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카페에 걸린 이름 석 자
월성 임상근
근래 몇 년 만에 보기 드문 많은 눈이 내려 세상이 모두 하얀 감옥에 구금되었다. 며칠을 방콕 했더니 엉덩이에 좀 이 쑤신다. 온기 잃은 햇살 한 줌이 거실 유리 문을 노크했다. 늘어질 대로 늘어진 몸 일으켜 커튼을 빼꼼히 밀어 본다. 겨울 햇빛 한 줌이 바람 쐬러 가자고 유혹하여 대충 눈곱만 비벼떼고 주섬주섬 따라나서본다.
한 줌의 햇살이 앞서서 가자는 대로 여기저기 배회하다가 안동댐 겨울 풍경이 멋들어지게 펼쳐진 후배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쓰디쓴 아메리카노 한 잔 시켜 앞에 두고 카페 창가에 기대어 앉았다. 카페 안의 공기는 무척 따사로웠다. 이 카페는 내가 종종 찾아오는 곳이고 카페 벽에는 개업 선물로 준 나의 시화가 한 점 걸려있었다. 몇몇 테이블에서 서너 명씩 젊은 청춘이 모여앉아 이야기꽃이 피어나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겨울 햇살에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햇살이 곤두박질하는 카페 모퉁이 창가에는 한눈에 봐도 이방인 같은 중후한 여인이 홀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카페에 들어서면서부터 줄곧 눈길이 갔다
언 듯 보기에 그 여인도 곁눈질로 나를 힐끔힐끔 쳐다 보는 듯 했다. 이상하고 야릇한 감정을 접어 놓고 집에서 들고 나온 시집을 열어 몇 편의 시를 읽다가 싸늘하게 식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려 하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고개 들어보니 창가의 그 중후한 여인이 내 앞에서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혹시 선생님이 저 벽에 걸린 시화의 작가 창식이님이십니까?"
한다.
"어떻게 아셨어요? 혹시 저를 아십니까?"
하고 되물었다. 그녀는 아련한 기억을 더듬는듯한 시선으로 미간이 파르르 떨렸다.
그 사연은 이러했다. 안동댐을 구경하고 너무 추워서 따뜻한 차 한잔하려고 이 카페에 들렸다. 카페벽에 걸린 시화액자에서 사십 년 전의 작은 인연으로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이름 창식이를 보았다. 순간 그녀는 가슴이 떨려 그대로 석고상이 되었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카페 주인에게 물어보았다.
“사장님 혹시 저 벽에 걸린 시의 작가를 아십니까”
하고 물어보니
“아! 예 저가 알고 지내는 선배 시인님이 주신 작품입니다. 왜요? 손님도 아시는 분인가요?”
했다.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그녀는 몇 번을 상세히 물어볼까 하고 망설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닐거라고 자신을 달래며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자리에 앉아 멍하니 안동호 설경에 눈길 던져놓고 있었다.
그때 한줌의 햇살이 이끄는 대로 내가 카페에 들어섰다. 카페 주인이 얼른 그 여인에게 다가가서
“손님 이 시의 주인공이 여기 오신 저쪽 저분입니다.”
라고 알려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내 앞에 마주 선 그 여인의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아찔한 느낌이 스쳤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낯설지 않는 얼굴 모습이다. 얼떨결에 엉거주춤하게 인사를 건넸다..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여인도 그대로 내 앞에서 굳어 있었고 빨간색 레이스가 달린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약간은 떨리고 있었다.
입술이 떨리면서 어렵게 건너온 말이
"선생님 혹시 저~ 기억하십니까?"
