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련에게 블로그 하는 것을 들킨 무대는 이제 당당하게 사진 찍는 데에 집착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이 아닌, ‘사진기’에 집착하게 된 것이지만, 영아를 예쁘게 찍어주기 위해서 라며 각종 렌즈를 사들이는 무대를 건성으로 지켜보기만 하던 금련은 다음 달 카드청구서를 확인하자마자 홧김에 무대의 등짝을 후려쳤다.
“당신 제정신이야? 우리가 아무리 맞벌이라 해도 아파트 대출금도 있고, 애도 태어났는데 이렇게 쓸데없는 데 거금을 펑펑 쓰다니! 이제 다신 카메라에 돈 못 쓸 줄 알아!”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이게 왜 쓸데 없어? 카메라는 비싼 만큼 값을 한다고. 이게 다 우리 영아 잘 찍어주려고 하는 건데.....”
그러나 아이 사진 찍어주는 건 뒷전이고 무대의 취미는 점점 소위 말하는 ‘장비병’으로 흐르고 있었다. 사진과 카메라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가입했던 인터넷 카페에서 다른 사람들이 새로 샀다며 올리는 장비들을 보고 군침을 흘리더니 어느새 그것들을 금련 몰래 사들이곤 하는 것이었다. (중략)
삶의 그 어떤 시점에서든 나를 지탱해줄 수 있는 정신적인 힘, 그것을 다른 말로 ‘철학’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에서 헤겔을 거쳐 데리다에 이르기까지를 줄줄 꿰어야만 철학이 아니다. 수많은 고비에서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근거를 마음에 품고 놓지 않았던 박지성이나 김연아 같은 이들도 분명한 자기 철학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제대로 된 취미에 곱게 빠져들면 그 자체로 자기 성찰이 된다. 취미란 아무런 금전적 이익을 바라지 않고 무언가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기에, 그것에 몰두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도 모르던 내면적 성향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커피를 직접 드립해서 마시는 사람이나 그림을 만나러 미술관을 찾는 사람, 혹은 시간을 쪼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철학으로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키울 기회가 더 많다.
행복학의 창시자인 마틴 셀리그먼의 연구를 보면 취미 활동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더욱 명확해진다. 행복한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직장 생활에, 시험공부에 쫓기는 우리는 행복을 남태평양의 어느 산호섬의 백사장에서 야자수에 걸어놓은 해먹 위에 누워 코코넛 주스를 마시는 장면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천국과 가장 닮았다는 섬 몰디브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무료해서’ 자살을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그림은 대폭 수정해야 할 것 같다. 현실의 행복한 사람들은 밭을 갈거나 그림을 배우거나 벨리댄스의 허리 돌리는 동작을 익히는 등 뭔가 목표를 가지고 끊임없는 노력을 함으로써 행복을 얻는 거라고 한다.
여자들은 성취보다는 자기만족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그나마 여러 취미 활동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남자들의 취미는 비율이나 종류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한정적이다. 그나마 남자들의 취미는 ‘장비병’으로 잘못 발전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칼럼을 보니 한국에서 카메라 사용자들의 기기에 대한 관심과 수준이 매우 높아서 해외 유명 메이커들은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한국을 테스트 마켓으로 삼는다고 한다. 그런데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의 작품 수준은 그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취미로 사진을 시작했다는 이들의 작품을 보면 ‘장비의 힘’이 선명하게 느껴질 뿐 실력이 통 늘지 않는구나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도 그 당사자는 어김없이 몇 달에 한 번씩은 본체와 렌즈를 팔고 사고 모으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사진이 취미가 아니라 사진기가 취미인 것이다. 사진뿐만이 아니다. 자전거, 낚시, 바이크, 자동차 튜닝, 오디오, 최근엔 캠핑 등의 취미 활동에서 소위 장비병 환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장비병이라는 신조어는 취미에 필요한 장비들에 끊임없이 욕심을 내는 일련의 행동들을 희화한 것인데, 유독 한국의 30대 이상 남성들에게서 두드러진다. 이게 꽤 많은 돈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가정 경제의 파탄을 가져오는 주범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고 본다. 장비병 환자(?)들의 대다수는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든 성실한 직장 남성들이다. 길어야 몇 년 목돈 좀 탕진하다가 정신 차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 정도 투자할 가치는 있다고 본다. 장비병으로 정말로 큰 문제를 일으키는 남자들은 장비병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라도 얼마든지 사고를 칠 만한 정서적 결함을 이미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안쓰러운 점은 그네들이 몰두하는 게 ‘정말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 붙일 곳 없는 자아를 순간적으로나마 우쭐하게 해줄 물건들일 뿐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진득하게 몰입해 단계적으로 성취를 쌓아나가기보다는 장비를 업그레이드함으로써 손쉽게 성취감을 느끼려 드는 취미 활동은 오래갈 수도 없으려니와 수많은 취미의 미덕을 극히 일부밖에 얻을 수 없다. 유난히 외로운 한국의 남자들은 영화 <아이언 맨>의 주인공처럼 첨단 장비로 무장해 영웅으로 거듭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지만, 슬프게도 장비만 갖춘다고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40대까지의 취미를 평생 가져가게 된다고 한다. 뇌의 전두엽이 노화를 일으키기 시작하는 40대 후반 이후에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이후에 새로운 것을 배워 취미로 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직장 외의 인간관계는 거의 만들지 않는 남자들이 은퇴 후면 거의 외톨이가 되는 현재의 상황을 되풀이하게 된다면, 여자들처럼 또래와 놀러 다니는 재미조차 누리기 힘들다. 남는 시간이 많아지는 은퇴 이후부터 취미 생활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으로 젊은 시절 일만 하다가는 앞으로 의학의 발달에 의해 8, 90년에 이르게 될 노후를 ‘무료함’이라는 형태의 지옥에서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자들은 배우자보다는 자신을 위해 그가 늦지 않게 평생의 취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야 한다. 지금의 노년층 남편들이 많이 그러하듯 아내가 들고 나는 일만이 일생의 관심사가 되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이왕이면 쓸쓸한 장비병이 아닌 진정한 취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좋겠다. 함께 80년 동안 공유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을 찾는 과정 자체가 취미 활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구에서 가장 닮은 생명체, 남자와 여자
그러나 아직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른다
2011년에 출간된 남인숙 저
어쨌거나 남자는 필요하다 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첫댓글 탁구 라켓과 러버도 마찬가지 개념이겠죠...? 저는 20대지만 수 많은 장비를 사용해보고 제 자신에게 맞는 장비를 예전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비교적 빨리 찾아서 그 소유욕이 많이 사라진것같아요...ㅎㅎ 정착하기전엔 신제품 나올때마다 무조건 사서 시타하고 남주고.... 반복이었네요ㅜㅠ
제 얘기를......ㅡㅜ
좋은글이네요. '여성분들이 자기성취보다 자기만족에 더 관심이 많다' 그래서 전 취미에 빠져드는 여성분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져요.
난 성취쪽에 더 관심이 많은데...이젠 ㅠㅠ ㅎㅎㅎㅎ
@멋진걸 ㅋㅋ 누나 그래서 인기 많죠
@만수이모
@멋진걸 ㅋㅋ
아...카보나도...
뜨끔;;;;;
헐~~ 뜨끔...;;;
저도 이제 용품병 벗어나려고요.
한 3백가지의 블레이드와 수십가지의 러버들을 써보고서 매 주 폼을 다르게 해야하고 감각 적응해야하고...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은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