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긁는 쟁기는 첫 1000년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아시아 전역과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이용되었다. 하지만 중쟁기와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슬라브족이 567년의 아바르족 침입 직후부터 중쟁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아바르족은 552~565년 사이에 몽골과 알타이 지역에 터키 연합이 형성된 후 대초원에서 밀려난 '난민'들이다)....편자가 정확히 언제 발명되었는지 분명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5세기경부터 훈족이 사용했다는 정황 증거는 있다. 어찌 됐건 로마인이 사용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추측건데 동양(시베리아)에서 9세기 후반 동유럽으로 유입되어 말엽에 비잔티움에 전달되었고, 그곳에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듯하다. 목띠 마구법은 3세기경 중국인이 발명했다. 이것은 기원전 100년에 중국 한나라에서 발명한 가슴띠 마구법을 개선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슴띠 마구법은 서양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목띠 마구법보다 훨씬 효율적이었다.
8세기경에 나타난 새로운 전쟁 형식(돌격 기병대)은 봉건 국가와 봉건 경제의 제도적 기틀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계기는 등자의 발명에 있었다. 등자가 나오기 전에는 말이 전쟁에서 그리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기병이 엄지발가락만 올려놓는 등자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은 인도에 기원을 두고 있다(기원전 2세기 후반). 100년경, 북인도(추운 날씨 때문에 기수가 맨발로 말을 타지 못한 지역)에서 기수는 장화 신은 발을 갈고리에 걸었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진 기수가 질질 끌려갈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등자의 중요한 혁신은 3세기경 중국에서 발명한 청동 및 주철 등자로 완성되었다. 477년경에는 중국 전역에서 그러한 등자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특히 연연족(아바르족으로도 알려져 있음)은 다뉴브 강과 테이스 강 사이에 정착해 살다가 서쪽으로 쫓겨가면서 등자의 사용을 확산하는 데 일조했다. 694년에는 아랍인이 쇠로 등자를 만들었고, 이러한 기술 혁신은 바이킹과 롬바르드족을 통해서 서쪽으로 확산되었다...마르텔이 등자를 발명하지는 않았어도 '새로운' 돌격 기병대의 창설자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유럽'이라는 배경 안에서 원칙적인 혁신자였다. 실제로 돌격 기병대를 창설한 사람은 페르시아인(비잔틴인도 포함해서)이었다. 그리고 아랍의 무슬림이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돌결 기병대를 답습했다. 640년 이후에(마르텔의 '혁신'보다 거의 1세기 앞서서) 돌격 기병대는 이슬람 군대의 기본 골격을 형성했다. 기병대가 기원전 1000년의 어느 시기에 아시리아인이 처음으로 소개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이때의 기병은 활을 쏘았지만 등자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또한 중세 유럽을 연상시키는 기다란 활,창,방패와 같은 많은 무기가 중동에서 처음으로 출련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슬람 군대는 긴 세월 동안 우월한 군사 기술을 활용했고, 그 대부분을 유럽이이 모방하거나 흡수했다. 결론적으로 마르켈은 등자도, 돌격 기병대도 발명하지 안흔 셈이다.
무슬림 역사는 투르푸아티에 전투, 마르텔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광범위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랍인이 콘스탄티노플에서 패배한 내용을(718년) 더 상세히 기술한다.
무슬림은 서부 유럽의 많은 지역, 그중에서도 에스파냐와 시칠리아를 점령한 뒤에는 더 이상 공격에 관심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뒤쪽에 위치한 서유럽에 대해서는 구미가 당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비잔티움은 더 강력하고 유혹적이었다.
유럽 내에서 항해하는 데는 충분하지만 너무 조잡해서 대양 항해에는 부적합한 포르톨라노 해도 역시 항해상의 제약이 되었는데, 이 문제는 아스트롤라베로 해결할수 있었다....아스트롤라베는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등장했다....아스트롤라베는 9세기에 저어들면서 정식으로 생산되었고, 10세기 중반 당시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에스파냐를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흥미롭게도아스트롤라베에 관한 가장 오래된 라틴어 문헌인 <<센텐티 아스트롤라비:10세기 말 북부 에스파나>>는 아스트롤라베에 대한 알콰리즈미의 논문을 비롯한 많은 이슬람 책자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많은 이슬람 천문학자들이 달성한 큰 업적의 결과로 유럽인이 아스트롤라베를 일반화한 점이다.
