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사랑합니다. 당신의 세월 /아버지에 대한 추억(2)
1952년이면 한창 전쟁 소용돌이 속에 있을 때였지만 저희 고향은 3개월 정도 적의 치하에 있었습니다.
그 어려운 속에서도 세월은 흘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갈 생각에 많이 기뻐해야 할 때였지만
중학교에 갈 형편이 되어 있지 못해 부모님이나 저나 고민에 싸여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집에서 쉬는 사이 군산에 주둔해 있는 보충대(당시 전쟁 중에 예비 군인을
모아 얼마간 있다가 훈련소로 보내던 부대))에 계시던 사촌 형님이 오셔서 부모님에게,
“작은 아버지, 장 영( 제 兒名)이 당분간 제가 있는 부대에 같이 있도록 하세요. 부대장 전령으로 있으면서
끼니라도 해결하도록 하게요.” 하자 아버지는
“제가 학교도 못 가서 마음이 많이 어두워 있을 터인데 그래도 될까?” 하시며 얼른 대답을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픈 마음으로 집에서 고민만 하는 것보다 그렇게 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 싶으셨던 지
”장 영아, 어떠냐? 형님 따라가서 그렇게 좀 있을래? 하고 저의 동의를 구하셨습니다.
“그래요 아버지, 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다음 날 사촌 형님을 따라 부대에 갔고 김 달수 대위 님의 전령으로 근무하며 우선 끼니를 때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겨우 15살 이었습니다. 외아들 미덥지 않아 항상 곁에서 멀어지면 안절부절
하시던 부모님이 그런 결정을 하시면서 얼마나 마음속으로 큰 갈등을 하셨을까요? 부대 전령이었지만 하는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중대장 님의 잔 심부름이나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중대장 님이 찾으시더니 “너 이것 우리 집에 갖다 주고 오너라.” 하시며 무엇인가
주셨습니다. 때는 점심때였습니다.
“사모님! 중대장 님께서 이것 가져다 드리라 해서 갖고 왔습니다.” 하고 내미니,
“응, 연락 받았다. 어서 들어와라.” 하시며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더니 점심때니 점심이나 먹고 가라 하시며 밥상을 내어 놓으셨는데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내어 놓은
밥상이 제가 처음 보는 진수성찬이 아닌가? 중대장 님이 일부러 점심시간에 저에게 심부름을 시키신 것이었고
사모님은 자식 같은 저에게 점심을 마련해 주신 것이지요.
한 술 한 술 넘기면서 속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전시에 모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때 어린 저에게 그런
대접을 해주신 중대장 님 그리고 사모님 저는 지금 그분들께 느끼는 감사한 마음은 결코 잊을 수 없으며 보고
싶은 마음은 너무 간절합니다.
그러나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보충 대가 이전하는 관계로 부득이 저도 귀가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다시 답답해 왔습니다. 중학교는 어떻게 해서도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할까?
시간이 지나면서 걱정은 커갔습니다. 그렇게 지나는 중에 하루는 어머님께서 저에게 제안을 하셨습니다.
“장 영아, 심심하지. 엄마랑 같이 가서 솔방울이나 따지 않을래. 솔 방을 따서 팔아 너 중학교 갈 돈 마련하게.”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 방법이 있었구나.
그리하여 다음 날부터 제가 나무에 올라 솔방울을 떨어뜨리면 어머님은 주워 가마니에 담았지요.
어머님은 힘들지 않느냐고 걱정하셨지만 워낙 제가 신 나게 하니까 어느 정도 근심을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솔방울을 따다가 20 리가 넘는 지경 장(대야 장)에 가서 팔곤 했습니다.
얼마 후 아버님이 어느 날 저녁에 넌지시 묻는 것이었습니다.
“장 영아, 힘들지 않니?
”예, 아버지 괜찮아요. 그렇게 해서 중학교에 가야지요.“
아버지는 조금 안도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낸 11월 전후였습니다.
중학교 입학을 위한 국가 고시가 있었고 좋은 성적을 받았습니다. 이제 중학교에 간다는 기쁨에 저는 들떠
있었지만 중학교 선택 과정에서 부모님과 저 사이에는 큰 갈등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가정 형편이 어려
우니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가까운 중학교로 가라 하셨고, 저는 걸어서 다닐 테니 군산 중학교에 가게
해주십시오.“ 하는 갈등이었습니다.
