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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집사님, 유튜브로 예배하는 것도 좋은데… 우리 서로 교제하고 그런 게 너무 그리워요."
2021년 5월 어느 날, 주혜영 집사는 김정자 집사와의 통화에서 말했다. 주혜영 집사는 2020년 11월부터 어쩌다 보니 A교회에서 '나와져 있는' 상태가 됐다. A교회를 떠날 생각으로 안 나가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내 교회'였으니까. 그런데 내 교회에 도저히 갈 수가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몇 주간 다른 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렸다. 진주 내 다른 교회를 가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어디를 가든 비슷할 것 같았다. 동네가 좁아서 A교회에 다니다가 왔다고 하면 어떤 소문이 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났다.
"그냥 우리끼리 예배하면 안 돼요?"
사실 김정자 집사와 김형택 장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A교회를 떠나겠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후에 어떤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정말 더 이상 못 다닐 것 같아서 나온 것이다. 남편이 장로였기 때문에 A교회가 속한 교단 교회로 갈 수는 없었다. 얼마간은 온라인으로 여러 교회 예배를 드렸고, 물어물어 좀 더 개혁적인 성향의 교회에 찾아가 보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 교회에서 젊은 시절 20년 넘게 헌신했던 50대 부부가 새로운 교회에 정착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주혜영 집사의 제안은 새롭게 다가왔다. A교회를 다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시기에 떠났기 때문에, 함께 무언가를 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만 해도 '교회'를 개척한다는 생각은 없었고, 그저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자는 것뿐이었다. 장소는 주혜영 집사의 동생 부부가 주말마다 내려오는 경남 의령 시골 마을에 있는 오래된 가정집을 택했다. 그렇게 2021년 5월 23일, 김정자 집사와 김형택 장로, 주혜영 집사와 주 집사의 어머니 이정숙 권사, 김명자 권사 5명이 모였다. 김정자 집사에게 이 모임은 임시적인 것이었다. "권사님에게 그랬어요. 교회가 정해질 때까지 함께 예배드리고, 좋은 교회가 있으면 그리로 가셔도 괜찮다고. 그런데 이렇게 교회가 될 줄은 몰랐죠."
예배는 사도신경으로 시작하고 주기도문으로 끝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진행했다. 설교는 김형택 장로가 맡았다. A교회에서도 ㄱ 목사가 강단을 비울 경우 김형택 장로가 설교를 해 왔기 때문에 어색할 것도 없었다. 조촐했지만, 수년간 잃어버렸던 예배의 은혜를 조금씩 되찾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우리만의 공간에서 다시 반가운 얼굴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뻤다. 사실 햇수로 따지자면 서로 알고 지낸 지가 20년이 넘는다. 30~40대 젊은 시절부터, 주혜영 집사의 경우 10대 때부터 봐 왔다. 하지만 정작 A교회에 있었을 때는 교회로 인한 고민과 갈등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교인들은 함께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서로를 알아 가기 시작했다.
물론 목사 없이 예배하고, 나아가 교회를 한다는 것에 부담도 있었다. 신학적인 고민이라기보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 때문이었다. 김형택 장로는 사임계를 제출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교단에 속한 장로였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웠다. A교회를 떠난 교인들과 따로 교회를 만들어서 설교도 스스로 하고 있는 모습은 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좋은 소재였다. 누군가는 자유주의신학에 물들어 동성애를 옹호하고 그 때문에 따로 교회까지 만들었다고 소문을 낼 수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나중에 '뜰교회'라는 이름을 만들고도 한동안은 부러 바깥에 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런 것들은 진실이 아니기에 계속 눈치 볼 일은 아니었다. "저는 자유주의신학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고, 단지 '동성애는 반대하지만 동성애자는 사랑해야 한다'는 관점일 뿐이거든요." 김형택 장로는 평소 교제하던 목사들과도 수시로 전화해 신학적·신앙적 고민들을 이야기해 왔다. 다들 아주 보수적인 교단의 목사들이다. "어떤 주제들에 있어서는 정말 치열하게 토론하기도 해요. 그런데 목사님들이 저한테 '너는 좀 이상하다'고 하신 적은 없거든요. 복음이라는 기본 틀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잘못하고 있지는 않구나' 생각하죠." 모임을 시작하고 1년여가 지난 무렵에야 김형택 장로는 교인들에게 말했다. 누가 물어보면 뜰교회 다닌다고 하시라고, 설교는 장로가 한다고 하시라고.
