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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문제>를 '풀로 덮어 놓았다가 다시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아위자님]의 설명에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봄봄의 의견을 드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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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名色이란 경에 따르면
'受, 想, 思, 觸, 作意'를 名이라 한다.
'4대, 4대소취색'을 色이라 한다.
여기까지는 [아위자님]과 [봄봄]의 의견이 갈라지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혹시 [아위자님]의 설명을 잘못 이해한 지점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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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문제는
'受, 想, 思, 觸, 作意'인 名도 名色이냐, 또한
'4대, 4대소취색'인 色도 名色이냐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아위자님]은 名도 名色이며,
'4대, 4대소취색'인 色도 名色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봄봄의 의견은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名色이란 名과 色이 화합이든지 맞물린 상태이든지 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名色이란 생명체(有情)와 관련된 표현이며, 名도 역시 有情과 관련된 표현이지만,
色은 有情과도 관련되지만 無情物에도 관련되는 표현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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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아위자님]과 [봄봄]의 의견이 갈라지는 것 같습니다.
[아위자님]은 無情物인 <짜장면>도 名色이라는 입장이시고
봄봄은 <짜장면>은 色이라는 입장입니다.
<짜장면>은 음식이여서 혼란이 있을 수 있으니, 황금<金>으로 바꾸겠습니다.
이렇게 바꾸어도 전혀 문제가 없겠지요?
[아위자님]은 이 <金>이 [우리들]에게 인식될 때, 혹은 인식되려면
名色이라는 방법이 아니면 인식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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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비유로 말씀드렸지만 다시 비유하면
욕계에 태어났지만 금생에 해탈하신 A(아라한),
욕계에 태어났지만 까마(慾- 5하분결을 해결하신) B(불환자이신 아위자님),
욕계에 태어나서 까마(慾)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5욕락에 매여 사는 C(무문범부인 봄봄)
이렇게 세 사람이 <金> 덩어리 한 개를 같이 보게 되었다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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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아라한)은 眼으로 色<金>을 見할 뿐입니다. (욕탐이 전혀 없으실 뿐 아니라, '나'라는 見등도 없으십니다.)
B(불환자)는 眼으로 色<金>을 見하시지만 (5겹의 욕 없음)
'나'라는 자만 등 은 남아 있습니다. (즉 前5根과 前5境 사이에서는 결박이 생겨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意와 前5根과의 문제는 해결했는지 경문에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즉, 또는 [意와 法들 사이]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어서, 名과 혹은 名色에 결박된 상태)
C(무문범부)는 眼으로 色<金>을 見하자마자
대부분의 경우 眼識이 생겨나고 欲貪(貪-喜-愛)이 생겨나고 結縛이 생겨납니다.
이른바 外로 흩어진 경우입니다.
자, 그러면 이때 세 사람이 같이 보고 있는
이 특정 色<金>은 色이냐 名色이냐 혹은 名인지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봄봄의 의견은 확고하나 각자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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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名色과 관련된 色界 혹은 名과 관련된 無色界에 태어난 어떤 중생이 있다고 합시다.
만약 慾을 완전히 벗어났다면 불환자이고 까마 혹은 5겹의 慾을 즐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慾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불완전하게 일시적으로 벗어나서 慾이 잠재되어 있다면
경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病이 재발하듯이 慾이 생겨난다면
그 중생은 색계나 무색계에 머무를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물면 색계나 무색계에 머물면서, 5겹의 慾을 즐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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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명색(名色)은 그 어떠한 경문에서도 항상 일관되게 <밖으로(bahiddhā)>인가?>
名色을 밖으로(bahiddhā)라고 표현된 경문은 봄봄은 니까야에서 1곳에서만 찾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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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님]이 번역한 경문을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avijjānīvaraṇassa, bhikkhave, bālassa taṇhāya sampayuttassa evamayaṃ kāyo samudāgato.
