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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나해 12월22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수도회] 가난의 찬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1사무 1,24-28
† 복음 루카 1,46-56
★ 기도 끝에 사무엘을 얻은 한나는 주님께 감사드리고, 사무엘이 젖을
떼자 약속대로 그를 사제 엘리에게 데려가 성전에서 봉사하게 한다
(제1독서).
★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몸으로 엘리사벳을 찾아가 부른 노래
(마니피캇)이다. 구세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겨울은 깊어지면서 성탄절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눈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설경을 감상하려는 욕심에서가 아닙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노래를 들으며 도시의 달콤한 성탄절을 즐겨 보고자 해서도 아닙니다.
얼굴에 와 닿는 눈송이의 차가운 감촉의 힘을 빌려서라도 순수하고 가난한
마음에 가 닿지 못하게 하는 오랜 미망과 욕심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눈 내리는 날에 구유의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을 상상하다가 흑백
사진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여행길에 한 작은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났던
마리오 쟈코멜리의 ‘나에게는 얼굴을 쓰다듬을 손이 없다.’라는
작품입니다. 1960년대 이탈리아의 한 작은 도시의 신학교에서 찍은 이
연작 사진들 속에서는 신학생들이 눈 내리는 날 해맑게 웃으며 뛰놀고
있습니다. 검은 수단이 하늘의 축복과도 같은 눈송이와 잘 어울리고,
그들에게서 날아오를 듯한 즐거움과 상쾌함이 느껴집니다. 순수함과
단순함이 큰 기쁨을 선사한다는 점을 깨닫게 하는 사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차가운 겨울날 누추한 마구간에서 가난한 부모의 아이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말씀의 강생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가난한 이들의
기쁨이며 구원이라는 것을 보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라는 점을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성탄절의 정신이
여기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비천한 이와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시고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는 하느님을 기쁨에 넘쳐 찬미하십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의 마음과 삶에 들러붙어 있는 욕심과 교만의 옷을
벗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대림 제4주간 월요일
2014년 나해 12월22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한나가 사무엘의 탄생을 감사드리다.>
◎ 사무엘 상권 1,24-28
복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 루카 1,46-56
오늘 ‘성소와 학업’이라는 주제로 가톨릭 회관에서 ‘대림특강’을 합니다.
특강을 하시는 선생님께서는 학업 때문에 신학교에 가기 힘든 학생들을
지도하셨습니다. 10년 동안 학생들과 함께 하면서 많은 보람을 느꼈다고
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서울대교구의 예비신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성소와 학업’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성소는 예비신학생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고 격려해 주어야합니다. 그래서 학부모님들을 초대해서 함께
하기로 하였습니다. 심성이 좋고, 건강하고, 대인관계가 좋은 친구들이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아서 신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웠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기회를 통해서 학생들이 학업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고, 신학교에서 요구하는 성적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성소국에서 함께 일할 사제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1,000여명이 넘는 예비신학생들을 같은 눈높이에서 사랑하고 이끌어 줄
열정과 능력을 갖춘 사제가 있었으면 했습니다. 담임부제님들과
신학생들에게 친형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면서 예비신학생 모임을 이끌어
줄 사제가 함께 있으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고3 학생과 일반 학생들과
자주 만나서 영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제가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교구장님의 관심과 배려로 내년에는 함께 일할 동료사제를 보내 주신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성모님은 단순히 어린
처녀가 아니었습니다. 뜻하지 않았던 일을 만나서 당황하고 걱정하는
처녀가 아니었습니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 노래는 그 어떤 신학자의 지식보다 더
뛰어난 삶의 지혜입니다. 이 노래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인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노래는 모든 신앙인들이 따라
불러야 할 삶의 지침서입니다. 가야 할 길을 알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성모님은 그래서 신앙인의 모범인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오늘
하루 성모님의 노래를 묵상하면서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어머니의 향기 -어머니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22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뉴튼수도원 42일째),
사무 상1,24-28 루카1,46-56
제1독서
<한나가 사무엘의 탄생을 감사드리다.>
◎ 사무엘 상권 1,24-28
복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 루카 1,46-56
어머니의 향기 -어머니 예찬-
어머니의 향기는 그리스도의 향기, 기도의 향기, 영혼의 향기, 찬미의
향기입니다. 물론 믿음 좋은 어머니를 뜻합니다. 며칠 전 성탄츄리나무
작업 후 방에 들어왔을 때의 순간적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어, 이거 솔향기가 아닌가?“
옷과 몸에 밴 솔 향기가 너무 신선했습니다.
