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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뒤 울타리를 이어가며 무궁화가 심겨져 있습니다. 언제 꽃이 피려나 오며가며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흘 전부터 몇 가지에 꽃망울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난해 여름 유심히 보며 언제쯤 꽃이 피는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마도 6월 말이나 7월 초쯤 되리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6월 하순에 들어서니 준비를 하고 있네요. 호 - 볼수록 신기합니다. 우리 사람도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을 보면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경이롭지요. 세상에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신비이고 놀라움입니다. 더구나 나로 인하여 내 분신과도 같은 자식이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면 더더욱 놀라움과 감사함이 넘쳐납니다. 그렇게 자식을 키우게 됩니다.
최근 영아 시신을 냉장고에 몇 년이나 보관(?)한 엄마가 검거되었습니다. 키울 능력이 없어서 그랬다는데 이해는 하면서도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이미 자녀가 셋인가 있습니다. 양육할 능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사전 임신 예방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형편이 안 되니 임신중절 수술도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 몸에 열 달 가까이 품고 있었는데 어찌 정이 없었을까요? 자녀를 낳지 않는 세태와 아이를 낳아도 기르지 못하는 세태 속에서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무작정 돕자니 그렇고 안 돕자니 그렇고, 결정하기도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세상에 나온 생명은 그가 누구이든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고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덧 한 해의 반이 가고 있는데, 기쁘고 시원한 이야기는 많지 않았습니다. 남은 반을 지내면서라도 좀 신나고 즐거운 이야기들이 많이 생산되기를 바랍니다. 건강해야 기다릴 힘도 생깁니다. 새로운 주말, 행복하세요. ^)^
2023년 6월 24일 김종우 목사 드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 : 11)
<플래시>
살다보면 바꾸고 싶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 때 이렇게 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나 안타까움 등이 있습니다.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 그겁니다. 지나간 일은 바꿀 수 없다는 뜻이지요. 다만 현실에서는 안 되지만 우리 머릿속에서는 가능합니다.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영화로도 만듭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해보는 재미를 느낍니다. 비록 상상 속의 일이지만 말입니다. ‘대리 만족’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과거에 빠져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냥 상상해보는 것뿐, 현실을 중요시하고 살아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상상이 창조력을 생산해내기 때문에 장려해야 하기도 합니다.
만약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요? 하기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기에 개인적으로 상상해본 적도 없습니다. 아무튼 그런 능력이 있다면 무엇을 할까 생각해봅니다. 가장 강력하게 나올 수 있는 일이 갑자기 죽음을 당한 사랑하는 사람을 되살리려는 일이 가장 많이 생길 것이라 생각합니다. 손실 중에서도 아끼는 사람을 갑자기 잃는 일이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 상처는 매우 깊고 그래서 오래갈 수 있습니다. 치유하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사고를 당하였다면 사고 전에 조치를 취할 것이고 병이 들었다면 역시 병에 걸리지 않도록 사전 예방을 할 것입니다. 그 시간 그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겠지요.
그런데 사실 세상은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그 일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연관되는 일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그 사건사고를 달리 바꾼다면 그에 따라 연관된 일들과 사람들에게 자연히 또 다른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전개될지 사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고 전혀 다른 역사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 책임은 누가 지나요? 그냥 내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나 몰라라 하겠습니까? 얼마나 무책임한 일입니까? 사람은 모두 따로따로 개인이지만 그 개인들이 또한 다른 개인들에게 그리고 크게는 한 조직과 사회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그 책임을 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간사회라는 공동체가 유지됩니다.
