있다. 아울러 지눌은 송나라 초기에 선교의 통합을 모색한 영명 연수의 백과사전적 전적인 종경록(宗鏡錄, 100권)과 영명지각선사유심결(永明智覺禪師)唯心訣)을 원용하여 일심사상에 기반한 선교의 통합을 모색하였다. 이들 저작들은 남종선과 천태선이 만날 수 있는 서물들이다.
지눌은 진심직설에서 그가 원용한 여러 경론들과 함께 그가 인용한 저술들의 저자들인 인도의 마명보살과 호법보살을 필두로 하여 출가선승과 재가선자의 살림살이와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또 그는 중국의 승조, (금릉보)지공, 삼조(승찬), 사조(도신), 자은(현장), 조계(혜능), 종보, 영가(진/현)각, (홍주)수료, 청량(징관), 규봉(종밀), 이통현(장자), 방온(거사), 배휴(거사), 귀종(지상), 임제(의현), 명각(설두 중현), 관계(지한), (대)법안(문익), 영명(연수), 찬녕, (승천)도원, 대혜(종고), 청계(홍진, 진산주), 용제(소수, 수산주), 법등, 위부(대각)원화엄, 법등 등과 넓게 교감하고 있다.
지눌은 원돈성불론에서 마명보살로부터 신라의 원효, 의상, 그리고 중국의 혜능, 현수(법장), 이통현, 영가진(현)각, 청량(징관), (승복)천고, 영소무, 대혜(종고), 분양(선소) 등의 인물들과 교유하고 있다. 특히 임제(의현)의 체중현(體中玄)-현중현(玄中玄)-구중현(句中玄) 순서의 삼현문을 체중현-구중현-현중현 순으로 새롭게 정리한 고탑주(古塔主) 천복(승고)의 삼현문은 지눌의 삼현과 삼문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지눌은 간화결의론에서 마명보살로부터 신라의 원효, 중국의 조계(혜능). 영가진(현)각, 이통현, 현수(법장), 청량(징관), (홍주)수료, 규봉(종밀), 법안(문익), 운문(문언), 불안(청원), 보안(□도), 장로(종색), 경산(대혜), 말산니(요연), 지소, 수견 등 인용 저술 저자들과 교유하고 있다.
지눌은 이 저작에서 원돈(圓頓) 즉 화엄(華嚴)과 선법(禪法)의 통로를 모색하기 위해 위로는 마명으로부터 신라의 원효와 의상, 중국의 혜능과 현수, 이통현과 현각, 징관과 천고, 영소무와 대혜와 분양 등의 사상을 원용하여 원교(圓敎)와 돈교(頓敎) 즉 화엄과 선법의 접점과 통로를 모색하고 있다. 그의 3문 중 원돈신해문은 이 원돈성불론에 입각하여 구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저작은 지눌의 ‘선교 일원’의 기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간화결의론 역시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의 이문을 다시 종합하는 무심합도문 즉 간화경절문의 이론적 배경을 담고 있는 저작이다.
지눌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는 종밀의 법집별행록을 나름대로 절요하고 아울러 자신의 사적 안목을 기록해 넣은 것이다. 때문에 지눌의 만년작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는 그가 크게 의지하였던 종밀의 저작을 일정한 안목에 의해 ‘절요’하고 아울러 ‘사기’를 보입한 저술이다. 비록 그의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그의 제자 진각 혜심(慧諶)에 의해 간행되었지만 간화선(看話禪)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할 저술이다. 여기에서 지눌은 인도-서역의 마명조사(馬鳴祖師)와 중국의 승조, 지공 및 신라의 원효, 의상 등의 저술도 인용하고 있다. 특히 석두(희천), 이통현과 혜능(조계), 하택(신회), 청량(징관), 규봉(종밀), 부오(규봉 제자), 남양(혜충), 배휴, 혜홍(각범), 용문(청원), (대수)법진 등의 저술을 인용하면서 이들 저자들과 간접적으로 교유하고 있다.
지눌은 이 저작에서 징관의 정원대방광불화엄경소[貞元(大方廣佛華嚴經)疏], 대화엄경약책[(大)華嚴(經)略策], 심요전(心要牋, 景德傳燈錄 收錄)과 종밀의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원각경소(圓覺經疏) 그리고 연수의 종경록(宗鏡錄),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영명지각선사유심결[(永明智覺禪師)唯心訣] 등을 원용하고 있다. 여기서 징관과 종밀과 연수는 모두 화엄과 선법 수행의 접점과 통로를 모색하기 위해 생평을 바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지눌의 사상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눌의 계초심학인문은 초심 즉 처음의 마음을 가지고 배우는 이에 대한 경계의 문장이다. 그의 이 저술 속에는 고승의 문장은 인용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계초심학인문은 이후 신라 중기 원효의 발심수행장과 고려 후기의 야운비구의 자경문과 함께 초심자들이 암송해야 할 위의로 자리매김 되었다. 즉 지눌의 ‘초심’, 원효의 ‘발심’, 야운의 ‘자경’이 어우러져 사미(니) 등 초심자들이 습득해야할 주요 과목으로 시설되어 있다.
