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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엽기 혹은 진실 (세상 모든 즐거움이 모이는 곳) 원문보기 글쓴이: 고윤정
출처 : https://theqoo.net/1262648385
원작자: 김설단 작가 (https://britg.kr/novel-author/2327/)
혜주가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지나서였다. 아파트 공용 주차장에는 이미 차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주차할 곳을 찾기 위해 혜주는 두 번이나 주차장을 돌았다. 결국엔 현관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끼어서 차를 주차할 수 밖에 없었다.
앞에 주차된 차의 뒤쪽을 아슬아슬하게 가로막아 차를 주차하면서 혹시 옆 차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내일도 아침 일찍 나가야 할 것이라 별 걱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새벽에 출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였다. 차에서 내려 현관까지 걸어오면서 괜스레 더 신경이 쓰였다.
피곤한 하루였다. 어젯밤도 브리핑 준비로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한 혜주였다. 하지만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피로였다. 수술도 그렇고 브리핑도 그렇고 막 전문의를 단 의사에게는 주어지기 힘든 기회였다. 과장의 절대적인 신임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어제 낮, 수술에 들어가기 위해 소독을 하고 있는 혜주에게 과장이 갑작스레 말을 던졌다.
"이 수술, 혜주씨가 집도하도록 해요."
"네? 제가요? 하지만 과장님께서 하시기로....."
"내가 혜주씨를 믿으니까 맡기는 거요."
"네....."
혜주는 약간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물론 과장의 갑작스런 지시를 예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학병원에서 과장급에게 배당된 수술을 전문의가 대신 집도하는 것이 간간이 있는 일이었지만 이처럼 큰 수술을 맡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과장의 말이 떨어진 그 순간 혜주의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겸손 섞인 승낙이 아니라 자신감에 찬 쾌재였다. 얼마나 이런 순간을 기다렸던가. 어렵지만 그만큼 성공을 하면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수술이었다.
폐암 중기, 이미 왼쪽 폐의 절반이 암세포로 뒤덮여 있는 환자였다. 폐동맥까지 거의 잠식해 들어간 암세포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동맥을 끊어 다시 이어야 하는 대수술이었다. 하지만 혜주는 이미 자신이 있었다.
혜주의 상상 속에서 그리고 꿈속에서 이런 류의 폐암 수술은 이미 수십 차례나 반복되었다. 때로는 맥박이 영으로 떨어져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환자가 벌떡 일어나 혜주를 쳐다보기도 했다. 혜주는 언제나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해서 꿈 속 환자의 얼굴을 직접 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혜주는 이미 그 꿈 속 환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혜주가 태어나기도 전에 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흐릿한 흑백 사진으로 밖에 만나보지 못한 아버지. 혜주는 꿈속에서 그 아버지를 수술하고 또 수술했다.
수술을 하는 내내 혜주의 손놀림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장조차도 혜주의 과감하고 정밀한 수술실력에 놀라는 눈치였다. 혜주는 꿈속에서 하던 대로 기계적으로 손을 놀렸다. 문득 대학 시절 한 젊은 가정의학과 교수가 한 말이 떠올랐다.
"지금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슈바이처나 대단한 의학자가 아니라 염가에 의료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잘 훈련된 엔지니어이다."
교수의 말은 일반인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영세 의원의 부족을 지적한 것이었지만, 혜주는 이 말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다. 엔지니어..... 혜주는 자신이 물컹한 기계의 부속을 만지는 정비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될 수만 있다면 혜주는 F1경기에 참가하는 전문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특급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에서 몇몇 부서진 차들을 잘못 만져 영원히 못쓰는 차가 된다하여도 그로 인해서 최고의 엔지니어가 탄생할 수 있다면, 그러한 작은 희생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혜주의 무의식 속에는 자리잡고 있었다.
4시간에 걸친 대수술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안경에 김이 서릴 정도로 공을 들인 수술을 끝내고 과장과 함께 수술실을 나선 혜주의 눈에 안절부절 환자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 가족들이 들어왔다. 가족들은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일어나 과장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어떻게 됐습니까?"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물론 차후 경과는 지켜봐야겠지만 일단 이번 수술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과장은 마치 조산원이 '아들입니다!' 하는 소식을 전하듯 미소를 머금고 그들에게 수술 경과를 전했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흘렀고, 부인인 듯 보이는 아주머니는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 나오는 과장과 혜주의 뒤로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가 던져졌다.
'나의 성공이다!'
과장의 뒤를 따라 걸으며 혜주는 속으로 몇 번을 되새겼다. 이것으로 과장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이제 혜주 앞에 남은 것은 국내 최고의 외과의로 명성을 쌓아가는 일 뿐이었다. 현재 폐암 수술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라 불리는 과장마저도 언젠가는 혜주가 따라잡아야 할 목표였다.
"내일 브리핑도 혜주씨가 준비하도록 해요." 과장이 걸음을 늦추지 않고 말을 던졌다.
"네?"
혜주는 깜짝 놀라 물었다. 과장이 수술을 맡긴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번 지시는 은근한 야망으로 가득 찬 혜주로서도 정말 놀라운 말이었다. 브리핑을 혜주가 맡는다는 말은 이 수술이 공식적인 혜주의 집도 기록이 된다는 말이었다. 경험뿐만이 아니라 작게나마 명성을 쌓을 발판마저 마련되는 순간이었다.
"과장님...."
혜주는 차마 감사하다는 말도 알겠다는 말로 못하고 그 자리에 서 버렸다.
"혜주씨 실력이 있어 보여서 내 이러는 거요. 고마워 할 꺼 없어요."
과장은 늘 그렇듯 할 말을 하고 먼저 걸어가 버렸다. 혜주는 잠시 멍하니 섰다가 마침내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지나가는 간호사가 이상하게 쳐다보아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혜주는 함박 웃음을 띤 채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브리핑 준비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밤을 꼴딱 새며 연습을 하고 또 했지만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람이 죄다 모인 국내 최고대학의 부속 병원이니 칼날 같은 질문이 아니 들어올 리가 없었다. 혜주는 대학시절 줄줄 외운 해부학 기본서까지 꺼내 다시 읽으며 브리핑 준비를 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 정례 브리핑에서 혜주는 역시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수술 내용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지만 과장의 도움도 매우 컸다. 시종일관 혜주의 재능을 칭찬하며 브리핑 내내 우호적인 분위기를 주도해나간 것이다. 막 전문의를 단 혜주의 너무 이른 성공에 몇몇 이는 시기심 어린 눈초리도 보였지만, 과장의 절대적 신임 하에 혜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 없이 브리핑을 해 나아갔다.
".........이상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과장이 먼저 박수를 쳤다. 브리핑 룸 내의 외과의들이 따라 박수를 치고 과장이 또 한 번의 치하의 말을 했다.
"수고 많았어요. 혜주씨. 역시 훌륭하군요."
"감사합니다. 과장님."
혜주는 과장이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그것은 과장의 인정이 혜주의 앞날에 빛을 던져준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혜주가 진심으로 과장을 존경하는 까닭도 있었다. 과장은 국내 외과수술 방면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짧은 미국 유학시절도 있었지만 과장은 거의 모든 수술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성공시킨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혜주 역시 그가 성공시킨 여러 수술들을 전문의 과정을 밟는 내내 수 차례나 목격하였다.
물론 혜주가 과장을 존경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국내 최고대학 부설병원의 과장을 지내고 있을뿐더러 국립보건원 연구이사를 겸임하고 있으며 보건원 산하 폐암연구학회 회장을 지내고 있는 과장은 그야말로 국내 외과 의학계의 노른자위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청빈한 학문적 성공만으로 만족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혜주에게 과장은 가장 이상적인 표본이었다. 그러나 과장은 결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법은 없었다. 순순히 혜주와 같은 실력 있는 후학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만 보아도 과장의 인간됨은 이미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관에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혜주의 몸이 오징어처럼 늘어졌다. 혜주는 집에 들어 가자마자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서 자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화장은 지우고 자야겠지? 어쨌든 오늘밤만은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푹 자리라 혜주는 다짐했다.
그러나 집 앞에 도착한 혜주는 뜻밖의 소포에 쏟아지던 잠이 달아났다. 노란 소포 포장 용지에 싸여진 상자에는 또박또박 보낸 이의 주소가 적혀있었다.
"경남 밀양시 밀양대학교 석진규."
주소를 읽어나가는 혜주의 얼굴에 놀라움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진규. 어린 시절 혜주와 한 동네에 살면서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였다. 혜주는 얼른 들어가 소포를 열어보고픈 마음에 서둘러 가방에서 열쇠를 꺼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열쇠 구멍에 열쇠를 맞추는 일조차 쉽지가 않았다.
딸깍. 문 따는 소리가 들리고 혜주는 허리를 숙여 소포를 들어올렸다. 뭐가 들었는지 약간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혜주는 소포를 들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2.
87년 여름이었을까. 혜주와 진규는 초등학교 4학년을 한 반의 회장과 부회장으로 지냈다. 둘은 전교 1, 2등을 다투는 사이였고, 다만 혜주가 여자라는 이유로 부회장에 낙점이 된 것이었다. 혜주는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불만이었다. 해서 진규와도 그다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새로 반장과 부반장을 선임하게 된 날 혜주는 다시 부반장의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1학기 두 번의 시험에서 두 번 다 혜주가 아슬아슬하게 진규를 이겼지만, 담임선생님은 싫다는 진규를 억지로 반장의 자리에 앉혔다. 혜주는 그 날을 계기로 진규와 친하게 지내기로 결심을 하였다.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는 여자아이로서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체념도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반장 자리를 사양하는 진규의 조용한 성격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2학기 중간고사 성적이 발표된 날이었다.
"이번 중간고사 1등은 진규다. 평균 97.5점. 반장이 체면을 차렸구나. 자, 모두 박수!"
아이들은 박수를 쳤고, 진규는 성격답게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혜주는 4학년 들어 처음으로 진규에게 전교 1등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별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혜주는 0.2점 차이로 이번엔 2등이구나. 혜주에게도 우리 박수 한 번 쳐주자."
아이들은 또 한 번 부러운 섞인 박수를 쳤다. 진규 역시도 박수를 치며 혜주를 쳐다보았다. 혜주는 진규와 눈을 마주치며 입으로 '축 하 해!'라고 신호를 보내었다. 진규는 혜주의 입 모양을 읽었는지 '고 마 워!'라고 답을 해 왔다.