선미재 키와 사각형 선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중국인의 작품이었다. 이것들은 400년에 등장해서 서쪽으로 전파되다가 1180년에 이슬람을 통해 유럽에 도착했다. 베네치아의 전함이 15세기 초의 우럽에서 가장 발달했다고는 해도 중국의 배 앞에서는 얼굴도 들지 못할 수준이었다. 장축 약 41미터, 횡축 약 6미터에 달한 베네치아의 갤리선은 각각 약 152미터, 약 51미터에 달한 초대한 중국 배들에 비하면 난쟁이였다.
제분소는 고대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어 후에 로마제국으로 전해졌다. 최초의 수력 제분소(결정적 혁신이었다)는 기워전 1세기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출현했다...로마인이 중세 후기 수력 제분소의 기초가 된 수직 바퀴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중국이 시초라는 근거는 중세 유럽의 수력 제분소가 '스프링 해머'에 의존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프링 해머는 기원전 4세기에 중국에서 발명한 것이기 때문이가.
풍차에 대한 최초의 언급을 644년 페르시아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니덤의 말처럼 더 확실한 것은 바누무사 형제(850~870년)의 작품에서 풍차를 언급했고, 1세기 후에는 몇몇 믿을 만한 저술가들이 세이스탄의 놀라운 충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예를 들면 아부 이샤크 알이스타크리와 아부 알카심 이븐 호칼). 페르시아의 풍차는 나중에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과 중국에까지 전해졌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최초의 공중시계는 1309년 밀라노의 세인트 유스트로지오 교회의 첨탑에 설치되었다. 최초의 휴대인 시게는 1335년 밀라노의 비스콘티 궁전에 등장한 것으로 추측된다.
(송의 소자용(蘇子容)은) 1086년에(는) 황제로부터 이전의 고리 모양의 시계[한공렴(韓公廉)이 발명함]를 다시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시계 제작의 가장 큰 과제는 탈진기(정확한 시간 측정을 위해 시계 축과 문자반의 움직임을 고르게 하는 장치)의 발명이었다. 카드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바퀴의 출현 이래로 가장 위대한 인간의 발명품이된...탈진기를 발명한 어느 미지의 천재나 천재가 서 있는 계단 주변의 완전한 어둠 속에 서 있다." 이 수수께끼는 탈진기를 발명한 것이 중국인[725년 일행(一行)으로 추정]이었고, 더욱이 그것이 서양으로 건너간 증거가 있다는 명백한 사실에 의해 풀린다. 실제로 그 개념은 이슬람의 중동 전역에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277년(비스콘티 시게가 나오기 약 60년 전)에는 시간 준수-수은 탈지기가 북착된 분동의 개념이 포함된-에 관한 아랍어 문서가 톨레도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포르투갈 왕은 많은 유대인 과학자들 등용했는데, 이들은 이슬람 지식을 번역해서 직접 전달해주었다(이는 십자군정쟁의 상황에서 무슬림과 직접 교류하는 것보다 더 '정치적으로 실행 가능한' 방법이었다). 더욱이 포르투갈인은 유대인 학살의 절정기인 14세기 말에 에스파냐에서 망명해온 유대인 과학자들의 이주로 더 많은 이득을 보았다...최초의 도전은 아프리카 서해안 보자도르 곶은 남쪽에 불어닥치는 강한 맞바람을 받으며 항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1440년대에 카라벨선의 건조로 해결되었다. 이 배는 선미재 키와 돛 세 개를 달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삼각돛이었다. 그러나 카라벨선의 기원은 포르투갈인이 이슬람의 카리브선을 바탕으로 작은 어선을 제작한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스트롤라베(는)...무슬람 천문학자들이 완성해서 10세기 중반 이슬람 지배하의 헤스파냐를 통해서 유럽에 전해졌다. 그러나 포르투갈인은 낮에도 정확한 위치를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유명한 코르도반의 무슬림 천문학자인 이븐 아스사파르(그의 논문은 라틴어로 번역되었다)에게 의존했다.
1580년대와 1670년대 사이에 유럽 전체가 동아시아로 수출한 은의 양이 평균 2240미터톤에 그친 데 비해 일본의 수출량은 6100톤에 육박한 사실....포르투갈이 동아시아 내에서 무역수지의 약 80퍼센트를 내륙 무역으로 충당했다는 사실이다....16세기 인도양 무역 체계에서 이용된 포르투갈 선박의 용적 톤수가 전체의 6퍼센트에 불과했다.