지눌이 간접적으로 교유한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불교사상사에 또렷한 위상을 남긴 저자들이다. 그가 인용한 저자들 중에는 보살과 선사 뿐만 아니라 학승과 거사들도 있다. 지눌은 많은 경론을 인용하면서 용수보살과 마명보살 및 호법보살의 논서 뿐만 아니라 임제(臨濟, 祖師)선, 법안선, 운문선, 위앙선풍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유식과 화엄, 법화와 밀종의 저술을 남긴 고승들과도 교유한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지눌은 대혜(大慧)의 간화선풍은 받아들였지만 그의 저술에는 조동(曹洞, 默照)선의 가풍을 선양한 인물과 저술과 접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지눌은 재가든 출가든 그들의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석존과 고승들의 살림살이와 사고방식을 원용하여 자신의 사상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경증(經證), 논증(論證), 교증(敎證)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커다란 계발을 받았으며 이것은 그의 사상 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지눌은 이들에게서 ‘문하’(門下)로서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책을 통해 ‘사숙’(私淑)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형성하였다. 오늘 우리가 ‘지눌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간접적 교감을 통해 그들의 철학과 사상을 원용하고 변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숙성 발효시킨 체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지눌사상의 형성 과정
지눌이 간접적으로 교섭한 이들은 주로 그가 즐겨 읽었던 저술들의 저자들이었다. 그는 붓다의 가르침을 담은 불경을 통해 중도(中道)의 이치를 터득했고, 인도의 용수보살과 마명보살 및 호법보살의 논서들을 이제(二諦)의 논리로 습득했다. 중국의 승조(僧肇)가 지은 조론과 보장론을 통해 반야(般若) 공관(空觀)에 대한 이해를 더했고, 지자(智者)와 관정(灌頂), 원효(元曉)와 의상(義湘), 법장(法藏)과 징관(澄觀) 및 이통현(李通玄)과 규봉(圭峰)을 통해 천태와 화엄 및 기신(起信)과 선법의 통로를 모색하였다. 특히 그는 혜능과 영가 및 하택과 종밀을 통해 선법을 중심으로 한 ‘선교 일원’(禪敎一元)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지눌의 독자적인 사상인 진심선(眞心禪)이 형성되었다.
선정[定]은 자기 마음[自心]의 몸체[體]요, 지혜[慧]는 자기 마음의 몸짓[用]이다. 선정이 곧 지혜인 까닭에 몸체는 몸짓을 떠나지 않고, 지혜가 곧 선정인 까닭에 몸짓은 몸체를 떠나지 않는다. 둘 다 가리면[雙遮] 모두 없어지고 둘 다 비추면[雙照] 모두 있게 된다. 몸체와 몸짓은 서로 이루고, 가리는 것[遮]과 비추는 것[照]은 걸림이 없다. 이 선정과 지혜 두 문은 수행의 요체요, 부처님과 조사들의 큰 뜻이며, 경(經)과 논(論)에서 함께 말한 것이다. 이제 조사의 가르침에 의지하면 다시 한 문이 있다. 가장 요체가 되니 이른바 무심(無心)이다.
지눌은 정혜법문을 중시하여 선정과 지혜가 수행의 요체이자 불조의 대의이며, 경론에서 함께 말한 것임을 역설하였다. 여기에다 다시 가장 요체가 되는 한 문을 더 세워 무심합도문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영명 연수의 무심합도(문)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그는 석두화상의 가르침도 원용하고 있다.
선문에는 또 정혜를 닦는 이외에 무심(無心)으로 합하는 문이 있다. 간략히 여기에 기록하여 교(敎)를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격외(格外)의 일문(一門)을 알아서 바른 믿음을 내게 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① 전에 서술한 바와 같이 안심(安心)의 문에 바로 상응하는 데는 정혜(定慧)보다 나은 것이 없다. 정(定)이란 자심(自心)의 몸체요, 혜(慧)는 자심의 몸짓이다. 정은 곧 혜이기 때문에 몸체는 몸짓을 떠나지 않고, 혜는 곧 정이기 때문에 몸짓은 몸체를 떠나지 않는다. 이 둘 모두를 가리면 하나도 없지만, 둘 모두를 비추면 모두 존재한다. 몸체와 몸짓이 함께 이루어지면 가림[遮]과 비춤[照]이 장애가 없다. 이 정혜의 두 문은 수행의 요체요, 불조(佛祖)의 큰 뜻이며, 모든 경론에서 똑같이 말하고 있다.
