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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출처] 영천이씨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작성자 풀향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출처] 영천이씨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작성자 풀향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출처] 영천이씨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작성자 풀향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출처] 영천이씨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작성자 풀향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출처] 영천이씨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작성자 풀향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출처] 영천이씨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작성자 풀향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출처] 영천이씨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작성자 풀향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출처] 영천이씨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작성자 풀향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출처] 영천이씨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작성자 풀향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출처] 영천이씨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작성자 풀향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출처] 영천이씨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작성자 풀향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출처] 영천이씨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작성자 풀향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출처] 영천이씨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작성자 풀향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독서를 즐기던 간재 |
간재 이덕홍은 1541년(중종 36) 10월 14일 영주 남촌 구룡동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다음해인 1559년(명종 14) 금난수의 소개로 마침내 평생의 스승인 퇴계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장손인 직장공(直長公) 이안도(李安道)와도 어울렸다고 한다. |
스승 이황과 각별한 정을 나누다 |
이덕홍은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이황 역시 그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던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에 이황은 직접 이덕홍에게 ‘간재’ 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그에게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황과 이덕홍의 사이는 매우 각별하였다. 스승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계산기선록』이나, 스승과의 질의내용을 모아 정리한『주역질의』·『사서질의』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천거로 벼슬길에 오르다 |
청년기의 대부분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에만 힘썼던 이덕홍은 1578년(선조 11) 38세의 늦은 나이에 조정에 나아갔다. 그것도 과거 급제가 아닌 천거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정구(鄭逑)·남치리·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혔던 것이다. 처음에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덕홍은 연이어 종묘서 직장, 세자익위사부솔로 승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광해군)를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효심이 지극했던 간재, 여막에서 세상을 등지다 |
1594년(선조 27)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덕홍은 우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 초가를 지어 묘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버린 그는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 해 5월 예안현 북쪽 우계에 장사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세자를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1615년(광해군 7) 원종일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그를 사모하는 영주 사림들이 그를 오계서원에 배향하였다. |
가족이야기
조 : 이현우(李賢佑)
생부 : 이충량(李忠樑)
모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
형제 : 이명홍(李命弘) 등
당대의 명문가 영천이씨
영천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나,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 봉승랑겸관농방어사(奉承郞兼觀農防禦使) 이중영(李仲榮),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파가 나뉜다. 그 중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이대영의 계보에 속한다.
영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가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꼽을 수 있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부제학(副提學)·호조 참판(戶曹參判)·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가 바로 이덕홍의 큰 할아버지이다.
예안에 뿌리를 내린 간재의 집안
본래 영천에 터를 닦고 살던 간재 이덕홍의 집안은 6대조인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 이헌(李軒) 때부터 예안의 분천(汾川)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습독관(習讀官) 이현우는 분천의 상류에 위치한 천사촌(川沙村)에 정착하였다가 아들의 결혼과 함께 영주로 옮겨 갔다.
그의 아버지는 교수(敎授)를 지낸 이충량이며, 임진왜란 때 이덕홍이 세자(광해군)를 호종한 공으로 말미암아 사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 박승장의 딸이다.
이덕홍은 모두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시(李蒔)·이립(李苙)·이강(李茳)·이무(李茂)·이점(李蒧)·이모(李慕)가 그들이다. 이립과 이점 그리고 이모는 각각 설서(說書)·한림(翰林)·수찬(修撰)의 벼슬을 지냈다. 3남 이강은 교리(校理)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조반정 때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학문이야기
교유인물 |
권우(勸宇), 금난수(琴蘭秀), 남치리(南致利), 유성룡(柳成龍), 유운룡(柳雲龍), 정사성(鄭士誠), 조목(趙穆) |
뒤늦게 학문을 시작하다 |
