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 단상 15/신석정]시인의 유택 ‘비사벌초사比斯伐草舍’
청소년 시절을 모두 보낸 전주全州는 당연히 나의 ‘제2의 고향’이라 할 것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까마득한 옛날같고 왠지 모르게 생경하다. 현대옥이나 왱이집의 콩나물국밥으로만 기억되는. 그런 전주의 거리를 모처럼 혼자 걸으며, 신석정 시인이 말년을 보내신 옛집 ‘비사벌초사比斯伐草舍’를 찾았다. 볏집 등으로 지붕을 이은 집이라는 뜻의 초사草舍는 어쩐지 艸舍초사로 써야 훨씬 더 어울릴 듯하다.
초사 근처에 있었던 전주남중학교(모교)도 졸업(1973년 2월)한 지 50년만에 찾았다. 그때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뚜렷한 기억 하나는, 중2 시절 노트 한 권에 가득 적어놓은 숱한 망상妄想들과 일기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전주제일고(구 전주상고) 부지를 걷는데 기분이 묘했다. 최근 사귄 친구가 알고 보니 중학교 1년 후배, 불쑥 전화를 했다. 내가 졸업한 후 학교에 불이 났다고 한다. ‘아항, 그래서 학교를 옮겼구나’
언젠가 유서 깊은 시인의 유택幽宅을 구입한 주인이 찻집을 운영한다는 말을 듣고, 정원에서 생강차 한잔 마시고 싶어 찾은 비사벌초사. 담벼락에 걸린 요란한 플래카드를 보고서야 재개발사업 추진으로 철거위기에 놓인 것을 알았다. 일제강점기 때 쓴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의 시로 시인을 흔히 목가牧歌시인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저항시인이자 민족시인이었다. 1941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절필을 했으며, 이승만-박정희정권때에도 참여시를 쓰며 독재에 저항했다. 양학洋學을 전혀 하지 않아 졸업장 하나 없으면서도 평생 고교와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72년이던가, 등교하는데 뒤에서 나의 사타구니를 잡고 “쥐잡았다”며 껄껄 웃던 노선생님이 바로 신석정 선생님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헌칠한 키에 장발, 바바리를 입은, 약간은 이국적인 외모의 멋쟁이셨다. 그분의 시를 그때는 서너 편 줄줄줄 외웠다.
초사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찻집을 운영하지 않은 지 오래이고, 지금은 인터넷 예약을 통해 문학토론회 등을 할 때에 방들을 빌려준다고 한다. 문을 두들겨 멀리서 왔다며 정원만 보고 가겠다고 떼를 썼다. 그분의 시나 글에서 읽은 시누대나 태산목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가을, 아스라한 기분으로 그분의 시 <작은 짐승>이라는 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시의 전문을 옮긴다.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모와 흰 대리석 층층계단을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즈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짐승이었다.
난이는 아마도 시인의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꿈 많은 문학청년 시절, 고향인 부안의 어느 느티나무 아래에서 첫사랑 소녀 난이와 앞바다를 함께 바라보며 손도 잡아보지 못한 채 말없이 앉아있기만 한 ‘순하디순한 짐승’이었다고 시에서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바다가 하늘보다 푸르렀다고 하지 않은가. 충분히 그러했을 것이다. 아, 나에게도 이런 추억 한 페이지가 있는가, 기억을 더듬어본다.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았던, 그 10대의 나는 어떻게 지금의 초로初老가 되었을까. 아지 못할 일이다.
중2때 국어선생님(이해철)이 시인이라고 했다. 수업 시간마다 시 한 편씩을 외우게 한 고마운 분이 신석정의 시들을 읊게 했다. 서정주의 <국화옆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 이장희의 <고양이>, 장만영 등의 시를 외게 했다. 초사를 잠시잠깐 둘러보고 나오며 시의 세계를 알려준 그 선생님 생각이 났다. 돌아가셨겠지. 아니, 어쩌면 살아계실 수도 있을 거야. 그때 하늘같던 선생님들이 사실은 우리와 15살 정도 차이가 났을 테니까.
비사벌比斯伐이 전주의 옛이름이냐 아니냐(경남 창녕昌寧이 맞다는 게 정론이다)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金富軾의 오기誤記라고도 하지만, 반론도 있거니와 오랜 세월 전주의 옛이름으로 굳어졌으며, 시인이 당신의 집이름을 그렇게 정했으니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전주의 미래유산 14호로 지정된 그 집이 어떤 경우에도 철거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다. 개발논리에 휩쓸려 사연 많은 그런 집들을 별 생각없이 허물어버린다는 것은 우리의 기록유산을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 천박한 짓임에 틀림없다. GNP가 3만달러가 넘는, 유엔이 선진국으로 지정한 우리나라에 진정 문화文化는 있는 것인가. 문화와 인문人文은 우리에게 대체 무엇인가. 그거야말로 우리의 삶을 기름지게(윤택하게) 하는 자양분들이 아닌가.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 그게 어찌 ‘먼 나라의 일’이 될 일인가. 이 새벽 지긋이 눈을 감고 조용히 읆조려본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세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염소 한가로이 풀 뜯고
길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세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나라를 아십니까.
오월 하늘에 산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촉촉히 비가 내리면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똑 따지 않으렵니까?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10.07 1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