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
정일권 장군은 다행히 내 설득에 응했다. 그는 내가 자신이 칩거하고 있던 진해까지 찾아와 “2사단장으로 부임해 달라”고 하자 이튿날 내가 보낸 경비행기에 올라타고 사단장에 부임했다. 그는 이후 야전 경험을 쌓은 뒤 2군단장을 거쳐 내 후임의 육군참모총장으로 복귀했다.
이 점에서 우리가 생각할 대목이 있다. 전화(戰禍)에 허덕여야 했던 대한민국에게 미국은 절대적인 후원자였다. 그들은 막대한 물량을 지원했다. 그로써 대한민국은 전화의 참담함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특히 한국군에 대한 그들의 영향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지대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정일권 장군의 인사를 비롯한 모든 지휘관급 장교의 보직 배치와 승진 및 강등 등을 미군이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넘겨줬던 작전권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미군이 한국군 고위 지휘관의 인사를 모두 총괄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실적으로 미군의 입김이 미치는 것은 허용할 수밖에 없지만, 인사의 근간을 미군에게 맡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군과의 협력을 최대한 펼치더라도 우리 스스로 체계성을 지니면서 독자적으로 일어서는 길을 찾아야 했다. 나는 육군참모본부에 파견 나와 있던 미 고문관과 참모본부 요원들의 협력 토대를 단단하게 다졌다.
그들은 참모본부 부장들과 같은 방에서 일했다. 공산주의 군대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마땅한 협력 방식이었다. 나는 휘하의 참모들에게 함께 같은 방에서 일하고 있던 당시의 미 군사고문단(KMAG) 요원들과 업무협조를 더욱 원활하게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앞에서 소개했던 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물자와 장비, 탄약 등의 ‘열쇠’를 쥐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 1951년 병참학교 졸업식 장면. 병참 분야를 줄곧 맡았다가 1952년 준장으로 승진한 이후락은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다.
우리가 필요하다고 물자와 장비 등을 맘껏 동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이 응하지 않으면 창고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들의 승낙을 거쳐야 물자와 장비 등을 전선으로 옮길 수 있었다. 따라서 미 군사고문단 고문관들과 휘하 참모들의 협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나는 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라이언 소장과 일부러 자주 만났다. 사소한 일이라도 그의 협력이 필요한 사안이라면 나는 먼저 그를 찾아가거나, 만나자고 해서 본부로 들어오도록 했다. 그를 만나는 일에 나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그를 자주 만나야 휘하 참모들과 본부에 파견 나와 있던 미 군사고문관의 협력이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했던 일미군이 한국군에게 지원하는 모든 역량은 우선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의 양해, 이어 서울에 주둔하는 미 8군 사령관의 승낙, 최종적으로는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의 재가를 거쳐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을 만나서 상황을 설명하고 한국의 실정을 이해시키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지원을 이끌어 내는 일은 순전히 나의 몫이었다.
라이언 소장은 특히 나와 자주 만났다. 육군참모본부와 미 군사고문단 사령부는 모두 대구에 있었다. 같은 시내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나는 그와 시도 때도 없이 만났다. 점심에 특별한 약속이 없는 경우에도 그랬고, 심지어는 저녁 때 특별한 사안이 없어도 만나서 자주 의견교환을 했다.
나는 서울의 미 8군 사령부에도 자주 올라갔다. 마침 내가 지닌 보잘 것 없는 능력을 인정하고, 나를 한국군 최고 지휘관인 육군참모총장에 천거했던 밴 플리트가 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밴 플리트는 6·25에 함께 참전했다가 북쪽으로 폭격 비행을 나선 뒤 행방불명, 숨졌을 것이 확실해 보이는 자신의 아들이 생각날 때도 나를 찾았다. 나는 그런 경우에는 아무 말 없이 길을 나서 그와 함께 그의 아들이 머물렀던 군산의 옥구 비행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그들과 가까워졌다. 대한민국이 지닌 역량이 변변찮은 상황이었고, 그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까워졌을 수도 있지만, 그런 과정을 겪다 보니 사이도 가까워졌고 일도 잘 풀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군의 협력이 너무나 아쉬웠던 우리의 사정을 두고 볼 때 더욱 그랬다.
