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을탄압한 전두환은 죽어서도 국림묘지에 못가고 묘쓸곳이없어서
화장하여 집에다두었다합니다===악독한독재자의대가지요===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광주광역시에서 비롯된 민주화운동이며, 광주민주항쟁이라고도 합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1. 발생배경
유신체제의 폭압정치에 눌려왔던 국민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70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에는 민주화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12·12 사태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국민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실현할 명확한 정치 일정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항의하여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가 1980년 봄에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학생과 민주인사들을 체포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광주에서는 비상계엄확대 소식을 듣고 18일 아침에 전남대학교 교문 앞에 대학생 200여 명이 모였는데, 공수부대가 과잉 진압을 하여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광주 도심지로 옮겨 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는 곤봉과 대검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살상했습니다. 19일에는 계엄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동참하여 적극 대항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2. 전개과정
5월 20일, 광주 시민들은 20만 명 이상 모여 시위대를 형성하여 시청을 접수하고, 차량시위를 벌이며 광주문화방송국을 불태우는 등 시위가 격해졌습니다. 21일에는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하려고 예비군 부대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을 함으로써 시위는 시가전의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일부 시민들은 차를 몰고 광주 외곽지역으로 가서 광주의 진상을 전했습니다. 시민들의 저항으로 21일에 계엄군은 시 외곽으로 철수했고, 시민군은 이날 오후에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외부와 고립된 채 스스로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고, <투사회보>를 발행해 선전활동을 하며 매일 시민궐기 대회를 열어 '계엄 해제', '학살 책임자 처단' 등을 요구했습니다. 이 자치 기간 동안 광주에서는 단 한 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사태 수습을 둘러싸고 시민군 지도층 내부의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습니다. 사태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무기를 회수하고 정부와 타협하자는 측과 정부의 퇴진, 계엄령 해제, 구속인사 석방, 언론조작 중지 등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결사 항전하자는 측으로 나뉘었습니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부는 광주의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와 폭도들이 주도하는 난동으로 규정하고 강경하게 대처했습니다. 그리고 광주지역의 통신교통을 단절하여 외부와 격리시킨 채 강경 진압에 나섰습니다. 21일부터 계엄군은 광주 시민에게 발포하기 시작했고, 광주 외곽으로 나가는 도로를 점령하고 이곳을 지나는 양민들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일시 외곽으로 빠졌던 계엄군은 26일부터 대대적인 진압 작전에 나서 광주 시내로 진격했습니다. 그리하여 27일 새벽에 상황실에서 끝까지 싸우던 시민군 대부분을 사살하고 도청을 접수하면서 열흘간의 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166명이 사망하고, 47명이 행방불명, 2,8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또 627명이 구속되었는데 175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되어 5명이 사형, 7명이 무기징역형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은 1981년 4월에 특별사면 및 감형으로 모두 풀려났습니다.
3. 결과 및 영향
신군부 세력은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들어선 전두환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도덕성과 정통성에서 비난을 받았습니다. 또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주한미군사령관이 광주의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입을 허용했다는 주장이 일면서 반미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대학생들은 몇 차례에 걸쳐 미문화원을 점거하여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1988년에 노태우정부가 들어선 뒤 정식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받았고, 사건 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1995년에는'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책임자들을 구속하고, 사망부상자에 대한 보상이 정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