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주체는 사람이 아닌 구조
〈아리랑〉과 〈오솔레미오〉는 전혀 다른 곡이다. 이 두 곡은 어떻게 다를까? 매우 엉뚱한 듯한 이 질문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박자가 다르고 멜로디가 다르다.’ 맞는 답이지만 사실상 무의미한 답이기도 하다. 같은 노래가 아닌 이상 세상의 어떤 노래에 대해서도 똑같이 답할 수 있다. 따라서 전문가라면 이런 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아리랑〉과 〈오솔레미오〉가 다른 이유는 두 곡이 서로 다른 음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두 대답의 차이는 매우 크다. 〈오솔레미오〉와 〈아리랑〉은 분명히 다르지만 〈오솔레미오〉와 〈아리랑〉의 차이는 〈오솔레미오〉와 〈산타루치아〉의 차이와는 다르다. 〈아리랑〉은 〈몽금포 타령〉과 유사하며 〈오솔레미오〉는 〈산타루치아〉와 유사하다. 〈아리랑〉과 〈몽금포 타령〉, 〈오솔레미오〉와 〈산타루치아〉가 각기 같은 음계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솔레미오〉에 사용된 음계를 사용해서 〈산타루치아〉를 만들 수는 있지만 〈아리랑〉과 〈몽금포 타령〉을 만들 수는 없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소쉬르가 말하는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의 구분에 적용할 수 있다. 파롤이란 언어에서 구체적인 발화 행위를 뜻한다. 앞서 든 예의 경우에는 〈몽금포 타령〉, 〈산타루치아〉, 〈아리랑〉과 같은 구체적인 곡의 전개가 파롤에 해당할 것이다. 이에 반해서 랑그란 파롤의 기반이 되는 언어적 체계를 뜻한다. 말하자면 앞서 든 예에서 〈산타루치아〉나 〈오솔레미오〉가 기반한 장단음계와 〈아리랑〉과 〈몽금포 타령〉이 기반한 우리나라의 5음계가 랑그에 해당한다.
소쉬르의 언어학이 주목하는 것은 파롤이 아닌 랑그이다. 소쉬르는 지금까지의 언어학이 파롤에만 치중하였을 뿐 더 근본적인 랑그의 중요성을 간과하였다고 주장한다. 랑그의 중요성에 대한 소쉬르의 강조는 사실상 구조주의 사상의 특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소쉬르에 따르면 〈오솔레미오〉의 랑그적 체계에서는 〈아리랑〉이 나올 수 없다. 랑그란 파롤의 토대로서 그것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양 음악에 심취해서 동양적인 분위기의 음악을 만들고자 했던 프랑스의 음악가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는 그러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과감히 서양의 전통적인 음계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가 즐겨 사용했던 온음음계(Whole tone scale)는 장조나 단조에서 사용하던 반음의 간격을 없앤 새로운 음계였다. 말하자면 그는 다른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기존의 랑그를 버리고 다른 랑그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자면 파롤, 즉 구체적인 언어의 발화 활동이 랑그에 의해서 제약되어 있음을 뜻한다.
드뷔시, 〈아라베스크〉 Arabesque, 1888
드뷔시는 동양적인 분위기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과감히 서양의 전통적인 음계를 포기했다. 즉 다른 음악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랑그를 버린 것이다.
드뷔시, 오페라 <아라베스크> Arabesque
언어 활동이 랑그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은 구조주의 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언어에서 랑그란 곧 언어적 구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말을 할 때 자신이 말하는 주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서 스스로 어휘를 선택하고 그것을 통사구조에 맞추어 문장으로 만들어 발화한다. 이 과정의 발화 주체는 당연히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쉬르의 언어학에서는 발화의 진정한 주체는 발화자가 아닌 랑그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가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사실상 우리의 표현방식이나 범위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체계, 즉 랑그에 의해서 지배되거나 제약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주체의 소멸은 바로 소쉬르의 언어학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다. 구조주의자들이 볼 때 인간이 스스로 주체라고 믿는 것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인위적인 허상에 불과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된 기표로서 드러낸다. 가령 자신을 남성, 한국인, 아들, 선생 등의 기표로서 발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화의 과정에서 기표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구조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 이 모든 기표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구조의 산물일 뿐이다. 주체란 사회적 구조, 즉 랑그 체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허구적 기표일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언어의 주체는 사람이 아닌 구조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