사랑하는 엄마가 사고를 당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충격이 너무 큽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시간을 돌이켜 그 자리로 달려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지요. 당장 달려가서 사고를 미연 방지하려 합니다. 문제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세상에서 벌어진 일이 그냥 개인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복잡하게 얽히는 또 다른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현재의 내가 있고 당시의 내가 나타납니다. 어떻게 하지요? 누구를 택합니까? 일단 합의하고 함께 움직입니다. 그 정도는 다행이다 싶습니다. 세상에는 내 맘 같은 사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훼방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특출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비단 그렇게 크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타 하나 만들어놓으면 그를 만들어준 기업이 이익을 얻습니다. 그러니 스타 발굴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가만두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몰려듭니다. 아니면 그보다 못한 자들이 경쟁상대로 여겨 없애버리려 쫓아다닙니다. 단순히 애들 싸움이 아니라 조직화되면 큰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향한 싸움이 됩니다. 전 세계를 향한 전쟁, 나아가 선악간의 대 전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마치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확대되는 것 같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같이 있게 마련입니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공간이 있는 것이고 공간이 존재하는 시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상호적으로 관계하며 존재하는 것이지요. 시간 따로, 공간 따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지배한다면 그에 따른 공간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공간이동을 한다면 이동한 그곳에는 또 그에 따른 시간이 존재합니다.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과거를 향합니다. 엄마가 사고를 당하기 직전으로 달려가서 상황을 바꿉니다. 무엇인가 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사고만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만 관여하는 일도 아닙니다. 소위 역사가 비틀어지는 것이지요. 답은 뻔합니다. 일단 흘러가면 그냥 내두는 것입니다.
시간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꾸며져서 나왔습니다. 아주 고전으로는 ‘타임머신’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반세기도 훨씬 전에 본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발상이었고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오랜 후에 보다 발전한 시리즈가 나왔으니 잘 기억하고 있는 ‘백 투 더 퓨처’입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글쎄, 과연 가능할까요? 역사 속에 불가능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으니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간 여행이 가능해지면 역사가 뒤범벅이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아마도 신이 없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영화 ‘플래시’(The Flash)를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전쟁
전쟁은 합법화된 살인행위입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단순히 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살인이 자행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전에 얼마나 착하게 살고 무슨 좋은 일을 얼마나 했는지 등등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적이냐 아군이냐 하는 것으로 판가름 납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인이라도 갈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기도하고 저기서도 기도할 것입니다. 무엇을 기도하겠습니까? 자기네가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이기려면 적군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적군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국적이 다르고 소속이 다르면 적군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서로를 향하여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요? 이것은 성경에서 보는 이스라엘과 이방나라와의 전쟁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끼리 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남북전쟁은 그랬습니다. 하기는 옛날 이스라엘도 남북으로 분단되어 서로 싸웠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기막힐 일일 것입니다. 양쪽에서 기도하는데 어느 편에 응답하실까요?
아무튼 전쟁은 비참합니다. 군인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이라면 차라리 싸우다 죽기라도 하지요. 싸움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전쟁에 휩쓸려 죽습니다. 그래서 힘없는 아이들과 여인들이 가장 불쌍합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물불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일단은 이겨야 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패배는 이미 전쟁으로 당한 고통 위에 더 무서운 비극을 쌓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합니다. 당연히 승리를 위한 온갖 수단이 동원됩니다. 비인간적이고 비인도적인 조치도 일단 이기고 나면 모두 덮어집니다. 그래서 전쟁은 더욱 무참하고 가혹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기에 전쟁은 가능하면 피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만드는 이 전쟁은 인류 역사와 함께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조금 큰 전쟁이라도 발발하거나 그 위험이 보이면 교회에서는 마지막 때를 곧잘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마 24 : 6 - 7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그래서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마지막 때를 운운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지만 전쟁은 우리 인류 역사와 함께 언제 어디서나 있어 왔습니다. 오늘날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지요. 마 22 :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전쟁, 그리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전쟁은 그런 전쟁이 아닙니다. 엡 6 :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구약시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은 많은 전쟁을 치르며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 정복으로 시작하여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고 나서도 주변 이방나라와 계속 전쟁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은 물론 육적인 세상의 전쟁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기록된 육적 이스라엘 나라의 사건들은 오늘 영적인 이스라엘 바로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되는 것이지요. 고전 10 :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전쟁을 그런 육적인 전쟁으로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젖먹이 신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지금 우리의 싸움은 총칼을 들고 대포와 미사일을 쏘아대며 하는 전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영적인 것을 말씀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난리와 전쟁을 말씀하신 것은 마지막 때 영적인 전쟁이 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3차 대전이다, 핵전쟁이다, 라고 말한다면 예수님과 하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스스로 거짓선지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싸움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마귀 나라 사이의 전쟁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때문에 세상 무기로 무장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엡 6 :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기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딤전 6 : 11 - 12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그렇습니다. 승리하면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믿으면 영생이 저절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천국이 저절로 오는 것도 아니지요.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마 11 : 12) 그러므로 싸워야 합니다.