1434년에 공포된 이른바 '무역 금지령' 이후 사무역에 종사하던 많은 중국 상인들은 멜라카나 마카오에서 구입한 서류들을 지참하고 항해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의 배는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의 보호를 받았으므로 금지령을 손쉽게 피할 수 있었다.
VOC(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7세기 중반에 약 7만 필의 면직물을 수출했다. 그러나 99만 필이라는 구자라티의 1647년 수출량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흥미롭게도 처으으로 숫자를 도입한 것은 중동의 페니키아인었다(그들은 스스로를 지중해 동해안에 위치한 가나안에서 온 카나니 혹은 가나안 사람이라고 했다).
알라지는 자신의 병원을 실험의 본거지로 삼고, 병의 전염을 막기 위해 환자를 두 부류로 나누었다. 이것은 후에 서양에서 앞다투어 받아들인 검역 격리의 기원이 되었다.
1040년경 중국의 필승(畢昇)이 최초의 이동형 활자 인쇄기를 발명한다.
최초의 이동형 인쇄기는 1403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었다...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중국과 한국의 발명품이 서쪽으로 전해졌을까? 중국의 판 인쇄가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13세기에 독일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1259년)와 헝가리(1283년)를 거친 후에].
유럽의 군사혁명(1550~1660년)
화약 제조법은 850년의 중국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1044년에는 출판을 통해 대중화했다.
최초의 대포(eruptor)가 1288년경 중국에서 발명..이것은 최초의 유럽 대포가 1326년에 피렌체, 1327년에 영국에서 출현
중국의 대포는 포탄을 운반했는데, 이것은 유럽에서는 15세기가 도어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중국의 대포는 더 단단한 주철로 만들어서 연철로 만든 유럽의 대포보다 더 유용했다. 유럽은 16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중국 대포와 같은 수준이 되었다.
튀르크족의 총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양의 인도와 서구 유럽으로 급속하게 전해졌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총기 수출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질이 좋은 것도 있었다. 특히 오스만 사람들은 유럽에서 만든 것보다 파열률이 적은 철제 총신의 제조로 머스킷 총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오스만 사람이 방아쇠(용두)를 발명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중국인이 발명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로마 '대포의 전신(예를 들어 투석기)'과 중세 유럽의 십자궁에도 방아쇠가 있었지만 이런 것은 화승총 방아쇠의 기본 골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용두는 전적으로 비유럽인의 독자적인 발명이었기 때문이다.
'학구적 (유럽) 세계에 대한 애정이 중국으로 향한 과도기적 해'인 1700년이었다. 그후 80년간 많은 유럽인이 중국에 대한강한 호기심을 보였고.
유독 프랑스가 중국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의견에 동의한다(분명 프랑스 국가의 전제주의가 '전제적인' 중국에 끌린 것도 그 이유의 하나였다).
중국을 유럽의 표본으로 삼기를 거부한 계몽 사상가도 분명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몽테스키외와 페늘롱을 들 수 있다....1780년 이후로는 뒤떨어지고 독재로 인해 숨막히는 야만인의 땅에 사는 '파멸한 사람들'의 중국이라는 믿음으로 끝났다....1780년경에 이르자 상황이 반전되어 '카타이를 평가하는 주기'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중세의 회전식 쟁기보다 1730년의 로더햄 쟁기는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이 쟁기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개발된 것으로 추정된다[네덜란드의 '바스타드(bastard)' 쟁기로 알려져 있었다]. 그후 네덜란드의 기술자들(동앵글리아 지방의 배수 공사에 참여했던)을 통해 영국으로 전해져 많은 부분에서 유사점이 많은 로더햄 쟁기로 발전했다....실제로 네덜란드의 바스타드 쟁기의 모든 면이 중국에서 발명되었고, 발명 시기도 약 2000년 전으로 추정된다....사실 1784년에 우럽인 제임스 스몰(이른바 쟁기의
발명자)이 설명한 쟁기 모델은 중국의 철제 흙판 쟁기를 거의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더욱이 약 1000년 동안 사용한 것과는 저햐 딴판인 새로운 유럽식 쟁기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최전식 풍구(추수 후 곡물의 껍질과 줄기를 분리하는 기구)의 발명 역시 중요한 혁신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2세기에 발명된 이후 거듭 개량된 중국의 회전식 풍구보다 시간적으로 한참이나 뒤떨어졌다. 이것은 철제 흙판 쟁기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직접 전해졌다. 처음에는 1720년대에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프랑스로 전해졌는데, 그곳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다양한 모델이 전해진 스웨덴에서는 요나스 노르,베르그와 같은 스웨덴 과학자들이 개작하기도 했다....이처럼 회전식 풍구는 1700~1720년 사이에 네덜란드 선원들이 직접 유럽으로 전했다(바타비아에서 처음 사용된 사실이 밝혀졌다).