그 날 저녁 진규와 혜주는 늦게 학교에 남아 아이들의 받아쓰기 채점을 하고 있었다. 시골 학교엔 늘 그렇지만 선생님들이 과중한 업무에 치게 마련이고,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몇몇 아이들이 받아쓰기 채점과 같은 소소한 일거리를 도와주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경우는 전교 1등과 2등이 한 반에서 반장과 부반장을 맡고 있으니 더욱 믿고 잡일을 맡길 수 있는 것이었다.
창가로는 낮부터 뛰어다니며 놀던 아이들도 다들 집으로 갔는지 조용한 운동장의 풍경만이 들어왔다. 혜주와 진규는 창가에 책상을 붙여놓고 마주앉아서 채점을 하고 있었다.
진규가 먼저 자기 몫의 채점을 다하고는 붉은 색연필을 책상에 놓았다.
"많이 남았니? 도와줄까?"
1학기 중에도 이런 기회가 있었지만, 진규와 혜주는 서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워낙에 혜주가 차갑고 딱딱하게 굴었던 까닭이다. 게다가 반의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편이 갈라져 크게 싸우는 일이 있었던 까닭에 그 분위기에 묻혀 서로 말을 주고받기도 어색했던 점도 있었다. 해서 1학기 내내는 누군가 먼저 채점을 끝내도 그냥 말없이 기다리고 있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의 혜주가 보낸 우호적인 메시지가 둘 사이의 서먹함을 없애버렸는지 진규가 먼저 말을 건네어왔다.
"잠깐만." 혜주가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몫의 시험지는 매겼다.
"나도 다 했어."
혜주와 진규는 색연필을 놓고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선생님 왜 안 오시지?"
"내가 가서 말씀드릴까?" 진규가 대답했다.
"그냥 기다리자. 좀 있으면 오시겠지."
"그래, 그럼 그러자."
선생님을 기다리는 둘 사이에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진규였다.
"혜주야. 넌 꿈이 뭐야?"
"꿈?"
"응. 커서 뭐가 될꺼야?"
"난 의사." 혜주는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왜?"
"암을 고치려고."
"암?"
"응. 아버지께서 암으로 돌아가셨대."
"그렇구나. 안됐다."
"물론 난 아버지 얼굴도 못 봤어. 나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거든."
그 때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채점 다 했니?"
"네."
"그럼 그냥 거기 놓고 가거라. 수고했다."
"네."
"그래. 선생님이 좀 바빠서 그래. 미안하다. 다음에 선생님이 맛있는 거 사주마."
"네. 선생님. 안녕히 계셔요."
혜주와 진규는 가방을 메고 교실을 빠져 나왔다.
혜주가 진규에게 같은 질문을 한 것은 집으로 향하는 기나긴 둑길을 반 넘게 걸어왔을 때였다.
"진규야. 넌 꿈이 뭐야?"
"나? 글세." 진규는 한참을 고민했다.
"나도 의사." 진규의 대답이었다.
"의사? 왜?"
"혜주 너랑 같이 의사하면 좋을 것 같아서."
진규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순진했다. 그래서인지 혜주는 갑자기 진규가 마음에 쏙 들어버렸다.
"그래 우리 나중에 커서 같이 의사하자."
"그래."
노을지는 긴긴 둑길을 걸어가던 두 꼬마의 모습은 이미 20여 년 전의 추억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그 20년 중 10년은 서로 연락이 끊긴 채 각자의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혜주의 문 앞에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진규의 소포가 배달되었다.
혜주는 조심스럽게 가위로 소포의 포장을 뜯어내었다. 안에는 봉투에 든 편지 한 장과 드링크제 한 통이 들어있었다. 혜주는 얼른 봉투에 든 편지부터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혜주에게.
안녕? 잘 있었니? 이렇게 불쑥 소포를 보내서 놀랐지? 서로 연락이 끊긴지도 10년이 되어 가는 구나. 넌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의사가 되었다며. 우연히 네 소식을 듣게 되었어.
난 여기 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있어. 산학 협동으로 얼마 전에 드링크제 하나를 개발했는데, 식약청의 허가도 떨어졌고, 이제 상품화하는 일만 남았어. 내가 연구하는 동충하초라는 건데, 암 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입증되었어. 너에게 이 샘플을 보내주고 싶었어.
네가 의사가 되어 암을 고치겠다고 하던 말이 생각나. 나도 함께 하기로 했는데, 결국 그렇지 못했지. 하지만 난 나대로 새로운 접근법을 찾았단다.
언제 한 번 서로 만나서 얼굴보고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드링크 한 번 마셔봐. 다음에 다시 연락할게. 안녕.
석진규.
짧은 편지였다. 그렇지만 혜주에게는 어린 시절의 감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20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다는 진규의 소식이 어쩐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혜주 자신이야말로 아직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마저도 들었다.
혜주는 드링크가 든 박스를 열었다. 시중에서는 보지 못한 박스였다. 안에 든 병에는 딱히 상표도 붙어있지 않았다. 판매가 되지 않은 시제품인 것이 표가 났다. 다만 뚜껑에만 '冬蟲夏草(동충하초)'라는 글씨가 쓰여있었다.
혜주는 한 병을 따서 꿀꺽 마셔버렸다. 쌉싸름한 향이 시중에 파는 드링크 제품의 맛과 딱히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혜주의 휴대폰이 울린 것은 그 때였다. 가방 속에 든 휴대폰을 찾느라 혜주는 가방을 죄다 털어야 했다. 허겁지겁 휴대폰을 열어 전화를 받자 들리는 목소리는 과장이었다.
"혜주씨? 나 최과장이오."
"아, 네. 과장님. 이런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과장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좀처럼 긴장하는 법이 없는 과장의 목소리가 이처럼 들떠 있는 것과 이런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한 것을 보면 굉장히 중요한 일이 틀림없었다. 급한 환자일까?
"혜주씨. 지금 날 좀 도와줄 수 있겠소?
"과장님, 무슨 일이시죠?"
"전화로 말하긴 어려운 사안이오. 하지만 무척 중요해요. 꼭 혜주씨가 날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는데."
"저야 과장님께서 부탁하신다면 언제든지 도와드려야죠. 지금 어디세요?"
"일단 병원으로 와주게."
"네, 지금 제가 병원으로 갈게요."
"고마워요. 혜주씨."
과장의 전화가 끊겼다. 혜주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더욱 궁금해 왔다. 혜주는 서둘러 백에서 꺼낸 물건들을 다시 쓸어 넣었다. 과장이 이토록 급하게 혜주를 찾을 만한 일이라면 한 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가방을 들고 문단속을 하고 나오면서 혜주는 주차에 대한 걱정이 퍽이나 쓸모 없는 걱정이었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혜주는 자신이 무의식중에 진규가 보낸 드링크의 뚜껑이 자신의 가방 속에 들어간 사실은 알지 못했다. 물론 그 뚜껑이 혜주에게 얼마나 큰 행운을 안겨다 줄 것인지 역시 혜주는 알지 못했다.
병원으로 운전해 가면서 내내 혜주의 머릿 속을 지나간 생각들은 과장의 부름에 대한 의문보다는 어린 시절 진규와의 추억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남녀학교로 갈리긴 했지만 시내로 통학을 하면서 늘 함께 다니곤 했던 기억들. 때로는 등교 시간에 늦어 진규의 자전거 뒤에 앉아가기도 했다.
시내로 나가는 길은 어린 시절의 그 뚝길을 지나야 했다. 그때까지도 그 길은 흙길 그대로여서 자전거 뒤에 앉아가려면 여간 엉덩이가 아픈 것이 아니었다.
"야. 엉덩이 아파. 좀 천천히 가."
진규의 허리춤을 붙잡고 혜주가 소리를 치면 진규는 짓궂게도 더욱 속력을 높이곤 했다. 그러면 학교까지 가는 내내 혜주는 비명을 질러댔다.
혜주의 학교 앞에 자전거가 서자 혜주는 얼른 뛰어내리며 진규의 등짝을 두들겼다.
"야, 이 나쁜 자식아! 천천히 가라니까. 머리도 바람에 다 날렸잖아!"
진규는 늘 그렇듯 말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제 갈 길로 자전거를 몰고 가버렸다. 혜주가 멀어져가는 진규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공중에 주먹질을 해대고 있노라면 혜주의 친구들이 다가와서 둘의 관계를 놀리곤 했다.
"야! 김혜주. 또 남자친구 자전거 타고 학교 왔냐?"
"남자친구는 무슨 개코가 남자친구야! 내 저런 자식을 그냥 죽여버려야지. 에휴."
"야, 벌써 소문 다 났어. 밀양여고 1등이란 밀양고등학교 1등이랑 사귄다. 좁은 밀양 바닥에 소문 다 났어."
"소문은 무슨 소문이야! 얼른 가자. 늦겠다."
소문이 돌아도 혜주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진규와 나란히 서울대학교 의대에 진학할 꿈을 꾸고 있었으니까.
진규의 아버지가 쓰러지신 것은 대입을 석 달 앞두고서였다.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다가 갑자기 쓰러지신 진규의 아버지는 다리가 부러지신 것보다 더 큰 병을 가지고 계셨다.
폐암.
혜주의 아버지에게 내려졌던 저주가 이번에는 진규의 아버지를 덮친 것이었다.
진규는 서울로 진학하겠다는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과수원을 지킬 수밖에 없었고, 결국 진규는 밀양에 있는 대학교의 농과대학에 진학하기로 하였다.
마을 뒷산에서 진규와 혜주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혜주 네가 내 몫까지 열심히 해서 꼭 훌륭한 의사가 되어줘."
진규의 그 말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혜주의 귓가에 맴돌았다. 혜주는 그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운명이란 언제나 사람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곤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날 혜주와 진규는 말없이 손을 잡고 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20년을 한 동네에 살면서 친구처럼, 철이 들면서 때로는 연인처럼 지내온 둘이었지만 그렇게 손을 잡고 있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도 서로 연락하면 되지 뭐."
진규는 그렇게 말했고, 혜주도 반드시 그러리라 다짐했지만 결국 대학에 진학하고부터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혜주가 어머니와 함께 완전히 서울로 이사를 해버렸고, 다시 고향에 내려갈 일이 없어져버린 탓이었다.