비구들이여, 어리석은 자는 無名에 덮이고 愛에 묶여서 이와 같이 이 身이 집기集起한 것이다.
Iti ayañceva kāyo bahiddhā ca nāmarūpaṃ, itthetaṃ dvayaṃ,
dvayaṃ paṭicca phasso
saḷevāyatanāni [saḷāyatanāni (ka.)],
yehi phuṭṭho bālo sukhadukkhaṃ paṭisaṃvedayati etesaṃ vā aññatarena’’.
<ayañ ca kāyo>과 <bahiddhā ca nāmarūpaṃ> - 한 쌍(dvaya)
바로 이 [집기한] 身과 밖으로 名色이라는 쌍이 있으며,
이 쌍을 緣하여 觸이 있고
六處들이 있으니,
어리석은 자는 六處들이나 六處들 중 일부에 접촉(觸)되어 樂・苦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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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愚者(든지 賢者든지) <無名에 덮이고 愛에 묶여서> 이 身이 集起.
2. <ayañ ca kāyo>과 <bahiddhā ca nāmarūpaṃ> - 한 쌍(dvaya)
3. <한 쌍(dvaya)>을 緣한 觸
[아직 육입이 생겨나기 전 상황, 즉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욕계의 삼사화합의 6觸(身)은 아님.]
4. 그 다음이 <saḷāyatanāni>, 그리고 나서
5. <육입이나 육입들 중 어떤 것을> 接(phuṭṭho)한 愚者(든지 賢者든지) 樂-苦를 감수한다(vedayati).
☞ 六處와의 (觸)接 <phassena phuṭṭho>
[Avijjāsamphassajena, bhikkhave, vedayitena phuṭṭhassa assutavato puthujjanassa
evameva kho, āvuso, bhikkhu chasu phassāyatanesu nevattānaṃ na attaniyaṃ samanupassati.
도반 우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여섯 가지 감각접촉의 장소들 가운데서
그 어떤 것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관찰(*samanupassati)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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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이 찾아 본 직접 언급된 유일한 경문입니다.
그러면 직접 언급되지 않았지만 명색을 내외로 추정할 수는 다른 경문을 보겠습니다.
Dhammānupassanā āyatanapabbaṃ
5-3. 법의 관찰: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處)에 마음챙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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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 ‘‘Puna caparaṃ, bhikkhave, bhikkhu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chasu ajjhattikabāhiresu āyatanesu.
Kathañca pana, bhikkhave, bhikkhu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chasu ajjhattikabāhiresu āyatanesu?
15.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六內外處)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어떻게 비구가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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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ha, bhikkhave, bhikkhu cakkhuñca pajānāti, rūpe ca pajānāti,
yañca tadubhayaṃ paṭicca uppajjati saṃyojanaṃ tañca pajānāti,
yathā ca anuppannassa saṃyojanassa uppādo hoti tañca pajānāti,
yathā ca uppannassa saṃyojanassa pahānaṃ hoti tañca pajānāti,
yathā ca pahīnassa saṃyojanassa āyatiṃ anuppādo hoti tañca pajānāti.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눈을 꿰뚫어 안다. 형상을 꿰뚫어 안다.
이 둘을 조건으로(緣) 일어난 족쇄도 꿰뚫어 안다.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족쇄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족쇄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
‘‘Manañca pajānāti, dhamme ca pajānāti, yañca tadubhayaṃ paṭicca uppajjati saṃyojanaṃ tañca pajānāti,
yathā ca anuppannassa saṃyojanassa uppādo hoti tañca pajānāti,
yathā ca uppannassa saṃyojanassa pahānaṃ hoti tañca pajānāti,
yathā ca pahīnassa saṃyojanassa āyatiṃ anuppādo hoti tañca pajānāti.