나는
"글쎄요~"
하며 망설이고 있는데 그녀가 얼른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청량리역 광장 시계탑까지 팔장끼고 걸어간 아가씨 순화를 혹시 기억하십니까?"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아주짧게 흘렀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겨울 햇살이 가늘게 들어오는 카페 창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간단하게 자신의 근황을 소개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는 여고시절까지 고향인 원주에서 살았고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탄탄한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여고시절이었다. 여고 2학년 어느 봄날 교통사고로 엄마 아빠가 한꺼번에 돌아가시고 하늘 아래 피붙이 하나 없는 고아가 되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그 많던 아버지 재산도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어느 날 갑자기 홀로 남겨진 그녀는 사회가 얼마나 냉혹한지를 모르는 가녀린 사춘기 소녀였다. 그녀는 아버지 지인이신 한 분이 거두어 주어서 임시로 몇 달을 그 집에 얹혀살았다. 슬픔에 잠기어 몇 달을 울기만하고 지내다가 옷 한 벌없이 무작정 그 집을 나와 상경하였다. 살아 남기위하여 발버둥 치다가 마지막에는 청량리 오팔팔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신세로 살았다고 하였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지금은 서울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으며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전국을 여행하면서 노후를 보내며 살고 있다고 했다. 오늘 그런 그녀를 가느다란 한 줄기 햇살이 비스듬히 비추어 아름답고 우아하게 보였다.
사십 년 전에 그녀가 도움을 준 군인이 안동 사람이라는 기억과 창식이라는 이름 하나로 안동으로 여행 왔다고 한다. 창식이라는 이름 소리에 나는 순간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통증이 밀려 올라왔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사십이 년 전의 일이다. 나는 경기도 가평 현리에서 맹호부대 공병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여 신병훈련을 마치고 공과대학을 다니다가 입소했다는 이유로 김해 공병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호랑이 발바닥을 만든다는 맹호부대 공병대로 자대 배치를 받아 군 생활을 했다. 그 고난의 신병 생활이 어느 정도 적응할 즘 드디어 일병으로 진급하였다. 곧이어 군 생활 첫 휴가가 주어졌다. 내무반에서 최고 고참 김한수 병장이 휴가 나갈 때 가라 상병 계급장을 달아주고, 손대면 베일 정도로 군복은 각을 세우고, 군화는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지도록 반짝반짝 광을 내고 몇 시간 동안 휴가 시 주의사항을 역설했다. 그 내용 중에는 청량리 오팔팔에 대한 이야기와 대처법도 있었다.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첫 휴가가는 날이 왔다. 휴가증을 받아 들고 가평 현리 시외버스 간이정류소에서 마장동 터미널까지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그 시외버스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나는 현리에서 시외버스를 탔고 조금 지나 보병부대 앞에서 그녀도 버스를 탔다. 내 옆자리가 비어 있어서 그녀와 동석하게 되었다. 두 청춘 남녀 아니 군인하고 처녀는 버스가 달리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을 지나서 둘 사이의 대화에는 서먹한 분위기가 녹아내렸다. 나는 그때 그녀에게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내가 고향이 안동이라서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걸어서 대왕코너 백화점, 제1호선 지하철역사 진입로 주변의 좁고 음침한 오팔팔골목 주변인 청량리기차역광장으로 가야 했다.
그 당시 청량리역광장 주변에는 오팔팔사창가 포주들이 삼삼오오 진을 치고 있다가 지나가는 군인은 그들의 가장 쉬운 먹잇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오팔팔 포주들을 피하기 위해 마장동에서 청량리역광장시계탑까지만 애인인척하며 팔짱끼고 함께 걸어가 줄 것을 부탁했다. 어려운 부탁인데도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했다. 한순간에 애인이 된 나와 그녀는 약 삼십 분 동안 팔짱끼고 오팔팔 골목앞을 지나 걸었다.
팔짱 끼고 걸어가면서 느낀 그녀의 체온은 따뜻했다. 분홍빛 꽃무늬 재킷에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바지는 하늘거리는 재질의 나팔바지를 입었고 굽이 낮은 단화를 신고있었다. 얼굴에는 옅은 화장끼가 보였고 입술은 짙은 립스틱을 발라 촉촉히 젖어 보였다. 나는 처음으로 느껴본 이성에 대한 따뜻함이었다. 그녀도 싫지는 않은 듯 보였다. 그녀는 청량리역광장에 도착해서 안동행 기차표도 끊어 주었고 가차역광장 맞은 편 본전다방에서 커피까지 한 잔 사주었다. 내가 돈을 내려고 해도 군바리가 무순 돈이 있냐며 기어이 그녀가 다 썼다.