② 이제 조사의 가르침[祖敎]에 의지하면 다시 한 문이 있으니 가장 간략하고[省] 중요한 것[要]으로 이른바 무심의 선문이 있다. (이하 게송 부분까지 종경록 인용) 왜 그러한가? 만일 마음이 있으면 불안하고, 마음이 없으면 스스로 즐겁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덕(先德)이 게송으로 설하였다. 마음과 짝하지 말라[莫與心爲伴]/ 무심이면 마음은 저절로 평안하리[無心心自安]/ 마음으로 짝을 삼으면[若將心作伴]/ 자칫 마음에 속히게 되네[動卽被心謾] (중략)
③ ‘그러므로 아난은 유(有)에 집착해서 의거할 바가 없었으므로 7처(處)에 망연하였고, 2조 혜가는 무(無)를 체득하여 저절로 편안해지고 말이 떨어지자마자 도를 이루었다. 만일 무심의 종지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비록 번뇌를 굴복시켜도 불안한 상(相)은 항상 나타난다. 만일 무심을 요달하면 어디서나 장애가 없어서 대처해야 할 번뇌도 없으니 제거하려는 노력이 어찌 필요하겠는가? 또 정(情)을 낳는 일념도 없으니 번뇌심을 잊는다는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인용한 ①②③의 내용은 모두 영명의 종경록에서 원용한 글이다. ①은 수행의 요체이자 불조의 큰 뜻이며 경론의 동전(同詮)으로서 정혜를 역설하고 있다. ②는 무심 즉 무분별심을 강조하고 있다. ③은 유심(有心)에 집착해 깨닫지 못한 아난(阿難)과 무심(無心)을 체득해 안심에 도달한 혜가(慧可)를 대비하고 있다. 이처럼 지눌이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을 통합하면서 다시 제시한 무심합도문 즉 경절문은 영명의 무심합도문을 원용해 시설한 교문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지점은 대혜 이전에 살았던 영명은 간화선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지만, 대혜 이후에 살았던 지눌과 혜심은 간화선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다.
이러하니 마땅히 알라! 조사나 종사로서 무심(無心)하여 도에 합한 사람은 선정이나 지혜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선정을 닦는 사람은 이치에 계합하여 산란을 거두는 까닭으로 인연은 잊는 힘이 있고, 지혜를 닦는 사람은 법을 간택하고 공(空)임을 관하여 탕멸(蕩滅)하는 공(功)이 있긴 있다. (한편) 이제 바로 무심(無心)을 알아 부딪치는 곳마다 걸림이 없는 이는 걸림 없는 해탈지혜가 현전하여 한 티끌 한 생각이 모두 (마음) 밖에서 온 것이 아니고 별다른 일이 아니거니 어찌 헛되이 (제거하려고) 공력을 소비하는 일이 있겠는가. 자신의 선정과 지혜도 오히려 의리 작용의 자취에 걸리는 일이 있거늘 하물며 번뇌를 떠나는 문이 어떻게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석두(石頭)화상이 이르되 “나의 법문은 선불(先佛)이 전해주신 것이다. 선정과 정진을 논하지 아니하고, 오직 부처님의 지견을 통달할 뿐이다”한 것이 이것이다.
이 무심합도[無心合道(門)]도 경절문(徑截門)이어야 또한 들어갈 수 있다. 화두를 스스로 닦는 것이나 하어(下語)의 방편은 오묘하고 비밀한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다만 지음(知音) 만나기가 드물 뿐이다.
지눌이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을 아우르는 무심합도문을 시설한 것은 삼문 수행체계를 창안한 종래의 임제(臨濟)와 이를 새롭게 광정한 천복 승고(薦福承古)의 삼현문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그는 임제가 창안한 것으로 알려진 삼현문 즉 체중현(體中玄), 구중현(句中玄), 현중현(玄中玄)의 구축을 통해 고려 선종의 질적 전환을 도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임제의 삼현문을 송대에 편찬된 선림승보전(권12)의 ‘천복(승)고선사’(薦福寺)조를 원용하면서 이를 자신의 삼현문으로 재구성하여 심화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천복 승고는 선종사에서 임제의 체중현-현중현-구중현의 삼현문 순서를 체중현-구중현-현중현의 순서로 분류한 첫 인물이다.
선에는 삼현문이 있다. 첫째가 체중현, 둘째가 구중현, 셋째가 현중현이다. 처음의 ‘체중현’은 ‘한없는 세계가 서로 털끝을 떠나지 않고, 십세(十世)의 고금(古今)이 당념(當念)을 떠나지 않는다’는 등의 사사무애법문으로서 초심자들의 깨달음의 입구로 삼는다. 그런데 이 체중현(體中玄)도 언교 중에서 이해와 분별이 있다. 해서 구중현(句中玄)의 흔적이 없는 평소의 거친 언구로서 집착을 부수게 하고, 재빨리 불법지견(佛法知見)을 없앤다. 그러나 이 또한 거친 지견과 거친 언구가 있다. 그러므로 현중현(玄中玄)의 양구(良久), 묵언(黙言), 방(奉), 할(喝)의 작용으로 단련한다. 바로 이때 재빨리 앞의 구중현의 거친 지견과 거친 언구를 없앤다. 그래서 ‘뜻을 얻고 말을 잃으면 도에 친하기 쉽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재빨리 법계를 증득한 곳이다. (여기서의 삼현은 비록 임제의 본의는 아니지만, 우선 고사(古師)의 뜻에 따라 밝힌다.)