마노를 꿰뚫어 안다. 법을 꿰뚫어 안다. 이 둘을 조건으로(緣) 일어난 족쇄도 꿰뚫어 안다.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족쇄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족쇄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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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i ajjhattaṃ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bahiddhā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ajjhattabahiddhā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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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위자님]은 1.[眼~意] 內外處 [色들~法들]은 모두 名色이며,
또한 2.<명색(名色)은 그 어떠한 경문에서도 항상 일관되게 <밖으로(bahiddhā)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본 경문에서 內로(ajjhattaṃ)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인지 문제가 됩니다.
또한 같은 경문에서도 이른바 [5蘊 名色]이라는 5蘊에 대한 법수관에서도
<내로 외로 내외로> 라는 표현이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면 1.과 2.를 모두 만족하는 설명을 [아위자님]이 말씀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眼의 대경인 色<金> 문제는 본 주제에 관련되므로 제외하더라도
非色이라고 누차 설명하신 [意]가 왜 名色인가 하는 점은 설명해 주셔야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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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문 번역과 해석에 관련된 문제이긴 하지만
[밖으로(bahiddhā) <오욕락으로 부터 시작하는>에 대해서]
<오욕락으로 부터 시작하는>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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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밖으로 흩어진 열의인가?
비구들이여, 밖으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 계속해서 흩어지고 계속해서 방해받는 열의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밖으로 흩어진 열의라 한다.”
‘‘Katamo ca, bhikkhave, bahiddhā vikkhitto chando?
Yo, bhikkhave, chando bahiddhā pañca kāmaguṇe ārabbha anuvikkhitto anuvisaṭo –
ayaṃ vuccati, bhikkhave, bahiddhā vikkhitto chando.
6. 수행승들이여, 밖으로 산란된 의욕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으로 흩어지고 혼란되는 의욕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밖으로 산란된 의욕이라고 한다.]
ārabbha : [ind.] beginning with; referring to; about.
<bahiddhā pañca kāmaguṇe ārabbha>를 <밖으로(bahiddhā) <오욕락으로 부터 시작하는>으로
번역하신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외로' 라는 것은 '오욕락으로부터 시작된다.'>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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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은 빨리어를 다른 분들의 번역에 의존 할 수밖에 없어서
위 두 분의 번역과 영어 번역을 참고 하면 <밖으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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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how is desire outwardly scattered?
Whatever desire is stirred up by the five strings of sensuality, outwardly dispersed and dissipated,
that is called outwardly scattered des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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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of what sort, monks, is desire that is outwardly diffuse?
Desire which, outwardly concerned with the five sensual delights,
is scattered abroad and dissipated, is called 'outwardly diff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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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And what, beggars, is wishing that is scattered abroad?
Whatever, beggars, is wishing set on,
scattered following after, diffused following after, the five external pleasure cords,
this, beggars, is what is called wishing that is scattered abo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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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구문이 있습니다.
<tathāgataṃ ārabbha ajjhattaṃ sati upaṭṭhāpetabbā.
如來를 <대상으로 안으로>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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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들이여, 내적인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는 무엇이든지 장애이고
외적인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도 무엇이든지 장애이다.
그러므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의 장애라는
이러한 개요로 표현된 것은 이런 방법에 의해서 두 가지가 된다.
Yadapi, bhikkhave, ajjhattaṃ kāmacchando tadapi nīvaraṇaṃ,
yadapi bahiddhā kāmacchando tadapi nīvaraṇaṃ.
‘Kāmacchandanīvaraṇa’nti iti hidaṃ uddesaṃ gacchati.
Tadamināpetaṃ pariyāyena dvayaṃ hoti.
1) 수행승들이여,
내적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도 장애이고
외적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도 장애이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라는 장애는 이러한 가르침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이치에 의해서 둘이 된다.
[Idha, bhikkhave, bhikkhu
santaṃ vā ajjhattaṃ kāmacchandaṃ ‘atthi me ajjhattaṃ kāmacchando’ti pajānāti,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자기에게 감각적 욕망이 있을 때 '내게 감각적 욕망이 있다.'고 꿰뚫어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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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또한 번역 문제이면서 內外로의 해석입니다.
