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히 걸어오는 한 남자.
이 더운 여름에 고급스러운 베이지색 바바리 코트와 더불어 고급 선글라스를 낀 단발머리의 그는 햇빛이 쨍쨍 내리 비치는,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금빛 모래밭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지호". 나이는 불혹을 넘어선 44살이지만
40대라는 명칭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요즘 언어로 꽃중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주저 앉아 거친 손으로 밀가루 같이 부드러운
모래를 한 움큼 쥐었다. 그리고는 주먹을 펴 모래를 버리고는 선글라스를 벗고 내리쬐는 태양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 작품 열정이 끓어오르는 구나."
그렇다. 그의 직업은 영화감독이다. 그것도 아주 유명한 영화감독이다. '박지호'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한민국 국민 중
72.8%가 알 정도로 아주 유명한 감독이다. 그의 유명 영화로는 '공동경비지역 JSA', '올드파더', '친절한 은자씨' 등으로
모두 평론가들과 관객, 그리고 흥행에서도 빼어날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 '올드파더' 같은 경우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그의 이름을 전세계적으로 알렸다. 이미 이름을 알렸고 초신비주의로 갈 것 같은 그의 겉모습과는
반대로 그는 매년마다 끓어오르는 작품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지난 해 '밀양촌'을 끝마치고, 이번 해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기
위해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작품욕을 다시금 끓어오르게 하고 있는 중이다.
"작품이 생각나. 이 모래를 보니 한 여인의 나체가 크로테스크하면서도 어딘가 희망에 젖은 모습으로 떠오르는군."
"아주 지랄 똥을 싸세요."
그런데 그 때, 어디선가 "아주 지랄 똥을 싸세요."라는 구수한 욕과 함께 지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한 사내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지호는 고개를 돌려 그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 사내는 웃음을 지으며 지호를 바라보았고, 지호는 달려가 그 사내와
격한 포옹을 하며 남성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남성답지 않은 우정을 과시했다. 그 이유는 그 사내가 꽃무늬 반바지와 꽃무늬
선글라스라는 살짝 애매모호한 조합을 갖추었기 때문일까? 아무튼 그 사내의 이름은 '정동진'으로 그의 어머니가 그를 가졌
을 때, 정동진에서 해를 보다가 진통이 시작됐다하여 정동진으로 붙여졌다는 일화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쓰잘데없는 일이고
그 역시도 지호와 함께 불혹을 넘긴 노총각으로서 이제는 50줄을 바라보고 있는(48세) 처방이 급박한 노총각이다. 그는
영화사 '칼라픽쳐'의 사장으로 최근들어 많은 흥행작을 내놓으며 영화계의 새로운 흥행제조기로 떠오르고 있는 인물이다.
물론 저질 영화들만 만들었다는 단점이 한 가지 있다. 동진은 지호에게 살짝 부탁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박감독. 이번에 작품 구상은 잘 돼가시는가?"
"암요, 정대표님. 지난 번에 내 영화 만드는데 제작비 좀 거룩하게 끌어와 달라는 요청을 보기 좋게 거절하셨죠."
"박감독, '밀양촌' 때의 일은 나의 실수였네. 내가 그래서 지금 자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이리도 거룩하게 찾아온 것이
아닌가?"
"본론이나 말하지."
"우리 같이 영화나 하나 만들자."
"내가 다른 제작사에 소속되어 있는 몸이라면?"
"아닌 거 다 알아, 이 자식아!"
"지금 내가 칼 자루를 쥐고 있는 상황 같은데 어디서 욕을 거룩하게 하시는 거지?"
"야! 우리 영화사 요즘 잘 나가는 거 알지?"
"잘 나가지. 평론가들한테 욕 바가지로 먹는 영화 만드는 걸로는 국내 최강이지."
"그러니까 내가 제작비 뻔질나고 거룩하게 끌어온다는 거 아니냐!"
"그러면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내가 만들고 싶은 작품 하나 만들게 해줘. 내가 10년 전부터 생각해오던 거야."
지호의 당당한 태도에 흠칫 놀란 동진은 살짝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아무 상관 없었다. 지호와 함께 영화를 만들어 양질의
영화를 만든다면 그동안 '칼라픽쳐'에서 만들었던 수많은 저질 영화들의 과거는 깨끗이 청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호와
동진은 얼른 모래밭을 빠져 나와 서울을 향해 달렸다. 이미 스토리 구상도 끝났고, 시나리오 작업도 끝났다는 지호의 말에
빨리 시나리오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이곳은 영화사 '칼라픽쳐'.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정동진 대표가 꾸리고 있는 이곳은 국내에서만 1,000여개가 넘는 영화 제작사들 중, 그것도 영화 제작사
라는 간판만 달았지 영화 하나 제대로 만들 힘 없는 수많은 제작사들 가운데 나름 번창하고 있는 제작사이고, 건물도 빌딩 안
에만 총 두 층으로 많은 직원들을 꾸리고 있는 제작사이다. 사장실이 있는 윗층은 특히나 직원들이 바쁜 곳이다. 최근 촬영에
들어갈 영화 '인썸니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때문에 직원들은 이리 저리 발로 뛰어가며, 전화를 바쁘고 여간 바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안 그래도 좁은 이 사무실 안에 20대 중후반 쯤 되어보이는 여자 하나가 길을 가로막으며 직원들의 바쁜 걸음을
계속해서 방해하고 있다.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검은 생머리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인썸니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의
대본을 들고 벌써 3시간 째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이름은 "장오경"이고, 나이는 26살로 현재 연기자이다.