의과대학에서의 일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하루하루 감당해야 할 공부에만 신경을 쓰기에도 역부족이었다. 레지던트 시절 어머니마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자 혜주는 누구보다도 외로웠지만 진규를 떠올리지는 않았었다. 하루 두어 시간도 채 못 자는 생활의 반복이었고, 혜주는 어머니의 죽음도 외로운 자신의 신세도 위로할 새 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쳐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최고의 의사가 되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를, 그리고 진규의 아버지를 앗아간 그 병마를 정복하고 말리라. 혜주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과장의 뜬금없는 부름에도 군말 없이 이렇게 지친 몸을 병원으로 옮기는 혜주에게는 나름대로의 그러한 계산이 있었다. 당분간은 과장의 뒤를 열심히 쫓으면 폐암연구소 쪽으로 길을 뚫을 수 있을 법도 했다. 혜주에게 필요한 것은 뛰어난 외과의로서의 명성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자신의 연구를 할 수 있는 계기였다.
병원으로 향하는 도로는 새벽이라 텅텅 비어있었고, 무심히 가속기 폐달에 발을 얹어놓은 혜주는 금방 병원 정문에 도착했다. 차단기는 내려져 있었고, 수위 아저씨는 유리로 된 칸막이 안에 앉아있었다. 병원의 밤풍경에는 그다지 급박한 상황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혜주는 운전석 창문을 열고 수위 아저씨에게 얼굴을 내보였다. 평소 같으면 말없이 차단기를 올려주었어야 할 수위 아저씨가 어쩐지 차단기를 올리지 않고 칸막이 밖으로 걸어나왔다.
"아저씨. 저예요. 차단기 좀 올려주세요."
혜주의 말을 듣고도 아저씨는 그대로 차단기 밖으로 걸어나오더니 저쪽 건너편 어딘가로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아저씨가 손짓하는 곳을 보니 검은 양복을 입은 두 명의 사내가 혜주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김혜주씨 되시죠?" 사내 한 명이 혜주에게 물었다.
"그런데요? 누구시죠?"
혜주는 약간 의아해하며 물었다. 사내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보였다.
"기관에서 나왔습니다. 최태식 과장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과장의 지시로 나왔다면 정말일 것이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혜주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혜주를 병원으로 부른 과장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할 테니까.
"내려서 저희 차로 가시지요."
"어딜요?"
"여기서 말씀드리기가 약간 곤란합니다. 가셔서 이야기하시죠."
혜주는 약간 꺼림칙했지만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차는 키를 꽂아둔 채로 수위 아저씨에게 맡겼다. 수위 아저씨는 혜주의 차를 주차시키기 위해 차단기를 올렸다. 헤주는 슬쩍 수위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저 사람들 누구예요?"
"몰라, 나도. 그냥 오더니 혜주 선생 기다린다고 오면 이야기 해 달라고 하더라구. 내가 이 시간에 혜주 선생이 여기 왜 오냐고 하니까, 그냥 올 꺼라고 하더라고."
혜주는 그들을 따라 약간 걸어갔다. 그 곳에는 검은 고급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양복을 입은 사내 중 한 명은 운전석에 타고 혜주와 나머지 한 명은 뒷좌석에 탔다. 어쩐지 연행되어가는 피의자가 된 기분이었다.
차가 한참을 달렸다. 밤이라 밖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히 도심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혜주는 어쩐지 위압적인 차 안 분위기에 눌려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인지 묻지를 못했다.
한 시간이나 달렸을까. 혜주는 마침내 입을 열어 물었다.
"지금 도대체 어딜 가고 있는 거예요? 좀 알고가고 싶네요."
"사실 저희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저희도 지시 받은 대로 김혜주씨를 모셔가는 것뿐입니다. 일단 가시면 모든 설명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안 들으니 못한 대답이었다. 혜주는 여전히 창 밖을 기웃거리며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짐작을 해보려고 했으나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윽고 차가 속력을 줄이고, 앞에는 겹겹히 바리케이트가 쳐진 모습이 나타났다. 게다가 바리케이트 앞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줄줄이 서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혜주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큰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총을 든 군인 한 명이 차 앞을 가로막고는 운전석 옆으로 다가왔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사내가 짙게 썬팅된 창문을 열자 군인은 황급히 경례를 붙였다. 그리고는 차를 통과시켰다.
차를 겹겹히 둘러쳐 진 바리케이트를 꾸불꾸불 피해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지나가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 한 채가 보였다. 그리고 주위로는 수풀이 울창했다. 뭔가 은밀한 시설임이 분명했다. 도로가 비탈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산 중턱 쯤 되는 것 같았고, 숲이 우거진 한 가운데 있는 이런 시설은 분명히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는 군사시설이 틀림없었다. 과장이 이런 류의 기관과도 친하다는 사실에 혜주는 속으로 두려움 섞인 찬탄을 터뜨렸다.
건물 현관에는 군복을 입은 중사 한 명이 마중을 나와있었다. 혜주가 탄 차가 현관 앞에 서고 혜주와 두 사내가 내렸다. 두 사내가 중사를 향해 경례를 붙이는 걸로 보아서 두 사내도 군인인 듯 했다. 중사는 군인 특유의 딱딱한 말투로 혜주를 맞았다.
"김혜주씨, 어서 오십시오."
"네. 여기가 어딘지?"
"일단 들어가시죠. 최태식 과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혜주는 중사를 따라 기나긴 복도를 걸어들어갔다.
4.
복도는 차갑고 길었다. 페인트가 칠해진 벽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다. 복도 천장 한가운데로 줄지어 달린 형광등은 약간은 어둡게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걸어가는 내내 좌우로 철문이 보였지만 푯말이 달린 문은 하나도 없었다. 무슨 은밀한 작업을 하는 곳인지, 내부 인사들도 자신의 사무실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마침내 복도 끝에 있는 철문으로 중사가 혜주를 안내했다.
"이 쪽입니다."
"네."
중사는 문을 열면서 경례를 붙였다.
"충성. 김혜주씨 도착했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안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과장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중사는 몸을 돌려 혜주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혜주가 들어선 그 곳에는 커다란 원탁에 과장과 소령 한 명,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혜주의 자리인 듯 과장의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혜주를 안내했던 중사는 혜주를 들여보내고는 밖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중사의 돌아가는 발걸음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방안의 방음은 철저했다. 혜주는 그 순간에도 군대란 곳이 참으로 분업이 철저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병원에서 여기까지 혜주를 데려오는 사람이 있고, 현관에서 이 곳까지 혜주를 데려오는 사람이 또 따로 있고, 여기서 이렇게 혜주를 맞는 사람도 또 따로 있다니. 이런 철저한 분업이 군대의 모든 사무에 통용되는 원칙인지 아니면 이번 사안이 워낙에 보안을 요하는 사안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김혜주씨, 앉으시죠."
소령은 혜주에게 명령 아닌 명령조로 말했다. 혜주는 자리에 앉으면서 옆에 앉은 과장에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과장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설명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소령이 혜주의 말을 받아채며 말했다. 혜주는 머쓱해져서 소령을 주목했다.
"일단 서로가 서로를 좀 알아야겠죠? 여기 계시는 분들은 이미 서로 인사를 하셨지만, 지금 오신 혜주씨를 위해 다시 소개를 하죠. 우선 저는 육군 본부 소속 이완규 소령입니다. 맡고 있는 일은 화생방 담당입니다."
소령은 혜주의 맞은 편에 앉은 파란 점퍼를 입은 40대 중반의 남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 계시는 분은 국립과학수사 연구소 부검팀장 박상호 씨입니다. 현재 국내에서는 최고의 법의학 실무자라고 할 수 있지요."
소령은 다시 혜주와 소령의 사이에 앉은 검은 코트를 입은 30대로 보이는 남자를 소개했다.
"이 분은 보건복지부 산하 전염병 대책 위원회 실무위원 김기수 씨이십니다. 비상시 각종 행정상의 대책을 마련하시는 데는 최고라고 들어 저희가 모셨습니다. 그리고 모두 아시다시피 최태식 과장님은 국립 서울대학교 부설병원 외과과장님이시며 폐에 관해서는 국내에서 가장 전문가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오신 김혜주 씨는 최과장님께서 특별히 추천하신 외과전문의이십니다."
혜주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소개에서 이미 뭔가 감을 잡았다. 전염병, 폐, 부검. 간단했다. 폐와 관련된 전염병이 발병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소령이 말을 이었다.
"일단 지금부터 간략하게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소령은 손에 쥔 작은 리모컨을 눌렀다. 그러자 방안의 불이 꺼졌다. 그리고는 혜주의 맞은 편 벽으로 빔프로젝트가 쏘아지면서 사진이 나왔다. 혜주는 그 쪽 벽이 스크린이었다는 사실조차 처음 알았다.
스크린에 나타난 사진은 끔찍했다. 일렬로 뉘어진 시체들. 흙바닥에 뉘어진 시체들은 농촌 아주머니 아저씨들로 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었고, 사진 끝으로 군화가 살짝 비쳤다. 소령이 다시 버튼을 누르자 다른 시체 사진들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끔찍했다.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진도 있었고, 그냥 죽어있는 사진도 있었다. 얼굴색이 푸르딩딩하게 변한 걸로 보아서 호흡곤란으로 죽은 사람을 연상시켰다. 네 번째 나온 갓 죽은 어린아이의 사진은 더욱 소름이 돋았다.
"상황 발생 지역은 강원도 곡성군의 진수 마을이란 곳입니다. 지금까지 마을 주민 24명 전원이 사망했고, 사인은 모두 호흡곤란을 수반한 폐출혈입니다. 전염병인지 아니면 모종의 테러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습니다. 지역은 준 군사지역인 관계로 현재 군에 의해 봉쇄되어있습니다."
"전염병이라면 사체를 수습한 군인들 중에서도 희생자가 있을 텐데요." 보건부 관리의 말이었다.
"네. 군에도 희생자가 있습니다. 현재까지 동일한 증세로 두 명이 사망했습니다."
"감염의 의심이 되는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문제는 감염의 증상 없이 바로 사망한다는 점입니다. 발병한지 5분 이내에 사망했습니다. 징후 따위는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화학 혹은 생물학적인 테러였든 전염병이었든 징후가 없다니요." 보건부 관리의 예리한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그 점이 저희로서도 의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앞으로 여러분들이 내려주셔야 합니다."
"저희가 현지로 파견되는 겁니까?" 부검팀장이 물었다.
"물론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빠지시고 싶으신 분은 지금 빠지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이 사안이 워낙에 민감한지라 모종의 조치가 가해질 겁니다."