기원전 3세기 중국에서 처음 발명된 다중관 조파기...그것은 수확량에서 30배나 효율적일 수 있었다.중국의 조파기가 유럽인의 왕래가 빈번하던 남중국의 항국에서 멀리 떠러진 북부 지방에 한정되었다는 사실로 설멸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다른 발명품과 달리 조파기는 유럽의 선원들이 직접 전파하지는 않았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그 개념만은 관련 서적과 사용법의 전파를 통해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에서 기원한 영국의 주요한 농업 기술들이 영국의 농부들에게 폭넓게 사용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즉 괭이 조파기는 19세기 중반, 로더햄 쟁기는 1820년대, 그리고 회전식 탈곡기는 약 1870년에 대중화했다.
터닙 타운젠트(순무, 클로버와 같은 새로운 사료 작물을 도입해서 생산성을 증대한 인물-옮긴이)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윤작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중 많은 부분이 아메리카와 중국의 도움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영국이 중요한 농업 혁신으로 꼽은 새로운 윤작 기법은 온전히 중국의 것이었다. 놀랍게도 중국인은 6세기에 일찌감치 그 기법을 개발했고...더욱이 18세기에 영국인이 이용한 혁명적인 윤작 작물 가운데 몇 가지는 약 12세기 이전에 중국인이 이미 이용한 것이었다(예를 들어 누에콩, 고무라, 기장, 밀과 보리, 순무 등).
더 크고 강한 말을 개발하게 한 새로운 품종 개량법이 출현했다. 하지만 그처럼 특별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이 18세기 초에 이루어진 '동양 가축'-오스만 제국에서 들여온 아랍 암말들(다알라 아라비안, 바이어레이터크, 고돌핀 바브)-의 수입이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배제되었다.
케네스 포머런츠는 궁극적으로 1800년 이후로 영국과 중국 사이에 '큰 격차'가 벌어진 것은 영국이 얕고 건조한 중국의 광산에 비해 깊고 풍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물을 밖으로 뽑아 올리는 데 필요한 증기기관이 영국에서 발명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포머런츠의 주장은 세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심층 채광은 전국시대(기원전 5세기~221년)에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송대까지 가장 깊은 광산이 평균 91미;터에 달했다(명,청 시대에는 몇몇 광산의 깊이가 914~1463미터에 달했고, 약 2591미터나 되는 광산도 있었다). 둘째, 많은 광산이 지하 수면 (보다) 아래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며, 때문에 배수가 필요했다(예를 들어 북부 장쑤성의 저지대 광산들). 로버트 하트웰은 그곳에서 "11세기에 걸친 운영 규모의 증가는 배수 장비에 대해 많은 투자를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장비 중에는 어쩌면 쓰촨 지방의 염정(鹽井)에서 사용한 것과 유사한 수력 양수기가 포함되어 잇을 수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피터 골라스는 다음과 같이 설며한다. 아주 적은 양의 물(지하수)도 석탄 채굴에 큰 걸림돌이 되는데, 중국에서 이 문제는 더 심각했다. 많은 양의 석탄이 엄청난 양의 물을 함유한 석회층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폭넓은 복합 지층으로 인해 물이 채굴 과정에 유입되기 쉽다. 결국 지하수 제거는 중국이 석탄을 채굴하는 데 가장 크고 가장 일반적인 문제였다...그러나 중국 광부들에게는 너무 많은 물보다는 오히려너무 적은 물이 더 큰 문제였다....증기기관에 대한 적요(摘要)는 인쇄 형식으로 왕정(王禎)의 <<왕정농서(王禎農書)>>(1313년)에 처음 나타난다...윌킨스의 발명품(수력 기관)은 다소 왕정의 기계와 닮은 점이 있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유일하게 추가된 것이 바로 크랭크축의 사용이었다(이것은 500~1700년 사이에 유럽인이 독자적으로 이룩한 네 가지 독창적인 혁신 가운데 하나였다). 더욱이 공기 흡입과 배출 작용을 동시에 수행하는 펌프인 중국의 상자형 풀무는 풀무질을 할 때마다 피스톤 한쪽에서는 공기를 배출하고, 반대쪽에서는 동량의 공기를 빨아들였다. 이것은 와트의 엔진과 '외형적으로 밀접한 유사성'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17세기 말에 중국인이 증기 터빈을 개발했다는 사실도 증명해준다.
