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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1. 묵상글 (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 주님의 도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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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1.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주님의 도전
오늘 주님께서는 정결례 법을 거스름으로
자기를 집에 초대한 바리사이의 심기를 거스릅니다.
우리 생각에, 초대를 받은 손님은 가능하면 집주인이 원하는 것을 거스르지 않고
따르는 것이 예의인데, 오늘 주님께서 그것을 따르지 않은 것은
예의가 없고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굴 집에 초대한 것은 사랑을 보인 것인데
그 사랑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게는 그런 주님의 행위가 의도적인 도전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싫어할 줄 뻔히 아시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깨뜨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고정관념 또는 관습의 타파입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
그래서 행동하시는 데 거침이 없으신 분으로서의 행동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이 매이지 않음과 거침없으심을
기존 질서를 거부한 히피들의 저항 정도로 폄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행동은 그저 개인의 저항이 아니라
제가 볼 때 위대한 사랑 혁명 또는 사랑 운동입니다.
본질을 생각하고,
본질로 돌아가자!
뭐 이런 위대한 혁명입니다.
무엇을 하든 본질은 사랑이고,
사랑이라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낡은 관습과 고정관념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 혁명을 정결례의 낡은 관념과 관습으로 가두려고 하면
그 정결례라는 관습과 관념의 부대는 터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부대 안에는 사랑을 담아야 하고 사랑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일갈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사실 우리 속에 사랑이 담겨있으면 사랑을 실천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결례 관습에 얽매여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지 않고
사랑 실천에 매진할 것입니다.
우리의 속에 사랑이 담겨있고 그래서 사랑으로 가득하면
우리의 손은 더러워도 사랑을 실천할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느라 손이 깨끗할 겨를이 없을 겁니다.
사랑으로 아이의 코를 닦아주느라,
사랑으로 걸레를 빨고 걸레질하느라,
손은 더러워지지만, 오늘 말씀대로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입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청소하려고
우리의 손은 더러워질 수밖에 없지만, 속은 사랑으로 깨끗하고 따듯한
우리가 되라고 주님께서는 오늘도 도전하십니다.
그 도전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사랑 혁명에 동참하시겠습니까?
새 술을 담는 새 부대가 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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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1.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에 일어난 일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당혹스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루가 11,38).
왜 그렇게 놀랐을까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의식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위생상의 하나의 관습이나 예의였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례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셨기 때문에 그들은 놀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는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루가 11,39)
이는 진정한 ‘정결례’는 겉을 씻는 일이 아니라, 속을 씻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음식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다.”(루카 11,39)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것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속에 담고 있는 것을 정당하게 취득한 것인지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사악함을 동시에 질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속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또 그것들을 어떻게 채웠는지, 왜 채웠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러한 사실을 깨우쳐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깨끗해지는 방법도 말씀해 주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이처럼, 더러움을 비워내는 길, 깨끗해지는 길은 형제와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착취와 사악으로 가득 채운 속을 비우는 방법은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정결법이라는 율법의 본래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곧 ‘정결법의 정신’은 깨끗하게 씻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니 속에 있는 것을 비워낸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비워지고 깨끗해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2코린 4,7) 으로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그러니 중요한 것은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드셨으니’,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더더욱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사랑을 베풀면 그 자체만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구원을 입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를 명심해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주님!
제 속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탐욕으로 채운 것을 사랑의 나눔으로 비우게 허소서!
사랑만이 모든 것을 다 깨끗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해져 당신의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속에 당신의 뜻을 품고 그 뜻을 퍼주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온전히 깨끗해지게 하시고, 당신 얼굴 뵙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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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1.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짱을 추구합니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예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겉모양을 깨끗이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즉 자선을 베풀게 됨으로써 깨끗해집니다.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성베드로 솔로그는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담겨 있는 탐욕과 사악은 자선을 통해서 정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정결례는 바로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사악함을 씻는 것입니다.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선을 베풀어 마음을 거룩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외적인 더러움을 씻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거나 마시는 그릇을 깨끗이 씻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외적인 깨끗함보다는 내면의 정결이 더 소중합니다. 모든 불의와 부도덕한 행위에서 정화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깨끗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외적 정결함을 강조하고 중요시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잘 가꾸지 못했습니다. 사제는 미사 중에 예물 준비를 하면서 손을 씻으며 기도합니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 안 보이는 속은 내버려 두고 겉꾸미는 사람들,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은 그릇을 닦는 일보다 마음을 닦는 일이 우선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주 하느님은 속마음을 들여 다 보시니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선을 숨겨 두기 바랍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6,4).
