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답답 하시겠네요.
본인도 그러한 경험을 했으며 지금도 그 심정은 마찬가지 이지만 세월의 위력과 한편으로는 감각의 무디어짐 내지는 여유스러움도 부인 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한 때는 최후의 수단 강구도 염두에 둔 적도 있었죠.
님의 글에 정보통님의 뎃글을 보고서 공감도 되고 하여 답글로 올려봅니다.
본인의 처역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증인이 되어 있었으며 이어서 나를 포함한 가족을 포섭하려고 무진 애를 쓴 결과 남자(저와 아들은 반증인)대 여자(처와 딸은 증인) 반반으로 나누어 지게 됐죠.
그 동안 수년간에 걸처 증인들(평신도에서 장로, 감독자)과 돌아가면서 처음에는 본인을 설득코자 다음에는 내가 자청하여 대화내지는 논쟁을 수없이 많이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여기에 쏟은 시간과 정력은 다른 일은 거의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나름대로 여증과 성경에 관하여 연구하고 공부를 하였었습니다.
아마 여증에 관한 비판적인 영문 웹싸이트나 책은 거의 섭렵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런지요.
초창기에는 증인들의 말재간에 나도 모르게 말려들어가 나는 별로 말도 못하고
끝나고 나면 아쉬움만 남아있었으며 뒤에 곰곰히 그들의 말을 되씹어보면 더욱 화가 날 때도 있었죠.
증인들의 대화술에는 진리의 전달이라는 포장속에 교묘하면서 그리고 말로 지지않고 제압하려는 일정한 패턴의 화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아마 이것을 별도 교육을 받은 걸로압니다.)
논쟁이란 무엇인가요.(증인은 논쟁보다는 대화를 좋아함)
자기의 주장이 옳으며 상대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로서 하는 싸움이라고 하곘습니다.
그럴러면 상대를 확실하게 잘 알아야하며 내 주장의 근거역시 확고 해야만 하겠죠.
근데 성경에 관한한 어떤 쟁점사항에 관하여 서로가 수긍하는 결론이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본인의 미천한 경험에의한 결론입니다.
왜냐구요?
이 지구상에 성경을 믿는 즉 광의의 기독교가 약 37,000 가 되며 그 이유가 성경 해석의 차이에서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안티 바이블에 관한 지식도 때로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 것도 골수포로 들에게는 잘 안통합니다.(그렇더라도 성경은 어느정도 알아야함)
그래서 다음 부터는 생각을 바꿔서 여증의 역사 그것도 한번에 한가지 주제만 가지고 이야기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잘 아시다 시피 여증은 방문시에 교관과 조교의 2인 1조로 꼭 방문하죠.
그 것도 가방에 참고서적을 휴대하고서.
처음에는 두사람이 서로 장단을 맟춰가면서 1;2로 할려니 숫적으로도 그렇고 약간 부담이 되어서 한사람만 오라고 해도 그런다고 하구선 다음에는 그 중 한사람이 임무교대하여 다른 사람이 오데요.
그런데 논쟁의 주제를 여증의 역사(여기에는 여증의 이중성과 거짓등이포함) 로 바꾸고 나서 부터는 한 사람이 두번째 오는 것을 별로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자세히 더 잘 알아보고서 하기로 두번째 날을 약속까지 했는 데도 무슨 무슨핑게(한국방문, 부모가 편찮아서등)로 오지를 않더라구요.
그런 후로는 내가 그랬죠.
거 좀 시원찮은 사람 말고 잘 아는 사람들 좀 불러오라고.
그러다 보니 내가 증인은 아니지만 말단서부터 높은(?) 많은 증인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두사람만 오지 말고 아얘 집단으로 오라고 하니까 그렇게는 안오드라구요.(아주 좋은 기회인데 역전도(?)하기에…)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하다보니 본인이 스스로 그만둔다면 모를까 왠지 마누라가 집단에서 왕따당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는 마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과 논쟁이나 말로 제압한다고 해서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 알았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어느 정도 알고나니 마음에 여유는 생겨나드라구요.
어쩌면 나만이 갖는 그들을 가엽게 생각하는 마음이랄까.(이점은 이 카페에 들어온 다음부터 더 느끼게 되었음)
그래서 요즘은 좀더 큰 포용과 사랑을 내가 먼저 보여주어야 하지않는가. 내가 그들보다 더 떳떳하고 바른 생활을 해야하지않는가.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전에는 마누라가 증인들은 품행이 바르고, 정직하고, 믿을수 있고, 등등 증인들을 자화자찬하는 칭찬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는데 요즘은 감히 입밖에도 못냅니다.
이것은 나의 품행이 나아서라기 보다는 여증내부를 어느정도 알기시작한 것이 아닌가하고 자위해봅니다.(어찌됐던 약간의 변화는 있는 것으로 보임)
두서없는 본인의 경험담을 적어봤습니다.
다시한번 요점을 되풀이 하자면.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 본인이 확실히 알아야 하기때문이며 또한 님의 부인에게 확실하게 알려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정확하게 반론을 할 수 없으면 님의 부인은 더욱 여증에관하여 확신을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님의 부인이 여증이 됨으로써 님의 2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됩니다.
참고로 본인이 퍼온 여증어린이들에게 있는 공포증과 현재 게시가 시작된 관념의 포로라는 글을 보시기바람니다. 특히 관념의 포로라는 글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부인의 증인들과의 접촉은 단호하게 줄이며 시간은 빠를 수록 낫겠죠.
이상 본인의 부족한 생각과 글을 도사님들 앞에 읊어 봤습니다.
첫댓글 참으로 경험의 바탕에서 나오는 현실적인 이야기라 아무 관계가 없는 저도 상당히 공감을 받는 다면 앞서 문제를 당한 가족이 증인인 사람들도 상당히 도움을 받았으르라 생각됩니다. 참 잘 읽어 보았습니다.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습니다/ 상생님은 현명한 판단에 따라 인내심을 가지고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믿음에는 두가지가 있다고 합니다/객관적인 신험과 주관적인 신앙입니다/누구나 동일한 방법으로 확인 가능한 것이 신험이라면/신앙은 내적체험을 통한 자기 고백내지는 주관적 확신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신앙이 교리를 외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이상 그 믿음이 참되냐 거짓되냐는 오로지 양심의 훈련받은 대로 나오게 마련입니다/또 믿음의 다른 특성은 신뢰입니다/그것은 내가 경험하는 대상(자연이나 인간관계)에 기초할 수도 있고 초월적 대상(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어떤 관계에 대한 신뢰도 역시 신험과 신앙의 두 측면이 있다고 보아집니다/내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의 표현이며/동시에 세계관이라고 할수
있습니다/누군가 무엇을 믿고 원하고 하고자 한다면 그것에는 동기와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언어적인 이해와 비언어적인 체험과 관계를 통한 신뢰라는 존재감을 통해 한 사람의 마음이 있습니다/그래서 누구에게나 특효약인 방법은 없으며/각 사람의 성격과 동기에 따라 처방이 필요합니다/어떤이는 객관적 증거를 요구하고/어떤이는 주관적 체험을 강조하고/어떤이는 보이지 않는 관계를 말하기 때문입니다/또 종교심이 어떤 보상심리(내세의 행복이나 지상천국도래에 대한 희망)인지 아니면 보다 도덕적인 요구인지 차이가 있으므로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합니다/두드리면 열린다는 진리는 통합니다
천불님, 이 말씀은 성서 묵상란의 저의 글(믿음이란...) 밑이라면 더 잘 어울리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