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류인혜 | 날짜 : 13-12-11 05:35 조회 : 2039 |
| | | 초상화로 만난 할아버지와 손자
류인혜 innhea@hanmail.net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화가 강세황姜世晃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었다. 그에 대한 책을 찾으니 2008년도에 발간 된《표암 강세황 산문전집》이 나온다. 도서관에 들고 갈 메모지에 적어 두고 있었다. 몇 달 후 간송미술관에서의 강세황 특별전 소식을 들었지만 다른 일이 많아서 그 전시회를 놓쳤다. 다행히 중앙박물관에서 강세황의 탄신 300주년을 기념 특별전을 개최하여 관람했고, 하루 종일이 걸린 학술심포지엄에도 참석했다. 궁금한 무엇이 있으면 그것을 향해 정신만 집중한다. 집중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강세황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 안쪽에 마련된 전시장 입구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강세황의 모습에 저절로 기분이 상승된다. 눈에 익은 그림이지만 새삼 감탄한다. 엄숙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도포차림의 노인이 뚜렷한 눈길로 바라보니 나도 마주 본다. 양악수술을 고민하는 요즘 미인들이 부러워할 듯 쭉 빠진 턱의 선이 곧다.
강세황은 자화상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초상화가 크게 유행했지만 화가가 스스로 그리는 자화상은 흔치 않았는데, 70세의 강세황이 자찬自讚까지 곁들여 그린 이 자화상은 그의 강한 자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가슴께부터 길게 늘어진 주홍색 끈은 압권이었다. 동행한 김 선생은 당신의 할머니도 모시옷 안에 붉은 색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덤덤한 옷을 장식하는 특별한 색깔은 옛사람들이 선호한 멋부림이라고 여기자.
그 옆에 나란히 걸려 있는 또 다른 그림,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정조의 명을 받아 이명기李命基가 그린 강세황의 초상은 엄숙하다. 기로소가 어떤 곳인지 그곳에 입소한 기념으로 왕이 초상화까지 그리도록 명했다면 보통일이 아니다. 거기에 덧붙여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라고 표현한 김정희의 글씨가 목단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5월의 꽃밭에 한 송이 장미처럼 걸려있다.
할아버지 강백년姜柏年, 아버지 강현姜鋧 그리고 강세황까지 삼대가 연속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가문의 위상을 멋진 글씨로 축하한 것이다. 또 안산 15학사의 한 사람인 재간 임희성任希聖이 1783년 여름에 썼다는 축하의 글도 있다. 그렇다면 기로소가 어떤 곳인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도 궁금하다며 얼른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본다. 기로소의 흔적으로는 현재 경기도 화성시에 남양풍양당이 남아있는데 그곳은 옛날의 경로당! 의외의 결과에 마주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려 다시 찾아본 기로소耆老所는 조선 태조 때 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문신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이다. 그들은 국가원로의 명부를 관리하고 국왕을 자문하며 조정원로의 친목과 연회 등을 주관했다. 영조 때부터는 임금도 나이제한 없이 들어 갈 수 있었다.
강세황의 초상은 부채 속에도 있었다. 궁중화원 한종유韓宗裕가 그려준 69세 때의 모습은 이웃 할아버지를 보는 듯 편안하다. 정면을 바라보고 등을 꼿꼿이 세운 증명사진 속 같은 모습이 아니라 배경이 된 소나무의 굵은 기둥에 기댄 듯 둥근 짚방석 위에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흔치 않은 구도이다. 초상이 그려진 그 부채를 손자 강이대姜彝大에게 주는 것이라서 그런지 얼굴에 환한 미소가 있다.
이번 특별전에는 강세황을 비롯하여 그 가족들의 초상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다. 아버지 백각 강현의 초상은 두 점인데, 한 점은 운학 흉배와 서대를 착용하고 교의에 앉아 있는 모습의 전신상이다. 또 한 점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제작한 <기사계첩>에 수록된 반신상이다. 두 그림의 얼굴은 나이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반면에 손자 강이오의 초상화는 편안한 차림의 옷과 그 색깔이 눈길을 끈다. 조선후기 직업화가인 소당 이재관이 그렸고, 김정희가 찬문을 썼다.
시아버님께서 큰일에 입으실 도포를 만들며 어머님께서는 쪽빛의 은은한 기품을 강조했다. 어느 집 바깥양반의 입성에서 눈여겨보았다는 그 빛깔을 내려고 모시를 몇 번씩 염료가 든 물에 담그며 살폈다. 꼭 남색이라고 말할 수 없도록 옥색 빛이 돌았다고 누누이 말했다. 며칠을 애쓰다가 빨래 줄에 걸린 모시 필이 눈부신 햇살의 방향에 따라 나오는 빛깔을 드디어 찾아내셨다. 도포 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며 햇살을 머금을 때와 풀어버릴 때의 색감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강이오가 입은 옷은 남자의 옷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담홍색이다. 그 시절에는 관원들의 평소 집무복이 홍색이었다니 흥미롭다.