어려서부터 홀로 독서를 즐기던 이덕홍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때 형의 도움으로 금난수를 만나 그에게 고문을 배우면서 학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금난수의 소개로 대현(大賢)이라 칭해지던 퇴계 이황을 만나 사제의 정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늦었던 출발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자마자 분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황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약 10여 년 동안 항상 스승의 곁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이황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이덕홍은 그의 행동과 언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계산기선록』이다. |
스승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우다 |
그는 독서를 할 때에 반드시 그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찾았고, 비록 자잘한 주석이나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세밀히 분석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게 물어서 속 시원하게 깨친 뒤에야 만족하였다고 한다. 스승 이황과의 질의 내용은 모두 저술로서 남겨놓았다. 논어질의·중용질의·심경질의·고문전후집질의·가례주해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그는 스승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심경·고문·가례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은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묘를 시험하고자 그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완성되자 모든 것이 옛 제도와 같아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덕홍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응건의 딸이며, 이덕홍이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될 때 함께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
벗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다 |
이덕홍은 스승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글들을 살펴보면 그의 학문 깊이가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년 이상의 선배였던 조목도 그에게 성리학에 대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였던 권우는 “의리에 분명치 않은 곳이 있어 조목에게 질문하였으나 분명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당신의 결단하는 가르침을 바란다.” 라며 이덕홍의 고견(高見)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학에 관해서는 역에 밝기로 이름난 남치리와 논의 하곤 했는데, 복괘(復卦)를 논한 일에 대해 남치리가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 라고 평할 정도였다. 또한 유운룡도 “한 번 선생을 잃은 뒤로 비록 의문이 있으나 질정할 곳이 없네. 청컨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게나.” 하였으니, 당시 벗들이 그의 학문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듬해 봄에는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영춘 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된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였고, 그 결과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
저작이야기
성리학의 향기가 베여 있는 『간재선생문집』이다 |
간재 이덕홍의 저작에는 『간재선생문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 그 밖에 강록 4종이 있다. 『간재선쟁문집』은 그가 죽은 뒤 1666년(현종 7) 외종손 김만휴(金萬烋)가 간행하였으며, 그 뒤 1766년(영조 42)에 중간되었다. 권수에 이광정(李光庭)의 서(序)와 정언충(鄭彥忠)의 중간서(重刊序) 및 목록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권상일(權相一)의 발문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집(本集)의 권1은 부(賦) 1편과 시(詩) 112수, 권2는 시 50수와 소(疏) 2편, 권3은 이황에게 보낸 문목(問目), 권4는 서(書) 18편, 권5·6은 계산기선록, 권7은 잡저(雜著) 19편과 명(銘) 7편 및 도(圖) 10편, 권8은 부록(附錄)으로 연보(年譜)·천목(薦目)·만사(輓詞)·제문·봉안문(奉安文)·축문(祝文)·묘갈명·행장(行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의 첫머리에 실린 부는 「음양호근(陰陽互根)」과 「박복(剝復)」이다. 전자는 “음은 양에 바탕하고 양은 음에 바탕한다.”는 태극의 철학적 원리를 읊은 것이고, 후자는 주역의 64괘 중 특히 박괘(剝卦)와 복괘(復卦)를 읊은 것이다. 보통 일반 문집의 시부가 풍류를 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적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권2의 상소는 1592년에 올린 「상왕세자서(上王世子書)」와 1593년 1월에 올린 「상행재소(上行在疏)」이다. 전자는 임진왜란 당시 전술상의 대책을 건의한 것이며, 후자 또한 왜적을 물리치고 국정을 회복시키는 계책을 상소한 것이다. 특히 거북선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진계도(陣械圖)ㆍ침수진목전도(沈水眞木箭圖)ㆍ구갑선도(龜甲船圖) 등의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정치적·전략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전술적인 차원에서 임진왜란에 대처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권3은 이황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초고를 바탕으로 문목만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이황의 답변을 첨부한 것이다. 권4 는 같이 공부하던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부분 성리학에 관한 문답으로 모두 1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12편이 권우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5·6의 「계산기선록」은 스승 이황의 언행과 가르침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을 16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글이다. 끝에 이덕홍의 기선총록(記善總錄)과 1666년에 쓴 학계(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7은 잡저·명·도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저는 대부분 성리학과 관련된 저술이며 그 중「진청란성부통변심도설변(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은 명나라 진청란의 학문적 견해를 비판한 글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덕홍이 성과 심, 체와 용, 미발과 기발 등 각 개념에 대한 규정을 엄밀히 하는 한편 각 개념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와 기를 일체로 보는 혼륜간(渾淪看)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와 기를 나누어 볼 줄 아는 분개간(分開看)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이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지의 서와 명은 자기로 만들어져 거의 땅에 묻힐 뻔 했던 것인데, 이황의 제자 사이에서 이덕홍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저작이다. 명은 호(戶)ㆍ창(窓)ㆍ등(燈)ㆍ척(尺) 등의 명으로 주변의 기물을 주제로 모두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도에는「심체도설(心體用圖)」·「위학지도(爲學之圖)」·「위정지도(爲政之圖)」·「부부유별도(夫婦有別圖)」·「산법도(算法圖)」가 수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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