"모종의 조치라면"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이 사태가 전염병에 의한 것일 경우입니다. 이 병이 전국으로 확산될 경우 국가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지난 중국에서 발병한 전염병의 경우에도 중국 경제는 거의 마비지경에 이르렀죠. 다행히도 이번 사태가 제한된 지역 안에서 벌어졌고, 게다가 그 지역이 준 군사지역이라 군에 의한 은밀한 통제가 가능한 실정이지만, 앞으로 사태가 확산된다거나 이 정보가 외부로 새어나갈 경우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몰려들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 경제가 뿌리 채 흔들릴 우려도 있습니다. 현재 정부는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종의 조치라는 것이 감금이군요."
"격리라고 해 두죠. 지금 작전에서 빠지시더라도 사태가 끝날 때까지 현재 계신 이곳에 격리 수용되실 겁니다. 하지만 이번 작전에 참여하셔서 사태가 성공적으로 수습된다면 여러분에게는 파격적인 보상이 제공될 겁니다."
"하지만 전염병에 걸려서 죽어버리면?" 부검팀장의 말이었다.
"그럴 경우에도 유가족에게는 응당의 보상이 제공될 겁니다. 국가는 현재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소령의 마지막 멘트는 진부하기 그지없었지만 다들 선뜻 거절하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난 참여하겠소."
먼저 말을 꺼낸 건 과장이었다. 과장의 성품다웠다. 과장은 말을 마치고 먼저 혜주를 쳐다보았다. 혜주는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된 이상 과장을 믿고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네. 저도 가겠어요."
혜주로서는 의사로서의 마땅한 희생 정신 이외에도 뭔가 계산된 바가 있었다. 성공리에 일이 끝났을 경우 국가가 제공해 줄 수 있는 파격적인 보상. 사안이 이토록 보안을 요하는 것이라면 일이 끝나고 난 후에도 참여했던 사람에게는 입을 막기 위한 조치가 필요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혜주 쪽에서 칼자루를 쥐는 셈이었다. 어떤 보상이든, 그것이 금전적인 것이든 개인의 지위에 관한 것이든 혜주가 원하는 만큼의 보상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살아서 돌아왔을 때의 일이지만.
"우리의 임무라는 게 가서 병의 확산을 막는 겁니까 아니면 병의 원인을 찾아내는 겁니까?" 보건부 관리가 확인하듯 물어보았다.
"당장은 발생지역이 고립된 까닭에 다른 지역에서 전염의 사례가 보고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로써는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주임무라고 해야 겠군요. 그러나 확산이 되고 있다는 증거가 나오면 병의 확산을 막을 방도도 생각을 해 주셔야 합니다."
소령의 대답을 듣고서 보건부 관리는 잠시 망설였다.
"나도 가겠소." 보건부 관리가 결국 세 번째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렇다면 나도 가긴 가야겠소만, 우리가 처음으로 파견되는 겁니까?" 부검팀장의 조심스런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소령의 대답이었다.
"그럼 아직 부검도 이루어지진 않았겠군요."
"네." 소령은 부검팀장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을 했다.
"그럼 다들 승낙을 하신 것으로 알고 바로 출발을 하도록 하지요."
"지금 바로 가나요? 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전 아무 것도 챙겨온 것도 없어서."
혜주가 갑작스런 출발이라는 말에 놀라 대답했다.
"필요하신 모든 것은 말만 하시면 현지로 조달될 겁니다. 일어나시죠."
네 명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갑작스런 출발이었지만, 사태의 긴박함으로 미루어보아 늦출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혜주는 오늘밤도 꼬박 새어야 한다는 사실이 약간은 부담스러웠다.
"참. 아직 말씀을 안 드렸군요. 이번 사태의 작전명은 '붉은방'입니다. 이는 작전지역을 일컫는 음어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작전에 투입되는 여러분은 음어로 '붉은손'이라 불리게 될 겁니다. 최연장자이신 과장님께서 '붉은손 둘'이 되셔서 팀장을 맡아주십시오. 그리고 나이순으로 박상호씨께서 '붉은손 셋'으로 불리실 꺼구요, 김기수씨께서 '붉은손 넷', 그리고 김혜주씨께서 '붉은손 다섯'이 됩니다."
소령이 함께 일어나며 넷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길로 혜주 일행은 지체없이 '붉은방'으로 향했다.
건물 앞에는 승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령과 일행은 승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에는 부사관 한 명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승합차는 다시 꼬불꼬불 바리케이트 사이를 뚫고 도로로 빠져나갔다.
혜주를 비롯한 네 명은 말이 없었다.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아마도 혜주의 머릿속과 별반 다르진 않을 것이었다. 과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하고 있는 일인가? 여기서라도 그만 빠지겠다고 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라도 감염이 되어 죽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 길이 이승을 달리는 마지막 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사태의 원만한 수습 뒤에 주어질 엄청난 보상에 대한 기대들로 가득할 것이었다. 부검팀장이라면 경찰 고위 간부직으로 승진할 수도 있을 것이요, 보건부 관리는 좀더 편한 부서의 장으로 승진이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혜주 역시 보건부의 폐암연구소에 평생 연구직을 보장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과장은? 과장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선뜻 이 일에 자원한 것일까? 혜주는 궁금증이 일었다. 과장 정도라면 이제 더 이상 뭔가를 얻기 위해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지 않아도 충분한 정도의 명성과 지위를 가지지 않았는가?
혜주는 과장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아마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지키는 몇 안되는 진짜 의사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혜주는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 나라에서 그런 희생 정신에 불타는 의사가 저토록 높은 지위까지 오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혜주는 언젠가 허준의 이야기를 읽은 생각이 났다. 혜주의 고향 밀양에 있는 얼음골에서 허준이 스승 유의태를 해부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정사에 따르면 사실은 아니라고 하지만, 암을 연구하는 데 자신의 몸을 제자에게 맡겼다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 그리고 스승을 해부한 제자 허준. 그런 의사들이 요즘 세상에도 있을까.
어릴 적 진규와 함께 의사의 꿈을 키우던 시절, 둘은 허준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읽고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었다. 우리도 커서 꼭 암을 고치자고. 그 때는 그런 순수한 열망만으로도 학문적인 성공뿐 아니라 사회적인 성공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생각해보면 천진난만했다고도 할 만 했다. 사회적으로 기반이 닦여있지 않으면 연구를 할 여유도 찾을 수 없는 게 혜주가 경험한 현실이었다.
혜주는 차를 타고 가면서 조금은 자 두려고 생각했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도무지 잠이 오지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과장은 무슨 생각을 골몰히 하는지 팔짱을 낀 채 내내 말이 없었다. 부검팀장은 몇 번이고 창 밖을 내다보면서 어디로 가는 중인지 가늠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창밖에 어둠이 짙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그는 습관적으로 창밖을 보았다. 아무래도 경찰 출신이라 경계심이 많은 듯 했다. 보건부 관리는 코트에 손을 찌르고 고개를 앞으로 약간 숙인 자세로 꼼짝하지 않았다. 눈이 작아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상체가 꼿꼿한 걸로 봐서는 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 역시 혜주처럼 잠을 청해보려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소령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앉아있었다. 마치 나머지 넷을 감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혜주는 어쩐지 이 기묘한 정적을 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가는 길에 읽을 만한 보고서 같은 거라도 준비해오지 않으셨어요?"
소령을 향한 말이었다.
"아직 상황이 초기 단계라 아까 제가 브리핑 한 내용 이외에는 보고된 바가 거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뭐 죄송할 것까지."
혜주는 딱 잘라 말하는 소령의 말투가 어쩐지 미덥지가 못했다. 어쩌면 막무가내로 일에 끌려들어올 때 자신을 데려왔던 두 사내 역시 군대식 말투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군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다들 각자가 맡은 부분에 관한 정보밖에 알지 못하므로 자연적으로 자신의 업무가 아닌 부분은 감추어지는 것이었다.
오르막을 한참 꼬불꼬불 올라가던 차가 비포장으로 들어섰다. 어차피 눈을 붙이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혜주였지만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수시로 엉덩이가 의자에서 들썩거렸다. 승합차로 이런 포장도 되지 않은 산길을 올라가다니.
앞 유리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듯 했다.
'이제 도착한 걸까?'
혜주는 오른손으로 안경을 치켜올리며 전방을 주시했다. 어둠 속으로 아까 본 것같이 생긴 노란 바리케이트가 보이는 듯 했다. 차가 속력을 줄이며 다가가자 바리케이트 앞에는 초병이 총을 들고 서 있고, '정지'라는 램프가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차가 바리케이트 앞에 서자 램프는 '라이트 꺼'라고 바뀌었다. 승합차의 라이트가 꺼지자 형광조끼를 입은 초병의 모습이 선연히 드러났다.
초병은 뚜벅뚜벅 차 쪽으로 걸어왔다. 운전석에 있던 부사관은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충성!"
초병은 부사관을 보자 먼저 경례를 붙였다. 영화에서처럼 총을 겨누고 암호를 교환하는 모습은 없었다.
혜주는 초병이 혼자 뿐인데 저 거대한 바리케이트를 어떻게 치우고 차가 들어가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혜주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지만, 함께 내려서 바리케이트 치우는 일을 도와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 소령이 승합차의 옆문을 열었다.
"내려서 차를 갈아타시죠."
'아, 차를 갈아타는 구나.' 혜주는 자신이 잠시지만 정말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이 산길을 승합차를 타고 계속 들어간다는 발상도 웃긴 것이었다.
네 명은 별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보안을 위해 휴대폰과 같은 외부와의 연락 수단을 압수하겠습니다."
초병은 군인다운 말투로 말했다. 소령이 내내 넷을 감시한 것도 혹시 외부로 전화를 할까봐서 그랬건 것이었을까?
"이해해 주시죠. 여기부터는 작전지역입니다."
넷 중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지만 소령은 그렇게 거들었다. 과장과 혜주 일행은 군말 없이 핸드폰을 꺼내 끄고는 초병에게 주었다. 초병은 바지에 달린 건빵주머니에서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를 꺼내 넷의 휴대폰은 담았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죄송하지만 확인을 위해 몸수색을 하겠습니다. 양팔을 들어올려 주십시오."
초병은 다시 한 번 넷에게 말했다. 혜주 일행은 멋쩍은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해해 주십시오." 소령이 다시 한 번 거들었다.
혜주는 자신이 여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약간은 불쾌해졌다. 과장과 부검팀장, 그리고 보건부 관리의 순으로 몸수색을 마친 초병이 혜주의 앞에서는 약간을 망설인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었다. 초병은 혜주가 불쾌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수색을 마쳤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병은 딱딱하게 자신의 임무를 마쳤음을 보고했다.