중국이 11세기에 목탄 대신 석탄을 사용했다는 사실..더욱이 용광로는 원래 기워전 2세기에 중국에서 유래했고, 5세기가 되면서 중국인은 강철을 생산하기 위해 연철과 주철을 함께 용해하는 '혼합-용해' 공정을 개발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1863년의 지멘스-마르탱법과 같지만 1400년 전에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도 1850년까지도 영국은 높은 생산 비용 때문에 비교적 낮은 수준의 강철(철과 비교해서)만을 생산했다. 이런 상황을 전환한 것이 바로 베서머 전로법의 발명(1852년)이었다.
1788년 영국의 철 생산 수준은 1078년 중국의 수준보자 더 낮았다. 또한 영국인이 11세기 중국에서 생산한 제품의 낮은 가격을 따라잡은 것은 19세기가 다 되어서였다.
인도 역시 영국을 앞섰다. 인도의 우츠 강철은 19세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순수한 철이었으며, 특히 다마스쿠스 강철로 유명한 페르시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영국 제품은 18세기 말까지도 다마스쿠스 종류보다 주악했다. 심지어 1842년까지도 인도의 철과 강철은 영국의 것보다 우수하지는 않더라도 쓸 만했으며, 세필드에서 생산된 것보다 훨씬 더 가격이 낮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때까지도 인도의 용광로 수는 영국에서 발견된 수의 약 50배였다는 점이다(영국이 호황을 누린 1873년에도 영국 용광로 수의 10배에 달했다).무엇보다 서양의 제철업자들은 인도와 페르시아 제품의 높은 품질 때무에 좌절하고 있었다.
중국의 직조 기술자들은 13세기에 이미 산업용 방적기(영국의 것들과 비슷한)의 모든 중요한 부분을 발명해놓았다....실제로 기계 구조에서 조작이 결코 쉽지 않은 (영국의 18세기말 중반) 다축 방적기는 모시 섬유를 짜던 대형 방적기의 품질에 미치지 못했다. 유일한 차이점은 중국의 기계가 면직물보다는 견직물 생산에 이용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견직물 기술의 전파가 영국의 면직물 기술의 발전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최초의 연철제 현수교는 65년 중국(유난성 칭다오)에 출현했고, 주철제 현수교는 580~618년 사이에 진샤강 위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중국의 예들은 '서양 기술자들을 고무시켰다고'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현수교에 대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보고를 들은 윌리엄 체임버스 경과 같은 많은 영국 건축가들이 이를 논의했고, 심지어는 토머스 텔포드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우리는 주로 듣는 영국의 산업적 독창성의 또 다른 증거는 1798년, 최초로 거리에 출현한 가스등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이 영국의 '혁신' 전 약 2000년 동안 조명을 목적으로 천연가스를 활용했다는 사실이 다시 은폐된다. 영국의 굴착용 날 역시 약 61미터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하나의 승리로 손꼽힌다 하지만 그 깊이는 914~1463미터에 달하는 중국의 깊은 광산에서 사용한 굴착용 날에 비하면 너무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중국인은 기원전 1세기에 이미 긴 날을 사용했다. 서양이 중국을 따라잡은 것은 19세기가 다 되어서였다.
영국은 만국박람회 (1851년) 이전에는 90퍼센트를 나무로 제작했다. 더욱이 강철이 영국에서 대량생산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싼 가격이 된 것은 1852년 이후였다.
1750~1858년 사이에 영국에 건설된 6000킬로미터의 운하는 약 700년 전 송대에 건설된 5만 킬리미터의 운하에 견주면 상당히 하찮은 수준이다.
1715~1815년의 국방비 D1(일반 및 특별 군사 지출) 지출은 1850~1913년의 거의 3배이며, 심지어 1914~1980년(두 차례의 세계전쟁이 있었던 기간)에 지출한 비용을 훨씬 상회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1715~1815년의 D2(일반 및 특별 군사지출과 군사 차관에 대한 이자 지불) 지출이 1850~1913년에 국가가 모든 부분에 지출한 비용의 2배이며, 특히 1914~1980년 사이의 D2 지출보다 현저하게 높다는 사실이다.