목사 없이 예배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 듯한 나이 많은 권사들이 오히려 별로 저항이 없었다. 이정숙 권사는 자신 있게 말한다.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예배드리는 거 아입니까, 그지예? 꼭 목사님만 제사장이 아이거든요. 우리도 제사장 아입니까. 나는 그리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나는 거부반응이 없어요. 진짜 거룩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부감은 없어요." 김명자 권사는 지금의 뜰교회가 어떤 완성된 형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길을 보여 주시겠지, 그때를 기다리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거니까요.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겠죠."
김삼희 권사는 1년 늦은 2022년 5월 뜰교회에 합류했다. 그 역시 A교회를 떠나고 1년 반 동안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다른 교회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하지만 정착하지는 못했다. 경남 지역에는 자신과 맞는, 다닐 만한 교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히려 교회보다는 성당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A교회에서의 일로 한국교회에 염증이 생긴 것일까. 개신교는 뭔가 구심점이 없어 보였다. 목사 한 명이 자기 소견대로 교회를 좌우지하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성당 시스템은 왠지 모르게 괜찮아 보였던 것이다. 그런 고민을 하던 차에, 드물게 연락하던 김형택 장로에게 뜰교회에서 성찬식을 하니 와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마침 1년 반 넘게 성찬에 참여하지 못했던 상태. 그렇게 뜰교회 예배를 가 보게 됐다.
두 번째 뜰교회 예배에 참석했을 때 마음을 굳혔다. 예배 중에 이 교회에 계속 다녀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냥 '그래 이거지' 싶은 거 있잖아요. 저는 '내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기는 했는데, 그중 예배에 집중했던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근데 뜰교회에서 예배드리는 한 시간은 오롯이 집중해요. 그게 정말 좋았어요." 사실 김삼희 권사가 첫 예배 때 뜰교회에 다닐지 결정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저 예배 장소가 너무 멀다는 점이었다. 교인들이 살고 있는 진주 시내에서 차로 30분을 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본의 아니게 제가 운전을 다 하고 있다니까요. 하하하."
4월 16일 예배를 마치고 예배 공간 앞 뜰에서 사진을 찍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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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시내에서 차를 타고 국도를 달려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간다. 마을의 수호 나무 같은, 풍성한 잎을 가진 큰 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에 이르러 차를 세운다. 한가득 푸른 내음을 내는 나무 건너편에 오래된 단층 시골집이 보인다. 듬성듬성 녹이 슨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뜰이 나온다. 왼쪽으로 나무가 몇 그루 서 있고, 가운데는 잔디와 잡초가 무성하다. 오른쪽에는 콘크리트 바닥이 아무렇게나 치고 들어와 있다. 그 뒤에 서 있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집, 바로 뜰교회 교인들의 예배 처소다.
봄이 되면 푸르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뜰. 그래서 '뜰교회'다. "저희가 여기 처음 왔을 때가 5월이었는데 정말 예뻤거든요. 여기 사과나무에 꽃도 피고요. 그래서 교회 이름을 뜰교회로 하자고 했어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뜰을 내어 줄 수 있는 교회가 되자는 의미도 있어요." 조금 멀기는 해도 주혜영 집사는 작은 뜰을 가진 이곳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좋다.
4월 16일 주일예배는 조금 특별했다. 목회자를 데려와 성찬식을 하는 날이었다. 뜰교회는 1년에 한 번씩은 성찬식을 하려 한다. 김형택 장로의 대학 선배로, 평소 김 장로와 신앙적인 이야기를 자주 주고받는 우홍기 목사가 1년 만에 뜰교회를 찾았다. 예배 시간보다 30분 일찍 모인 교인들은 다 함께 테이블을 세팅하고 성찬식 때 쓸 빵과 포도 주스를 준비했다. 각자 자리에 앉아 커피와 차를 마시고, 김정자 집사가 작은 화이트보드에 예배 순서까지 적고 나니 시간이 됐다. 이날은 주혜영 집사의 자녀 두 명과 우홍기 목사, 취재하는 기자까지 함께해 작은 거실이 꽉 차 보였다.
예배는 김형택 장로의 인도에 따라, 보통의 장로교회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진행됐다. 우홍기 목사가 설교를 하고 예배 후 성찬식까지 집례했다. 장로교회 전통에 따라,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입교하지 않은 주혜영 집사의 자녀 두 명은 성찬을 받지 못했다. 자녀들이 빵을 먹고 싶어 하자 우홍기 목사가 양해를 구했다. "조금 더 커서 입교하면 그때 먹을 수 있어. 미안해." 주혜영 집사의 큰 자녀 두 명은 지난해 이맘때 뜰교회에서 우홍기 목사를 통해 입교식을 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세례와 성찬은 목사만이 집전할 수 있다. 뜰교회처럼 기성 교회를 벗어난, 목회자 없는 작은 교회에서도 이런 전통을 지켜야 할까. 김형택 장로도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년에 한 번은 성찬을 하기로 했는데, 과연 성찬을 장로가 할 수 있는지 저도 그게 퀘스천이었어요. 일단 목사님께 부탁해서 지난해 처음으로 성찬과 입교식을 했죠. 들어 보니까 다른 평신도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아닌 리더도 성찬을 인도한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할 수도 있겠지만… 뭐 1년에 한 번이라도 목사님 모셔서 설교도 듣고, 목사님 대접하면서 우리도 맛있는 식사도 하고 그러니까 좋더라고요."