소령은 몸수색을 끝낸 네 명을 이끌고 바리케이트를 옆으로 돌아서 지났다. 그러자 약간 멀리의 어둠 속에 군용 지프차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넷은 습기 찬 산 특유의 밤공기를 뚫고 지프 쪽으로 갔다. 지프에는 따로 운전병이 있는지 승합차를 운전해 온 부사관은 내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승합차를 다시 왔던 곳으로 운전해 갈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다.
지프차는 6인승이었다. 얼룩덜룩한 위장무늬가 칠해지긴 했지만 시중에서 판매되는 국산 지프차 그대로였다. 과장을 비롯한 혜주 일행은 모두 뒤쪽으로 탔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소령은 타지 않고 말했다. 다들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그들은 소령도 당연히 함께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령도 함께 가시는 것 아니었소?" 과장이 물었다.
"아닙니다. 제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 여기부터는 '붉은손 하나'의 지휘를 받으실 겁니다. 그럼 무사히 일을 끝마치시기를 빌겠습니다."
소령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문을 닫아버렸다. 혜주는 어이없다는 생각과 함께 군인은 다 거짓말쟁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소령과 짜기라도 한 듯 운전석에 앉아있던 상병의 계급장을 단 병사는 차를 출발시켰다. 이별의 말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지는 소령의 모습이 뒷문 너머로 보였다. 그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차를 향해 경례를 붙이고 있었다.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군인이 탄 것도 아닌데 그는 도대체 무엇을 향해 경례를 한 것일까?
6.
지프차는 한참을 달렸다. 넷은 소령의 감시가 없어졌어도 서로 말이 없었다. 보건부 관리와 과장은 서로 안면이 있을 법도 했지만 서로 말하기가 서먹한 듯 했다. 혜주와 과장 역시도 서로 무슨 말을 할 법도 했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물론 혜주가 먼저 말을 꺼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혜주가 묻고 싶은 말은 이런 거였다.
"과장님, 왜 저를 끌어들이셨어요?"
하지만 그 말을 이 자리에서 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물어보지 않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과장이 먼저 혜주에게 설명을 할 법도 했지만 과장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차 앞으로 희한한 형상이 보였다. 우주인 같은 복장을 한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화생방 차단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상한 기계가 놓여있었다.
지프차는 그 앞으로 와서 섰다. 그러자 화생방이 다가와서 경례를 붙였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상병은 차의 네 개 문을 모두 열었다. 혜주는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곧 알게 되었다.
화생방은 조수석 쪽으로 다가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화생방은 무엇을 실례하는지 말하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차안에 호스의 끄트머리 같은 것을 집어넣었다. 옆에 있던 이상한 기계에서 뻗어 나온 호스였다. 그리고는 그 끝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콜록콜록. 네 명은 기침을 했다. 별로 독하지 않은 소독연기였다. 하지만 예고도 없이 차안에 연기를 뿜어버리자 순식간에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혜주는 아무런 통보도 없이 연기를 뿜어버리는 군인들이 너무나 무례하게 느껴졌다.
"뭐하는 짓이오!"
부검팀장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아무런 해명도 사과도 없이 연기만이 서서히 사그라 들었다. 연기가 어느 정도 가시고 나자 덜컹하고 차가 출발하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 속력을 내면서 운전을 하는 상병은 연기가 다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창문을 닫았다.
"죄송합니다. 대대장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작전지역에서는 누구나 구역을 통과할 때마다 소독을 해야합니다."
네 명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차에 몸을 맡겼다.
"저기 보이는 저 건 뭡니까?"
습관적으로 창 밖을 기웃거리던 부검팀장이 입을 열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검은 밤하늘에 희뿌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뭐 말씀하시는 겁니까?" 운전을 하느라 한 눈을 팔 수 없는 상병이 되물어왔다.
"왼편에 보이는 연기 말이오." 과장이 부검팀장 대신으로 설명을 했다.
"아, 그건 시체를 소각하는 연기입니다."
"소각? 아직 원인이 구명되지도 않았다면서 막무가내로 소각을 하는 겁니까?" 과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대대장님 명령입니다."
상병은 속 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일 것이었다.
"그 대대장이라는 사람 좀 만나야겠군."
과장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상병이 그 말을 들었는지 대꾸를 해왔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대대장님께서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그리로 가는 중입니다."
네 명은 궁금증과 안도가 섞인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대대장이라면 이른바 '붉은손 하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이런 위험한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투철한 군인정신을 가진 사람일까? 아니면 그 역시 사태수습 이후에 뭔가 엄청난 보상을 약속 받은 것일까? 아마도 차에 타고 있는 네 명처럼 그런 심정들이 복잡하게 섞여있는 상태일 것이었다.
차가 몇몇 천막 막사가 마련되어있는 공터에 이르렀다. 군용천막으로 만들어진 막사라 어둠에 섞여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너댓개 정도 되는 것 같아 보였다. 차는 막사가 모여있는 입구에 정차하고 시동을 껐다.
총을 든 군인 한 명이 다가왔다. 젊은 중사였다. 그는 과장의 옆에 있는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행은 차에서 내려 중사를 따라갔다. 중사는 두 번째 막사 쪽으로 걸어갔다. 막사 앞을 지키고 있던 초병이 경례를 붙여왔다. 중사는 경례도 받지 않고 막사의 문을 열었다.
"충성."
"어, 그래. 왔나?" 안쪽에서 약간 칼칼한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에 고함을 많이 치는 사령관이라는 인상이 풍겼다.
"들어오시라고 해."
"네."
중사는 일행을 향해 뒤쪽으로 돌아섰다.
"들어오시죠."
과장을 선두로 일행은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막사 안에는 중령 계급장을 단 대대장이 서서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시오. 거기 의자에 앉아요."
한 쪽에 마련된 테이블과 의자를 가리키며 대대장이 말했다. 중간키에 약간 마른 듯한 그는 딱히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지는 않았지만 눈매만은 날카로웠다. 나이는 50대 정도로 보였지만 얼굴이 검게 탄 까닭에 늙어 보이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더 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행은 테이블 쪽으로 가서 각각 의자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았다. 대대장도 남은 의자 하나에 앉았다. 테이블까지 마련된 막사는 사령관의 그것답게 나름대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소각을 지시하신 것이 중령입니까?"
다짜고짜 과장이 물었다. 원래부터 직설적인 성격이긴 했지만 혜주는 약간 놀랐다. 딱딱한 병영의 분위기에 혜주는 어느 정도 압도되어 있었던 까닭이었다. 역시 과장은 남다른 면모를 지니기는 했다.
"아, 그것 말이오? 그렇소. 내가 지시했소. 마침 버섯 재배하던 건물이 소각하기도 좋고 해서." 약간은 공격적인 과장의 질문에 대대장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아직 사태의 원인도 밝혀지지 않은 마당에 그렇게 아무렇게나 처리해도 되는 겁니까?"
과장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아까보다 훨씬 공격적인 질문이었다. 마치 문책을 하는 듯한 인상마저 풍겼다. 혜주는 '아직 사태의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렇게 처리해도 괜찮을까요?'하는 식으로 좀 더 공손하게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차피 내뱉어진 말이고, 게다가 넷 중의 팀장은 과장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염병이 퍼지는 데에는 소각하는 게 최상이오. 사람을 묻어놓으면 들쥐가 파먹어서 병균을 옮긴단 말이야."
대대장은 역시 아무렇지 않게, 심지어는 얼굴에 웃음마저 띠면서 대답했다. 사실 대대장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물론 전염병이라는 가정 하에 말이지만.
"하지만 전염병인지 어떤지도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이렇게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이게 전염병이 아니면 뭐겠소? 하루에 사람이 하나씩 죽어나가고 있단 말이야. 시체는 발생하는 즉시 소각시키라는 명령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오."
대대장의 퉁명스런 대답이었다.
"그럼 군이 이 곳을 관할한 게 이틀 밖에 되지 않는 건가요?"
혜주가 과장과 대대장의 다툼을 끊을 겸해서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거의 일주일이 되었지."
"하지만 죽은 사병은 둘 뿐이라고 하던데요?"
"그럼. 사병 둘. 내 피 같은 부하들이 죽었지. 그리고 일차로 왔던 붉은손 네명."
넷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일차로 왔던 붉은손? 분명 소령은 자신들이 처음으로 투입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린 우리가 처음인 줄 알고 왔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과장이 놀라운 침착성으로 물었다.
"그래요? 허, 거 참. 나야 외부에서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지 알 수가 있나. 어쨌든 그랬다니 유감이오. 뭔가 본부에서 행정상의 착오가 있었나보지."
대대장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마치 혜주 일행을 놀리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우릴 속였어!" 부검팀장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제 와서 어쩌겠소." 보건부 관리가 체념하듯 부검팀장을 달랬다.
"부검을 할 시신은 남겨두시고 소각하신 겁니까?"
과장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 혜주는 다시 한 번 과장의 과감성에 놀랐다. 이 사람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이 분하지도 않은 걸까? 아니면 혹시 과장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온 것이 아니었을까? 혜주는 과장이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 자신을 끌어들였을 리는 없다고 믿으려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약간의 의심이 남았다.
"글쎄. 남아있는 시신이 있을까? 아마 없을 꺼요. 희생자가 생겨나는 족족 태워버렸으니."
"그런 무책임한 대답이 어디 있소!"
과장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화가 폭발하는 듯 한 수준이었다. 실지로 무책임한 대답이기는 했으나 과장을 제외한 혜주와 나머지 둘은 과장의 따끔한 말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생각에 이미 자신들의 임무는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과장의 질책이 혜주 자신에 대한 질책인 듯 느껴졌다. 혜주는 다시 자신의 막중한 임무를 상기했다.
'그래, 우린 생명을 구하러 여기에 온 거다.'
혜주는 속으로 되뇌이는 순간 자신이 좀 덜 계산적으로 바뀌었다고 느꼈다.
대대장은 과장의 언사에 기분이 틀어졌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과장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자신의 감정을 수습하는 듯 입을 아래위로 다물었다. 그리고는 군인 특유의 냉정함을 되찾고 대답을 했다.
"내가 무책임하다고 했소? 아무도 내게 무책임하다는 말을 할 자격은 없소. 알겠소? 아무도. 왜냐고? 내가 아니면 아무도 여기 이 자리에 있지 않을 테니까. 아무도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자신의 조국을 수호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야전이 뭔지, 전쟁이 뭔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게 뭔지도 모르는 기생 오래비 같은 젊은 장교들은 하나같이 몸을 사리고는 도망쳐버리고, 나만 여기 지휘관으로 남아서 바로 이 곳을 지키고 있는 거요. 알겠소? 내가 목숨을 걸고 이 곳을 지키고 있는 거라고! 내가! 하루에 한 명씩 죽어나가고 있는 이 곳을 내가 지키고 있어!"
