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의 일요일 오후 1시 50분에 시작하는 영화는 작품성과 진수를 보여주는 영화들이 방영되는 경우가 많아 이 시간은 나를 은근히 흥분시킨다. 7월 9일 영화 <원더플 라이프>는 부제로 <애프터 라이프>가 붙어 있었다. 심미안이 풍부한 오래된 후배가 전화를 걸어 와, 강력 추천하기도 했지만 <조제 물고기...>이후 일본 영화에 대한 편견을 걷어 내면서 새롭게 다가온 일본 영화는 생각보다 작품성(나는 영화의 경우 그 영화의 감독과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철학성을 먼저 집어보는 버릇이 있다)이 뛰어난 수작이 많음을 후에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인연은 헐리웃 주류 영화가 아닌 EBS 일요영화를 통해서 였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오랫동안 활동해온 고레이다 히로가즈의 이 영화 '원더플 라이프' 만큼 따뜻하며 동시에 쓸쓸하고, 깊은 여운이 남는 영화도 흔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고 있었다.
"삶에서 단 하나의 기억만을 남기고 나머지 모두는 잊어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추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시작과 함께 영화는 매주 월요일마다 죽은 사람들이 모이는 림보라는 한 간이역을 보여 준다. 그곳에 도착하면 죽은 사람들은 자신의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해 내야 한다. 기억해 낸 그 행복했던 순간은 영화처럼 재현해서 영상에 담아준단다. 그 영상의 시사회를 보면서 마지막날 그들은 그 행복한 기억만을 간직한 채 영원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죽음을 두렵지 않게 하는 영화
참으로 독특한 감독의 구상이다. 어느 영화가 ‘사후세계’를 이렇듯 따뜻하고 평범하고 잔잔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의 영원한 미스테리이지만 동시에 인간에게 막연한 불안감 ‘죽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따뜻하게 담을 수 있다니 경탄에 차 맞이 않는다. 우선 죽은 사람들이 모이는 림보 역의 모습이 어느 산골의 낡고 오래된 학교 건물 같이 생겼다. 즉 다른 동, 서양에서 표현해 오던 '사후세계'와는 다른 이미지로 정감이 담겨 있는 그래서 이 곳을 찾는 망자들의 모습 또한 참으로 편안하다.
이 영화 <원더풀 라이프>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많은 죽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해 나가며 그들의 기억을 찾아준다. 자신의 삶의 모습들을 얘기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나 일상적이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과 인생 얘기를 듣다 보면, 나한테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더욱 이들이 죽은 사람들인지 산 사람들인지에 대한 개념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다만 나 아닌 그들만의 인생 속에서는 과연 어떤 순간이 가장 행복했던 때였을까? 하는 관심 어린 호기심으로 조용히 듣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기 위해 감독은 6개월 동안 경로원을 돌아다니면서 500명 이상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만약 당신이 지금 죽어서 인생을 돌아본다면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는 과정을 전부 비디오로 촬영했다고 한다. 결국 감독은 인터뷰한 사람 중 일부를 그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로 발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그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인간미가 흘렀는지 모른다.
이 사람들 중 한 사람인, 아내와의 첫 만남에 대한 설레임조차 잊은 채 열정 없이 무탈했지만 평범하게만 살아왔던 와타나베씨는 행복한 순간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이 담긴 비디오를 보고서야 잊혀졌던 새로운 옛 기억들이 떠오르고 마침내는 아내와의 추억을 선택하게 된다. 이것을 돕던 면접관인 모치즈키 자신도 와타나베씨의 비디오를 통해 옛사랑을 기억한다. 이로써 자신이 한 사람에게 있어서 행복한 순간의 일부분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어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자신도 이 림보 역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기억에 담아 50년 만에 이곳을 떠난다. 반면 모치즈키를 사랑하는 시오리는 과거의 기억을 선택하면 이곳에서 사랑한 모치즈키에 대한 사랑의 기억이 잊혀질까 두려워 끝까지 선택을 하지 않고 림보 역에 남게 된다.
이 영화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말없이 이곳 저곳에서 단풍져 떨어진 낙엽과 도토리를 줍고, 화분의 꽃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벚꽃을 좋아한 할머니. 선택이라는 말조차도 신경 쓰지 않는 할머니는 촬영장소에서 떨어지는 벚꽃모양의 꽃 종이를 모아 말없이 자신의 면접관에게 전해준다. 그 할머니의 관조적인 그러나 쓸쓸하면서도 소녀 같은 행동- 벚꽃을 손으로 받으며 행복해 하는 모습-이 지금도 아른거린다.
