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지예 (경상도 사투리)
지난 추억 이야기
낙엽 진 공원길을 소녀가 걷고 있다. 한 사내가 뒤따라가며 수작을 걸어 본다.
"차 한잔하실까요?"
"언지예"
이 말에 뒤돌아서면 경상도 사람이고, 계속 따라 간다면 경상도 사람이 아니다.
언지예는 '언제요'의 뜻이 아니라, '아니다' '싫다'는 의미의 경상도 사투리다.
오대예도 '언지예'와 같은 의미인데, '언지예'는 신라가 지배했던 영역, '오대예'는 가야 지배 영역과 방언 구역이 얼추 비슷하게 분포한다.
경주는 참 신비스런 도시다. 삼국유사를 읽고 가면 더욱 그렇다.
경주에 도착하면 시내로 들어가지 말고, 금오산이라고 불리는 경주 남산으로 가라. 문명이라는 인위적인 것에 눈을 돌리면, 상상 속의 서라벌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2천 년 전의 시간여행을 위해서...
경주 남산(金鰲山)은, 신라의 영산(靈山)으로 불교 문화의 보고, 신화와 전설의 시원지이며 천년 고도의 노천박물관이다.
천년 왕국 신라, BC 57~AD 935 세계사에 천 년을 지속한 나라는 많지 않다. 서양사에서는 동•서 로마제국이 있고, 동양에서는 신라가 유일하다.
수많은 나라와 왕조가 명멸한 중국에서 명나라가 400년을 겨우 넘겼고,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한족(漢族)과 한자(漢字) 등, 중국을 상징하는 그 한(漢)나라였다.
장안과 낙양에서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남긴 그 한나라도, 전한•후한을 합쳐야 400년이 된다.
1970년에 상경했다. 12시간 완행열차로 서울역에 도착했다. 길을 묻는 억센 사투리에 촌놈이라고 비웃는 것 같아서 무작정 걸었다.
염천교와 서부역을 지나서 다다른 곳이 만리동이었다. 만리재는 서울역에서 마포로 가는 고개로 조선 세종 때 한글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가 이곳에 살아서 유래한 지명이다.
그때 한 달 하숙비가 8천 원이었다. 하숙집 몇 집 아래엔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DJ라는 최동욱씨 집이 있었는데, 동아방송 '3시의 다이얼' 진행자였다.
박정희 대통령 아들 박지만이 만리동 모 중학교에 다녔으며, 아침이면 경적을 울리면서 앰블런스에 싣고 통학시켰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메뚜기 이마만 한 좁은 땅덩어리에서 경상도 사람들은 특이한 사투리를 쓸까?
나는 오래 전부터 그 의문의 답을 찾고 있었다.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인 29대 태종 무열왕 (金春秋)과 문명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동생으로 역사 속의 바로 그 문희(文姬)이다. 언니 보희의 꿈을 사서, 문희는 김춘추의 옷을 꿰매준 인연으로 왕비가 된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언니 보희도 나중에 김춘추와 결혼(次妃)해 요석공주를 낳고, 요석공주는 원효대사를 만나 설총을 낳았다.
그 문무왕의 비문에 깜짝 놀랄 만한 진기록이 있다. 신라 왕족의 성씨인 경주 김씨의 시조가 흉노족 출신 투후(秺侯) 김일제(金日磾) 라는 놀랍고 수수께끼 같은 기록이다.
흉노(匈奴)는 흉(훈족)으로 퉁구스어로 '사람'을 뜻하며, 돌궐(투르크)로도 불렸다. 중국에서 그 훈족을 비하(卑下)하는 의미로 흉(匈)에 노예노(奴)를 붙여 흉노로 불렀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중국은 우주의 중심이고, 한족 외에는 모두 오랑캐(야만인)로 치부했다.
동이•서융•남만•북적(東夷•西戎•南蠻•北狄)
김일제는 흉노 '번왕'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인데, 한나라(前漢)에 포로로 잡혀 와 한무제의 목숨을 지켜준 공로로 김(金)씨 성을 하사받고 '투후'를 지낸 인물이다.
흉노족은 금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금(金)을 성씨로 사성(賜姓)했다.
문무왕릉 비문을 연구한 추사 김정희의 '문헌비고'에도 기록돼 있다. 문무왕릉비는 국립 경주박물관에 있다.
번왕(藩王) 흉노는 황제를 '선우'라고 했고, 선우 아래 제후국 왕을 '번왕'이라고 했다.
투후(秺侯) 한(漢)나라에서 황제 아래 제후국 왕, 흉노의 번왕과 같다.
