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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조집 [☆분청사기 파편들에 대한 단상☆]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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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파편들에 대한 단상]
이은봉 시조집 / 책만드는집시인선 092 / 책만드는집(2017.05.19)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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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파편들에 대한 단상
이은봉
무등산 자락 여기저기
분청사기 파편들.
깨어지고 부서져
조각난 세월들.
미어져 터져버린 가슴, 너무도 많구나.
가마터 주변마다 버려져 있는 목숨들,
땅속에 묻힌 지
수백 년이 지났어도
저처럼 되살아나서 내일을 꿈꾸다니!
꿈이야 뭇 생명들의 본마음 아니던가.
버려진 꿈 긁어모아
이곳에 쌓고 보니
무등산 골짜기마다
동백으로 피는 봄볕.
개구리
이은봉
개구리가 개구리를
등허리에
업고서는
풍덩, 둠벙 속으로
뛰어든다,
저 개구리!
유유히 헤엄을 치는
저 개구리
개구리 위!
무당벌레
이은봉
살다 보면 그야말로 별일이 다 있지요.
모가지에 힘주고 아랫배에 힘주고,
뿌지직 힘주다 보니
바지에 똥도 싸고
대책 없는 이놈들, 함부로 날뛰는 놈들, 괜스레 상처 받을 일 어디에 있겠소. 발자국 소리에조차 죽은 채 입 닥치지.
세월아, 네월아. 후다닥 지나가거라.
살짝이, 납작이 엎드리는 게 최고지.
텃밭의 무당 벌래들
요로코롬 안 살겄소.
잠자리
- 첫 사랑
이은봉
마른 수숫대 위
살포시 앉아 있는,
가만가만
다가서면
차르르
날아가는,
잠자리, 고추잠자리
서러워라 가을빛!
땅강아지
이은봉
남새밭 한구석, 두 손 싹싹 비비네.
땅속 여기저기 헤엄치며 다니다가 갑자기 뛰어나오니 봄 햇살 너무 밝네.
하느님 내려다보니 더욱이나 두렵네.
너무도 잔인한 게 이 세상 아닌가. 밭고랑 내딛는 걸음, 자꾸만 흔들리네.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 바라보네.
콩새가 콩인 줄 알고 삼키면 어쩌나. 알겠네, 발바닥까지 비벼대는 저 마음!
내변산
이은봉
산까치들 좋아라.
서리 맞은 홍시들,
가지마다
주렁주렁
붉디붉은
보름달들.
들국화 무더기로 피어
발걸음들 잡아끄네.
땡감
이은봉
한자로 쓰면 청시靑柿,
우리말로 쓰면 땡감.
땡감은 내 어릴 적
짓궂은
별명이었지.
한 때는 나도 그처럼
떫은 적 있었거니!
오렌지
이은봉
깨고 터져야
향기를
뿜는다며,
너는 내 절망에
생채기를
내는구나.
그럴까, 내 절망까지,
오렌지여
그렇겠지만.
제비
이은봉
제비야,
네 꼬리 같은
신사복
걸쳐 입고
연희를
베풀고 있는
이웃 나라
총리는
부끄럼
없다는구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술 생각
이은봉
술이 체질인 사람
있기는 하겠지.
못 먹는 술
억지로 마시며
그날은 거기 그 자리, 멋지게 흥 냈지,
체질이야 오히려 술보다는 차茶이지.
마셔야만 할 때는
그래도 마셔야지.
다관茶罐에 찻물 부으며
잠겨보는 술 생각.
환해지는 빛
이은봉
어둠이 와야 빛이 소중하지.
밤이 와야 낮이 그립지.
가슴이 환해져야만
세상도 환해지지.
땅거미 밀려오면 반짝, 하고 켜지는 빛.
고향 마을 먼 마음, 자꾸만 떠오르지.
싸락눈 싸락거리는 밤,
어지러운 마음 가득.
대못
이은봉
가슴속 대못 하나,
단단하게 박혀 있네.
녹이 슨
이 대못,
암만해도
안 빠지네.
차라리 끌어안아야지,
다른 길 없으면!