죽음이라는 경계선을 넘는 것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해주는 추억의 만남 장소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써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행복한 순간에 영원히 머무는 것,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라고
기억과 망각을 통해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
이 영화를 보면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선 사람들인데도 모두 간이역에서 다음 도착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들이 다음 세계로 가기 위해선 하나의 행복한 과거의 기억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삶에 대한 기억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만큼 정확할 수 있을까?
영화 <메멘토>나 연극 <아누크에메의 기억> 에서처럼 ‘기억’이라는 것은 때론 마취된 사실처럼, 때론 광신된 믿음처럼, 때론 채색된 추억처럼 우리에게 남겨지기도 한다. 우리에겐 동전의 앞뒷면처럼 기억과 함께 망각이라는 역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처럼 우리 자신의 인생 비디오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재편집하려 들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모습과 상당히 다르게 기억되어 온 부분이 많을 테니까....
굳이 이 영화에서 행복한 한 순간만을 기억하라고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망자들의 아름다운 한 컷을 재현하여 행복감을 지속시켜 주고자 하는 림보 역에 있는 촬영 팀의 마음처럼 어쩌면 영화를 만드는 작업 또한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감독의 의중도 엿볼 수 있다. 불확실한 기억력, 이것은 곧 재현했지만 각자의 생각에 따라 채색된 영상일 뿐이다. 오직 그의 생각과 추억과 기억만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기억대로 만들어진 그 영상을 행복으로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행복한 한 순간에만 영원히 머물며 살도록 한다거나 동시에 다른 기억들은 모두 잊혀져야 한다. 극단적 선택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망설이고 고민한다.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은 곧 다른 모든 것들의 포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학생이 있다. 그는 N세대답게 한 가지 기억만을 선택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며 다른 미래의 기억이나 꿈 같은 것으로 대체하면 안되는지 과감하게 도전해 온다. 하지만 끝내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만을 선택하기보다는 선택하지 않으며 시오리처럼 이곳에 남는다.
이 림보 역에서조차 ‘기억'이라는 선택의 이유로 이승처럼 떠나는 자와 남는 자가 생긴다. 한가지 기억을 가지고 떠날 수 있는 자가 행복한 것인가? 아니면 모든 기억이 소중해서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어 이 림보 역에 남는 자가 행복한 것인가? 영화는 사실 사랑 얘기를 담은 영화라기보다는 인생 얘기를 담은 영화라 하고 싶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남들은 어떤 것을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생각할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에게 의미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소중한 기억이나 아름다운 시절은 언제였을까?” 이러한 일련의 상념 어린 의문들을 떠올리면서 영화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나에게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할까? 지금은 아무리 고민해도 나의 행복했던 시간들과 그 속의 사람들, 그리고 그 감정들을 따로 선택해 낼 수는 없다. 그래서 나 역시 시오리처럼 과거 기억의 삶과 사랑의 모습들을 버리고 잊혀지는 것이 아쉬워서 끝내 선택하지 못하고 림보 역의 면접관처럼 한 사람으로 남아있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므로 이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그 추억어린 기억 속에 남겨진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그대는 아는가?" 라고.. 이 영화는 정신적으로 목말라하는 미국인들에게 10개월간 인기를 얻었던 영화다. 우리 자신도 각자의 살아온 삶이 진정한 사랑을 나눈 삶이었다 말할 수 있는지 과거를 한번쯤 되돌아보면 좋을 듯하다. 영화는 자막이 내려지고도 여운으로 남아 또 묻는다. "당신 인생의 원더플 라이프는 무엇이었느냐?"고..
첫댓글잇신 감독의 조제,호랑이,그리고 물고기들을 괜찮게 보셨다면 위의 영화가 왠지 저한테도 맞을 것 같네요...일본을 좋아라 하진 않지만 그들의 영화는 저의 정서와 좀 맞는 부분이 있어 겨 봅니다...최근에 본 역시 잇신감독의 '메드히미코'란 영화도 감독 하나 믿고 봤는데...재밌더라구요..한번 필꽂힌 작가나 감독이 있으면 무조건 믿고 보는 경향이 있어서....정보 감사합니당^^
진정한 행복은 누리고 있을때는 잘 모르죠 잠시 멀리 떠나서 나를 볼때라던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볼때 그걸 더 잘 느낄수 있는법... 기억은 작은 파편처럼 잘려져 있어 단순히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남과 함께하는 추억일때 그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것 같네요
영화 "아무도 모른다"도 같은 감독(히로카즈)의 작품으로, 썩- 아주- ^^ 괜찮은 영화입니다. 추천해 드려요. ^^
긴 글 잘 읽었습니다. 꼭 한번 보고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