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지정사(遠志精舍)를 지은 뒤에도 한이 되는 것은 촌락이 멀지 않아 그윽한 맛을 누리기가 만족스럽지 못하여서다.
북쪽 못을 건너서 돌벼랑 동쪽에 특이한 터를 얻었다. 그 자리는 앞에는 호수의 풍광을 안고 뒤로는 높은 언덕을 업었으며 오른쪽은 붉은 벼랑이 치솟고, 왼쪽은 흰 모래가 띠를 두른 듯한 곳이다. 남쪽으로 바라보면 멀리 뭇 산봉우리들이 들쭉날쭉 서서 두 손을 마주 잡고 읍하는 것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이요, 어촌 두어 점이 나무 사이로 강물이 어리어 보일락 말락 하며, 화산(花山)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달려오다 강에 닿아 멈추었다. 매양 달이 동쪽 산봉우리에서 떠올라 차가운 산 그림자를 거꾸로 반쯤 호수에 드리우고 잔잔한 물결 하나 일어나지 않아 금빛과 구슬 그림자가 서로 머금은 듯한 풍경이야말로 유달리 즐길 만한 것이었다. 그 자리가 인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앞에는 깊은 못이 막혀 있어 사람이 오고자 해도 배가 아니면 통할 수 없다. 그래서 배를 북쪽 강기슭에 매어 두면 객이 와서 모래밭에 앉아 소리쳐 부르다가 오래도록 응답이 없으면 스스로 돌아가게 되니, 이것 또한 세상을 피해 그윽이 들어앉아 사는 일에 일조가 된다.
이에 내가 마음속으로 이것을 즐겨 조그만 집을 지어서 늙도록 조용히 거처하는 곳으로 삼고자 하나, 다만 집이 가난하여 도무지 계획을 세울 수 없었다. 마침 산승(山僧) 탄홍(誕弘)이란 자가 그 건축을 주관하고 속백(粟帛.곡식과 비단)으로 물자를 대겠다고 자천하였다. 일을 시작한 병자년(1576)으로부터 10년이 지난 병술년(1586)에 겨우 완성되어 깃들고 쉴 만하게 되었다.
집 구조는 당(堂)이 2칸인데 감록(瞰綠)이라고 부르니, 왕희지(王羲之)의,
우러러 푸른 하늘가를 보며 / 仰眺碧天際
아래로 푸른 물 구비를 내려다본다 / 俯瞰綠水隈
는 말에서 취하였다. 이 당의 동쪽에는 한가할 때에 거처하는 집이 2칸이 있는데 이름을 세심(洗心)이라고 지었으니, 《주역》 계사(繫辭) 가운데의 말뜻을 취한 것으로 혹 여기에 종사하여 만에 하나라도 이루고자 함이다. 또 재실 북쪽에 집이 3칸인데 지키는 스님을 두고 불가의 학설을 취하여 완적(玩寂)이라 하였다. 동쪽에 서재 2칸을 지어 찾아오는 친구를 대비한다는 뜻으로 원락(遠樂)이라고 하였으니,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뜻에서 취하였다. 이 서재에서 서쪽으로 나가 조그만 다락 2칸을 만들어 세심재(洗心齋)와 더불어 나란히 앉혔는데, 애오(愛吾)라고 이름하니, 도연명의 시에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함이라.[吾亦愛吾廬]”라는 말에서 취하였다. 모두 합해서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대개 강물이 흐르다가 이곳에 이르러서는 깊은 못이 되었는데, 그 물빛이 깨끗하고 맑아 옥과 같은 까닭에 이름하였다.
사람이 진실로 그 뜻을 본받고자 한다면 구슬의 깨끗함과 못의 맑음은 모두 군자가 귀하게 여길 도이다. 내가 일찍이 옛사람들의 말을 살펴보건대, “인생은 스스로 뜻에 맞는 것이 귀하지 부귀가 어찌 귀하리오.” 하였거니와, 내가 비루하고 옹졸하여서 평소부터 행세하기를 원하지 않은 것이 비유하자면 “미록(麋鹿.고라니와 사슴)은 성품이 산과 들에 알맞지 도시에 맞는 동물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다.