정신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솔향기였습니다.
깨어 있는 영혼의 향기가 있다면 아마 이럴 것입니다.
어제 성탄츄리나무 작업장 모닥불 곁에서 수도형제들과 나눈 덕담도
재미있습니다. 한 번의 도끼질로 쩍 갈라진 나무 속 결이 너무 곱고
깨끗하고 향기로워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아, 수사님 마음 결처럼 곱고 깨끗하고 향기롭습니다.“
제 덕담에 곁에 있던 수사님은 웃음으로 화답했고 다른 수사님 역시
웃으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제 마음은 굴곡이 많습니다.“
나무만 아니라 사람 마음도 곱고 향기로울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요즘 읽은 사막수도자의 일화 중 한 대목도 나눕니다.
-복된 조시마는 늘 온 시간을 말씀들을 읽는 것을 사랑했다;
말씀들은 거의 그가 숨쉬는 공기와도 같았다(they were almost like
he air that he breathed).-
말씀대신 어머니의 향기를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특히 1독서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그랬을 것이며
복음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랬을 것입니다.
두 분 가정 똑같이 두 어머니의 기도의 향기, 찬미의 향기로 가득했을
것이며, 두 아들들은 어머니의 이런 향기를 숨쉬며 성장했을 것입니다.
아, 어머니의 향기보다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하느님이 점지해 준 아들들이기에 두 어머니의
아들 사랑은 참 각별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사무엘이 젖을 떼자 한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올라갔다.
삼년 된 황소 한 마리에 밀가루 한 에파와 포도주를 채운 가죽 부대 하나를
싣고,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가난한 처지에 이런 봉헌이라면 그 신심이나 아들
사랑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이어 봉헌 후 계속되는 내용은 한나의 하느님 찬미(1사무2,1-10)인데
독서에는 나오지 않고 화답송(1사무1,4-5.6-7.8ㄱㄴㄷㄹ)에 일부
나옵니다. 그대로 하느님 밖에 의지할 바 없는 가난한 이들, 아나뵘
(anawim)의 하느님 찬미가입니다.
바로 1독서의 한나와 쌍벽을 이루는 루카복음의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하느님 찬미가 '성모의 노래'는 가톨릭 교회가 매일 저녁기도
말미에 마음을 다해 바치는 찬미가이기도 합니다.
이 또한 진정 가난한 아나뵘의 찬미가입니다.
이런 찬미가가 우리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정화합니다.
향기로운 영혼,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영혼으로 만들어 줍니다.
분명 사무엘과 예수님은 이런 어머니들의 하느님 찬미를 숨쉬며 살았을
것이며 성장했을 것입니다. 요즘 절실히 깨닫는 바도 대부분의 시편은
물론 '주님의 기도'도 가난한 아나뵘의 기도라는 확신입니다.
이런 하느님 찬미를 숨쉬며 살아갈 때 비로소 영혼은 주님의 향기를 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어머니들인 한나와 마리아를 대하니
제 주변의 많은 향기로운 얼머니들과 제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자식들은 아무리 나이 먹어도 영원히 어머니의 자식일 뿐입니다.
아주 힘들면 생각나 찾는 곳이 고향의 어머니입니다.
이젠 고향의 어머니는 떠나셨고, 교회가 고향이, 성모님이 어머니가
됐습니다만 예전 어머니 생전에는 자주 찾았던 고향의 어머니였습니다.