1688년부터 1815년 까지 축적된 영국의 국가 부채는 국민소득의 180퍼센트이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1914년 차르 제국의 부채는 국민소득의 47퍼센트, 1913년 빌헬름 2세 치하 독일은 9퍼센트, 1990년 미연방은 59퍼센트였다.
역진세는 산업 투자에 이용할 잉여물을 거둬들이기 위해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적용됐다(누진세의 예:간
접세)
1715~1815년 사이에 부과된 영국의 역진세가 국민소득의 10퍼센트에 달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사실이다. 이는 중국의 명,청 왕조뿐만 아니라 산업화가 진행되던 독재 정권하의 러시아(8퍼센트)의 경우를 모두 추월하는 수치이다. 1715~1815년까지 영국의 간접세는 중아 정부 재원의 66퍼센트에 달한 반면, 직접세는 고작 18퍼센트에 그쳤다. 게다가 영국에서는 저소득층의 세금 증가율이 소득 증가율을 넘어섰지만 차르의 독재 정권하에서는 농민의 소득 증가율이 세금 증가율을 웃돌았다.
(1800~1845년간) 영국의 관세가 매우 높은 수준이었고, 나름대로 산업화를 겪고 있던 여타 유럽 국가들의 관세보다 높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실제로 고도의 산업화를 겪고 있던(1800~1845년)영국의 관세율을 산업화를 겪으며 보호 무역주의를 표방한 독의 경우보다 6배, 러시아(보통 주요한 유럽의 산업국가로 추정되었던)보다 1.5배 가량 높았다.
1715~1790년 사이 관세 수입은 국민소득의 2.6퍼센트, D1(국방비)의 37퍼센트에 달했다. 1790~1815년 사이 관세는 나폴레옹 전쟁을 지원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증가해서 국민소득의 3.8퍼센트, D1의 25퍼센트에 이르렀다. 이 수치는 1815년 이후 다시 증가했다. 120년 동안 일관적으로 추진된 군국주의의 영향으로 발생한 국가 부채의 엄청난 이자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815~1850년 사이에 관세 수입은 국민소득의 4.5퍼센트, 연간 평균 이자 지불액의 70퍼센트에 육박했다(이자 지불은 중앙 정부 지출의 50퍼센트를 약간 상회했다). 심지어 1850~1913년 사이에도 역진세를 적용한 관세 수입이 국민소득의 2퍼센트에 달했으며, D1의 약 60퍼센트를 충당했다.
1875년('자유화 시대'의 절정기) 제조품에 대한 평균 관세는 유럽 10퍼센트, 미국을 포함하면 14퍼센트에 달했다.
1688년 이후로 군비가 급증하면서 정부는 차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1796~1931년 사이에는 무역 수지가 해마다 저자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주로 저소득층에게서 거둬들인 역진세를 부유한 금융 투자자들에게 이자로 지불했다. 결국 빈곤층(소비자)에게 얻은 소득을 부유층(저축자와 투자가)에게 재분배한 셈이었다. 나는 총 대부금의 약 80퍼센트를 런선의 자본시장에서 발행했다고 주장한다(나머지 20퍼센트는 암스테르담 자본시장에서 조달했다). 이는 영국이 지불한 총 이자의 약 80퍼센트가 런선시의 금융 투자자들에게로 직행했다는 의미와도 같다. 결국 세금의 역진성을 감안할 때, 이자의 50~60퍼센트를 저소득층이 지불했다고 가정할수 있다. 이런 점에서 1715~1850년 사이에는 국민소득의 약 5퍼센트가 가낭한 노동자층,중하위층 소비자들에게서 부유한 금융 투자가들에게로 넘어갔다고 본다. 이는 경이적인 수치다(영국이 1850~1913년 사이에 국방에 지출한 액수의 거의 2배와 맞먹는다). 더욱이 나폴레옹 전쟁 중재분배된 금액은 국민소득의 9퍼센트를 약간 밑돌았다.
영국이 '문명의 선물을 전해줄' 매체인 불평등 조약이 강행되었다. 브라질(1810년), 중국(1842~1858년), 일본(1858년), 샴(1824~1855), 페르시아(1836,1857년), 오스만 제국(1838, 1861년)을 비롯한 많은 비서구 구가들과 조약을 체결했다. 그것은 해당 국가의 관세 자유권을 박탈했고 전체적으로 관세를 최대 5퍼센트까지 제한했다.