Yaṃ kiñci Rāhula ajjhattaṃ paccattaṃ kakkhaḷaṃ kharigataṃ upādiṇṇaṃ, seyyathīdaṃ kesā lomā
nakhā dantā taco maṃsaṃ nahāru aṭṭhī aṭṭhimiñjā vakkaṃ hadayaṃ yakanaṃ kilomakaṃ
pihakaṃ papphāsaṃ antaṃ antaguṇaṃ udariyaṃ karīsa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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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ṃ vā pan’ aññam-pi kiñci ajjhattaṃ paccattaṃ kakkhaḷaṃ kharigataṃ upādiṇṇaṃ,
ayaṃ vuccati Rāhula ajjhattikā paṭhavīdhā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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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ā c’ eva kho pana ajjhattikā paṭhavīdhātu yā ca bāhirā paṭhavīdhātu paṭhavīdhātur-ev' es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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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ṃ: n’ etaṃ mama, n’ eso ham-asmi, na {me'so} attā 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paṭhavīdhātuyā nibbindati, paṭhavīdhātuyā cittaṃ virājeti.
라훌라여, 안으로 낱낱이 단단한 것 내지 고체로 取해진 것,
가령 머리카락˙털˙손발톱˙살갗˙살˙[…],
혹은 그 외에도 안으로 낱낱이 단단한 것 내지 고체로 取해진 것은 무엇이든 —
라훌라여, 이를 일러 내적인 地界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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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내적인 地界와 외적인 地界는 동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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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正慧로 보아야 한다.
그것을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正慧로 보고서 地界를 염리하고 地界로부터 心을 離貪한다. [나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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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훌라여, 안으로(ajjhattaṃ) 각각 거칠고 견고한 것과 그것에서 파생된 것,
예를 들어 머리카락, 털, 손톱, 이빨, 피부, 근육, 뼈, 골수, 신장, 심장, 간장, 늑막, 비장, 폐 …(생략)…
모두 내적인(ajjhattikā) 地界이다.
이러한 내적인(ajjhattikā) 地界와 외적인(bāhirā) 地界를 ‘地界(paṭhavi-dhātu)’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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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올바른 반야로써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daṭṭhabba) 한다.
이와 같이 그것을 올바른 반야로써 있는 그대로 보고서(disvā)
地界를 염오하고, 地界로부터 心(citta)을 이탐시켜야(virājeti) 한다. // [아위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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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님]과 [아위자님]의 번역은 대동소이합니다.
문제는 이 경문을 근거로 [아위자님]은 [ajjhattaṃ]라는 표현은 [daṭṭhabbaṃ]와 연관시켜 설명하십니다.
달리 의견을 말하지 않아도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daṭṭhabbaṃ]이고,
[ajjhattaṃ paccattaṃ] [upādiṇṇaṃ]것이 [ajjhattikā]라고 설명하는 경문으로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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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 viññāṇaṃ ‘asmī’ti vadāmi, napi aññatra viññāṇā ‘asmī’ti vadāmi.
api ca me, āvuso,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asmī’ti adhigataṃ
‘ayamahamasmī’ti na ca samanupassā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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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meva kho, āvuso, kiñcāpi ariyasāvakassa pañc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bhavanti,
atha khvassa hoti yeva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anusahagato ‘asmī’ti, māno ‘asmī’ti, chando ‘asmī’ti anusayo asamūhato.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가 제거 되었다 하더라도,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번뇌는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so aparena samayena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udayabbayānupassī viharati.