귀뚜라미야
이은봉
귀뚜라미야, 왜 우니. 너도 많이 서럽니, 귀뚜라미야, 너는 왜 어둠이나 키우니
숲 속의 소나무들은 서러워도 푸르거늘!
단풍잎 하나
이은봉
늙은 엄니 손바닥 같은
쪼글쪼글
단풍잎 하나,
혼자 걷는 오솔길 위
떨어져 뒹구네.
마음속 깊은 골방으로
밀려드는
슬픔 하나!
까마귀들
이은봉
조촐조촐 가을비,
흩뿌리는 무등산
우산 쓰고
거뭇거뭇
올라가는
쇄인봉.
빗속의 저 까마귀들,
조촐조촐 젖는데.
살구꽃빛 그리움
이은봉
그리움에도 빛깔 있나, 봄날의 살구꽃빛, 살구꽃빛 그리움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
연분홍 꽃잎 사이로 흔들리는 사랑아!
달개비꽃
이은봉
남들 눈에 띄지 않아
점점이 좋아라.
보랏빛
설움으로
가만히
피어서는
한세상 견디는구나,
논두렁의 뜸부기.
소광화문 광장에서
이은봉
촛불을 치켜든다, 사랑을 높이 든다. 광화문 광장아, 미안하고 고맙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네가 다 지키는고나.
강진 기행
이은봉
강진에는
무엇을 보러 나가.
영랑을 보러 가지.
시문학을
보러 가지.
모란은 아직 좀 일러
파지를 않았어도.
누에
이은봉
누에가 뽕잎을 먹는다.
사각사각
소리 내며,
언젠가 고치 팔아
등록금
낸 적 있다.
누에의 뽕잎 먹는 소리,
하늘의
웃음소시!
마을버스
이은봉
길음동 전철역에서
돌산의 신안아파트까지
병들고 늙어빠진
굼벵이
한 마리
땀 뻘뻘 흘리는군요,
고개를 끄덕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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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첫 시조집을 간행한다. 2000년 가을 느닷없이 회오리바람이 불어 시조를 쓰기 시작했으니 17년 만인 셈이다. 감개가 없을 리 없다.
이 시조집에 실린 시조를 쓰는 동안 가장 많이, 가장 깊이 의식한 것은 일본의 정형시 하이쿠이다. 나로서는 이 시조집의 시조가 바쇼의 하이쿠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기를 바란다.
국내에도 닮고 싶은 시조시인과 시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와 그의 시조를 여기에 밝혀 이런저런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용감하지는 못하다.
생전에 다시 또 시조집을 간행할 수 있을까, 별로 자신이 없다. 혹시라도 그것이 가능하다면 순수한 단시조집이 아닐까. 시조가 써지면 두려워하지 않고 써볼 생각이기는 하다.
시조를 쓸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이근배, 김영재, 이지엽 시인께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표한다. 2000년 가을 이지엽 시인의 권유와 격려가 없었다면 감히 시조를 쓸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2017년 봄
펑리당에서
이은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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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時調集 [※분청사기 파편들에 대한 단상※]
시조를 쓰고 읽는 즐거움
이은봉
1. 깨어 있는 시민계급과 시조
한때는 시조를 늙고 낡은 언어예술 형식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시조가 민주화된 오늘의 자본주의사회에서도 생존할 수 있을까, 시조는 이미 저 자신의 사회․ 경제적 토대를 잃어버린 지 오래이지 않은가. 조선시대의 사대부적 가치를 반영하는 언어예술이니만큼 그들의 가치가 해체되고 소멸된 지금은 시조도 해체되고 소멸되어야 마땅하다고 이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1980년대를 거치면서 나는 그러한 생각을 수정한다. 198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구성 형식에 대해 좀 더 진전된 인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시민계급을 기반으로 하는 오늘의 현대사회와 사대부 계급들을 기반으로 하는 과거의 봉건사회가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깨어있는 시민계급 중심의 오늘의 현대사회와 깨어 있는 사다부계급 중심의 과거의 봉건사회는 상호 겹치는 부분을 갖고 있다.
