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아와 라헬 1
(29: 21-35)
(요약)
보통인에게 이성이 신앙보다 더 지혜롭게 보이지만 이성은 상대적이요 신앙은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것이다. 또 신앙은 거저 주시는 은혜이지만 이성은 피눈물 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두 가지가 다 하나님이 내신 것이지만 항상 신앙이 앞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신앙과 이성의 증진을 위해서 은혜를 예비하셨으니 인정하고 그 위에 쌓아 나아가자. 그러나 이성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지 못하고 신앙만이 그 일을 한다. 그렇다고 신앙일방주의로 나가면 광신이 되는 것이니 두 가지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설교)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대단히 갈등하는 문제가 신앙과 이성의 관계입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이성(理性)은 남녀간의 이성(異姓)이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마음의 작용. 도리에 따라 판단하거나 행동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즉 신앙과 방법에 대한 논제가 되겠습니다. 제목이 딱딱하다고 생각치 마시고 이런 면도 알아야 우리의 수준도 높아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신앙과 이성은 하나님께서 둘다 사용하시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의 원리 속에 존재함을 알아야 합니다. 이 관계를 이 시간에 레아와 라헬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1. 영적으로 깊지 못한 자에게는 신앙은 매우 우둔하게 보이는 반면 이성은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인다는 점입니다.
창29:17에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그랬습니다.
여기 레아가 안력이 부족하다는 뜻은 시력이 약하다는 뜻 외에 눈에 총기가 없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못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야곱 보기에 좀 우둔하게 보이고 여성적인 매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라헬이 곱고 아리땁다는 것은 객관적인 아름다움의 뜻도 없진 않지만 역시 야곱이 어여쁘게 보아준다는 주관적인 뜻이 강한 의미입니다. 남자인 야곱이 보기에는 라헬이 더 지혜롭고 매력있게 보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한결같이 안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레아가 못생겼다는 뜻은 아니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사람들의 신앙과 이성에 대한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깊이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신앙보다는 사람의 생각과 논리가 훨씬 더 설득력 있고 지혜롭고 매력적이게 보입니다. 반면 신앙하는 사람들의 모든 사고와 행동이 아주 무식하고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사람의 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사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사람의 좋은 방법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전1:18-21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고전3:18-20에는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은 주권과 나라의 부강과 번영이 하나님의 손에서 말미암지 않고 자기 능력에서 나온 줄 알다가 7년간 짐승처럼 된 적이 있었습니다. 삼상2:8에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한 한나의 기도와 같이 성공적 인생의 길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레아의 후손인 유다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신앙을 사람의 이성보다 더 지혜롭고 아름답게 보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은 나도 모르는 사이 거저 주시는 은혜이지만 이성을 얻기 위해서는 피눈물 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창29:20-21에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서 7년 7년 해서 14년을 쉴 사이 없이 일했습니다. 그러나 레아를 얻기 위해서는 아무런 계획도 노력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은혜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성은 날마다 배우고 암기하고 돈을 투자해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서부터 30세까지 쉬지 않고 배워도 부족해서 계속하여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죽기까지 우리는 학생일 뿐입니다. 이것이 이성과 은혜의 차이입니다.
3. 그렇치만 항상 신앙이 앞서야지 이성이 앞서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22-26절에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라반이 가로되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반이 라헬 대신 언니를 들여보내 끼워 팔기로 야곱을 속여 7년을 더 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미리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라반의 사기적인 속셈이 드러나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그 지방의 풍습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결코 깰 수 없는 일정한 풍습이 있는데 그것은 아무리 사람의 생각과 지혜가 현명하고 아름다워도 그리고 당장 그것이 필요해도 영적 원리상 신앙을 앞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돈 있다고 권세 있다고 문제를 그것으로만 해결하려말고 왜 이런 시련이 나에게 주어졌는가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일에 열매가 맺힐 뿐 아니라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있습니다. 만사의 문제가 신앙보다 인간이 더 앞서기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 생각하면 무슨 다툴 일이 있고 무슨 원망이 있겠습니까? 신앙 떠나서 생각하니까 문제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을 너무 멀리하지 않았는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서운해 하신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문제가 생기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다윗 역시 시므이가 자기를 저주할 때 이것을 사람의 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징계하심인 줄 알고 회개했습니다.