흉노는 당시 세계 최강국 로마제국을 주눅들게 했으며, 게르만족을 이동시켜 유럽의 고대사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또 역대마다 중국의 변방을 침략하고 괴롭혀서 만리장성을 쌓게 만든 그 북적(北狄)이다.
중국 산서성에서 발견돼 시안(西安) 비림(碑林)박물관에 있는 신라인 '大唐 故 金氏夫人 墓銘'에도 같은 내용의 글이 전해지고 있다.
'중국 시안 여행에서 비림박물관의 그 비문을 보러 갔으나, 비전시물로 수장고에 있어서 볼 수 없었다.'
김씨(金氏)는 우리나라 270여 개 성씨 중 1/5을 차지하는 약 1,000만 명으로 한국의 대표 성씨이다.
김씨는 신라계(金閼智)와 가야계(金首露)의 두 큰 집단이 있다.
대부분의 김씨는 신라계에서 분파됐지만 가야계 김씨와 외가인 김해 허씨(許氏)도, 범(汎) 김수로왕 계열에 포함된다.
김(金)을 중국에선 진(JIN)으로 발음한다. 신라와 고려시대엔 금씨로 불리었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이(李)씨 성의 나무목(木) 자와 쇠금(金) 자는 상극임으로 金의 음을 '금'에서 '김'으로 바꿨다고 한다.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의 마지막 황제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신(新)나라를 세울 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정변에 참여해 개국공신으로 권세를 누렸다.
신나라가 15년의 단명 왕조로 망하고 다시 후한(後漢)이 들어서면서, 김일제의 후손들은 역적으로 몰려 멸족의 위기에 처한다.
그때 김일제의 5세손이 무리를 이끌고 신라와 가야로 망명해 와,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됐다고 기록은 전한다.
신나라 때 유통되던 '왕망전'이 남해안과 제주도에서도 발견됨으로서, 그 일행의 일부는 제주도를 거쳐 일본까지 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고구려와는 적대관계였음으로 신라와 가야로 온 것 같다.)
이와 같은 기록(假說)을 사학계에선 인정 하지 않지만, 상당한 근거와 관심을 끌고 있다.
신라와 가야에서는 흉노의 관습대로 고구려와 백제에는 없는 돌무지덧널무덤 (積石木槨墳)과 금관을 만들었고, 유목민의 상징물인 이동식 솥 동복(銅鍑)을 사용하고 사슴을 신성시했다.
(금관은 사슴뿔을 형상화한 것)
서라벌은 국호이면서 수도 이름이었다. 국호를 신(新)나라와 연관된 신라(新羅)로, 금(金)을 신성시해 수도를 금성(金城)으로 바꾼 것은, 이런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흉노 무덤의 유골과 우리나라 고인골 (古人骨)의 DNA를 분석한 결과, 놀라울 만큼 서로 일치해, 스키타이, 흉노, 신라가 같은 그룹에 속한다고 발표했다.
신라와 가야 지역에만 존재하는 유목민족의 유물•유적과 풍습은 이들(흉노)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음이 확실하다.
신라에는 그 전, 진(秦)나라 패망 때 망명해 왔던 유민의 일부가 이미 6부의 지배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새로 망명해 온 흉노 세력이 이들과 합세해 선진 문물을 바탕으로 다시 왕족과 지배층을 이루면서, 몽골어 및 중국어 발음과 억양이 평민들 언어에도 깊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경상도 사투리는 억셈과 마디를 끊고 끝을 낮추는 등, 실제로 몽골어와 중국어 억양과 비슷한 점이 있다.
우리가 단일민족이란 말은 맞지 않다. 한국 성씨의 46%는 귀화 성씨이고, 한민족의 약 30~40%는 인근국 귀화인의 후손들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시대, 세계는 이제 지구촌의 단일민족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지금의 미국이나 중국 등 번성한 대국들은 모두 다민족 다문화 합중국(合衆國)들이다.
역사를 보라! 문물과 통상 교류가 활발한 시대는 번성했고, 문을 닫은 쇄국(鎖國)의 결과는 비참했다. 단일민족이 꼭 자랑거리는 아니다.
다문화 가정, 그들도 우리의 일원, 형제 자매들이다. 그들은 우리 한민족의 피를 섞어 아들 딸 낳고 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존중하고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자. |
첫댓글 에고, 결국은 버킹검이네요. 다문화 가정을 잘 봐달라는 야그를 할랴면 남의 시조꺼정 들먹거렸는지 내참 원~~ 알자 지자가 지의 시조를 ... 고약한진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