싸움과 전쟁은 일차적으로 군인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하나님나라 군대와 마귀나라 군대의 전쟁입니다. 문제는 영적인 전쟁에서는 군인이 다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전쟁을 하려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지요. 군인은 당연히 군사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장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무장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찬송가를 부르면 이 내용이 실감나게 들려옵니다. 찬송가 393장(새찬송가 350장)을 봅니다. “우리들의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 우리들의 싸울 것은 육체 아니요 마귀권세 힘써 싸워 깨쳐버리고 죽을 영혼 살릴 것일세” 이는 분명히 영적인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찬송가를 열심히 부르면서도 어떻게 육적인 전쟁만 생각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왜 싸운다고 합니까? “죽을 영혼 살릴 것일세” 그렇습니다. 죽을 영혼을 살리는 것이 우리 전쟁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혼자 싸웁니까? 아닙니다. 같이 싸워야 합니다. 목사만 싸우는 것도 아니고 성도만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싸우는 것이지요. 언제까지 싸워야 합니까? “일심으로써 힘써나가세 일심으로써 힘써 싸우세 마귀들의 군사들과 힘써 싸워서 승전고를 울리기까지." 언제까지요? 예, 이길 때까지입니다.
이 찬송가 2절에는 우리가 무엇으로 싸워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입은 갑옷 쇠가 아니요, 우리들이 가진 검은 강철 아니요, 하나님께 받아 가진 평화의 복음, 거룩하신 말씀이로다.” 그렇습니다. 말씀으로 하는 전쟁입니다. 마귀는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는 그보다 더 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서 가신 예수님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언제까지 싸워야 한다고요? 승전고를 울리기까지 즉 최후 승리를 얻을 때까지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가면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떠나면 우리는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노출되어 있는데 마귀는 우리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나는 적에게 보이는데 적은 나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싸움은 누가 이기겠습니까? 뻔하지요. 그러므로 우리 홀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따라가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기면 무엇을 얻는다고요? 영생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목적은 하나입니다. 영혼을 구하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싸움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엄청나지요. 천국과 지옥입니다. 우리의 적이 누구입니까? 마귀입니다. 엡 6 :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적군은 정사, 권세 그리고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 악의 영들이 세상에서는 눈에 보이는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을 사용합니다. 어두움 즉 무지한 지도자들이지요. 성경도 모르면서 안다고 우기는 자들입니다. 마귀는 그런 지도자들을 들어 사용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백성을 미혹하여 천국이 아니라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이지요. 하나님 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속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따라갑니다. 당연히 천국 가는 줄 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 곧 세상 끝에는 어두움이 덮여 있습니다. 마 24 :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졌으니 빛을 발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다시 오신답니다. 이 또한 정말 하늘의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목자들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지한 목자들이요 마귀가 함께 하는 목자들이지요. 그들이 그렇게 가르쳐도 아멘, 하고 따라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함께 구덩이에 빠진답니다. 지옥으로 가는 겁니다. 자기는 분명 천국 가는 줄 알고 믿고 가르치고 배우지만 그게 아니지요. 그런데 그렇게 된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처음 영적 싸움이 시작된 것은 바로 예수님 오신 초림 때입니다. 그 당시 이 땅의 하나님의 군사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마귀의 군사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이었지요. 전 세계적인 전쟁이 아닙니다. 저 팔레스타인에 있는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 때 정사와 권세를 누가 잡고 있었습니까? 바로 서기관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들과 무엇으로 싸웠습니까? 총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싸움은 육적인 무기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가운데 적을 공략하는 무기는 하나입니다. 엡 6 :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마귀와의 전쟁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요란한 병기들로 불을 튀기며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싸우는 것이지요. 바로 참과 거짓 곧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군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가지고 공격합니다. 마귀는 장로들의 유전, 전통과 자기 생각의 말로 하나님 백성을 미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분명 하나님 말씀이 아니지요. 자기 것으로 말한답니다.