강세항은 진주 유씨와 나주 나씨 두 아내에게서 자식을 보았는데, 강이오姜彝五는 나씨 소생 강신姜信의 아들이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눈이 작고 날카롭지만 전체인상은 어질고 순하게 보인다. 옷의 윤곽선을 능숙하고 빠른 속도로 그려낸 것이 특징이다. 의외로 얼핏 드러난 옷고름 안쪽의 타원과 각대 양편이 푸른색으로 화려하고 중앙의 금박처리가 고급스럽다. 가까이에서 오사모를 쓴 수염이 정돈된 선비의 안색을 살피고 멀리 서서 그의 옷차림을 살펴본다. 은은한 담홍색 옷에 세 부분의 작지만 선명한 푸른색이 정신을 맑힌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져 문인화가 강이오의 색체에 대한 안목은 주홍색 허리띠의 할아버지 강세황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기俗氣 없는 글씨와 문인화를 추구했다는 강세황은 한국 회화사에 있어 공이 뚜렷한 사람이다. 진경산수화를 발전시키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켜 그로 인하여 산수와 화훼에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가 정착되었다.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여 공간감의 확대, 담백한 필치, 먹빛의 변화와 맑은 채색 등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했다. 또 서화에 대한 뛰어난 감식안으로 수많은 서화평을 남겨 당대 최고 평론가의 위치에 있었다. 자신의 그림을 뛰어넘어 다른 이의 그림까지 자세히 볼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화풍에 너그러웠다는 이야기다. 어떤 분야든지 발전을 위해서는 앞선 사람의 폭 넓은 수용이 필요하다.
그런 당연한 역사적 사실보다 위로는 기로소에 들어가도록 높은 벼슬과 장수했던 어른들이 자랑스럽고 아래로 그의 예술적 기질을 물려받은 손자들이 대단하다. 삶의 내용이 충실했기에 그들 초상에서 당당한 표정을 본다. 긴 세월을 지나서도 자랑스러운 집안의 내력을 한 눈에 볼 수 있음이 몹시 부럽다. 柳 《문장》2013년 가을호
柳仁惠(류인혜) * 1984년 수필 <우물>로『한국수필』봄호 추천완료. 수필집:『풀처럼 이슬처럼』,『움직이는 미술관』,『순환』,『나무이야기』. 시집:『은총』. 인문서: 류인혜의 책읽기『아름다운 책』.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3회 펜문학상(수필부문) 수상.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한국수필작가회 회장 역임. 한국수필 자문위원. 국제펜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죽순문학회 회원. |
| 김권섭 | 13-12-11 06:04 | | 표암豹菴강세황작가의 회화 동향을 실어 가계도와 화풍을 알게 되어 반갑습니다. 시골에서 모처럼 아들 딸 집을 가게 되어 국립중앙박물관 에서 '영통동구靈通洞口'를 보며 파격적인 입체묘사에 찬탄을 금치 못했고, 연강제색도烟江霽色圖에서는 여름비가 그친 뒤 안개 자욱한 가운데 발묵潑墨으로 묘사한 산봉우리들이 연이어 솟아오르고, 더 멀리 원산의 푸른 봉우리와 산등성이가 수면에 거꾸로 비춘 모습에 환상에 빠졌습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 |
| | 류인혜 | 13-12-11 17:50 | | 선생님께서도 강세황 전을 관람했다니 반갑습니다. 저는 세 번 가보았는데 갈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들었지요. 송도기행첩에 나오는 <영통동구>를 보는 순간 바위를 표현한 기법의 현대적인 감각이 무척 놀라웠습니다. 그림이 사람에게 주는 감흥은 오래 남기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 임병식 | 13-12-11 08:53 | | 강세황인물화전을 다녀오셨군요. 강세황하면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오르고 깡마른 자화상이 떠오르며 서화비평에 일가견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납니다. 복색을 세세히 살펴서 심상까지 들여다본 글솜씨가 압권입니다. 그분의 자화상을 보면 한치의 빈틈이 없는 단호함과 자기 고집이 느껴지는데 호또한 사나운 표범을 뜻하고 있군요. | |
| | 류인혜 | 13-12-11 17:55 | | 옛선비들의 강직함이 좋은 글을 남겼고, 그림과 글씨의 높은 경지를 이루는 끈기를 가졌는가 봅니다. 또 심성에 교훈을 주는 좋은 글을 읽으며 과거를 준비했으니 후세에게 전하는 느낌은 깊고 넓습니다. 올해는 독서의 결과와 옛사람을 따라가는 수필을 많이 썼습니다. 내년에는 또 무슨 일에 몰두할지 스스로 기대가 됩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 |
| | 임재문 | 13-12-11 21:42 | | 삽십여년전 서울구치소 근무시절에 동양화에 흠뻑 빠져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저의 아버지께서도 처음에는 초상화를 하셨지만 결국은 동양화를 하셨기에 어깨너머로 보고 습작한 것들을 표구해서 거실이랑 제 서제에 걸어두고 있답니다. 서툴어도 정감이 갑니다. 강세황에 대한 궁금증을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류인혜 선생님 ! 요즘은 도자기에 흠뻑 취해 지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도자기는 모으려고 합니다. 제 수집벽은 아무도 못말립니다. | |