9년전 돌아가신 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약 4개월 전에 썼던
'어머니를 그리며'란 시가 생각 나 나눕니다.
제 어머니는 늦게야 세례를 받았지만 참 향기로운 분이셨습니다.
-남들은 내가 효자일거라 생각하는데 솔직히 말해 난 효자가 못된다.
어머니를 닮아 붙임성도 없고 무뚝뚝한 편이다.
이건 어머니도 인정하신거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조선 여자 같은 분이셨다.
애교나 아양은 거의 없었지만 강인한 의지에 아주 지혜로운 분이셨다.
심한 밭일에 몸 많이 피곤하여 밤에 끙끙 앓으셔도
아프다는 내색 하나 않으셨다.
아버지 원망하는 말 하나 들은 적 없고
큰 소리 내셔서 다투거나 화내신 적 한 번도 본 적 없다.
매번 우등상을 타 와도 덤덤하실 뿐 칭찬 한 번 하신 적도 없다.
돼지 키워 자식들 학비도 대셨고
장마다 계란 모아 팔아 꼭 찐빵도 사다 주셨다.
사실 오십 년대 육십 년대는 모두가 가난했지
그러나 마음은 참 부자였고 행복했다.
어려워도 내 전과서며 학용품은 꼭 꼭 잘도 사 주셨던 어머니
초등학교 시절 무척이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나
일 년에도 아마 열 번은 크레용을 샀을 거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 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어머니
삶 자체가 기도였고 신앙이셨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상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거니 ‘그립다’ 거니 감정 표현 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 오신 어머니
내 수도원 들어올 때도 극구 만류하셨다.
‘왜 이제 살만하게 됐는데 또 고생길에 접어드느냐’고
그러다 하루 지나 내 방에 들어오셔서
‘얘, 수철아, 네가 좋아하면 수도원 들어가라’고 허락해 주셨다.
사실 어머니는 은연 중 막내인 나와 살고 싶어 하셨다.
지금은 극도로 쇠약해 지셔서 온 종일 방에 누워계신 어머니
정신은 여전히 맑으시고 마음도 고요하시다.
그냥 계시기만 해도 좋은 어머니 '신 마리아'
오래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나이 들어 철이 났나 보다.
(2005.2.18.일 씀, 2005.6.14.일 90세 선종)-
비단 제 어머니만 아니라, 50-60년대 보편적 어머니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누구나 어머니를 통해 우리 모두의 영원한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만납니다.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와 더불어 매일 저녁기도때마다 바치는
오늘 복음의 성모찬가가 우리를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찬미의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향기를 숨쉬며 봉헌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가난의 찬가/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나해 12월22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한나가 사무엘의 탄생을 감사드리다.>
◎ 사무엘 상권 1,24-28
복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 루카 1,46-56
“비천한 이들을 들어높이셨도다.”(루카 1,52)
가난의 찬가
성모 찬가는 루카복음의 서론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루카 복음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다. 루카는 이 노래를 통해 구원 약속과 이행,
이스라엘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다. 구원 사건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계획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이를 돌보시어
높여주심으로 가능했다. 이 노래는 초대 유다 공동체에서 만들어져
불려졌고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그리스도 신자들의 입을 통해 노래 불려진
우리의 노래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노래를 통해 그 체험을 다시
현재화시키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성모님의 입을 통해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과 폭력주의자들의
전유물인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그 어떤 막강한 억압세력도 모조리
뒤엎게 된다는 기쁜소식이 선포되고 있다.
성모님께서 이 노래를 부르실 때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마 성모님께서는
자신에게 천사가 찾아와 전한 소식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약혼자인 요셉에게도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예언이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결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모님은 주님을 잉태한
사실을 세상에 알림에 있어서 자신이 생각하는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때를 묵묵히 기다렸을 것이다.
약혼자 요셉은 꿈에서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실현되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성모님에게 천사의 말을 확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모님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워 세상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동떨어진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친척 엘리사벳의 집에
도착하여 엘리사벳을 만난 그 순간 그녀의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을까?