중년에 망녕되이 벼슬길에 나아가 명성과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20여 년을 골몰하였다. 발을 들고 손을 놀릴 때마다 걸핏하면 놀라서 부딪칠 뿐이었으니, 당시에 크게 답답하고 무료하여 슬퍼할 적마다 이곳의 무성한 숲 우거진 덤불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지금 다행히 임금의 은혜를 입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오니, 벼슬살이의 영화는 귓가에 지나가는 새소리가 되었고, 아름다운 한 언덕 한 골짜기의 즐거움이 깊어 간다. 이때에 나의 집이 마침 이뤄졌으므로 장차 문을 걸고 싹 물리쳐 쓸은 듯 깊이 방 안에 들어박혀 지내며, 산의 계곡 사이를 이리저리 거닐기도 하고 도서는 즐겨 찾아 읽을 정도로 만족하며, 성긴 밥이 맛있는 고기의 기름짐을 잊기에 족하다. 좋은 때 아름다운 경치에 정겨운 벗들이 우연히 모여들면 그들과 함께 굽이진 계곡을 거슬러 찾기도 하며 암석에 앉아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흰 구름을 읊기도 하면서 호탕히 놀아 물고기와 새들까지 모두 흠뻑 즐겁게 하면서 시름을 잊으리라.
아, 이것 또한 인생이 스스로의 뜻에 맞는 큰일이니 밖으로 달리 그 무엇을 그리워하겠는가. 내 이 말이 굳지 못할까 두려운 나머지 문득 벽에 써서 붙여 스스로를 경계한다. 병술년(1586) 늦여름, 주인 서애 거사(西厓居士)는 적는다.
▼ 옥연서당(玉淵書堂)은 그후 서애가 옥연정사(玉淵精舍)로 이름을 고치고 이곳에서 《징비록》을 집필하였다.
玉淵書堂記
余旣作遠志精舍。猶恨其村墟近。未愜幽期。渡北潭。於石崖東。得異處焉。前挹湖光。後負高阜。丹壁峙其右。白沙縈其左。南望則羣峯錯立。拱揖如畫。漁村數點。隱映烟樹間。花山自北而南。隔江相對。每月出東峯。寒影倒垂。半浸湖水。纖波不起。金璧相涵。殊可玩也。地去人烟不甚遠。而前阻深潭。人欲至者。非舟莫通。舟艤北岸則客來坐沙中。招呼無應者。良久乃去。亦遁世幽棲之一助也。於是。余心樂之。欲作小宇。爲靜居終老之所。顧家貧無計。有山僧誕弘者。自薦幹其役。資以粟帛。自丙子始。越十年丙戌粗成。可棲息。其制爲堂者二間。名曰瞰綠。取王羲之仰眺碧天際。俯瞰綠水隈之語也。堂之東。爲燕居之室二間。名曰洗心。取易繫辭中語。意或從事於斯。以庶幾萬一爾。又齋在北者三間。以舍守僧。取禪家說名曰玩寂。東爲齋二間。以待朋友之來訪者。名遠樂。取自遠樂乎之語。由齋西出爲小軒二間。與洗心齋相比。名曰愛吾。取淵明吾亦愛吾廬之語。合而扁之曰玉淵書堂。盖江水至此。匯爲深潭。其色潔淨如玉故名。人苟體其意。則玉之潔淵之澄。皆君子之所貴乎道者也。余嘗觀古人之言曰。人生貴適意。富貴何爲。余以鄙拙。素無行世之願。譬如麋鹿之性。山野其適。非城市間物。而中年妄出宦途。汨沒聲利之塲二十餘年矣。擧足搖手。動成駭觸。當其時。大悶無聊。未嘗不悵然思茂林豐草之爲樂也。今幸蒙 恩。解綬南歸。軒冕之榮。過耳鳥音。而一丘一壑。樂意方深。是時而吾堂適成。將杜門卻掃。潛深伏奧。俛仰乎一室之內。放浪乎山谿之間。圖書足以供玩索之樂。疏糲足以忘蒭豢之美。佳辰美景。情朋偶集。則與之竆回溪坐巖石。望靑天歌白雲。蕩狎魚鳥。皆足以自樂而忘憂。嗚呼。斯亦人生適意之大者。外慕何爲。懼斯言之不固。聊書壁而自警。丙戌季夏。主人西厓居士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