오늘의 깨어 있는 시민계급과 과거의 깨어 있는 사대부계급은 정서적으로 유사한 특징을 공유한다. 여러 면에서 오늘의 현대사회의 시민계급은 과거의 봉건사회의 사대부계급과 유사한 의식지향을 갖는다. 이는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비판의식의 면에서는 물론 책임의식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형편이 이러하니 심미의식의 면에서도 오늘의 깨어 있는 시민사회는 과거의 깨어 있는 사대부사회와 충분히 접점을 갖는다.
깨어 있는 주체로서 언어예술에 대한 깊은 의지를 지닐 수 있는 사람은 어차피 그 사회의 특별한 몇몇 개인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도 시조는 오늘의 깨어있는 시민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한 역할을 갖는다. 시조라는 언어예술 형식이 갖고 있는 서정적 심미의식을 생산하고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특별한 능력을 지닌 몇몇 소수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시조와 자유시의 창작주체 및 향유 주체는 상호 공존할 수밖에 없다.
2. 품위 있는 삶과 시조의 형식
자유시는 매 편마다 자기 형식을 창출해야 하지만 시조는 그렇지 않다. 일정한 형식, 기본 체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시조이다. 이른바 ‘3장 6구 12음보’라는 기본 형식이 바로 그것이다. 많은 사람이 시조를 두고 ‘정형시’라고 부르는 것도 다름 아닌 이 때문이다.
한 행이 4음보인 시조의 기본 형식은 한 행이 3음보인 4구체 향가의 기본 형식을 떠올린다. 4구체 향가의 기본 형식은 원시 민요의 기본 형식과 유사하다. 그렇다. 4구체 향가의 기본 형식은 한 행이 3음보인 ‘4장6구12음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한 행이 3음보인 4구체 향가와 한 행이 4음보인 시조는 장과 행의 구조가 뒤집혀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점에서 4구체 향가와 평시조 단수는 형식적으로 깊은 유사성을 갖는다.
시조의 전통적인 리듬 형식, 리듬 체계를 있는 그대로 창작에 구현하는 시인은 많지 않다. 시인들 자신도 시조의 기본 형식을 있는 그대로 창작에 구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땅치 않아 한다. 주어진 시조의 기본 형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하기, 이른바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 시조가 처해 있는 현실이다.‘3장 6구 12음보’라는 기본 형식을 기꺼이 수용하면서도 즐겁게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어 시조는 더욱 주목을 받는다.
물론 주어진 형식 안에서 실현하는 변화와 변주는 어느 면에서 어눌하고 답답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안에서 새로운 행의 처리로 새로운 리듬을 이루려는 탐구를 거듭 즐기고 있다. 장章을 단위로 행을 나누는 것이 기본 형식이지만 매번 그렇게 행을 나누는 것은 읽는 맛과 보는 맛을 고루하게 만든다. 남들처럼 나도 장을 지니고 있으면서 장을 초월하는 행, 나아가 구, 음보, 음절을 단위로 다양하게 행을 나누어 읽는 맛과 보는 맛을 배가하려 노력한다.
이렇게 행을 새롭게 분할하는 것은 시조를 새롭게, 곧 낯설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때의 낯설게 만들기는 마땅히 읽고 보는 즐거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이다. 행을 이처럼 낯설게 분할하는 가운데 가락을 밀고, 당기고, 끊고, 맺고, 꺾고, 젖히는 것은 시조를 창작하는 또 다른 기쁨 중의 하나이다.