말을 하는 동안 대대장은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 과장을 포함한 혜주 일행은 대대장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대대장도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는 듯 다른 곳을 쳐다보며 말을 하지 않았다. 막사 내에는 일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대대장의 말 알겠습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과장이 조심스럽게 사과의 말로 정적을 깼다. 대대장은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괜찮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어쨌든 체계적인 대처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검을 통해 병의 원인을 알아낼 필요가 있구요."
"부검은 걱정 마시오. 곧 희생자가 생길 꺼요. 하루에 한 명씩 죽어나가고 있으니까. 일단 오늘은 마련된 숙소에서 쉬도록 하시오. 숙소는 원래 폐가이던 곳을 치워놓았소. 나야 군인이니까 이런 천막 막사에서 지내도 과장 일행은 숙녀 분도 끼어있으니 잘만한 데서 자야지 않겠소."
혜주는 자신을 위해 숙소를 마련했다는 말에 어쩐지 자신이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짐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들어올 때 몸수색을 할 때도 그렇고.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내선 전화의 벨소리는 귀청을 때릴 정도로 컸다. 대대장은 일어나서 뒤쪽에 있는 책상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 어디? 3중대? 알았어. 잠깐."
대대장은 전화를 끊지 않은 채 한 손으로 수화기의 송화구를 막고 일행에게 물었다.
"희생자가 발생했소. 지금 부검을 할거요?"
일행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금 합시다. 그래야 정확한 사인을 알 수 있지 않겠소." 과장이 먼저 말했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할겁니다." 과장이 대대장을 향해 알려주었다. 막 죽은 시신의 부검이라. 혜주는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죽은 시신의 해부도 수없이 해보았고, 살아있는 사람의 수술도 많이 해 봤지만 이제 막 죽은 시신의 해부를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놈 태우지 말고 놔둬. 부검해야 하니까."
대대장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밖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봐!"
"상병 최정태!"
문 앞에 서 있던 초병이 크게 관등성명을 대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 분들 7구역으로 이동시켜."
"네 알겠습니다."
대대장은 혜주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어나셔서 제 7구역으로 이동하시죠. 그리고 내일 아침에 다시 뵙겠습니다."
과장과 일행은 일어나서 머뭇거리며 초병을 따라 막사를 나섰다. 대대장은 밖으로 배웅조차 나오지 않고 그들을 보냈다.
7.
차는 바리케이트 앞에서 정차했다. 창문이 내려지고 화생방이 다시 호스를 꽂았다. 차안은 이내 연기로 가득 찼다.
"젠장. 이제 도대체 몇 번째야!"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부검팀장의 불평이 터져 나왔다. 구역을 이동할 때마다 소독을 하는 탓에 차로 이동을 하는 채 30분이 되지 않는 시간에도 벌써 다섯 번째 소독을 하는 중이었다. 짜증이 나는 건 혜주도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은 느낌일거라고 위안하면서 참는 중이었다. 물론 계속 반복하다보니 연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것도 있었다.
차가 출발하면서 운전을 하던 상병이 부검팀장의 불평에 대한 사과라도 하듯 알려왔다.
"이제 다 도착했습니다."
그리고는 차가 멈추었다. 주위로는 군용 구급차 한 대가 서 있고, 화생방 복장을 한 군인들이 세네명 서 있었다. 일행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화생방 중 한 명이 일행에게 다가왔다.
"보호복을 착용하시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방독면의 울림판을 통과해서 나왔다. 마치 우주인처럼 온 몸을 감싼 그 복장을 혜주 일행도 착용하겠냐는 물음이었다.
"그런 복장으로 부검을 할 수 있을까요? 움직임이 둔해져서 힘들겠는데."
부검팀장의 말이었다. 아무래도 부검을 주도해 나갈 사람이 그인 만큼 그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전도 생각지 않을 수 없지 않소. 앞서 온 네 명이 일주일 만에 죽었다는데."
보건부 관리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리고는 동의를 구하듯 나머지를 둘러보았다. 혜주는 자신의 생각은 뒤로 한 채 과장을 쳐다보았다. 과장이 팀장인 만큼 과장의 생각을 따를 참이었다.
"전에 왔던 부검팀은 보호복을 착용하고 부검을 했나요?"
과장은 화생방에게 물었다. 화생방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처음에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는 착용을 했죠."
"보호복이 효과가 있었나?"
"그건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난 입지 않겠네. 빠른 부검을 통해서 병의 원인을 밝혀내는 게 우선이니까. 거추장스러운 복장으로 부검을 할 수는 없네. 난 마스크와 위생복, 그리고 위생장갑만 준비해 주게."
과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혜주는 과장의 결단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혜주도 과장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저도 입지 않겠어요."
"난 아무래도 부검을 집도해야 할 사람이니 그런 거추장스러운 옷은 입지 않는 게 좋겠소."
부검팀장도 그렇게 거들고 나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보건부 관리도 어쩔 수 없이 보호복을 착용하지 않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보건부 관리의 얼굴에는 내심 불안해하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부검하실 시신은 저쪽 임시 막사 안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화생방은 뒤편으로 보이는 천막으로 된 막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화생방 복장을 한 군인 두 명이서 구급차에서 전선을 풀어 막사 쪽으로 끌고 갔다. 전등을 켤 전력을 차에서 끌어다 쓰려는 것 같았다.
화생방 한 명이 구급차의 문을 열고 위생복 네 개와 마스크 네 개, 그리고 위생장갑 네 켤레를 가지고 왔다. 혜주 일행은 서둘러 복장을 갖추었다.
"부검에 필요하신 모든 장구는 막사 안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화생방은 친절하게도 옷을 입고 있는 일행에게 알려주었다. 이 곳으로 이동하는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잠깐. 사망한 지 30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죠?"
부검팀장이 화생방에게 물었다.
"네. 연락 드린 그 때 사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시신의 혈액이 아직 응고되지 않아 부검할 때 피가 많이 튀겠는 걸? 특히 전기톱을 쓰게 되면."
부검팀장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럼 보호복을 입고 부검을 하는 게 어떨까요?"
보건부 관리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안을 했다. 부검팀장은 과장을 쳐다보았다. 의견을 묻는 눈치였다.
"전기톱을 쓸 경우에는 방독면을 쓰고 하도록 하죠."
과장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부검팀장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보건부 관리는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넷은 복장을 갖추고 막사로 향했다.
화생방은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 아래에 늘어져 있는 코드를 꽂았다. 그러자 막사 안 천정 중앙부에 설치되어있는 수술용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전등 아래에는 흰 천에 덮여 있는 시신이 누워있었다. 천에 가려 아직 시신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건장한 군인일 것이었다. 혜주는 눈으로 어림해서 시신의 키를 재어보았다. 180센티미터가 넘어보였다.
화생방은 막사 한 쪽에 있던 부검 용구가 가득 놓여있는 테이블을 시신 가까이로 끌고 왔다. 과장은 화생방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이제 나가봐도 돼요. 부검은 우리가 실시할 테니까."
"아닙니다. 부검 전 과정을 지켜보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화생방은 그렇게 말하고는 막사 한 쪽으로 물러섰다.
"부검은 1시간 안에 끝내셔야 합니다." 화생방은 한 쪽에 서서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과장이 의아스런 말투로 되물었다.
"1시간이라뇨?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시신은 사망 이후 두 시간 안에 무조건 소각해야 합니다. 대대장님 명령입니다. 시신이 사망한 지 30분이 지났기 때문에 부검은 한 시간 안에 끝내셔야 저희가 시신은 소각장까지 운반해서 총 두 시간 안에 소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대장에게 말하겠소. 시간은 넉넉히 하도록 해요."
"이미 대대장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일은 없도록 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과장은 불쾌한 표정으로 화생방을 쳐다보았다. 나머지 셋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소. 그 중령이라는 사람 말이 통하는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그냥 빨리 부검을 끝내도록 하죠."
부검팀장이 과장에게 달래 듯 말을 했다. 과장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부검에 들어갈 태세를 취했다. 시간이 제한된다면 1초라도 먼저 부검에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부검팀장은 시신 위에 덮여있는 흰 천을 걷었다. 그러자 나체의 남자 시신이 그대로 환한 불빛에 드러났다.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피부색도 거의 변화가 없었다.
부검팀장은 메스를 들어 시신의 목 아래부터 서서히 절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손에 힘을 주어 깊숙이 살을 갈랐다. 아직 응고되지 않은 피가 절개부위에서 스며져 나왔다.
혜주는 자꾸만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혜주 역시 수술을 위해 환자의 가슴 부위나 복부를 절개해 본 경험이 많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마취된 환자였다. 게다가 지금 부검팀장은 목 아래부터 해서 사타구니 바로 위까지 일자로 절개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일반 외과수술에서 이토록 광범위하게 절개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부검팀장의 손에 쥐어진 메스가 시신의 사타구니에까지 다다랐을 때에는 갑자기 시신이 살아서 벌떡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죽은 지 30분밖에 되지 않은 시신이라도 어느 정도 근육의 경화가 일어났는지 부검팀장의 얼굴에는 땀까지 흘렀다. 그는 세로로 절개를 마치자 이번에는 가로로 절개를 시작했다. 부검을 마치고 시신을 원상복구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아예 십자로 상체 모두를 개복해 버리려는 듯 했다. 어쩌면 시간을 아끼는 데는 그것이 최선의 방도인 지도 몰랐다.
거의 20분이나 걸려서 절개를 마치고 피부를 사방으로 들어내어 고정시키자 내부 장기가 모두 드러났다. 복부에는 거의 아무런 이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폐경색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아 원인을 찾으려면 폐를 절개해 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폐 절개는 내가 하겠소."
과장이 부검팀장에게 말했다. 부검팀장은 별 말없이 메스를 넘겨주었다. 그로서도 약간의 휴식이 필요한 터였다. 게다가 폐에 관해서라면 과장이 최고의 전문가였으므로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과장은 좌측부터 폐를 절개하기 시작했다. 폐는 피가 응고되어 갈색으로 변해있었다. 폐에 출혈이 일어난 것이 직접적인 사인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조직을 떼어서 정밀검사를 해봐야겠죠?"
과장은 혜주를 보며 물었다.
"네. 육안으로 봐서는 심부전으로 인한 폐울혈과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는데요?"