도반들이여, 그는 나중에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iti rūpaṃ, iti rūpassa samudayo, iti rūpassa atthaṅgamo;
iti vedanā... iti saññā... iti saṅkhārā...
iti viññāṇaṃ, iti viññāṇassa samudayo, iti viññāṇassa atthaṅgamo’ti.
tassa imes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udayabbayānupassino viharato
yopissa hoti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anusahagato ‘asmī’ti, māno ‘asmī’ti, chando ‘asmī’ti anusayo asamūhato, sopi samugghātaṃ gacchatī”ti.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형성이다. 이것이 형성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형성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의식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도반들이여, 그가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 머물 때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번뇌는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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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하분결(慾등)을 해결하신 불환자.
그럼에도 5蘊(여기서는 4蘊이 아님, 즉 色蘊을 포함하는 名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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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지막으로 [위빳사나 마가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에서 본문을 보겠습니다.
♦ “atha kho, bhikkhave, vipassissa bodhisattassa etadahosi —
‘kimhi nu kho asati viññāṇaṃ na hoti, kissa nirodhā viññāṇanirodho’ti?
atha kho, bhikkhave, vipassissa bodhisattassa yoniso manasikārā ahu paññāya abhisamayo —
‘nāmarūpe kho asati viññāṇaṃ na hoti, nāmarūpanirodhā viññāṇanirodho’ti.
비구들이여, 그때 위빳시 보살에게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없을 때 의식이 없으며, 무엇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소멸하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은 지혜로운 주의를 통하여 마침내
'정신 · 물질(名色)이 없을 때 의식이 없으며, 정신 · 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소멸한다.'라고
통찰지로 분명하게 꿰뚫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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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승들이여, 마침내 보살 비빳씬은
‘나는 이러한 원만한 깨달음으로 향한 길을 얻었다.817) 곧,
명색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817) Smv.461에 따르면,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란
네 가지 진리(四諦: catusacca)를 깨닫기 위한 고귀한 길
또는 열반(nibbāna)을 깨닫기 위한 고귀한 길을 말한다.
고귀한 길이라는 것은 그것을 위한 이름인데, 통찰의 길(vipassanāmagga)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 61. “atha kho, bhikkhave, vipassissa bodhisattassa etadahosi —
2.21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adhigato kho myāyaṃ maggo sambodhāya<cf. vipassanā-maggo bodhāya> yadidaṃ —
'나는 참으로 깨달음을 위한 위빳사나의 도40)를 증득하였다. 즉
40) 원어는 vipassanā-maggo이다.
그러나 미얀마 육차결집본에는 단지 maggo로만 나타난다.
그리고 육차결집본 주석서에 "maggo ti vipassanā-maggo"
(DA.ii.46에 해당하는 육차결집본)라고 주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러나 PTS본 주석서에는 이 구절이 나타나지 않는다.
PTS본의 저본으로 사용된 스리랑카 고 필사본에는 이 구절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역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경의 원문은
vipassanā-maggo(위빳사나의 도) 보다는 maggo(도)가 더 타당한 듯하다.
vipassanā-maggo라는 표현은 주석서와 복주서에서 몇 번 나타날 뿐
다른 경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위빳시 보살과 위빳사나를 연결짓기 위해서 스리랑카의 필사본들에는
이렇게 적혀서 유통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이것은 역자의 추측일 뿐이다.