주어진 틀 안에서의 자유, 곧 틀 안에서의 이런저런 자잘한 실험은 시민적 가치의 실천, 곧 살아 있는 민주주의의 실천에 대응하기도 한다.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 나날의 삶이 지니고 있는 형식을 새롭게 발견하고 개혁하는 일은 자못 중요하다. 어떤 삶에도 형식은 있기 마련이거니와, 이때의 형식을 바로 깨닫고 바로 실천하는 일은 삶의 품위를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시조의 기본 형식을 새롭게 발견하고 변주하는 일은 오늘의 삶이 지니고 있는 기본 형식을 발견하고 변주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아니, 오늘의 삶이 지니고 있는 기본 형식을 발견하고 변주하는 일은 시조의 기본 형식을 발견하고 변주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내용에 못지않게 형식도 중요한 것이 일상의 삶이다. 형식을 갖출 때 삶은 품위를 얻기 마련이다. 형식을 갖추지 않고 품위 있는 삶을 얻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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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으랏차! 계룡인가, 무등인가, 백두대간 한허리에 불끈 솟아오른 산 하나를 냅다 메다꽂듯 이은봉 시인이 시조집『분청사기 파편들에 대한 단상』을 갈팡질팡하는 오늘 이 땅의 모국어 한 마당에 부려놓는다. 그랬구나. 늘 날 선 감성의 칼끝으로 이 시대의 속말들, 슬픔, 아픔, 또는 사랑, 부끄럼 따위를 잘도 도려내 감칠맛 나는 입담으로 시를 척척 써내는가 했더니 바로 이거였구나. 저 신라 향가, 고려가요에서 조선 백성들의 서럽고 기꺼운 가락이 녹아 흐르는 시조의 “밀고, 당기고, 끊고, 맺고, 꺾고, 젖히는” 나랏말씀을 엮어내는 솜씨를 오래 익혀왔던 것이구나. 글감 뽑아내기에서도 종횡무진이다. 앞의 시인들이 미처 못다 쓴 것, 지었다 해도 초ㆍ중ㆍ종으로 넘어가고 휘어지고 돌려 차는 말 놀림에서 이가 빠지거나 금이 간 것들을 이은봉은 티 없는 청자, 백자로 잘도 구워낸다. 책 이름으로 내세운 작품만 해도 “꿈이야 뭇 생명들의 본마음 아니던가. // 버려진 꿈 긁어모아 / 이곳에 쌓고 보니 // 무등산 골짜기마다 / 동백으로 피는 봄볕”에 부닥치니 그만 헉! 숨이 막힌다.
-이근배 시인ㆍ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마른 수숫대 위 / 살포시 앉아 있는, // 가만가만 / 다가서면 // 차르르 / 날아가는, // 잠자리, 고추잠자리 / 서러워라 가을빛!”(「잠자리-첫사랑」) 어떠한가! 이은봉 시인의 이 한 편의 절창 시조. 보이고, 고요하고, 움직이고, 소리 나고, 빛깔 있고, 서럽고, 가슴 아리고, 두근거리고, 조금은 아닌 듯 후련하고……. 이은봉은 자유시의 중진이다. 시조를 쓴다기에 그러냐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조집을 출간하겠다며 시집 한 권 분량 작품을 보내왔다. 단번에 읽고 놀랐다. 또 읽었다. 두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는 시여야 하고, 시조는 시조여야 한다는 내 생각과 맞았다. 삶에는 어느 삶이라 해도 형식이 있다. 격이 있는 형식은 삶의 질을 높인다. 이은봉의 시조가 그렇다. 시조의 격을 높이고 있다. 시와 시조의 길을 걷기에 충분한 건각健脚이다.
- 김영재 시조시인ㆍ《좋은시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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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봉 시인∥
∙ 1953년 충남 공주(현 세종시) 출생. 1992년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삶의문학》 제5호에「시와 상실의식 혹은 근대화」를 발표하며 평론가로, 1984년《창작과비평》 신작시집『마침내 시인이여』에「좋은 세상」외 6편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좋은 세상』『봄 여름 가을 겨울』『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무엇이 너를 키우니』『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길은 당나귀를 타고』『책바위』『첫눈 아침』『걸레옷을 입은 구름』『봄바람, 은여우』등이 있고, 평론집으로『실사구시의 시학』『진실의 시학』『시와 생태적 상상력』『화두 또는 호기심』등이 있다.《열린시조》2001년 봄호에 처음 시조 5편을 발표한 바 있다. (사)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부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한성기문학상, 유심작품상, 가톨릭문학상, 질마재문학상, 송수권문학상, 시와시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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