혜주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때 뒤에 서서 부검을 지켜보고 있던 화생방이 불쑥 끼어들었다.
"현미경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보시죠. 조직을 외부로 유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발병자의 시신의 전 부위는 소각하게 되어있습니다."
"무슨 말이요? 폐조직을 떼어서 보관하는 것도 안 된단 말이오?"
과장은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대대장님 명령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무슨 수로 사태의 원인을 밝혀낸단 말이오? 내가 대대장에게 이야기를 좀 해야겠소. 통신병을 좀 연결시켜 주시오."
"대대장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지난 번 부검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씀드려도 소용없을 겁니다. 원칙은 바꿀 수 없습니다."
화생방은 단호히 과장에게 말했다. 혜주와 과장은 어이가 없었다.
"왜 지난 번 부검팀이 원인을 밝히는 데 실패했는지 알 것 같군요."
혜주는 과장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과장은 혜주의 말에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그럼 한 쪽에서 과장님과 혜주씨가 현미경으로 폐조직을 관찰하시죠. 그동안 제가 시신의 두개골을 절개하겠습니다."
부검팀장의 말이었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놓인 전기톱을 들었다.
"그렇게 합시다."
과장은 오른쪽과 왼쪽 폐의 조직 약간을 메스로 떼어내었다. 그리고는 혜주와 한 쪽에 마련된 현미경으로 이동했다.
"전기톱에 전원을 좀 연결해줘요."
부검팀장이 화생방에게 말했다. 화생방은 말없이 전기톱에서 나온 전선을 가지고선 문 앞에 놓은 콘센트에 꽂았다.
지잉. 지잉.
부검팀장이 전기톱에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자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방독면 좀 가져다줘요."
부검팀장이 다시 화생방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자 화생방이 문 쪽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방독면 가져와!"
곧 화생방 복장을 한 다른 군인 한 명이 목까지 비닐커버가 달려있는 방독면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부검팀장은 방독면을 쓰고 시신 쪽으로 다가갔다.
"피가 튀니까 옆으로 비켜서요."
부검팀장의 목소리가 방독면에 달린 울림판을 통해 퍼져 나왔다. 할 일이 없어 시신 옆에 서 있던 보건부 관리가 슬그머니 화생방 옆으로 물러났다. 그는 혜주와 과장이 붙들고 있는 현미경 옆에도 갈 필요가 없고 시신 옆에 서 있을 수도 없어 멀뚱해졌다.
지이이이잉.
전기톱의 톱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부검팀장은 전기톱을 서서히 시신의 두개골 중앙부로 가져갔다. 현미경에 집중해 있던 혜주도 그 모습을 힐끗 아니 볼 수 없었다. 외과의로서 수술도 많이 해 봤지만 두개골을 통째로 써는 부검 장면은 아직 본 적이 없었다.
사방으로 피가 튀면서 전기톱이 두개골을 파고 들어갔다. 과장의 옷까지 피가 몇 방울 튀었지만 과장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는데 집중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보건부 관리는 비위가 상하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화생방은 방독면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만큼의 호기심으로 부검을 바라보고 있겠지만.
보건부 관리는 슬그머니 혜주 쪽으로 오더니 뭐라고 말을 했다. 전기톱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손짓을 보아하니 밖에 잠깐 나갔다 들어오겠다는 말인 것 같았다.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혜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건부 관리가 문을 나설 때에도 화생방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두개골을 절단하고 있는 부검팀장을 쳐다보았다. 혜주 역시 그의 톱질 솜씨에 나름대로 감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아무도 과장이 폐조직의 일부를 위생장갑 안쪽으로 슬쩍 집어넣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8.
과장과 혜주 일행은 막사 앞에 서서 서로의 견해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뒤로는 걸레가 되다시피 갈가리 찢기어진 시체를 화생방 복장을 한 군인 둘이 옮기고 있었다.
"난 도저히 모르겠소."
부검팀장이 맥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머지 세 명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보건부 관리야 어차피 의학적인 전문가가 아니고 부검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바도 없었기 때문에 병의 원인에 대해 이렇다 말할 처지가 못되지만, 혜주와 과장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워낙에 짧은 부검시간에 자세히 연구를 해 볼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해도 전혀 사인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외부의 원인균에 의한 사망일까요?"
혜주가 말을 꺼냈다. 과장은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서 있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겠지. 바이러스이든 혹은 화생방 테러에 의한 것이든, 뭐든."
과장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숙소로 이동하시죠."
뒤에서 화생방이 일행에게 알려왔다. 일행은 마스크와 위생복 그리고 위생장갑을 벗었다.
부검팀장의 바지에는 잔뜩 피가 묻어있었다. 전기톱을 쓸 때 생각보다 피가 많이 튄 모양이었다. 그는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투덜거렸다.
"필요한 물품은 모두 조달될 거라고 했으니 새 바지를 하나 가져다 달라고 하시죠."
보건부 관리가 부검팀장에게 말했다.
"누구에게 말하면 되지?"
부검팀장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화생방이 다가와 대답했다.
"제게 말씀하시죠. 제가 연락을 해 놓겠습니다."
"그럼 우리 모두 갈아입을 옷이 필요하니까, 일단 옷을 좀 가져다 달라고 하죠."
"신체 사이즈는?"
화생방이 되물었다. 다들 먼저 대답을 하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면서 머뭇거렸다.
"그러지 말고 각자의 집에 가서 옷을 가져오면 되지 않겠나? 충분히 가져올 수 있을 텐데."
과장의 말이었다. 다들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이야. 내 아파트에 가면 내 개인용 전자 현미경이 있어. 그걸 좀 가져다 달라고 하고 싶은데. 다음 부검에 쓸 수 있도록."
과장이 말을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화생방은 과장에게 대답을 한 후 한 쪽으로 걸어가서 무전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소리로 뭐라고 무전을 날렸다. 그리고는 다시 이쪽으로 걸어왔다.
"일단 차에 타시죠. 숙소는 제1구역에 있습니다."
넷은 피에 젖은 위생복과 위생장갑, 마스크를 옆에 서 있던 화생방에게 건네어 주었다. 화생방은 큰 비닐 봉지에 네 명의 그것을 몽땅 담고는 시신이 실려 있는 차 뒤에 훌쩍 던져 넣었다. 시신과 같이 소각을 할 작정인가 보았다.
넷은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 서로의 의견을 교환해 보려고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았다. 워낙에 차의 소음이 큰데다가 산길을 덜컹거리며 가는 바람에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거의 6∼7분 간격으로 차안에 뿜어지는 흰 소독 연기 때문에 눈을 못 뜰 지경이었다.
보건부 관리는 지졌는지 고개를 시트 위로 젖힌 채 졸고 있었고, 부검팀장은 뭐가 불만인지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장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혜주는 창 밖을 보며 해부를 당한 청년을 생각했다. 그렇게 온 몸이 너덜너덜해지고 머리통이 반으로 쪼개진 채 소각되고 말겠지? 생각해보면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보호자에게는 어떻게 이 사실을 알릴까? 물론 사실 그대로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분명 뭔가 둘러대겠지. 비무장지대 수색에 나갔다가 지뢰를 밟았다던지 하여튼 뭔가 그럴듯한 핑계를 대어 가족들에게 전사를 알릴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렇게 된다면 국가유공자로 인정은 받게 될 터였다.
"혜주씨."
혜주는 자신의 귓가에 조용히 울리는 과장의 음성에 깜짝 놀랐다. 과장은 혜주에게 귓속말을 해 왔다. 둘러보니 보건부 관리와 부검팀장은 지쳐 곯아떨어져 있었다.
"혜주씨. 좀 있다 숙소에 도착하면 나와 잠시 이야기 좀 해요."
"네 과장님." 혜주는 역시 조용히 대답했다.
이윽고 차는 제1구역에 다다랐다. 차가 멈추자 부검팀장은 용케 잠에서 깨어났다. 역시 경찰 출신다운 긴장감이 몸에 밴 사람 같았다.
"다 온 거요?" 부검팀장이 운전을 하던 상병에게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내리십시오."
부검팀장은 도착을 확인하자 옆에 앉아있던 보건부 관리를 깨웠다.
"이봐요. 도착했소."
보건부 관리는 비몽사몽으로 깨어나더니 차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린 혜주는 쌀쌀함을 느꼈다. 부검을 할 때 흘린 땀이 말라서 그런지 더 추웠다. 시간을 알고 싶었지만 시계가 없었다. 늘 핸드폰을 가지고 다녀서 손목시계를 따로 차지 않는 까닭이었다.
"몇 시죠?"
혜주가 상병에게 물었다. 상병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더니 대답했다.
"공사시 삼십오분입니다."
혜주는 자신이 벌써 이틀 밤을 꼬박 새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조금이라도 자 두어야 할텐데. 하지만 지금 잠이 들어도 두 시간도 못 잘 것이었다. 게다가 과장이 따로 이야기를 하자고 하였으니 아마도 오늘밤도 잠을 자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는 저 위쪽에 있는 건물입니다."
상병이 어둠 속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오르막길이 보이고 숲에 가려진 지붕이 보였다.
"따라오시죠."
상병이 먼저 올라갔다. 넷은 상병을 따라 길을 올라갔다.
숲은 더욱 어두웠지만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어느 정도는 앞이 보였다. 별로 길지 않은 오르막길이었지만 혜주는 힘들게 올라갔다. 상병은 군화도 신었고, 이런 산길을 다니는데 익숙한 군인이어서 그런지 빠르게 걸어 올라갔다. 부검팀장도 어느 정도는 잘 올라갔지만 과장과 보건부 관리는 영 발 딛는 폼이 어설펐다. 하이힐을 신은 혜주는 거의 중심을 잡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상병은 빨리 올라가다가 자신이 너무 빠르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서서 일행을 기다렸다.
맨 마지막에 올라오는 혜주가 자꾸만 늦어지는 바람에 일행은 앞으로 가지를 못했다. 과장이 혜주의 손을 잡아주었지만 혜주는 자꾸 발이 미끄러졌다.
지켜보고 있던 상병이 보다 못해 혜주 쪽으로 다시 내려왔다.
"제 손 잡으십시오."
혜주는 상병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여기 제 발이 딛는 곳을 그대로 따라 딛고 오십시오."
상병은 혜주의 손을 자신의 뒤로 잡고 천천히 한발씩 올라갔다. 평평한 부분만 골라서 발을 딛는 그의 모습이 혜주에게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혜주는 앞서 가는 상병의 발만 보면서 그가 디뎠던 자리를 그대로 디디면서 올라갔다. 처음보다 훨씬 빠르게 올라갈 수 있었다.