nāmarūpanirodhā viññāṇanirodho,
정신 · 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이 소멸하고,
viññāṇanirodhā nāmarūpanirodho,
의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 · 물질이 소멸하고,
nāmarūpanirodhā saḷāyatananirodho,
정신 · 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saḷāyatananirodhā phassanirodho, phassanirodhā vedanānirodho, vedanānirodhā taṇhānirodho,
taṇhānirodhā upādānanirodho, upādānanirodhā bhavanirodho, bhavanirodhā jātinirodho,
jātinirodh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nirujjh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i’.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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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nirodho nirodho’ti kho, bhikkhave, vipassissa bodhisattassa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비구들이여, 위빳시 보살에게는 '소멸, 소멸'이라는 전에 들어 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영지(明)이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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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atha kho, bhikkhave, vipassī bodhisatto aparena samayena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udayabbayānupassī vihāsi —
2.22 "비구들이여, 위빳시 보살은 그 후에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오취온)에 대해서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관찰(*anupassī)을 하면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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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i rūpaṃ, iti rūpassa samudayo, iti rūpassa atthaṅgamo;
iti vedanā, iti vedanāya samudayo, iti vedanāya atthaṅgamo;
iti saññā, iti saññāya samudayo, iti saññāya atthaṅgamo;
iti saṅkhārā, iti saṅkhārānaṃ samudayo, iti saṅkhārānaṃ atthaṅgamo;
iti viññāṇaṃ, iti viññāṇassa samudayo, iti viññāṇassa atthaṅgamo’ti,
'이것이 물질(色)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아 느낌(受)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想)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형성(行)이다. 이것이 형성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형성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의식(識)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tassa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udayabbayānupassino viharato
na cirasseva anupādāya āsavehi cittaṃ vimuccī”ti.
그가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에 대해서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관찰(*anupassino)을 하면서 머물자
오래지 않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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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내용이 경문에 많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상카라[行]들이다. 이것이 상카라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상카라들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알음알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라고 [관찰하며 머문다].
iti ajjhattaṃ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bahiddhā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ajjhattabahiddhā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Samudayadhammānupassī vā dhammesu viharati,
vayadhammānupassī vā dhammesu viharati,
[cf.udayabbayānupassino]
samudayavayadhammānupassī vā dhammesu viharati.
이와 같이 안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법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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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시 보살께서 해탈하신 과정은
연기를 사유하시다가 [識-名色]의 互緣(이른바 10支)에 의해서 윤회하는 것을 아시고 나서
[명색]의 멸로부터 [식의 멸, 명색의 멸, 육입의 멸, 등등....]을 아시고
<깨달음의 도(보리도) 혹은 깨달음을 위한 위빳사나의 도를 얻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5蘊, 5온의 일어남, 5온의 되돌아감> 隨觀(anupassati)
그리고 <5온의 (udayabbaya)을> 隨觀(anupassati)하여 해탈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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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分觀(vipassati)과 隨觀(anupassati)이 같지 않다면...?
혹은 次第가 分觀(vipassati) 이후 隨觀(anupassati)이 아니라면...?
본 경은 온갖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설명하면서
정작 중요한 위빳사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지...?
그러면서 隨觀(anupassati)하여 해탈하셨다고 나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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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위빠사나>라는 표현으로 가장 상세하게 설명하는 경문은 M111입니다.
그러나 비상비비상처와 상수멸은 禪에 출정하고 나서(즉 그 이전의 초선~무소유처 까지는 출정하지 않고)
[ 21. 그는 새김을 가지고 그러한 성취에서 일어났다.
그러한 성취에서 새김을 가지고 일어나서 이제는 소멸하고 변해버린 과거의 상태를 이와 같이
‘과연 이러한 상태들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생겨났고, 존재했지만 사라졌다.’라고 관찰했다.
So tāya samāpattiyā sato vuṭṭhahati.
So tāya samāpattiyā sato vuṭṭhahitvā
ye dhammā atītā niruddhā vipariṇatā te dhamme samanupassati –
‘evaṃ kirame dhammā ahutvā sambhonti, hutvā paṭiventī’ti.
20. "그는 그 증득에서 마음챙기며 출정(出定)한다.
그는 그 증득에서 마음챙기면서 출정하여 과거에 소멸하고 변해버린 그 법들을 관찰[隨觀]한다.
'이와 같이 이 법들은 없었는데 생겨나고, 있다가는 사라진다.'라고.]
☞ 두 경지에서는 합수관(samanupassati)이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첫댓글 ㅎㅎ
^^;; .... 삐지신 것 까지는 눈치 챘는데
<망할 놈들>이라고 저주^^까지 하시는 지경까지는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새해에는 하여간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이런 상황에게 <풀로 마냥 덥어 두기에는>....