- 전쟁 직전 백선엽 대령(오른쪽에서 둘째)이 이후락(왼쪽에서 둘째), 김창룡(오른쪽 끝)과 찍은 사진.
그러면서 나는 한국군 인사를 우리 스스로의 필요와 판단에 따라 펼쳐가는 작업에 나섰다. 미군은 모든 것을 주고 있었지만, 장기적으로 우리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너그러웠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놓지 않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필요와 이해(利害)를 날카롭게 저울질하는 성향을 보이지만, 명분과 실정에 맞는 일이라면 자신의 권한을 양도하는 데 결코 인색하지 않은 군대였다.
그들의 성향이야 여러 가지임에 분명하지만, 미군은 특히 합리성을 존중했다. 명분에 합당하다면 상대를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었다. 아울러 자신들이 대한민국에게 절대적인 지원을 펼치고는 있지만, 모든 것을 “감 놔라 배 놔라”하는 식은 아니었다. 그래서 설득이 중요했다. 명분과 실제를 조화시켜 합리적으로 설득할 경우 그들은 쉽게 한국의 사정을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별 단 아들, 아버지에 꾸지람그 무렵 한국 전선을 이끌던 밴 플리트 사령관은 그런 점에서 한국군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그는 한국의 사정을 깊이 이해했고, 가능한 한 한국을 돕고자 했다. 나는 그 점을 충분히 활용했다. 우선 시급했던 사안은 한국 육군참모본부의 병과장(兵科長)을 승진시키는 일이었다. 당시 육군참모본부 병과장의 계급은 대령이었다.
그 병과장들이 각 육군본부 예하의 지휘관을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군대는 모든 것이 계급을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귀가 서로 맞지 않았다. 상대가 장성이라면 이쪽도 장성이 나서야 말이 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육군참모본부의 병과장을 무더기로 승진시키는 일에 나섰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한 일이었고, 아울러 미군이 양해해야 했다.
10여 명을 우선 진급시켰고, 그 뒤에는 모든 병과장에게 준장 계급을 달아줬다.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올리는 장군 진급 인사안을 모두 재가했다. 미군도 이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달지 않았다. 당시도 지금처럼 ‘별’을 다는 일은 영광이었다.
내가 진행한 무더기 준장 승진의 대열에 올라 있던 한 병과장은 승진한 뒤 제 방에다가 “하인(何人: 어떤 사람)이든 막론하고 노크를 하라”고 써 붙였던 일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결례가 아니었으나, “아들이 별을 달았다”는 소식을 듣고 대구 육군본부를 방문했던 그의 부친이 그 종이를 보고서는 붙 같이 화를 내며 아들을 꾸짖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내가 들었던 유쾌한 일화였다.
아주 영리한 인상을 주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언변이 좋았고, 아이디어를 잘 냈다. 나와는 오래 함께 일한 적은 없었으나 평소 그런 이미지를 풍겨 나 또한 주목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락이었다.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권력 핵심을 이뤘던 전 중앙정보부 부장이다.
- 1972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왼쪽)이 김일성과 악수를 하는 모습.
그 역시 내가 벌인 ‘무더기 승진’에 묻혀 그 때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줄곧 병참 분야를 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승진 당시에도 그는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병참감을 맡고 있었다. 그 외에도 작전참모부장 이준식, 행정참모부장 양국진, 군수국장 백선진 등이 모두 준장으로 진급했다.
내가 육군참모총장에 올라 벌인 일은 적지 않았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대한민국 군대는 무엇인가 새롭고 의미 있는 일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냥 앉아 있기에는 국정이 아주 급박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군대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로서 가장 절박했던 현안은 대한민국 군대의 전력 증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있어야 벼를 심을 수 있는 ‘천둥지기’의 신세였던 것이다. 미국이 움직여주지 않으면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마침 미군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지닌 음식을 누군가와 늘 나눠먹기 좋아하는 사령관, 밴 플리트의 움직임이었다.
그가 대구에 있던 나를 서울로 불렀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제 한국군 전력 증강 계획을 짜야 할 때”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의 앞뒤 사정을 잘 알았다. 나는 속으로 ‘이제 기회가 왔다’라고 되뇌었다.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몰아닥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