영국은 1700~1850년 사이에 32퍼센트에 달하는 평군 관세의 혜택을 누렸다.
1882~1894년 사이에 (영국에서) 인도로 수출하는 면포에 대한 관세가 면제되었다(1859~1882년 사이에 5퍼센트 낮아졌다).
17세기 영국의 경제가 인도산 직물의 순수한 수입자였던 데 비해 1815년에는 약 4000만 파운드(약 1만 8143톤)에 해당하는 2억 5000만 야드(약 22만 8600킬로미터)의 면포를 수출했다. 1873년에는 영국 면포 수출의 40~45퍼센트가 인도로 향했다. 따라서 한때 영국에 면포를 수출했던 인도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완제품을 인도로 수출하는 랭커셔 사업을 위한 면 재료 공급국으로 변모했다. 욬먼데 영국 직물 산업의 발전이라는 사회적 대가가 인도의 산업을 파괴했던 것이다.
스탠리 엥거먼(Stanley Engerman)과 로저 앤스테이(Roger Anstey)는 노예 무역에 따른 수익은 투자 비율이나 국민소득에 비해 지극히 낮은 비율에 불고하다고 주장하면서 이 가은 사실에 반기를 들었다['저비율' 주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바버라 솔로(Barbara Solow)는 엥거먼의 자료를 평가하면서, 1770년 동안 '노예 무역의 수익이....전체 투자의 거의 8퍼센트, 상업 및 산업 투자의 39퍼센트였으며, 이는 낮은 비율은커녕 엄청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비교를 위해서 미국의 경우, 1980년에 이루어진 개인 투자에 대한 국내 기업의 총 수익률이 약 40퍼센트라는 말도 덧붙였다. 더욱이 오늘날 미국에서 총투자에 대해 8퍼센트 이사의 수익을 올리는 유일 산업은 단 하나도 없다. 윌리엄 데리티(William Darity)는 1784~1786년에 노예 무역으로 거둬들인 수익률이 그로부터 약 200년 후 미국 자동차 산업이 올린 수익률의 3배 이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노예 무역의 수익에 대한 로저 앤스테이의 평가는 엥거먼의 것보다 훨씬 더 인색하다. 그의 자료는 그것이 국민소득의 0.11퍼센트에 불과했으며 이는 '사라질 뻔한 영국의 산업혁명에 대한 자금 지원에서 노예 무역이 지닌 커다란 중요성의 신화를 비웃을 만한 수치'임을 시사한다. 중요하게도, 이 수치는 '저비율' 주장이 면과 철 산업(영국 산업혁명의 원동력이었던)의 자본 투자에 적용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사실상 두 가지 산업 내의 투자 수준은(앤스테이의 과장된 추정치와 크게 대조된다) 1780~1800년 사이 국민소득의 각각 0.22퍼센트 정도였다....이상하게도 그는 저출률을 국민소득의 7퍼센트로 평가하면서도 노예 무역이 총 투자를 0.11퍼센트 정도만 끌어올렸을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러나 이 수치는 투자에 대한 수익률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높았기 때문이다. 수익의 50퍼센트가 면 공업에서 발생했다고 가정한다면, 이것이 전체 산업 투자의 25`30퍼센트에 대한 자금을 조달했을 것이다. 이는 결국 '고비율'을 주장할 만한 수치다.
1750년 이후로 많은 흑인 노예 농장은 역구의 부재 지주들이 소유햤다....실제로 18세기 말에 식민지에서 거둬들인 식민지 소득은 영국 총 투자의 약 50퍼센트에 달했다.이중 상당액이 영국의 산업에 재투자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산업화의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1770년에는 서인도에서 단독으로 거둬들인 수출 이익이 전체 영국 개인 투자의 38퍼센트 혹은 국민소득의 2.5퍼센트에 달했다. 이는 이 이익의 단 15퍼센트 만이 영국의 면 공업 전체에 투자되었다는 말과 같다(즉 '고비율' 주장).
18세기 후반에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 흑인들이 생산한 상품 대 원재료의 비율은 83퍼센트였다(1850년에도 69퍼센트였다). 여기서 단연 두드러지는 부분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흑인 노예들이 거의 독점적으로 생산한 목화솜의 공급이었다. 그런데도 엥거먼은 노에 무역에 따른 총 수익이 영국 국민소득의 극히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이라고 주장했다(저비율 주장). 그러나 노예들이 생산 목화솜이 아니었다면 영국의 면공업은 산업화에 지대한 역할을 할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케네스 포머런츠는 1861년과 1862년 (남북전쟁기간)에 노에를 기반으로 한 미국의 목화솜 수출이 중단되자 영ㄱ국의 면포 소비는 55퍼센트에 그쳤고 가격은 2배로 뛰었다고 지적한다.