예수님 이후 전쟁은 영적인 전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적인 전쟁이라고 가르치는 것도 마귀가 주입한 거짓말이지요. 그렇게 가르치는데도 아멘 하고 따라가는 신자는 마귀에게 미혹된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가르치는 자도 그렇게 배우는 자도 자신이 마귀에게 미혹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가만있지 않겠지요. 당장 벗어나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옳다고 찰떡같이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깨달으면 자기 속의 이 악한 영을 쫓아내려고 힘쓸 것입니다. 전쟁은 바로 나 자신 안에서 먼저 일어나는 것이지요. 내 마음 속의 악한 영을 말씀으로 싸워 이겨서 쫓아내면 하나님의 성령이 오십니다. 마귀가 세상을 주관하고 있듯이 마귀가 지금 우리 육체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찐대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고 가만있을 때가 아닙니다. 살전 5 : 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우리 신앙세계가 지금 모두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 간다,’고 안심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과 영생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 백성이니 결코 지옥 갈 수가 없답니다. 누가 이렇게 미혹하고 있습니까? 마귀가 그렇게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이 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시체가 되어야 했습니까? 마 24 :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귀가 불신자들을 상대로 싸우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수하에 있는데 뭣 때문에 그들을 상대로 싸우겠습니까? 마귀가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그들이 싸우고자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백성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경계하시는 겁니다. 성경이 자주 경계하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영생도 싸워서 이겨야 얻는 것입니다. 천국도 싸워서 이겨야 들어가는 것이지요. 가만 앉아서 저절로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럴 것이면 이렇게 경계하지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엡 6 : 10 - 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이 싸움이 가장 치열할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종말의 때, 마지막 때입니다. 오늘 우리의 때입니다. 요일 5 : 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고 있는 하나님 백성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작 말씀하셨지요. 천국 가는 길이 좁고 협착한 길이고 그 길을 찾는 자도 많지 않다고 말입니다. 마 7 : 13 -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 초림 때 그러했듯이 다시 오실 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눅 18 :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 깨닫고 경성해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때 심판을 어떻게 하는 것으로 알고 믿고 있습니까? 예수 믿는 자기네는 구원과 영생을 얻고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지옥의 판결을 받는다고 알고 믿고 있습니다. 역시 잘못 가르친 것이고 마귀의 거짓말이며 자기 생각의 산물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즉 마귀의 미혹에 빠진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와 불신자를 심판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고 성경도 그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를 심판한다고 말씀합니까? 하나님 백성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관심은 불신자들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하나님 백성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기에,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배도하고 범죄하였기에 심판하는 것입니다. 마 19 :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벧전 4 :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즉 하나님 집 곧 이스라엘 백성이 심판의 대상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하나님은 불신자들을 심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당연지사이고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당신 백성이 마귀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의를 주어도 말을 듣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우리도 자식에게 누누이 주의를 주는데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결국 매를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경계를 해주었음에도 말을 듣지 아니하면 어쩌시겠습니까? 심판하시는 겁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아는 대로 그럼에도 어떻게 하였습니까? 먹었습니다. 그러니 심판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오래 참으시지만 그러나 언제고 매를 드실 때가 옵니다. 누구를 때리십니까? 말 안 듣는 당신 백성입니다. 그것을 신앙으로 표현한다면 언약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끝은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입니다. 왜 망했답니까? 언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히 8 : 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그렇습니다. 첫 언약 곧 구약에 흠이 생기지 아니하였더면 둘째 것 곧 신약 곧 새 언약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 언약을 하나님 백성이 지키지 못하여 끝내고 새 언약을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언약의 대상까지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언약의 대상은 잘 아는 대로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대상은 예수를 믿는 자들 곧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약 즉 새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구약이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심판받아 끝장났는가, 잘 생각하고 신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귀의 궤계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고 또한 마귀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 싸움은 다시 말하지만 총을 쏘고 대포를 쏘고 미사일을 날리는 그런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마귀의 말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알지 않고서야 어떻게 대적하여 싸우겠습니까? 무작정 ‘예수 믿으면 천국’이라는 어리석은 말에 미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검 곧 말씀을 잘 갈고 닦아두지 아니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 예배드리며 앉아 듣고 있는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뜻하신 말씀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승리하는 자만이 천국을 차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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