결국 부모님이 제 고집에 응해 군산 중학교에 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드디어 입학 서류를 접수하러 아버지께서 가셨다 오시더니 아버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셨는데, 이유는
”장 영아, 지금까지 접수된 학생 중에는 네가 1등이란다.“ 하시면서 기뻐하심이 역력했습니다.
그렇게 갈망하던 중학교를 가게 되었으니 개학을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그렇게 지루했습니다.
드디어 개학을 하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지요. 그러나 학교까지가 40 리였으니 매일 15 살 나이에 80 리를
걸어 다니는 것이 부모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3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각, 조퇴, 결석을 하지 않고
다녔습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지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다녔나 싶지만 환경이 그랬으니
적응했었나 봅니다.
그 하루하루가 부모님은 얼마나 아픈 마음으로 견디시며 보내셨을까요? 까마득한 아픔입니다.
아침 등교 시에는 그래도 해가 뜨면서 밝아지니 별문제가 아니었지만 하교 시에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한 시간이나 되는 고개를 혼자서 넘어 집에 와야 하니 기다리는 부모님은 얼마나 조마조마 하셨겠습니까?
저보다 부모님이 겪은 고통이 훨씬 더 컸겠지요. 그렇게 3년을 다니면서 저는 얼마나 소리 없이 울었고 지쳐
있었겠습니까?
고개를 넘어오며 무서움에 떨어 땀으로 목욕하다 시피 살아온 11월쯤으로 기억됩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그 비 다 맞고 집에 오니 어머님이 한 말씀 하셨는데
”옷 벗어 들고 오지 그 비 다 맞고 왔느냐?“ 그 말씀에그간 참았던 서러움이 폭발했습니다.
부모님도 울고 저도 울고 지금 생각하면 그 울음이 부모님께 얼마나 큰 아픔이었을까 두고두고 한이 됩니다.
그러고 끝났으면 다행일 걸 아버님은 다음 날 학교 근처에 가셔서 집을 사셨는데 그 돈 어디에서 나왔겠어요?
그로 인해 부모님 피땀으로 장만하셨던 두 번째 우리 새집을 팔고 헌 집 헐어다 지은 집이 세 번째 집이었으니
그보다 큰 불효 어디에 있을까요.
아버님 어머님, 이 불효자 엎드려 빕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버지 이 불효자 용서를 빕니다.
그 죄 용서 받으려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결과 고등학교 졸업식 때는 아버님이 참석하셨는데 상이란 상은
다 받는 저를 보면서 마음으로는 참으로 기뻐하신 아버님이셨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상을 많이 주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우등 상에 3년 개근상이 전부였지요. 그 상을 다 받았으니 아버님 생각에는 집을 장만해 준 보람이 있었구나
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아버님 가슴에는 저렇게 공부한 자식에게 또 대학을 포기 시켜야 할
생각으로 가슴이 타 들어 가셨을 겁니다.
역시 대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제가 부모님께 지은 죄 중에 가장 큰 죄를 지게 되니 그 불효
어디에서 갚아야 합니까? 그 생각 하나가 평생 부모님께 진 씻을 수 없는 죄 의식에 저는 가슴 아파하며
살아왔습니다.
결국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아버지가 마련해 주신 그 집을 팔고 짐 정리하여 집으로 돌아온 후 저는 극단적
선택을 하였지요. 아버님 어머님 한 평생 이 자식 하나 믿고 모든 것 다 잃어 가시면서 사신 것 잊고 선택한
죽음의 선택. 그때 아버지 어머니 얼마나 놀라셨던가요? 이 보다 큰 죄 있을까요?
놀라심 재우시고 병석에서 제가 찾았던 지향(芝香)이를 데리러 충청도까지 가셨지만 거절 당하시고 돌아오신
아버지.
먼 훗날 그 지향 이를 아내로 맞이하신 날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씻을 수 없는 상처였을까요.