마리아는 처녀 잉태 사실을 자기 혼자 지고 가야 할 무게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사촌 엘리사벳이 성령의 빛으로 그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성령을 받아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듣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받아들여 구원에 참여하는 '영혼의 순례'를 사작해야 할
때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순간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보면서 하느님께 또 세상을 향하여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높여주셔서가 아니라 자신을
굽어보신 그 자비에 감사드리며,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의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뛴다”(1,46-47)라고 목소리 높여
노래한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을 높이시고 교만하고 부요한
억압자들을 끌어내리신 근원적이고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유다민족의 조상들에게 베푸신 자비하심이다. 이렇듯
메시아의 탄생은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역사 속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성모의 노래는 줄곧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한 데 대한
기쁨의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단순히 연약한 한 여인의
노래가 아니라 '모두의 영혼을 울리는 생명의 노래'인 것이다.
우리가 성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를 생각한다면, 날마다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며
성모님과 함께 기쁨에 넘쳐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고…그 자비가 영원히 미치실 것”(1,54-55)이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구유에 하느님의 자비를 담은 나의 진실한 마음과
선의가 채워질 때 그 작은 구유는 모두를 살리는 우주가 되지 않을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기적을 불러오는 순수한 믿음
2014년 나해 12월22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
복음: 루카 1,46-56
< 기적을 불러오는 순수한 믿음 >
‘TV 동화 행복한 세상’에서 ‘기적’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작은 시골마을, 세 식구가 사는 오두막에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다섯 살
막내가 앓아누운 지 여러 달째. 아이는 변변한 치료 한번 받아 보지 못한 채
시들어갔습니다.
“으... 응... 아파.....”
엄마는 아무런 도리가 없어 앓는 아이의 머리만 쓸어줄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기적만이 동생을 살릴 수 있다는 엄마의 간절한
기도를 듣게 됐습니다.
“기적이라도 있었으면... 제발.”
문틈으로 들여다보던 소년은 궁금했습니다.
“기적? 기적이 뭐지?”
다음 날 아침 소년은 엄마 몰래 돼지 저금통을 털었습니다.
“천 원, 이천 원, 오천 원.”
돼지가 토해낸 돈은 모두 7천 6백원. 소년은 그 돈을 들고 십 리 길을 달려
읍내 약국으로 갔습니다.
“헉헉헉....”
“아이구 애야, 숨넘어갈라. 그래 무슨 약을 줄까?”
숨이 차서 말도 못하고 가쁜 숨만 헥헥 몰아쉬는 소년에게 약사가 다가와
물었습니다.
“저.. 저기... 도, 동생이 아픈데 기적이 있어야 낫는데요.”
“기적? 아니, 기적이라니?”
“여기서는 기적 안 팔아요?”
“이를 어쩌나. 여기선 기적을 팔지 않는단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옆의 신사가 물었습니다.
“꼬마야, 네 동생한테 어떤 기적이 필요하지?”
“어, 나도 몰라요.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은 없고 기적이 있으면 살릴 수
있대요. 그래서 기적을 사야 하는데.....”
“하하. 저런, 돈은 얼마나 있지?”
“이... 이... 이만큼요.”
아이는 양손으로 둥그렇게 원을 그려 보였습니다.
신사는 7천6백 원으로 기적을 사겠다는 소년을 앞세우고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소년의 동생을 진찰한 뒤 병원으로 옮겨 직접 수술까지
해 주었습니다. 약사의 동생인 그는 큰 병원의 유명한 외과 의사였던
것입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소년의 엄마가 수술비용을 물었을 때 그 의사가
말했습니다.
“수술비용은 7천 6백 원입니다.”
동생을 살리고 싶다는 소년의 사랑이 단돈 7천6백 원으로 꿈같은 기적을
산 것입니다.