예배를 마치고 조촐하게 성찬식을 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뜰교회는 평소 6명이 모인다. 김형택 장로가 근 몇 년간 해외 출장이 잦아 한국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해외에서 김 장로는 전화로 예배에 참여하고 설교를 전한다. 그게 잘될까 싶지만 뜰교회 교인들은 이제 익숙하다. 김형택 장로의 설교는 실제 삶에서 적용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것은 아니기에 부족한 점은 있겠지만, 추상적인 말들을 "땅으로 붙이는" 일에는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본다. 설교가 끝나면 자유롭게 질문이나 의견도 주고받는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니까 부족한 설교에 채워지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예배가 끝난 후에는 정해 둔 책을 읽고 책 내용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간 <만화 기독교강요>(생명의말씀사)와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홍성사)를 함께 읽었다. 주혜영 집사는 이런 책들을 함께 읽고 공부하며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알아 가는 중이다. 30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이렇게 성경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더 신나는 거예요. 진짜 말씀이 원동력이 된다는 말 있잖아요. 지금이 그래요."
또 한 가지 뜰교회 교인들이 뿌듯해하는 일 중 하나는 바로 '헌금 사용'이다. 투명하게 관리하는 것은 물론, 목회자 사례비 등 크게 나가는 고정비용이 없다 보니 교회 밖으로 더 많이 흘려보낼 수 있었다. 헌금 내라는 사람 한 명 없어도 2022년 한 해 뜰교회 교인들은 6명이서 총 1500만 원을 헌금했다. 이 중 절반이 넘는 850만 원을 구제와 선교에 썼다. 나머지는 장소 사용과 식사 비용 등으로 쓰고 예비비로 200만 원을 남겼다. 교회 바깥뿐 아니라 안도 돌보자는 의미로, 연말에 교인들이 가족들과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가정당 20만 원씩 지급했다.
돈을 좀 모아서 예배 공간을 리모델링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집이 워낙 오래됐고 사람이 매일 사는 집이 아니라 관리가 잘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인들은 이내 생각을 접었다. 물론 더 좋은 공간에서 모이면 좋겠지만, 지금도 대여섯 명이 모이는 데 불편하지는 않다. 리모델링을 하려면 최소한 몇백만 원을 들여야 하는데, 그 돈을 차라리 이웃을 돕는 데 쓰기로 했다.
이정숙 권사는 이렇게 헌금 사용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결정하는 것이 좋다. A교회에서도 공동의회를 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저 거수기 역할만 했을 뿐이었다. "발언권이 있다고 하지만 그게 진짜 발언권이 있는 겁니까. 그냥 동의하냐고 물으면 동의한다고 하는 거지. 그런 분위기 속에 있다가, 여기서는 우리 헌금을 우리가 결정한 곳에 나눈다는 게 참 좋아요."
'행복한 신앙생활'. 뜰교회 교인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죄와 회개의 종교이지만, 그것이 항상 죄책감에 절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행복, 진정한 인간 됨을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뜰교회 교인들은 너무 오랜 시간 죄책감에만 시달렸다. 사실이 왜곡된 설교를 들으면서도, 혹시나 자신이 목사를 판단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탓했다. 예배와 설교가 더 이상 은혜가 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목사에게 목양을 받는 것도 아닌 상태로 몇 년을 봉사하고 헌금하며 버텼다. 이제는 그것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안다. 김정자 집사는 말했다.
"계속 회개만 했어요. 그 방법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그 교회에서 못 나온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마 지금 기성 교회에 다니고 있는 저희 또래 사람들 중에도 다른 교회에 갈 수가 없어서 그냥 거기에 있는 분이 참 많을 거예요. 떠나면 그 교회에 다녔던 세월이 다 없어진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저 같은 경우도 23년, 제가 관계했던 사람들, 섬겼던 시간들, 그런 것들이 다 없어져 버리는 거 같았거든요. 그게 무서운 거예요. 왜 나이가 들면 그런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저희같이 이런 모임도 가능해요. 고민하시는 분들이 이런 방법을 잘 모르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