지눌의 할주로 추정되는 이 부분에서 고사(古師)는 천복 승고선사를 가리킨다. 지눌은 선림보승전(1124년간)을 입수해 읽고 승고의 삼현문 해석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삼문을 정립하였다. 승고는 체중현에 ‘한없는 세계가 서로 털끝을 떠나지 않고, 십세의 고금이 당념을 떠나지 않는다’는 화엄의 사사무애법문으로서 체중현 즉 초심자들의 깨달음의 입구로 삼았다. 이어 구중현에는 간화선을 짝짓고, 다시 현중현에는 양구, 묵언, 방, 할의 작용을 배대하고 있다.
이러한 승고의 배대에 대해 각범 혜홍은 ‘승고의 삼실(三失)’ 즉 ① 삼현삼요(三玄三要)를 현사 사비(玄師沙備)의 삼구로 이해한 것, ② 파릉 호감(巴陵顥鑑)의 삼전어(三轉語)를 비난한 것, ③ 자기를 두 가지로 나눈 것 등으로 비판하고 있다.승고의 삼현문에 대한 비판 중 특히 ③의 ‘공겁 때의 자기’와 ‘지금 현재에 일용하는 자기’로 나눈 것에 대해 혜홍은 비판하고 있다. 자기를 두 가지로 나눈 것에 대해서는 고려 선사들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종 1년(1123) 7월에 승과를 주관했는데, 당시의 수행자들이 대부분 두 가지[二種]의 자기(自己)에 대해 무성하게 논하고 있었다. 그러자 국사(國師)가 말하기를, ‘자기는 하나밖에 없는데 어째서 둘이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그것을 금한다’. 의 말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많았는데, 후에 혜홍(慧洪)의 선림승보전이 전해지자 거기에는 고사(古師)의 삼실(三失)을 나누어 자기를 나누는 것을 일실(一失)로 하기로 하였다. 수행자들이 그것을 보고나서는 의문을 버렸다.
이 결락() 부분은 ‘천복 승고선사’일 것으로 추정된다. 승고는 몸체[體]와 몸짓[用]의 측면에서 ‘공겁시 자기’ 즉 ‘공겁 때의 자기’와 ‘금시일용 자기’ 즉 ‘지금 현재에 일용하는 자기’로 구분한 것이다. 하지만 각범 혜홍은 즉자적으로 이것을 둘로 나누어 오히려 승고의 본의를 왜곡하고 있다. 그 결과 고려 선사들도 그의 담론을 따르기에 이르렀다. 반면 지눌은 오히려 승고의 본의를 수용하여 자신의 사상적 활로를 열어나가고 있다. 나아가 그는 영명 연수의 종경록을 원용하여 삼문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지눌의 삼문 즉 성적등지문, 원돈신해문, 간화결절문 중 특히 무심합도문으로 제시된 간화경절문은 영명의 종경록에서 유래했음이 분명하다. 300종 이상의 문헌을 인용하고 있는 종경록은 백과전서를 방불케 하여 당시 고려 선승들에게 참고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책에는 ‘무심합도’라는 말이 세 차례나 제시되고 있다. 아마도 그도 이 문헌을 애용했을 것이다. 지눌을 이은 혜심의 저술에는 종경록의 인용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지눌은 “참다운 마음[眞心]이란 앎이 없이 알고 평등하게 품고 원만하게 비추므로 초목과 다르며, 미움과 사랑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망녕된 마음과 다르며, 대상을 비워서 밝히므로 미움도 없고 사랑도 없으며, 앎이 없이 알므로 참다운 마음”이라고 하였다. 이 참다운 마음 즉 진심은 그의 철학적 기반이었으며 그것은 무심(無心) 즉 무분별심(無分別心)의 다른 이름이었다.
진심의 본체는 원인과 결과를 넘어서고 옛과 오늘을 꿰뚫으며 범부와 성인을 세우지 않으며 모든 상대가 없어서 마치 커다란 허공과 같아서 모든 곳에 두루하며 묘체(妙體)는 고요하여 일체의 모든 희론(戱論)이 끊어졌으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요란하지도 않아서 잠잠히 항상 머무른다.
지눌은 이 진심을 ‘자성이 곧 법성’이며, ‘자심이 곧 불심’이라는 구도로 다시 해명한다. 그리하여 불변(不變)에 기초한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연(隨緣)에 기반한 수상정혜(隨相定慧)의 구도 아래 진심을 설명하고 있다. 지눌은 몸체인 자성(自性)에 대응하는 몸짓인 자심(自心)을 다시 정과 혜의 두 문으로 해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쌍차(雙遮)와 쌍조(雙照)로 통합하여 무심(合道門)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지눌은 늘 사람들에게 읽기를 권할 때는 언제나 금강경으로 법을 세우고, 이치를 연설할 때는 반드시 육조단경에 의거했으며, 이통현의 화엄론과 종고의 대혜어록을 두 날개[羽翼]로 삼았었다. 그리하여 그는 25세에 창평 청원사에서 혜능의 법보기단경을 읽다가 마음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치[理]를 터득하여 성적등지문(性寂等持門)을 구축하였다. 다시 31세에는 하가산 보문사에서 이통현의 신화엄합론을 읽고 선과 화엄이 둘이 아님을 자각, 선과 교가 한 뿌리임을 깨닫고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정립하였다.
