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왕후의 일생
1851(철종 2)~1895(고종 32) / 조선 제26대 고종의 비.
본명 민자영. 조선 철종당시 증영의정 민치록의 외동딸로 태어나 9세 때 고아가 되어
어렵게 생활을 하다 세도정치의 기반을 없애기 위해 중전을 물색하던 대원군의 눈에
띄어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이 후 총명함으로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대원군
의 섭정을 물리치면서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쇄국정치를 고집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조선의 문물개방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외국을 통해 유입이 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은 조선이 새로운 시대에 눈을 뜨게 하는
반면 수구세력들의 불만은 늘어나고 일본상인들의 농간으로 백성들의 반일감정은 고
조된다.
결국 별기군 특별우대에 반발하여 무위영의 군사들은 난을 일으켜 민씨척족과 황후
의 처형을 요구하는 사건인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다시 등장을 하게 되고 황후
는 변장을 한채 피신을 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다시 정국의
중심에 대원군이 등장을 하고 큰 위협을 느낀 조정의 기득권층은 청나라 텐진에 주재
하던 영선사 김윤식에게 통지를 하여 청국의 조정을 요청하였다.
청국은 종주국으로써 속장을 보호해야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빼앗긴 조선의 기득권
을 되찾으려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대원군을 납치
해 청국으로 호송을 하고 다시 황후는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후 10여 년간 일본과
청나라의 각축전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나 이미 노쇄한 청나라는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은 시모노세끼 조약과 갑오경장을 요구하여 조선의 지배기반을 확
고하게 구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러시아, 불란서, 독일을 회유하여 일본의 기득권
탈취를 골자로 하는"삼국간섭"을 성사 시킨 명성황후에 의해 일본은 조선을 다시 잃
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결국 일본은 대세를 뒤집기 위해 "여우사냥" 이라는 작전명 아래 황후의 암살계획을
수립하고 1895년 10월8일 사무라이 다카하시 겐지의 칼에 의해 파란 많았던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