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피곤했나봐?
고개를 쑥 내밀고 내려다 보는 너의 눈길에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르고
나는 대답대신 멋쩍게 너의 손이 닿았던 이마를 매만지며 로비 중앙의 시계를 올려 본다.
-수업 벌써 끝났어?
-비오고 꾸리꾸리 땡땡. 아 근데 나 배고파.
너는 내 손목을 잡아 끌고 앞장을 선다.
마치 처음 도리스네 갔던 그 날처럼.
알람을 맞춰 놓은 휴대폰이 침대 밑으로 떨어져 본체에서 베터리가 이탈했던 날,
1교시 전필수업을 두고 난 늦잠을 잤더랬다. 오 마이 갓!
간만에 쏟아지는 햇살에 삐질삐질 정문을 막 지날 무렵
정문을 나서려는 너를 다시 마주한 건 우연이었을까?
-민용아 밥 먹었니?
너의 무섭도록 날카로운 눈과 마주치자 헐떡이던 내 숨이 멎는 듯 했다.
난 너의 눈길을 피해 대답 대신 손목시계를 보는 척 했다.
그런 날 내려다 보던 너는 더는 묻지도, 내 답을 다그치지도 않고
손목을 잡더니 걷기 시작했다. 무서운 너의 얼굴에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고,
이런 햇살 아래에선 그저 태양이 눈부셨다는 핑계로
뫼르소에게 묻지마 이방인 살인을 당하는 것 보단 땡땡이를 치는 게 훨씬 나을 거라 생각 했다.
도리스네 간다.
오랜만에 마주 친 동문후배가 밥을 사달라며 조르는 통에 우린 셋이 된다.
도리스네에서도 이사람 저 사람 번갈아 가며 우리 테이블에 앉거나 서서 내게 오랜만이란 인사를 건낸다.
쏟아지는 소식 틈 바구니에서 난 네가 좋아하는 해물치즈떡볶이를 고르고,
넌 모둠튀김을 고르며 무심히 말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리스가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인 줄 알았어.
-도리스 맞지 않아요?
나는 조용히 그 소설의 주인공은 도로시라고 알려준다.
이제 화제는 <도리스>에서 <오즈의 마법사>로 넘어간다.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물에 대한 어린 기억들이 쏟아진다. 꿈과 희망과 마법이 있는 나라의 이야기.
-근데 이상한 게 영화를 보면 먼치킨이나 오즈는 컬러고 켄사스는 흑백이에요.
-그건 현실과 판타지를 차별화시키기 위한 장치지.
현실은 시궁창이고 모험과 환상이 가득한 세계는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의도겠지.
그래 너와 나만이 존재하는 상상속의 세상은 내게 총천연색이지만,
현실은 흑백논리. 결국 난 하얀 것과 까만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테지.
-넌 어땠니?
-신비와 모험? 재미있다기보다 끔찍해서 안 좋아해.
-왜? 뭐가?
-하늘에서 도로시네 집이 뚝 떨어지면서 동쪽 마녀가 죽잖아.
-착한 남쪽과 북쪽 마녀와 달리, 과연 동쪽과 서쪽 마녀들도 처음부터 악했을까?
그리고 남의 하수인마냥 마녀사냥에 나서는 거 별로임.
나는 물에 녹아버린 서쪽마녀의 이야기를 담은 위키드를 떠올리며 덧붙이지만,
신나서 마법사 얘기를 하던 사람들이 조용해진다.
-역시 넌, 뭔가 세계관이 독특해. 근데 네 입에서 뭐가 좋단 소릴 들어본 적이 없는거 같다.
-넌 뭐 좋아하니?
내가 좋아하는 것. 바로 내 앞에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너라고 차마 말 할 수 없겠지.
난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훑다 너와 눈이 마주치자 말을 놓는다.
-앨리스.
-앨리스?
-각자 가고 싶은 나라가 있잖아. 꿈꾸던 세상.
오즈, 원더랜드, 네버랜드. 그 중 어디도 가고 싶진 않지만.
난 그나마 원더랜드가 좋더라. 그리고 거울을 지나쳐 앨리스가 발견한 것도.
-네버랜드는 또 뭐야?
-피터팬이 사는 곳. 말 그대로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땅이잖아.
이야기는 오즈를 지나 원더랜드에서 네버랜드를 거치며 각종 동화나라로 넘어간다.
누구는 앨리스에 동조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웬디가 좋다고 하고.
네버랜드와 원더랜드, 오즈가 뒤범벅이 된 모호한 도리스네.
이미 도리스가 누구인지는 사람들의 관심 밖이다.
나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동화나라를 실컷 떠들도록 내버려 둔다.
어차피 당신들의 천국일 뿐, 나의 것이 될 순 없다.
난 애궂은 달걀 노른자를 포크로 콕콕 찍어댄다.
이제 난 내가 아는 도리스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