또 다시 41세 때에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대혜 종고(1088~1163)의 보각선사어록을 통해서 간화선의 진면목을 깨닫고 사(事)를 터득하여 (간화)경절문(徑截門)을 구축하였다.그리고 이들의 삼문을 열어 이것에 의해 수행하여 믿고 들어가게 하였다. 여기서 눈에 띄는 지점은 지눌이 모두 ‘독서’ 즉 이들 세 텍스트를 ‘읽고서 자각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들 텍스트들을 깊이 읽고 그 맥락에 대해 심사숙고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처럼 지눌은 교(敎, 慧)를 통해 선(禪, 定)으로 들어가 선법 중심의 ‘선교 일원’(禪敎一元)의 사상체계인 진심선을 구축하였다. 그는 이 세 번의 깨달음의 전기를 통해 그 사상의 깊이와 넓이를 더했다. 성적등지문은 정과 혜를 통해 구축되었고, 원돈신해문은 화엄의 성기사상을 표현한 것이며, 간화경절문은 간화선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지눌이 종래의 조사돈오선을 집대성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간화경절문을 새로운 수행법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 본격적인 간화선은 그의 제자 진각 혜심(慧諶)에 의해서 크게 주창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은 지눌이 1차와 2차 깨달음의 전기에서 만난 혜능의 선법과 이통현의 교법에서 알 수 있다. 그는 그의 화두였던 ‘선교 일원’(禪敎一元)을 확립하기 위해 혜능 이래의 조사돈오선을 집대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많은 고승들을 만났다. 지눌이 만난 고승들 중 특히 그의 저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인물은 혜능과 영가, 하택과 규봉, 영명과 대혜였다. 그는 이들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혜능과 영가는 선의 기반을 다진 고승들로서 선사 지눌의 사상적 저변을 형성해 주었다. 반면 하택과 규봉은 자신의 평생 화두였던 선교(禪敎)의 일원(一元)이라는 시대정신과 역사인식의 철학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규봉의 법집별행록은 지눌의 철학적 기저를 확보시켜준 전범이었다. 그는 이 저술을 절요(節要)하고 거기에다 자신의 사기(私記)를 덧붙여 선교일원의 논리적 근거를 확보하였다.
규봉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선종 중 하택종(神會 남종)과 북종(神秀 선종) 및 홍주종(馬祖道一 선종)과 우두종(牛頭法融 선종)의 4종 선법을 채집하여 세상에 별행시켰다. 종밀은 선종을 이들 4종 선법으로 제시한 뒤 1) 북종, 2) 우두종, 3) 홍주종·하택종의 셋으로 정리한다. 이에 대해 지눌은 돈오문이 없는 북종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을 피한 채 하택종을 중심으로 우두종과 홍주종을 포괄하고 있다.
저 홍주종은 돈오문에는 비록 가깝지만 아직 적실하지 않고 점수문에는 완전히 어긋난다. 우두종은 이미 공(空)에 통달해 있지만 돈오문에 대해선 절반쯤 이해했다고 할 수 있지만 (망녕된) 마음을 잊었기 때문에 점수문에 대해서는 어긋나지 않는다. 북종은 단지 점수문일 뿐 돈오문은 전연 없기 때문에 수행도 진실이 아니다. 하택종에서는 반드시 먼저 돈오한 뒤에 그 돈오에 의지해 수행한다. 이 글의 뜻에 따르면 홍주종은 돈오문에는 가깝지만 적실하지 못하고, 우두종은 (돈오문에 대해서) 반쯤은 알았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을 닦는 사람은 오직 하택종의 말만 믿고 다른 종파의 말은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지눌은 종밀이 선원제전집의 서문에서 삼종을 비판한 것에 의거해 식망수심종(息妄修心宗)인 신수북종과 민절무기종(泯絶無寄宗)인 우두종과 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인 홍주종과 하택종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다만 후학들이 말에 집착하여 여래의 지견을 알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방편으로서의 변별을 인정할 뿐이다. 그리고 나서 지눌은 하택종을 중심으로 하고 자기 마음의 몸체[體]와 몸짓[用]을 분명히 한다.
이제 말법의 시대에 마음을 닦는 사람은 먼저 하택이 보인 가르침으로 자기 마음의 본성[性]과 특상[相], 몸체[體]와 몸짓[用]을 결택하고 비고 고요함[空寂]에 떨어지지 말고 대상에 따라[隨緣] 막히지 말라. 진정한 견해를 일으킨 다음에 홍주종과 우두종의 두 종지를 또렷이 본다면 부절(符節)이 부합하는 듯 할 것이니 어찌 망녕되이 취하고 버린다는 생각을 내겠는가?