자식 살려 달라고 애원해도 결국 돈 있는 집에 시집가서 떠난 지향 이가 배까지 불러서 집에 왔던 때, 아버님이
한 평생 믿고 키운 자식에게 배신 당한 아픔은 오죽하셨을 까요? 그것도 모자라 군대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와
직장을 구하는 사이에 지향이가 협의 이혼 서류를 제출하지 않고 저에게 오는 바람에 간통으로 고소당하여
경찰서에 불려가는 자식을 보면서 지금까지 저를 키우시며 자랑스러워 하셨던 모든 기쁨이 다 무너지고 동네
사람들에게 얼마나 부끄러운 심정으로 견디셨습니까??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삶이셨을 겁니다. 그 와중에 잠시 쉬는 때 대나무 하나 베어오다 자구를 잘못 사용하여
뒤꿈치를 찍는 바람에 제가 기절하였지요. 모든 것을 참고 견디시던 아버님 제가 깨어나자마자 그간 참으셨던
한을 못 이겨 절규하셨지요.
“에라, 이놈의 자식 뒤져 버려라.” 라고요. 평생 저에게 단 한마디 나쁜 말씀 소리 한 번 크게 하시지 안 했던
아버님이 그렇게 통곡의 소리를 뱉으셨지요. 지향이를 맞이한 것에서 시작된 한이 폭발한 것이지요. 아버지.
그 며느리가 결국 저를 파멸 시키고 떠난 사실을 아버지가 살아 아셨다면 아버지는 세상을 버리셨겠지요.
아버지가 소천 하시고 10년 후에 이 일이 일어났으니 아버지가 모르신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아버지. 이 불효자 한이 있습니다. 제가 이제 8 순이 넘어 살아보니 남은 것은 한 밖에 남지 안 했습니다.
특히 부모님께 지은 한이 그처럼 큽니다. 살아오면서 아버지 어머니 아프게 한 일들은 제가 어떻게 갚을
길조차 없으니 더욱 큽니다.
첫째,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지 못 한 것이 그리 큽니다. 아버지 어머니 농촌에서 한 평생 사시면서 큰 돈
바라시지도 안 하셨을 터인데 적은 용돈도 드리지 못한 것이 그리 한입니다. 부모님 몰래 얼마간 용돈을
드리고 왔지만 매월 얼마씩 꼬박 드리지 못한 한이 큽니다.
둘째, 아버님 치매로 7년이나 고생하셨고 그 중 2년은 식물인간으로 사실 때 3시간이면 찾아 뵈올 수 있는
거리였는데, 모든 수발을 어머님께 만 맡기고 살아온 삶이 지은 죄 가운데 가장 큽니다. 특히 마지막 아버님
사람조차 알아보시지 못할 때 어쩌다 가서 누우신 자리 만져보면 이부자리가 젖어있던 기억은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셋째, 아버지 그나마 기억이 있으셨을 때 가끔 바깥 세상 구경이나 시켜드릴 걸 서울에 사는 핑계로 단 한 번
못해 보고 아버지 가셨으니 이제 가슴을 뜯으며 후회한 들 얼마나 위선인가 싶습니다.
생각하면 모두가 아버지께 지은 죄요 용서 받지 못할 불효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와 쌓은 기억이 몇 날 며칠을 토해도 다 말할 수 있을까요? 한 없이 적으며 제 마음을 달래려
해도 달래지겠습니까? 모두가 더욱 새로워지는 아픔이네요. 이제 부모님 영전은 집에서 15분 거리에 계십니다.
가까이 모시면 수시로 찾아 뵈올 줄 알았습니다. 얼마 전에는 솔방울 몇 개 하고 꽃을 엮어 아버님 어머님
영전에 드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 빌고 싶은 용서가 갚아지겠습니까? 더욱 뵙고 싶고 그리움이 저를 아프게 할 뿐입니다.
<끝>
첫댓글 저는 아버지를 존경은 하지만 사랑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평생 그 어려움 다 겪으시며 사신 아버지.
그래도 자식 앞에 단 한번도 힘들다 하시지 않은 아버지
평생 언성 한번 뱉지 않으신 아버지
그 아버지였기에 아버지는 저에게 영원한 스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