한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기적을 선물로 준
의사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 믿음을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정성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에는 어처구니없이
부족하여도 우리 정성을 보시고 감히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은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한나의 자신의 간절한 기도로 탄생한 사무엘이 예언자
엘리를 통해 하느님께 봉헌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나는 엘리가 술에
취해 중얼거리는 것으로 알았을 정도로 믿음을 지니고 하느님께 자녀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은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장차 사무엘이란 이름을 지니게 될 아기를 주셨습니다. 한나는
아기를 주신 분이 하느님이시기에 아기를 다시 성전에 봉헌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탄을 향하고 있는 모든 독서가 메시아의 탄생이 예고된 부분들만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의 탄생 또한 메시아
탄생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한나는 성모 마리아입니다. 성모님 또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더 간절하게 메시아가 오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간절함을 보시고 하느님의 마음이 성모님께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기대를 저버리시지 않기 위해 성모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물론 성모님은
겸손하시어 당신을 통해 메시아가 탄생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을지라도 그분의 믿고 바라는 순결한 마음이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예언되어 있던
때보다 7년 정도 앞서서 예수님이 탄생하셨는지도 모릅니다(보통은
예수님 탄생을 기원전 7년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기원전 7년에
호구조사가 시작되었고 기원전 4년에 헤로데가 죽었기 때문. 기원전
7년에 태어나 이집트로 피신 가 있다가 4년이 지나서 돌아왔을 것으로
추측).
성모님께서 실제로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첫 기적을 하시게 했습니다. 당연히
해 줄 것으로 믿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인들에게 명령하는 성모님의
순수한 믿음을 그리스도께서는 실망시키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그 믿음에 합당하게 은총은 내려주십니다. 성모님의 이 큰
믿음이 메시아가 세상에 오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이 믿음에 찬 눈망울을 지니고
하느님께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지금 자리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2014년 나해 12월22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한나가 사무엘의 탄생을 감사드리다.>
◎ 사무엘 상권 1,24-28
복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 루카 1,46-56
며칠 전에 신학생들이 제 방을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신학생이 책꽂이에 세워있는 무엇인가를 보고는 “신부님, 정말로
부러워요.”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고 그 신학생이 바라본 것을 보니
2001년부터 써 온 ‘새벽 묵상 글’을 제본한 것입니다. 한 해가 지나면 1년
치를 묶어서 제본을 했는데, 2001년부터 2013년까지(2014년 것은 이제 곧
제본되어서 이 책꽂이에 세워지겠지요?) 총 13권이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묵상 글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2001년부터 차곡차곡 채워지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
신학생에게 저는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너도 지금부터 글을 써봐. 그렇게 14년 동안 글을 쓰고 해가 끝날 때마다
제본을 뜨면, 너도 14년 뒤에 후배 신학생에게 부럽다는 말을 들을 거다.”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첫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첫 마음이 없다면 그
어떤 결과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첫 마음들이 모아져서
본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결과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 첫 마음을 쉽게 포기합니다. 전혀 실천하지 않으면서 그냥
부러워만 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포기하고, 지금의 삶으로 충분히 만족한다면서 포기하고,
도저히 할 수 없다면서 포기하고, 바빠서 포기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포기하고.... 포기의 이유만 계속해서 만들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포기함에 앞서 한 번이라도 시도해보면 어떨까요?
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계속해서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삶 안에서 중요한 희망과 기쁨을
체험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모님께서 엘리사벳 성녀를 찾아뵙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고서는 집에서 두문분출
(杜門不出)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남 앞에 나서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잉태하셨음에 충분히 교만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자리에 그냥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움직이셔서 엘리사벳을 만나십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을 더
깊이 체험하셨고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지금의 자리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를 생각하기에
앞서, 이 자리를 떠나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이유도 만만치 않게 많을 것입니다. 결국 내 마음만을 바꾼다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부르신 찬미의 노래를
우리도 부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실패해서 다행입니다(구로다 다쓰히코, ‘멋지다 다나카’ 중에서)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노벨상을 받아 화제가 된 다나카 고이치가 강연
등에서 자신의 과거 실패담을 말할 때 하도 여러 차례 이야기해서 이제는
그만의 독특한 개인기라 할 수 있을 정도가 된 말투가 있다. 입사 당시
맡았던 연구 내용이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아 수상의 계기가 된 연구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을 때의 에피소드가 그것이다.