지눌은 종밀의 이 저술을 절록(節錄)한 뒤 여기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그리고 끝에는 대혜선사의 간화선을 응용하여 방편을 제시하였다. 지눌의 요지는 고려 당시 각기 불교의 언교를 무시하고 묵좌(黙坐)만을 제일로 여기는 선종과 다만 교리의 탐구와 지식과 이론으로 불법을 탐구하는 교종을 통합하는 데에 있었다.
학자는 먼저 불조(佛祖)의 여실한 언교에 의하여 진정한 지견을 세워서 관행 귀감(觀行龜鑑)을 삼되 그 교의를 놓아버리고 다만 앞에 드러난 일념[現前一念]을 가지고 선지를 참구[參詳禪旨]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 있으리니 이른바 출신활로(出身活路, 安心立命處)이다.
지눌은 여실한 언교로 진정한 지견을 세워 관행 귀감을 삼은 뒤 그 교의를 버리고 앞에 드러난 일념을 가지고 선지를 참구하였다. 그는 늘 몸가짐을 잘 거두어 잡아 소걸음[牛行]과 범의 눈[虎視]으로 혼자 있을 때에는 삼가고 경계하여 몸가짐에 게으르지 않았다. 나아가 그는 힘드는 일과 운력하는 데 있어서도 늘 대중에 앞장섰다.
이러한 정진 속에서도 지눌은 억보산(億寶山)의 백운정사(白雲精舍)와 적취암(積翠庵) 및 서석산(瑞石山)의 규봉난야(圭峰蘭若)와 조월암(祖月庵) 등을 지었다. 그가 새로 지은 ‘규봉난야’는 그와 규봉과의 긴밀한 교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 암자를 오가면서 그는 선정을 닦으며 자신의 살림살이와 사고방식을 가다듬었다.
5. 지눌 진심선의 개화
고려의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은 철학자이자 사상가였다. 그는 통일신라(統一新羅)와 대발해(大渤海)의 남북국(南北國) 시대 이래 고려 불교의 에너지를 선법으로 응축시켜 진심선(眞心禪)의 수행법을 창안해 내었다. 지눌은 고려 중기 교종의 ‘선정(修行) 없는 광혜’(狂慧)와 선종의 ‘지혜(經敎) 없는 치선’(癡禪)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창안하였고, 삼문(三門)의 수행체계를 세워 모든 분별을 없애버린 진심선의 활로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고려 중기 불교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시대인 북송대의 불교가 경험한 과정을 참고하였다.
지눌은 치선과 광혜의 대립을 넘어서기 위해 혜능과 영가, 하택과 종밀, 영명과 대혜 등의 수행법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그는 특히 영명 연수의 가풍과 송나라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의 가풍에 깊이 주목하였다. 일심(一心)에 입각하여 사상을 펼친 영명과 달리 대혜는 수당(隋唐) 이래 중국 불교의 에너지를 선관(禪觀)으로 수렴(收斂)하여 간화선(看話禪)의 수행법을 창안해 내었다. 그는 송대 선법(禪法)의 과제였던 문자선(文字禪)과 무사선(無事禪)과 묵조선(黙照禪)의 문제점을 극복(克服)하기 위하여 화두(話頭)를 들고 깨어서 수행하는 동중(動中) 공부인 간화선을 제창(提唱)하였다. 대혜의 이러한 역정은 고려 중기불교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지눌에게 시사해주었다.
당말 이후 송대 초기에 유행한 문자선의 활성화는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문자의 본래 쓰임새를 잘못 알아 문자선에 치우쳐 큰 병통(病痛)으로 나타났다. 대혜는 이러한 병통을 해소하는 최후의 방책으로서 ‘간화’(看話)라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 길은 범부(凡夫)의 심식(心識)으로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아니며 오히려 심식의 길이 완전히 끊어진 삼매(三昧)의 자리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대혜는 이러한 문자선의 순기능(順機能)과 역기능(逆機能)을 전관(全觀)한 뒤 공부의 지침을 제공하는 순기능과 문자의 본질을 도외시하고 단지 공부하고 집착하여 수행하지 않는 역기능을 전관할 수 있는 길을 간화선(看話禪)으로 열었다. 지눌이 대혜에게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대혜는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수행하지 않는 수행자(修行者)의 잘못을 통렬히 꾸짖고 있다. 본래무사(本來無事)란 깨친 이의 임운자재(任運自在)한 경지이지 범부가 단지 그 흉내만 내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대혜는 자신의 수증관(修證觀)에 입각하여 수행을 통한 시각(始覺)으로 본래의 본각(本覺)에 합치해야 온전한 깨달음이라고 하였다. 때문에 그는 수행자들에게 현재의 미혹(迷惑)을 제거하여 본각(本覺)에 그대로 합치해야 함을 줄기차게 역설하였다. 대혜가 사상사적으로 주목되는 이유는 시각(始覺)을 이루는 수행법으로서 ‘간화’(看話)를 채택하고 있는 지점이다. 지눌 역시 같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대혜는 공부는 정(靜)과 동(動) 모두에 간단(間斷)없이 해야 하며 근기(根機)에 따라 차별화된 방편(方便)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 그는 세속의 모든 일과(日課)를 단절(斷絶)하는 측면과 세속사(世俗事)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측면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그것은 곧 묵조(默照)의 정좌(靜坐)의 좌상(坐相)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비판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도적(中道的) 수행관에 입각하여 묵조(默照)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지눌은 대혜가 모색한 송나라 선종의 사상적 통합을 참고하면서 고려 불교의 대립을 해소시킬 사상적 활로를 찾아나섰다.