얼굴도 이쁘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얼짱, 몸짱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마음짱을 추구합니다. 마음을 잘 가꾸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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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1.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들에게 힘든 것이 있다면 강론의 내용을 삶으로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가 하는 강론의 내용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청하였던 것처럼 의인이 50명이 아니라 10명만 있었어도 하느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저도 제가하는 강론 내용의 50%가 아니라 10%만 온전히 삶으로 실천하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영적으로 풍요로운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위안과 용기를 얻는 것은 오늘 입당송의 말씀입니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한동안 국회의원들의 문자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서 국회의원들의 사적인 문자가 기자들의 카메라에 포착이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공정과 정의를 이야기하지만 사적인 문자에는 당리와 당략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원으로서는 품위에 맞지 않는 내용을 검색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사적인 이야기가 노출되어서 한동안 소란이 있었습니다. 공식석상에서는 국가의 품위와 품격에 맞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적인 자리에서 하는 이야기는 품위와 품격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언론에 노출되었고, 제가 있는 미국에서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국회의원과 대통령 그리고 공직자들은 늘 언행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말 한마디 때문에 공든 탑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신독(愼獨)’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홀로 있을 때라도, 남이 보지 않을 때라도 늘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의미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제게도 혼자 있을 때 조심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중학생 때입니다. 친구가 학원에서 숙식을 하면서 공부하였습니다.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학원에서 친구를 배려해 주었습니다. 친구는 학원 청소를 하였고, 교재도 정리하였습니다. 한번은 친구가 지내는 학원에서 같이 잠을 잤습니다. 주일 아침인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저는 잠이 덜 깬 상태이기도 했고, 장난기도 있었기에 품위와 품격에 맞지 않는 응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전화는 학원과 전화를 공유하는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친구는 저 때문에 학원 원장님께 꾸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저 대신에 꾸중을 들어야 했던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저의 실수를 대신 짊어진 친구가 고맙기도 했습니다. ‘없는 데서는 나랏님도 욕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남을 비방하고, 욕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뒷담화가 부적절함이나 신중함의 부재로 인해 친교를 파괴하는지요! 더 확실히 말하자면 뒷담화는 사람을 죽입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 사도가 자신의 서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뒷담화하는 남자나 여자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혀가 칼처럼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이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조심하십시오! 뒷담화하는 남자나 여자는 자신들의 혀를 사용하여 폭탄을 던지고 유유히 사라지지만, 그들이 던진 폭탄은 다른 이의 명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그들은 테러범입니다. 뒷담화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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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1.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토마토는 과일일까요? 채소일까요? 아마 많은 분이 토마토를 채소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들었고,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은 과일일까요? 채소일까요?
“딸기, 수박, 참외, 바나나, 아보카도, 올리브.”
정답을 말하면, 아보카도와 올리브는 과일로 보는 것이 맞고 다른 것은 채소라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과일의 정의가 나무에서 나는 단맛이 포함된 식용 가능한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풀에서 수확하는 열매를 채소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두 농학적 관점입니다. 이에 반해 식물학적으로는 과즙이 풍부하고 단맛이 나는 식용으로 먹을 수 있는 식물의 열매를 과일로 분류합니다. 그래서 과채류라는 개념을 만들어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일과 채소의 구분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아는 진리라는 것 역시 틀린 것이 얼마나 많을까요? 숯과 다이아몬드가 있습니다. 무엇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할까요? 당연히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러나 숯과 다이아몬드는 같은 탄소 동위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온도와 압력의 차이를 통해서 나눠진 것뿐입니다.
진리에 대해 함부로 생각하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를 살릴 수 있으며, 가장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반대로 생각했던 사람이 오히려 나를 배신해서 큰 어려움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늘 열린 마음, 그리고 겸손한 자세가 요구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닫힌 완고한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잘못된 것만 눈에 보이나 봅니다. 사사건건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았다면서 난리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더 깨끗하게 해야 할지를 말씀해주십니다.
사람 마음속의 더러움을 무시하고 겉만 꾸는 것으로 만족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마치 그릇을 씻으면서 겉만 씻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지요. 그들의 마음속에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만 사람들에게 깨끗한 척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까요?