일단 급하게 의견을 올려 두고 올해 가기 전 까지는 정리하여 보고 하겠습니다. _()_
<불교의 '인식론'>을 가장 잘 ....... 아니 <자세하게> 언급한 경문이.......
<맛찌마 니까야 제1권 제1경>입니다. ..... 그 경의 제목이 뭐더라? ... 하여간 <뭔 뿌리>였던 것 같은데요.....
하여간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 들으려면 '뿌리'가 되는 경>이라는 뜻으로 외우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못 알아 들으면...... <부처님 말씀 '전체'를 못 알아 듣는다>는 뜻이겠지요.
@아위자 경은 <불교의 '인식론'적 입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심의식과 대상(ārammaṇa)과의 관계>에서 <대상(ārammaṇa)에 대한 '인식론'>을 <경>에서 처럼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요....... <불교>는 <'심의식'에 방점을 찍는 경우>가 없는데요........ 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항상 <대상(ārammaṇa)에 '방점'>을 찍으셔서.......... '아비담마'를 거론 하시고, '이탐'을 거론하시고, '滅'을 거론하시고, '염오'를 거론하시고 하시거든요.........
@아위자 '명색'이란? 대상(ārammaṇa)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런데 <그 대상(ārammaṇa)에서 어떻게 '六識'이 연기됩니까?>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위자 아마도....... 그러하기 때문에....... <명색>을 <유정만이 지니는 것>이라고...........ㅋㅋㅋ
@아위자 대화가 될려면....
가능한 본 주제에서 논의된 것을 중심으로 말씀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든 경문이 본 주제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만은
본문에서 질문했고 의견을 드린 것을 중심으로 대화가 이여지면 좋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문제에 대해서 다른 경문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하시면 검색해서 올리겠습니다.
아하~
두분 즐거운 토론되시구요.
만약 봄봄님이 아위자님을 만났다고 치면.. 눈으로 보는 아위자님의 용모는 명색입니다.
하늘(공간)을 한 번 쳐다보더라도 하늘도 명색이고 아위자님이 먼 생각을 하고 있나 하는
아위자님의 마음이란 것도 대상인 한 명색입니다. 아위자님의 마음은 그 마음의 대상인 명색과
연생연멸하겠지요...
불교는 인식론이 맞다고 봅니다.
'識'이라는 놈이 <제 아무리 '똑똑한 놈'>이라고 한 들 ............. <짜장면>과 <볼펜>을 어떻게 구분하겠느냐?.....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인데요............ 그래서 ... <짜장면>이라는 '명색'이 제공하고 있는 <색성향미촉법 nimitta(相)>가 없으면 ........ 제아무리 <제 아무리 '똑똑한 놈'인 識>이라고 한 들 ............. <짜장면>을 구분해 낼 재주가 없는 것이다........라는 지적을 하고자 하는 것인데..............
'아위자'의 <설명 실력이 '형편이 없다' >보니 ........ nimitta(相)공부만 40년 넘게 공부해 왔으면서도.... 결국 또...... 설명에 실패하는 것 같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 ....
경전에 ...... <짜장면>이라는 용어가 나올 '이치'도 없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위자 겨우 언급되는 용어는 <色>이라는 용어인데........... '그 <色>'이라는 것을 <識이 '어떻게 구분해 내는 것인가?>......... 를........... 가급적 .......'인식론'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서 설명하자니.... 솔직히 ... '아위자'의 <설명 실력>에 한계를 느낍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위자 나아가 ........ 중생들이 <'짜장면'이라는 '物質食'을 하지만 사실상은 '識食'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을 ........... 설득력 있게 설명할 재주를 '아위자'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아위자 남들이...... 알아 듣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는 '아위자'가 ......... 이렇게 된 이유는 ... 그 동안 <너무나 긴 시간>을 '아위자' 자신만을 설득시키기 위한 <공부>만 해 왔던 탓인데요........... 남에게 <알아 듣게 '설명'>하는 재주는 발달 시키지 못한 체로...... 자신을 위한 <공부>만....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봄봄'님!