조지프 이니코리(Inkori)는 노예 무역과 서인도 무역에 대한 보험 이자가 영국 전체 해상 보험 시장의 63퍼센트에 달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1784~1786년에 그 수익은 영국 총 투자의 55퍼센트 혹은 총 개인 투자의 64퍼센트에 달했다( 이 수치의 약 80퍼센트는 아프리카 및 아메리카 와 무역으로 형성되었다). 이것의 중요성은 면 공업에 투자한 금액이 영국의 총 투자액의 단 4퍼센트에 불과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면 공업의 총 투자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삼각무역(세 나라 간에 순환적으로 수출입을 행하는 무역 형태-옮긴이) 수익의 약 9퍼센트가 필요했을 것이다. 확실히 9퍼센트느 일반적으로 영국의 산업화에 투자할 수 있는 금야글 과소평가한 수치다. 또한 제국적인 무역을 통한 총 수익이 영국 총 투자액의 55퍼센트 이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유럽으로 건너간 많은 수출품들이 사실은 수입한 식민지 생산물(주로 흑인노예를 부리는 식민지에서 생산 되었다)의 제수출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의 면 공업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삼각 무역으로 창출된 수익은 9파센트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있다.(아마도 6퍼센트에 불과했을 것이다).
항해 조례와 식민지 체계가 정확히 국내 수요가 감소한 시기에(즉, 국내 총 소유가 위축되고 있을 때) 영국의 보증된 독점적 수출 시장을 확립한 사실을 중요하다. 따라서 영국의 산업 수출이 1700~1770년 사이에 150퍼센트 이상 상승한 반면 국내 시장은 단 14퍼센트의 성장에 머물렀다. 더욱이 유럽에 대한 영국의 제조품 무역 점유율이 84퍼센트(1700년)에서 45퍼센트(1773년), 그리고 29퍼센트(1855년)로 떨어지면서 유렂의 무역 시장이 얼어붙었다. 만약 모든 식민지들을 포함시킨다면 영국의 제조품 수출률은 1700년에는 14퍼센트, 1773년에는 55퍼센트, 1877년에는 71퍼센트로 급된다....여기서 관건은 시긴지 시장드이 18세기 동안 증가한 영국의 많은 산업(약 70퍼센트)을 흡했다는 사실이다.
1700~1800년에 관한 내 계산에 따르면 영국의 '주변' 무역은 국민소득의 약 15퍼센트 정도로 추산되낟이것은 어마어마한 수치다. 또한 19세기 동안에는 훨씬 더 증가해서 1858년에는 국민소득의 34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수치에 육방하기도 했다(1850~1913년 사이 영국 국방비의 900퍼센트 이상에 해당한다. 더욱이 사각 무역네서도 그수치를 1750~1800년 사이 양국 국민소득의 약 12퍼센트에 달했다
(영국의) 평균 관세는 1800~1809년 사이에는 36퍼센트 증가했고, 1810~1819년 사이에는 44퍼센트까지 증가했다가, 1820~1829년 사이에는 55퍼센트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1830년과 1839년이 되어서도 평균 관세율은 38퍼센트라는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영국의 관세는 1846~1860년 사이에 20퍼센트에 달했고, 1860~1879년 사이에도 10퍼센트로 높은 수치를 유지하다가 1880~1913년에 가서야 겨우 6퍼센트로 떨어졌다.
유럽의 무역 정책은 자유무역보다는 현저한 보호무역으로 유명했으며, 이런 상황은 17세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 게속되었다. 특히 영국은 1700~1846년 사이에 32퍼센트의 평균 관세를 징수했다. 더욱이 유럽의 평균 산업 관세는 1820년에 19퍼센트, 1875년에 10퍼센트, 1913년에는 19퍼센트에 달했다.
유럽 군사 혁명(1550~1660년)의 토대가 된 기술들-화약, 총과 대포-은 모두 850~1290년 사이에 일어난 중국의 군사 혁명 동안 개발되었다(이슬람 중동 역시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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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바라본 근대 아이누와 식민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