“먼저 표면 분석을 하려고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말이지요. 그것이 만일 성공했더라면 오늘과 같은 날은 오지 않았을
테지요. 팀에서 실험 도구를 활용해서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생체 물질과 같이 아주 분석하기 쉬운 덩치 큰 것을
뭉그러뜨리지 않고 분석할 방법이 없을까를 연구했습니다.”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것이 바로 이 ‘다행히도’라는 사고방식이다. 연구에
늘 따르게 마련인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이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는데, 이는 연구자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적용해볼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다.
다나카는 예전부터 강연에서 이렇게 말해왔다.
“실패는 다음 일의 실마리라는 말을 항상 스스로에게 되뇌어 왔습니다.”
다나카에게 소니의 입사 시험에서 떨어진 일에 대해 물었을 때도,
다나카는 이렇게 대답했다.
“학생 시절에 전기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전공 과정은 고작 2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남들보다 잘하지도 못했습니다. 만약 소니에 입사했더라면 지극히
뻔한 전기 개발자가 되어 아주 상식적인 일을 했을 것이고, 이번 수상
대상이 된 것과 같은 엄청난 발견을 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됩니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소니의 입사시험에 떨어져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해서 자신이 만든 틀 안에서 스스로를 가두곤
하지요.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실패해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느님|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나해 12월22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한나가 사무엘의 탄생을 감사드리다.>
◎ 사무엘 상권 1,24-28
복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 루카 1,46-56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느님
성탄이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낯선 카드와 선물을 받으며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저는 아직 카드를 쓸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과분한 선물을
받기만 하며 빚을 지게 됩니다. 저는 최근 몇 해 동안은 카드를 보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매일 같이 우편물을 확인 합니다. 어느새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받는 것에 익숙해진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거듭 태어나기를
다짐합니다.
마리아는 시골의 보잘것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힘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말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1,47-48). 비천함을 굽어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며 또 희망입니다. 우리의 비천함도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믿고 순명 하는 가운데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복된 여인,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거룩하신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믿고, 믿는 바를
가슴에 새기고, 새긴 바를 실행하게 될 때 비로소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사람들에게는 복된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처지나 여건, 환경을 비관합니다. 능력이나
성격을 상대와 비교하며 스스로를 위축시키며 힘들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루카1,51-53). 하느님께서는 지금 나의 처지를 인정해 주시고 그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지금은 보잘것없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빛나는 존재입니다. 할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젊은 날에 아이를 배지 못하는 돌계집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엘리사벳도
하느님의 은혜를 입고 늙은 나이에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일을 해주셨구나”
(루카1,25).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자신의 처지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충실한
삶을 살았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나의 비천한 처지를
돌보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엑 신부 -
◈ [서울] 하늘계획 따라 세상계획 고쳐가는 삶
2014년 나해 12월22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한나가 사무엘의 탄생을 감사드리다.>
◎ 사무엘 상권 1,24-28
복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 루카 1,46-56
하늘계획 따라 세상계획 고쳐가는 삶
세상계획과 하늘계획이 있으니 어느 계획을 따르겠냐고 물어온다 합시다.
세상에 있는 한 세상계획을 따라야한다고들 당연히 말할 겁니다.
어쩌면 하늘계획은 생각할 필요도 없고 아예 없는 걸로 취급합니다.
성모님은 하늘계획 따르기로 세상계획은 완전 포기하신 고통의 여인입니다.
당시 시골여자(촌년)였던 마리아는 세대가 흐르며 하늘여왕이 되셨습니다.
신앙인의 삶도 하늘계획 따라 세상계획 고쳐가는 삶이어야 하겠지요.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49)”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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