4. 그러나 이성이 아주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28절에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그랬습니다.
야곱이 항의하자 라반은 레아만 주지 않고 7일 후에 라헬도 주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또 다시 라헬을 위하여 7년을 수고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신앙만 필요하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이성도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식도 배워야 하고 이치도 알아야 하고 경험도 풍부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하면서 너무나 무지해도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삼고 모든 것을 신앙 안에서 생각하되 계획도 세우고 공부도 많이 하고 노력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뛰어난 정치가도 과학자도 학자도 농부도 교육자도 기타 다른 인재들도 많이 나와야 합니다. 다만 이성보다 신앙을 더 앞세우시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앙이 완전하기를 돕고 또 이성이 완전하기를 돕기 위해서 언제나 도우심을 예비하신다는 점입니다.
24절에 “라반이 또 그 여종 실바를 그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했고, 29절에도 “라반이 또 그 여종 빌하를 그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했습니다.
라반이 두 딸을 줄 때 딸들만 주지 않고 그들을 돕는 여종까지 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의 강화와 이성의 좋은 방법을 위해 아름다운 것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인류가 태고로부터 쌓아놓은 모든 과학의 업적의 장점을 인정하고 그 위에 쌓아나가야 합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이루어 놓으신 그 기초 위에 우리의 신앙을 건설해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쓰신 하나님의 종들의 업적의 장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신학이란 다 사람이 만든 헛된 것이다”라는 편견을 가지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자기가 가진 그 좁고 서투른 지식 가지고 헤쳐모여 식으로 성경을 처음부터 재정립시키려고 하는데 이는 불가능한 일일 뿐 더러 결국 유치한 자기 신학을 하나 더 만드는 결과밖에는 안 됩니다. 어찌 신학이 사람이 만든 것입니까? 신학은 성경 연구의 결과로서 다듬고 다듬어 그 시대로서는 그래도 가장 반듯하다고 내놓은 것들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돕는 여러 은사를 무시하지 마시고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살려서 그 위에 아름다운 것을 건설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6.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이성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지 못하고 오직 신앙만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끈다는 사실입니다.
32-35절의 내용입니다. 32절만 읽으면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레아가 자기 아들들의 이름을 짓는 것을 보면 남편이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음에 대한 한을 봅니다.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의도대로 하지 않으시고 라헬의 태는 닫으시고 레아의 태만 열어 주십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야곱이 매일 라헬의 집에서 살고 레아에게는 한 달에 한두 번 형식적 겉치레만 하지만 라헬은 자식이 없고 레아만 자식이 생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레아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레아는 루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를 낳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 아들들을 통해서 이제 남편의 사랑을 받게 되리라고 소망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목적이 있어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레아가 한이 맺히듯 사랑 받기 원하듯 우리가 신앙에 열심하길 원하십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예를 들면 루우벤(보라 아들이라)의 이름을 지을 때처럼 주님을 사랑할 은혜를 주십니다. 또 시므온(들으심)의 이름처럼 깨닫는 은혜를 주십니다. 또 레위(연합)의 이름처럼 주님과 연합할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유다(찬송함)의 이름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아름다운 마음을 주십니다. 이성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지 못하지만 신앙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다는 교훈입니다.
7. 그렇다고 신앙 일방주의로 나가서도 안 됩니다.
35절에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했습니다.
여기 멈춤은 아주 멈춤이 아닌 일시적인 지체를 뜻합니다. 신앙 제일주의라고 해서 모든 것을 신앙으로만 하고 이성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진행할 때는 진행하고 뭠출 때는 뭠취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 항상 진행만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앙제일주의와 광신을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할 일도 충분히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신앙보다 이성을 더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이성도 절대 필요하지만 신앙을 앞세워 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아름다운 구원과 평강의 길로 인도하심을 잊지 마시고 그 아름다운 축복을 다 받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