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2장 18-22절 낡은 것과 새 것
여러분은 “애착”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애착은 “한 개인이 다른 사람에 대해 의존적이고 애착을 갖는 행동 양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갖고 충성을 하는 감정”을 말합니다. 또다른 애착은 “어떤 대상에 몹시 끌리거나 정이 들어서 그 대상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애착은 아마도 두 번째 유형일 갓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애착이 없으면 사람의 정서나 인격이 온전하게 자라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착이 생기도록 부모가 각별히 사랑을 쏟아야 한다고 합니다. 부모의 사랑이 아이에게 전해질 때 아이는 애착을 통해 온전한 인간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착이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으로 강해지면 집착이 됩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버리라고 해도 도저히 버리지 못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여도 그 자신에게는 굉장히 귀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애착을 갖는 어떤 것이 실제로 그만한 가치를 가진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그만한 가지가 없는대도 귀하게 여겨서 절대로 버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면 맨 먼저 보이는 것을 자기 엄마로 알고 따라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는 따로 있는데 엉뚱한 것이 엄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도하게 애착을 갖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물건이나 혹은 어떤 일이 있으십니까? 애칙 너무 강해지면 그것을 집착이라고 부릅니다. 이 정도 되면 절대로 그 애착의 대상과는 헤어질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이상한 이상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애착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바뀔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만나면 바뀝니다. 새것이 오면 이전 것에 가졌던 애착들이 서서히 소홀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잃는 것에 대하여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마음의 갈등을 가지는 시간은 있습니다.
그 시간에 어떤 사람은 과거에 애착을 갖던 것을 버릴 수 없어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대로 살게 되지만 마음에 곤고함의 실체를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대상을 향하여 과거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에 모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갈등이 지금으로부터 2000년이 조금 넘는 그 시기에 유대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은 전 세계를 덮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옛것과 새것은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8절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 상황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그 시기에 금식을 하고 있지 않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어쩌면 이 시간에는 침례 요한이 감옥에 갇히지 않고 제자들과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18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마치 오늘날로 말하면 튀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남들과는 다른 행보를 걷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다른 종교적인 사람들은 다 금식하는 절기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먹고 미시고 즐거워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19-20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지금은 신부가 신랑과 함께 결혼을 하는데 찾아온 손님들과 같다고 하십니다. 혼인을 즐기는 혼인식장의 축제에서 어떻게 금식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랑과 신부가 헤어지듯이 그들이 헤어질 날이 옵니다. 신랑이 신부의 곁을 떠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때는 슬퍼하면서 금식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금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나 대다수의 바리새인들은 즐거워하면서 축배를 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새 것과 옛 것에 대한 비유를 들으셨습니다. 21-22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이 비유는 더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 여러분들이 확실히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비유는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다른 과거의 것에 덧붙일수는 없습니다. 율법과 덧붙일 수도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전통이나 침례 요한의 전통과도 덧붙이거나 섞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새계명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을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여러분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혼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혼자만 사랑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어떤 교인들은 목사님과 사모님은 사랑을 주어야하는 사람들이고 성도들은 사랑을 받기만 하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또한 오래된 성도는 사랑을 주어야 하고, 새신자는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자나 사모나 기존성도나 새 성도나 할 것없이 교회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옛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집에서 사용하던 방식을 교회 와서도 사용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항상 예수님의 사랑방식을 배우고 예수님의 사랑방식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서 성경을 통해, 목회자들을 통해, 교회가 세운 교회의 직분자들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운 바를 따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하지 않으면 그 말씀은 여러분 등에게서 떠납니다. 그 사랑의 마음도 여러분들에게서 떠납니다. 이 일을 위해 성령은 성경을 통해, 목화자들을 통해, 교회가 세운 직분자들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그들이 가르칠 때 성령은 배우는 사람들 안에서 감동하시고 감화하시면서 깨닫게 하시고 행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방식으로 살기 위해 옛 방식의 삶을 부지런히 버리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소중했고 애착을 가졌던 그 어떤 것보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예수님으로 충만해 있으며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예수님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완전한 천국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들을 새 사람으로서 항상 주님 안에서 자라게 하시며 세상을 밝게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새롭게 된 여러분들 안에 있어 여러분들을 통해 교회가 화목해지고, 가정이 화목해지고, 직장이 화목해지고, 나라가 화목해지고, 세계 곳곳이 화목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