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0일 예수님과 사귀기 ‘그리스도 우리의 빛’ ‘하느님 감사합니다.’ 부활 성야 빛의 예절에서 우리가 하는 선언이자 신앙 고백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짙은 어둠을 걷어내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 주님이 빛이라고 고백하는 건 나와 세상이 어둡다는 뜻이다. 미래를 알지 못하고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 몸과 마음을 어둡게 만들기 때문일 거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내 안에 있는 계획과 걱정 그리고 불안도 함께 일어난다. 지금껏 계획대로 잘되지 않았고, 걱정 대부분은 쓸데없는 것인 줄 잘 알면서도 불안하다. 걱정이 없어도 걱정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죄 같고 뒤처지는 거 같다. 휴양지에 가서도 그러고 친구를 만나도 그때뿐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이 정말이지 나의 고백이다. ‘님 안에 쉬기까지 내 영혼은 평안하지 않나이다.’ 주님 안에 있음이 나의 영원하고 완전한 휴식이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다. 내 신앙, 예수 그리스도, 이분이 내가 가는 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길이 어두운 건 악해서가 아니라 모르고 안 보여서이다. 주님을 등불에 비유하신 건 당신을 세상에 보여 주라는 주문이기 이전에 내 안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걱정과 불안이라는 어둠을 주님으로 날려 보내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 4,22)”고 하신다. 세상에 비밀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이 내 어둠의 뿌리를 드러내 주신다는 뜻으로 들린다. 왜 그런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 내 죽음과 연결되어 있을 거다.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신앙의 진리에 무관심하고 주님 말씀을 듣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완고한 사람이다. 하늘나라 이야기를 말 그대로 내가 사는 이 땅과는 아무 상관 없는 하늘, 별나라 이야기로 여기는 사람이다. 세례성사로 받은 신앙은 계속 자라나야 한다. 교리 지식도 필요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예수님과 친밀해져야 한다. 자주 마음의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주님과 은밀히 대화한다(마태 6,6). 어떤 이야기든 좋다. 연인은 대화하기 위해 만나는 게 아니라 서로 만나기 위해, 함께 있으려고 대화한다.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으면 괴로워할 게 아니라 어린이처럼 그 즉시 주님께 용서를 청한다. 예수님과 인격적 친밀감이 만능 해결책은 아니지만 환상과 실재를 구별하게 한다. 예수님은 사귈수록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마르 4,25).’
예수님, 주님을 따라 하느님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이 십자가 제사를 완성하셔서 휘장을 찢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주님과 친해집니다. 친구와 연인이 그러는 거처럼 제 마음을 드리니 주님 마음을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께로 인도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