그녀는 그날 이후로 나의 군복 가슴에 달린 노란 상병 계급장과 창식이라는 이름 석 자를 가슴에 새기고 평생을 살았다고 했다.
왜 그녀는 그렇게 스쳐간 사람을 가슴에 세기고 평생을 살았을까? 그녀는 시궁창같은 세상에서 밟힐대로 밟히고 짖이겨져 만신창이 된 한송이 꽃이었을 것이다. 그날도 그녀는 늘 그렇게 했듯이 자신의 삶에 지치고 아프면 엄마 아빠의 유골이 뿌려진 강변 유원지를 찾아와 한없이 한없이 엄마 아빠 부르며 울다가 지쳐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군인 창식이가 부탁을 하였다. 그녀는 그 부탁을 들어주면서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첫눈에 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 자신의 가슴에 멍든 상처의 뿌리가 너무나 깊고 크기에 자신의 감정을 창식이에게 한마디도 표현하지 못했다.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것이다.
그 반면 나의 그녀에 대한기억은 까만 밤하늘처럼 지워지고 없었다. 지금 그녀를 만나고 더듬어 간신히 찾아낸 기억은 그때 참으로 고맙고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의 이 상황에서 엉거주춤한 내 모습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그 시절은 사회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박정희 유신 정권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온 나라에 계엄령이 내려졌고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이런 사태에 대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전두환이 물러가라, 신현학이 물러가라, 목이 터지게 민주화를 외쳤다. 검은 포도위를 청춘이 뒹굴고 최루탄 연기와 청춘의 붉은 피가 뒤 범벅이 된 혼돈의 시기였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내가 열세살되던 해 어린 나이에 아버지는 지병으로 하늘나라 가시고 할머니와 어머니 두 분께서 육 남매를 키우셨다. 손가락이 휘어지고 손마디에 피멍이 들도록 작은 땅뙈기를 긁어 겨우 끼니를 연명하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런 형편에 내가 인천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두 살 터울인 남동생이 대학교를 진학하게 되었다. 나는 가정 형편상 할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하고 군대를 가야만하는 형편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에 세월은 그저 무심하게 흘러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녀에 대한 고마운 감정도 내 삶의 여정에서 그렇게 까맣게 말라비틀어지고 말았었다.
그런 그녀가 사십이 년이 지난 오늘 그것도 안동에서 평생토록 가슴에 새긴 이름 석 자를 발견하였다. 찬바람 불어오는 안동호 카페에서 지금 나와 마주 앉아있다. 이제는 온기 잃은 석양이 그녀의 어깨에 붉게 걸려있었다. 안동호 푸른 물결도 지난 세월 만큼 잔잔하게 황금빛 윤슬로 반짝인다. 카페의 안락의자에 등을 맡긴 그녀의 흰 머리카락이 저녁놀에 반사되어 밝게 빛났다. 그녀는 그저 무표정하게 앉아 빙긋이 웃고 있다. 해가 서산을 넘고 어둠이 밀려드니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 상기되었다. 속으로 난 참으로 곱게 늙었다 하고 속울음을 삼킨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카페 주인인 후배는 서너 번이나 아메리카노 커피를 따뜻하게 리필해 주었다. 그런데도 마시다 남은 커피는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와 나는 그날 그렇게 두 잔의 식은 커피잔만 테이블에 동그랗게 남겨 놓고 일어섰다
카페 문을 나서니 찬바람이 강을 거슬러 올라 차갑게 불었다. 그녀의 어깨에 걸친 연보랏빛 솔이 더욱 쓸쓸하게 보였다. 불어오는 강바람에 길게 늘어진 솔 끝 수술이 그녀를 살포시 감싸 안는 밤이다. 어두운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 불빛 마저 차갑게 느껴지는 밤 뒤를 따라 걸어 가면서 내일은 이 겨울에 한줌의 따사로운 햇살이라도 그녀를 곱게 비처주길 속으로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