| | 류인혜 | 13-12-12 07:58 | | 친구 어머니께서 70세가 되자 초상화 공부를 시작했답니다. 집안에서 가볍게 소일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는데 대단한 경지에 이르도록 계속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바깥출입이 불편하게 되면 집안에서 그림을 그릴 작정입니다. 그런데 임선생님, 도자기에 대한 이야기 깜박했네요.^^ 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
| | 일만성철용 | 13-12-13 10:53 | | 품위 있는 글을 읽다 보니 류 작가님의 또다른 모습이 묵중하게 다가 옵니다. 늘 하는 제 이야기는 이 글에는 그분의 초상화가 실려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초상화가 어떤 것인가 인터넷에서 찾아 보아야 되거든요. 알면 쉽고 모르면 어려운 법인데 제다 그 비겨릉 이야기 해 드리고도 싶습니다. | |
| | 류인혜 | 13-12-13 13:12 | | 일만 선생님 말씀대로 사진 한 장 넣었습니다. 글에 필요한 사진이나 그림을 함께 넣으면 더 좋은 효과를 가져오겠지요.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선생님처럼 본문 안에 그림을 여러 장을 넣는 방법입니다. 또 사진 올릴 때 크기를 조절 하는 것도 배워야합니다. 두루 감사합니다. | |
| | 이방주 | 13-12-13 15:05 | | 선생님, 초상화를 통하여 그 사람의 내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비롭습니다. 사진은 사진에 찍인 인물의 내면만 담기는데 초상화에는 그린 사람의 생각까지 담기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옛 사람들은 왜 자줏빛이나 붉은 빛 띠나 줄을 많이 사용했을까요? 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그런 의문이 문득 일었습니다. 무게 있는 글 읽고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 |
| | 류인혜 | 13-12-14 07:05 | | 이방주 선생님, 저도 그 점이 궁금했는데, 옷을 장식하는 색체에 대한 감각이 뚜렷했는가 봅니다. 한복의 화려함을 생각해보면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의 취향이 무척 아름다웠을 겁니다. 염색법도 발달했고요. 많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소재로 수필을 쓰는 작업은 참 어렵습니다. 제 색깔이 나오도록 시도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 |
| | 김용순 | 13-12-15 08:14 | | 류인혜선생님, 초상화가 요즈음 것처럼 선명합니다. 자화상이니, 그대로 이겠군요. 뭔가 성품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 |
| | 류인혜 | 13-12-16 06:44 | | 오래 전 간송미술관에서 저 그림을 만났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두 손을 깊숙이 숨기고 있는 표암의 기세에 눌려서 저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했는데 이제야 그 숙제를 해결 했습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
| | 김창식 | 13-12-19 19:43 | | 초상화로부터 느껴지는 기운이 강렬합니다, 류인혜 선생님. 그런 분 혹 우리 주위에도 계시지 않을까요? 뵙고 싶습니다. | |
| | 류인혜 | 13-12-19 22:07 | | 김창식 선생님, "사람을 찾습니다!" 해 볼까요. 강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사람, 존경하면서도 거리감이 없는 그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 |
| | 정진철 | 13-12-19 21:42 | | 류선생님의 학구적인 열정에 존경을 표합니다. 우리나라의 오랜역사에 걸출한 인재가 많지 않겠습니까 전부를 연구할수는 없는 일이고 어느정도는 자기 취향에 맞는 분들만 골라서 찾아보고 연구를 해도 시간이 너무 없을것 같습니다~~ | |
| | 류인혜 | 13-12-19 22:13 | |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목록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어쩌다가 그 이름들이 눈에 들어오는 자료를 찾으면 모아 두고 있습니다. 틈이 나는대로 정리하고 있어요.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선생님 말씀대로 시간이 점점 없어집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
| | 임병문 | 13-12-21 09:57 | | 선생님의 글로하여 표암 선생의 면모를 다시 보고 느낍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항시 건강하시고 평안하소서. | |
| | 류인혜 | 13-12-21 10:14 | | 며칠 치과에 드나들 일이 생겨서 신작수필의 답글을 게을리 했습니다. 토요일 아침, 임선생님께서 다녀가셨네요. 수백 년 후의 사람들이 우리들을 기억해 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봅니다. 겨울답게 춥습니다. 건강 유의하세요. 고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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