'아위자'가요........ 남들하고는 <무조건 '대화가 안 되는 놈'>은 아닙니다. 禪家의 선방스님네들 하고는 ...... 기가차게 <대화하고 서로 통하거든요........> .........ㅋㅋㅋㅋ........ 그 양반들은 '니까야'의 '니'도 모르시는 분들입니다. 읽어 본 적도 없더라구요.......... 제가 존경하는 혜국스님도 "어~~ 그려? 남방의 경전에도 그렇게 쓰여져 있어? 나도 한 번 읽어 보아야겠네."라고 하시고....... 스님이 <니까야 '번역본'>을 읽으시게 한 장본인이 '아위자'인데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
혹시 시간 나시면 <충주 석종사에 가셔서> 스님에게 직접 질문해 보십시오. 아마도 스님은 저 보다 <잘 설명하시는 재주>가 있으시니까.......... 요.
제가 이해하고 있는 '불교'는 ....... '현재' 혹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 '界'>에만 방점을 찍더라구요......... 識에게도 '界'인데요....... 그 <識에게 '界'>는 心에게서 물려 받은 것이지 識 고유의 것은 아닌데요.......... 그 <識에게 '界'>는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識은 '자신을 界'로 인식하지는> 못 합니다. 그래서 三昧가 강조되는 것이지....... 다른 의미에서 三昧가 불교에서 강조되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말하자면 <如實智見은 '삼매'에서만> 이라는 점을 유위하셔야 한다는 말씀만 드리고 .......... 일단 <후퇴>를 선언합니다. ㅋ.
언젠가........ '봄봄'님을 <오프라인>에서 만나게 되면......... 그 때 다시 ........ <짜장면 '먹으면서'> 다시 도전해 볼까 합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아위자 이렇게 해서 <'명색'문제는 얼렁 뚝딱 .....다시 '풀로 덮고'>서.........
<'합수관(samanupassati)' 문제>로 넘어 가고자 합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상황이 불리 할 때는....... <36계>가 최고이므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위자 色이 名色이라는 설명도 해 주시지 않은 것은 그렇다고 해도...
意가 왜 名色인지 최소한 설명해 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봄봄도 스토커^^ 기질이 있어서 본 커페 강퇴시키지 않으시면
반복 질문합디다. 농담아닙니다.
아위자님! 올해 진더기 같은 [망할 놈]^^;;은 <풀로 덥고>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ㅋㅋㅋㅋㅋ 아위자님! 감정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 제기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名色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면 [識-名色] 互緣을 깨닫는 것은
모든 부처님들이 도달하신 지점이므로 어렵다고 하더라도
말씀하신 취지를 이해도 하지 못하게 될 것 같습니다.
봄봄이 名色에 대해서 아위자님의 설명에 다른 의견을 드리는 것은
일차적으로 아위자님에서 받은 것이 많기 때문에
최소한 봄봄이 생각한 것을 말씀드릴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위자님이 받아 들이시지 않으셔도
다른 도반님들은 최소한 '이러한 견해도 있구나'라고
알고나 계셔야 되는 내용이라 생각하는 하기 때문입니다.
@봄봄 감히 말씀드리면 [아위자님]의 名色에 대한 해석이 위크 포인트입니다.
@봄봄 아위자님은 아실 것입니다.
봄봄은 이 문제에 대해서 최소한 4년전 부터 가지고 있었고
작년 이 맘때 부터 직접 의견을 드린 것 입니다.
그만큼 생각하고 생각해서 질문도 드렸고 의견도 드린 것입니다.
재밌게 공부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