예전에 단막극과 미니시리즈에서 단역으로 잠깐 출연했었고,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친구 역할을 맡아하며
연기 경력을 쌓아온 그녀였다. 단역+조연 생활만 벌써 5년 째라 이 바닥에 대해서 모르는 게 거의 없을 정도인 그녀이다.
그 때, 영화사 직원 중 한 명이 오경에 의해 길이 가로막히자 결국 참다 참다 한 마디 하게 된다.
"왜 자꾸 길을 가로막으시는 거예요?"
"양감독님(양진수 감독)은 언제 오시는 거예요?"
오경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양진수 감독이 어디있냐고 물었다. 직원은 오경의 애처로운 눈빛에 홀려 화를 낸 것이 살짝 미안해
졌다. 하지만 그는 양감독이 어디있는 줄 몰랐다.
"신인 여배우 같은데 나도 양감독님 어디있는 지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내일 다시 찾아오는 게 어떨런지?"
"내일 찾아와도 없고, 내일 모레 찾아와도 없을텐데 언제까지 연락만 기다리고 있으라구요!"
"신인 여배우라서 아직 모르는 게 많을텐데... 내 말에 너무 기 죽지 말구요. 이런 상황에서는 배역에서 짤린 거예요.."
"나 신인 여배우 아니거든요! 5년 동안 이 바닥에서 일한 사람이에요. 단역이란 단역은 다 맡아서 했다구요! 그리고 이번에
양감독님이 나한테 이 배역 무조건 준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대본도 줬잖아요!"
오경은 대본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그 직원에게 대본을 들어 보여줬다. 그 직원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결국 오경의
곁을 떠나 자신의 일을 보러 갔다. 오경은 한숨을 쉬며 맥 빠진 표정과 축 처진 어깨를 뒤로 하고 영화사를 떠나려는 그 때!
꽃무늬 옷에서 양복으로 갈아 입은 동진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직원들은 동진을 보며 "대표님 오셨어요?"라고 자신을
잘 봐달라는 표정을 지으며 인사했다. 모든 걸 포기하려던 오경은 드디어 자신이 배역을 잃은 것에 대해 따질 대상을 찾았
다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동진은 오경을 지나쳐 자신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고, 오경은 직원들 몰래 동진의 방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오경은 직원들 몰래 아주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 씩 발을 내딛고 있는 그 때, 바바리 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지호와 털썩 부딪혔고, 오경은 손에 들고 있던 '인썸니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의 대본을 손에서 떨어뜨
렸고, 오경과 지호는 눈을 마주치며 서로 빤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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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예고
"나 진짜 몰라요?"
오경과 지호는 옷깃을 스치는 것으로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
오경은 지호에게 떨어뜨린 대본을 주워달라며 역정을 부리고,
지호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오경은 지호의 얼굴을 전혀 모르고 지호는 앉은 자리에서
굴욕을 당하게 된다.
한편, 동진에게 따지러 간 오경은 양감독에게 술도 따라주고,
호텔도 같이 들어갔는데 왜 나에게 배역이 없냐며 따졌고, 살짝
민감한 이야기에 동진과 지호는 퍽 놀라고, 결국 오경은 '칼라픽쳐'
건물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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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천재 감독 vs 초짜 신인 여배우, 짜릿한 동거!'라는 소설을 썼었던 마음이입니다.
거의 반년만에 시즌 2를 들고 찾아왔는데 아직 1편이라 무슨 내용인지 모르실 거 압니다.
지난 번 소설같은 경우는 집 주인이 당시 주인공들에게 이중 계약을 하며 사기를 쳐서
동거가 시작되지만, 이번 소설은 둘이 감독과 여주인공으로 만나게 되면서 동거를 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지난 번 소설 때도 항상 뒤에 예고를 붙여줬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할 것이구요, 오늘 같은 경우는 1회가 거의 인물 소개밖에 없어서 다음 회 예고를 아주
길게 써준 것이고, 다음 회부터는 되도록이면 짧게 써드리겠습니다. 2회는 금요일에
올려드리겠습니다.
첫댓글 정말 오래만에 오셨군요..그것도 2부 가지고요.....이번도 기대가 되는데요.....금요일에 기대할께요....
1년만에 2부 들고 찾아왔는데 반겨주신 분이 아직도 계신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ㅠ.ㅠ
우와 재밌어요!
아직 1회라 별다른 이야기도 없을텐데 재미있다고 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아! 오랜만에 뵙네요^^ 요즘 컴을 못해서 ㅠㅠ 이것도 우린불륜했어요도! 착실하게 읽겟습니닷!+_+
아쿠아마린님 댓글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 불륜했어요도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이번 소설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오호 ㅋㅋ시즌2군요 ㅋㅋ 오랜만에 뵈요^^ 키킥 ~ 이번도 마이 재밋을꺼가타요!ㅋ
시즌 2도 꼭 재미있게 봐주세요! 시즌 1보다 더욱 더 풍성한 스토리로 찾아뵙겠습니다.
시즌1 재밌게 봤었는데 .. 시즌2로 뵙게되니 반갑습니다
시즌2 꼭꼭 재미있게 봐주세요~
처음보는데 무척 재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