바오로 사도 역시도 겉으로만 보이는 허례허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6)
속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자선을 베푸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실천만이 마음을 깨끗하게 해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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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조웰 오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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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1.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유의 여정
-하느님 중심의 삶-
그날 강론 제목은 그날 삶의 메시지이자 주제가 됩니다. 여전한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그동안 출간했던 제 세권의 책 내용도 그 연관성이 재미있습니다. 2007년에 출간했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이어, ‘둥근 마음, 둥근 삶’, 그리고 2011년에 출간한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인데, 결국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이 후의 두권의 책같습니다. 벌써 10년이 지나니 아득한 느낌입니다. 다 팔고 있는 것도 다 나눴기에 현재는 한권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누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 물으면 지체없는 제 대답입니다. 삶은 여정입니다. 하루하루 하루 삶의 여정에 충실하려 노력합니다. ‘자유의 여정’이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저에게 하루하루 날마다 강론 쓰는 새벽 시간은 주님의 위로와 치유의 구원을 체험하는 자유로운 복된 시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참 자유의 삶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자유롭습니까?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의 여정입니까? 자유로워야 합니다. 자유와 행복은 함께 갑니다. 나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한다면 최대한 자유롭고 행복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예전 ‘수도회사’를 가르칠 때 교재로 사용했던 ‘더 큰 자유와 더불어(With Greater Liberty)’ 책 제목도 잊지 못합니다. 결국 수도여정도 더 큰 내적 자유를 향한 여정입니다.
며칠전 들은 이야기와 지난 밤 미국 사촌 누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도 충격이었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용합니다.
“아버지가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한 수도형제의 건강했던 부친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치매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한결같은 삶의 여정은 참으로 쉽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한때는 건강하던, 수도원도 기쁘게 방문했던 사촌 누님인데 위독하다는 새벽 카톡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신부님, 루시아 정숙 언니가 사경을 헤매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족들 마지막 인사하고, 이젠 면회도 안된다 합니다. 이국땅에서 기적만 바라고 있습니다.”
어제 친지의 조촐한 축하모임에서 만났던 한결같이 정답고 자유로워보이던 조카 딸 부부와 여동생 부부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흡사 우정관계의 친구처럼 보였습니다. 참 좋은 우정관계의 친구로 날로 자유로워지는 부부라면 참 아름답고 자유로운 성인들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이런 일상의 평범한 성인들이 참으로 귀하고 소중합니다.
새벽 읽고 있는 회고록 마지막 대목도 나눕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아직 걱정스러운 바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발전을 해 온 것 같아요. 이제 DJ가 하신 말씀을 조금 느낍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발전한다’, 살면서 실패는 해도 좌절하지는 않습니다. 살다보면 목표대로 성취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못한 것은 또 하면 되요. 실패가 아니어요.”
그렇습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발전합니다. 자유로운 삶이 행복하고 아름답습니다. 정말 날로 아름다운 자유의 인생 여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카찬스키스의 희랍어로 쓰여진 묘비명도 강렬한 느낌입니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믿는 이들에게 참자유의 비결을 알려줍니다. 어제에 이어 다시 반복되는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귀한 말씀입니다. 늘 들어도 새롭고 좋으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유입니다. 율법의 종살이, 율법의 저주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멜 때 참자유인의 삶입니다. “굳건히 서라”는 것은 종살이의 멍에로 이끌려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여 단호하고 확고하게 자유 안에 버티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자유, 율법과 종살이중 그리스도와 자유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자유, 역시 선택이요 훈련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후반부 말씀이 그대로 참 자유의 비결을 보여줍니다. 율법주의적 사고와 삶을 단호히 끊어 버려야 합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의로워지기를 바라는 희망이 이뤄지는 이 복된 시간입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 자선으로 나누는 삶이 참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부단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신망애의 삶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을 꾸짖는 주님의 통쾌한 말씀이 참자유의 비결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식사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에 놀라는 본말전도의, 위선적인 바리사이의 치부를 폭로합니다. 바로 안과 밖이 다른 이중성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으로 만들지 않았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안이 깨끗하면 밖은 저절로 깨끗해 집니다. 화장과 성형이 불필요합니다. 하느님 중심 자리에 있는 탐욕과 사악을 말끔히 비워내고 성령으로, 신망애 향주삼덕으로 가득채우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 바로 자선입니다. 끊임없이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며 나눠 비울 때 저절로 탐욕도 사악도 사라지고, 마음도 몸도 깨끗해집니다.
너무 많은 갖가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인들에게는 가면이 없어 안팎이 같아 진실하고 겸손합니다. 허영이나 교만이 없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중에 마음 속 탐욕과 사악을 말끔히 비워내고 끊임없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으로, 끊임없이 자선을 베풀며 살아갈 때 참으로 아름답고 순수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더불어 우리의 가면은 날로 저절로 사라져가면서 안팎이 같은 삶, 이제 가면이 더 필요없는 진실하고 자유롭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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