그리하여 지눌은 평소의 지론처럼 정혜쌍수(定慧雙修)에 기초하여 성적등지문(性寂等持門)과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건립한 뒤 다시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을 시설(施設)하였다. 이 무심합도문은 진심(眞心) 즉 무심(無心)에 기초한 수행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눌이 입론(立論)한 삼문(三門)의 궁극적 지향(志向)이기도 하다. 그는 이러한 체계(體系)를 통해 고려 중기 이래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갈등을 극복하였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통합하여 조계종(曹溪宗)을 건립하였다. 대혜 역시 송나라 선종(禪宗)의 여러 문제들을 극복해 가는 과정 속에서 간화선을 창안하였다. 지눌은 사상적으로 대혜의 어록을 읽고 깊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 지향은 동일하지 않았다.
대혜와 지눌의 문제의식은 시대의 중심(中心)에서 그 시대의 문제들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자기의 사상(思想)을 구축(構築)해 갔다는 점에서 상통(相通)하고 있다. 하지만 화두(話頭)를 통해 깨달음을 회복해 가는 시각(始覺)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대혜의 간화선과 본래부터 깨닫고 있는 본각(本覺)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지눌의 진심선은 서로 상이(相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지눌은 혜능 이래의 조사돈오선의 집성자로서 위상을 지니고 있으며, 반면 대혜는 간화선의 창안자로서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눌은 자신이 간접적으로 교유한 저자들과 직접적으로 교유한 수좌들과 만나 고려 중기 불교계가 요구하는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자신의 한 몸둥어리 속에다 담아낸 사상가이자 철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6. 정리와 맺음
어떠한 만남이든 그 만남은 우리를 살찌운다. 그것이 악연이든 선연이든 마찬가지이다. 악연이라면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고, 선연이라면 정면교사로 삼아 나를 살찌우면 된다. 평생을 소를 길들이며 살았던 목우자 지눌(牧牛子 知訥, 1158~1210)은 53년의 생평동안 적지 않은 고승들과 교감하였다. 그는 학덕과 덕행이 높은 고승들의 저작들을 만나 ‘간접 교감’이기는 했지만 그들과 깊은 대화를 하였다.
지눌은 조계(曹溪) 운손(雲孫)이었던 사굴산문의 종휘(宗暉)의 문하로 출가한 이래로 각 산문에서 득재(得才) 등의 수좌들과 만나 ‘직접 교감’을 하였다. 또 뒷날 백련결사를 주도한 원묘 요세(圓妙了世)와 수행하며 교감하였다. 그리고 지눌에 이어 수선사 2대 사주가 된 진각 혜심(眞覺慧諶)을 필두로 하여 그의 제자였던 정선(正宣), 정혜결사의 무대를 옮기기 위해 그의 명을 받고 송광산 길상사터를 발견한 수우(守愚), 유저의 간행과 유포를 담당했던 충담(沖湛) 등은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했던 선사들이다. 이처럼 지눌은 그의 화엄론절요 뒤의 간기에 적힌 ‘해동조계산수선사도인(海東曹溪山修禪社道人) 충담(冲湛)’, ‘모공조판인쇄무궁자(募工彫板印施無窮者) 동사도인(同社道人)’ 혜심(慧諶書)’, ‘시주사내도인(施主社內道人) 담령(湛靈)’, ‘시주나주호장직승처(施主羅州戶長直升妻) 진의금(珍衣金)’ 등과도 만나며 ‘직접 교감’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의 철학과 사상은 성숙하여졌다.
또 지눌은 여러 경전과 논서 속에서 마명과 용수 및 호법 보살 등을 만나 ‘간접 교감’을 하였다. 교장(장소류) 속에서 그는 승조와 (금릉보)지공, 삼조(승찬)와 사조(도신) 및 자은(현장), (분황)원효와 (부석)의상, 이통현과 현수(법장), 조계(혜능)와 영가(현각)와 하택(신회), 방온(거사)과 배휴(거사), 청량(징관)과 규봉(종밀), 귀종(지상)과 임제(의현), 명각(설두 중현)과 관계(지한), 법안(문익)과 운문(문언), 찬녕과 도원, (홍주)수료와 불안(청원), 보안(□도)와 장로(종색)와 천복(승고), 경산(대혜)과 말산니(요연), 지소와 수견, 청계(홍진, 진산주)와 용제(소수, 수산주), 법등과 위부(대각)원화엄 등과 만나 철학적 대화를 깊이 나눴다. 이 과정에서 지눌은 특히 혜능과 영가, 하택과 종밀, 영명과 대혜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적 지형인 성적등지문(性寂等持門)과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그리고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으로서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의 삼문과 진심선(眞心禪)의 지형도를 그려낼 수 있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조계산 송광사가 배출한 16국사의 첫 주자였던 지눌은 이후 제자 진각 혜심 등 16국사와 2왕사를 배출한 이 절이 승보종찰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또 그의 수행가풍을 담은 수선사 청규와 보청 등은 송광사로 하여금 수행의 사찰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한 마중물이었다. 이처럼 고려 중기에 형성된 선사상의 큰 흐름은 명철한 시대정신과 투철한 역사인식을 가진 고승 지눌이 전시대 및 동시대 고승들과의 간접 교감과 직접 교감을 통해 형성한 철학과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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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High Priests Who Gave Effects to the Philosophy of Bojo Jinul
- Focusing on the High Priests Described in Bojojeonseo -
Ko Young Seop
/ Professor, Buddhist Department of Dongguk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discuss the high priests who gave effects to the philosophy of Bojo Jinul(1158~1210). During his lifetime (for 53 years), he exchanged with many high priests. Although they were the indirect communion with the high priests with high learning and virtue through their books, he had a deep conversation with them.
Since becoming a Buddhist while studying under the Jonghwi of Sagulsanmun(闍崛山門) who was Jogye(曹溪) descendant(雲孫), he has met the heads of various temples including Deukjae for ‘direct communion’. After that, he exchanged with Wonmyo Yose who led Baekryeongyeolsa during training. Hyesim who became the second head of Suseonsa, his disciple, Jeongseon, Suu who discovered the site for Gilsangsa in Songgwangsan in order to move the stage of Jeonghyegyeolsa according to command, and Chungdam who was in charge of publication and distribution of a posthumous work were the priests who shared the last time with him. He directly met and exchanged with ‘Haedong Jogyesan Suseonsa an ascetic(海東曹溪山修禪社道人) Chungdam’, ‘to raise craftsman typesetting print eternal person(募工彫板印施無窮者) Suseonsa an ascetic(同社道人)’ Hyesim’, ‘an ascetic in the firm as donor(施主社內道人) Damryeong’ and ‘a wife of Jikseung who the head of native place in Naju as donor(施主羅州戶長直升妻) Jinuigeum’ who were described in the imprint of Hwaeomronjeolyo. In the process, his philosophy and though were matured.
Jinul met Mamyeong, Yongsu and Hobeop Bodhisattva in various sutras and discussion books for indirect communion. He met Seungjo &(Geumreungbo) Jigong, Samjo (Seungchan) &Sajo (Dosin), Jaeun(Hyeonjang), Wonhyo &Uisang, Itonghyeon &Hyeonsu (Beopjang), Jogye (Hyeneung) &Yeongga(Hyeongak) &Hataek(Sinhoe), Bangon(Geosa) &Baehyu (Geosa), Cheongryang (Jinggwan) &Gyubong (Jongmil), Gwijong (Jisang) &Imje(Uihyeon), Myeonggak(Seoldu Junghyeon) &Gwangye(Jihan), Beopan (Munik) &Unmun(Muneon), Channyeong &Dowon, (Hongju) Suryo &Bulan (Cheongwon), Boan (□-do), Jangro (Jongsaek), Cheonbok (Seunggo), Gyeongsan (Daehye) &Malsanni (Yoyeon), Jiso &Sugyeon, Cheonggye (Hongjin &Jinsanju) &Yongje (Soju &Jinsanju) and Beopdeung &Wibu (Daegak) Wonhwaeom for philosophical conversation. In the process, Jinul was deeply affected by Hyeneung, Yeongga, Hataek, Jongmil, Yeongmyeong and Daehye. As a result, he could draw the topographic map of the three gates(三門), Jinsim-Seon(眞心禪) and Musim-Seon(無心禪) in Sung-Jeok-Deungji gate(性寂等持門), Won-Don-Sinhae gate(圓頓信解門) and Ganwha-Gyoungjeol gate(看話徑截門), which were his unique philosophical map.
Jinul who was the first runner of 16 national priests producted by Jogyesan Songgwangsa in Goryeo Age was the driving force that enabled Songgwangsa that produced 16 national priests and 2 royal priests including his disciple Jingak Hyesom to confirm its position as ancestral temple of Seung-Bo(僧寶宗刹). Cheonggyu and Bocheong of Suseonsa who contained the training trend of Jinul were the priming water to enable Songwangsa to become the temple of training. The driving force and priming water were originated from the philosophy and though formed by the highest priest Jinul through direct or indirect communion with the high priests of previous or contemporary age.
* Key words
The three gates, Sung-Jeok-Deungji gate, Won-Don- Sinhae gate, Ganwha-Gyoungjeol gate, Jinsim-Seon, Musim-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