얼마 올라가지 않아 집과 마당이 나왔다. 혜주는 집의 윤곽을 보자 다 왔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어졌는지 발을 헛디뎠다.
"엄마!"
혜주가 넘어지려 하는 순간, 상병이 혜주의 팔을 확 끌어당겼다. 덕분에 혜주는 넘어지지 않았지만 대신 상병의 품안으로 와락 안기고 말았다. 혜주는 중심을 찾고는 황급히 상병의 몸에서 떨어졌다.
"고, 고마워요." 혜주는 겸연쩍게 말했다.
"아닙니다."
상병도 뭐가 부끄러운지 혜주를 쳐다보지 못하고 대답했다.
상병을 포함한 일행 다섯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한 쪽에서 검은 그림자 둘이 퍼뜩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혜주는 순간 깜짝 놀랐지만, 자세히 보니 일어선 그림자 쪽이 더 놀란 것 같았다.
"뭐야 이 새.끼들아!"
상병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혜주는 좀 전보다 더 놀라서 움찔했다.
"충성!"
일어선 두 명의 그림자가 황급히 상병을 향해 경례를 붙였다. 그러면서 한쪽 발로는 담배를 비벼 끄고 있었다.
"보초 안 서나! 어쭈, 총은 어쩌고?"
상병이 무섭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보초 두 명은 옆에 내려놓았던 총을 황급히 들고 주섬주섬 어깨에 매었다.
"너희 개새.끼들, 내일 아침에 두고보자. 알겠어!" 상병이 무섭게 소리를 질렀다.
"네 알겠습니다."
보초 두 명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혜주는 상병이 친절한 군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고쳐먹었다. 그도 군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서운 사람이 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 분들 주무실 수 있도록 해 드려."
"네 알겠습니다."
상병은 그들을 다시 한 번 쏘아보고는 먼저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 버렸다.
"충성!"
두 명은 내려가는 상병을 향해 받아주지도 않는 경례를 했다. 그리고는 상병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후, 하는 한 숨 소리가 들렸다.
"우린 어디서 자는 건가?"
과장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물었다.
"안에 방이 네 개 마련되어 있습니다. 각자 사용하고 싶으신 방을 골라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뒤쪽에 수도가 있어서 간단하게 씻으실 수 있습니다."
보초 중 한 명이 풀이 죽은 목소리도 대답했다.
집은 가운데 복도 같은 마루가 있고, 양쪽에 방이 두 개씩 달려있었다.
"나와 혜주씨가 오른쪽 두 방을 쓰고, 두 분이 왼쪽 두 방을 쓰도록 하시죠. 그리고 오늘 부검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 다시 하도록 합시다. 다들 피곤한데 조금은 자 두어야지요."
과장이 먼저 말을 하자 다들 동의했다. 그리고는 각자 자신이 쓸 방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혜주는 수도가 불편에 세수밖에 하지 못한 것이 계속 찝찝했다.
'과장님은 할 이야기가 있다더니 잊어버리셨나?'
혜주는 과장이 다른 두 명이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조그만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똑. 똑.
혜주가 거의 졸음을 못 이길 지경이 되었을 즈음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과장이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혜주는 벽 가까이로 귀를 붙였다.
"혜주씨." 희미하게 과장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
혜주가 벽에 입을 대고 대답을 하고서는 다시 귀를 벽에 붙였다. 그러자 다시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혜주씨. 이쪽으로 좀 건너오겠어요?"
"네. 갈께요."
혜주는 벽에서 떨어져서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보초 두 명은 마당 너머 길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혜주는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살그머니 마루를 지나서 과장의 방문을 열었다.
과장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창이 보초들이 선 반대편으로 나서 보초들은 불이 켜져 있는지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과장은 책상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었다. 혜주가 들어서자 과장은 혜주를 보며 말했다.
"일단 앉아요. 보여줄게 있으니까."
혜주는 과장의 옆에 앉았다.
책상 위에 놓여진 것은 폐조직의 표본 슬라이드였다. 과장이 휴대하고 다니는 간단한 실험용구 세트로 만든 것 같았다.
"과장님 혹시 아까 시신의.....?"
혜주가 놀란 얼굴로 과장을 보며 물었다.
"맞아요. 혜주씨."
"하지만 현미경이 없으니 어떻게 관찰을 해 볼 수도 없고."
"내가 아까 내 전자 현미경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던 것 기억나죠? 내일 그게 도착하면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거요."
혜주는 존경스러운 눈으로 과장을 바라보았다. 혜주에게는 없는 철저한 임무에 대한 사명감이 과장에게는 있어 보였다.
"육안으로는 아무런 짐작을 할 수가 없어요."
"네.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폐조직에 섬유화가 일어났네요. 방부 처리 하셨나요?"
"약품이 없어서 방부 처리가 안되있어요. 내일 안에 현미경이 도착하지 않으면 애써 만들어 놓은 게 썩어버릴 지도 몰라요."
"그렇겠네요." 혜주는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과장이 혜주에게 막연한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중요한 일이죠. 어떻게든 원인을 밝혀야겠죠."
"그냥 중요한 일이 아니오." 과장인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문제요. 혜주씨도 이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이 나라는 5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동안 순식간에 이만큼 발전해 온 나라요. 그만큼 치명적인 약점도 많이 지닌 나라이고. 이런 사소한 변수 하나 하나가 자칫 나라를 나락으로 빠뜨릴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 모두가 공멸하는 거예요."
공멸이라. 섬뜩했다. 어쩌면 아까 전에 죽어있던 그 청년처럼 우리 모두도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혜주에게 섬뜩하게 다가왔다. 물론 전국민이 전염병에 걸려 죽는 일이 발생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미 의료제도가 충분히 발달하였으므로. 하지만 만일 이 사태가 외부로 유출되어 국가의 경제가 파탄으로 이르게 된다면 의료혜택도 몇몇 돈 많은 이의 몫이 되어버릴 것이었다. 지금도 얼마나 수많은 의약품과 의료 기기들이 외국에서 값비싸게 수입되고 있는가. 경제가 파국으로 치닫을 수록 전염병, 이번 사태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가게될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가 이번 사태를 수습하지 않으면 안돼요. 우리가 실패하면 모두가 실패하는 거요."
"과장님. 알겠어요."
혜주는 새삼 비장한 과장의 말에 수긍을 했다.
"하지만 전 너무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미 1차 부검팀이 들어와서 전원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왜 우리에게 하지 않은 걸까요? 우린 속은 거예요."
"그들이 그 이야기를 했다면 누가 여기에 오려고 하겠소."
혜주는 순간 과장이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토록 쉽게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고 국가적 사명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순간 혜주의 머릿 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과장은 혹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미 모든 것을 알고서 여기에 들어온 것이 아닐까?
혜주는 망설였다. 이런 걸 물어봐도 될까? 그리고 물어본다 한들 과장이 사실대로 대답을 할까? 당연히 부인하겠지?
"과장님."
"네, 혜주씨."
"혹시 제 짐작인데, 과장님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여기에 들어오셨나요?"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혜주는 과장에게 물었다. 어쩐지 과장이 사실을 이야기해 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숨길 건 또 뭐가 있겠는가?
과장은 아무 말이 없이 혜주를 바라보았다. 뭔가 고민을 하는 듯 보였다.
"사실대로 말해주겠어요."
과장은 혜주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입을 열었다.
"내 계급은 중령이오."
과장의 첫마디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 뒤로 이어진 과장의 이야기도 충격의 연속이었다.
"난 이미 두 차례나 이런 종류의 작전에 파견된 적이 있어요. 물론 두 차례 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어요."
"그럴 수가."
혜주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과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난 민간인의 생활을 하면서 국가비상사태에는 군의관으로 차출이 됩니다. 물론 그런 사태는 주로 생명을 걸어야만 하는 위급한 상황이오. 그런 상황을 성공적으로 수습하는 대가로 내가 받는 보상은 엄청납니다. 가령 내가 사회에서 성공시킨 수많은 수술들은 이미 군 내부에서 먼저 성공한 수술들이오. 특수한 인물들을 살려놓기 위해 군에서는 실험적인 수술들도 곧잘 이루어지거든."
"그렇다면 사회에서 이루어진 그 엄청난 업적들이 모두 국가권력과의 담합 하에......"
혜주는 순간 배신감까지 느끼며 과장을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한켠으로는 과장이 더욱 거대한 산으로 여겨졌다. 만일 오늘의 이 순간이 없었다면 혜주는 영원히 과장의 벽을 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시달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담합이라는 표현은 좀 듣기 거북하군요. 혜주씨가 국가와 나의 관계를 뭔가 더러운 밀거래의 관계로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난 국가를 위해 언제고 목숨을 바치고 국가는 그 대가로 나에게 수많은 기회와 충분한 명성을 안겨주었어요. 그리고 난 언제고 다시 국가가 나를 원한다면 달려올 수 있소. 지금처럼."
과장의 말에 혜주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편협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과장이 자신을 끌어들인 이유는 뭘까? 왜 이런 위험한 임무에 자신을 끌어들였을까? 혜주는 다시 과장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왜 저를 함께 오자고 하신 거죠?"
"혜주씨가 학부생 시절에 쓴 글을 우연히 읽었어요. 반드시 폐암을 정복하고 말겠다는 그 글. 난 혜주씨가 뭔가를 해 낼만한 의사라고 생각해요. 재능뿐만 아니라 열정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난 늙었어요. 국가도 나 같은 사람이 더 필요해요. 혜주씨. 단순히 연구를 하고 수술을 하고 하는 걸로는 뭔가를 이루어 내기 힘들어요. 최소한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나라는 성장 단계부터 정부의 주도하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군사 정권이지. 그런 전통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요. 알게 모르게 사회 각 분야가 정부의 통제와 지원 하에 굴러가는 거요. 혜주씨. 만일 혜주씨가 나처럼 국가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자신의 일을 한다면 난 혜주씨가 내가 이룬 것보다 훨씬 큰 업적을 이룰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과장님."
혜주는 과장의 말에 감동을 받았다. 그가 나를 이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니.
"이 일이 끝나면 혜주씨를 추천할 생각이었어요. 난 내가 혜주씨를 잘못 본 게 아닐 거라고 믿어요."
혜주는 한참을 말을 못하고 과장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일을 계기로 진정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혜주는 더 없는 불안감과 함께 그만큼의 기대를 느꼈다.
"우선 지금은 방에 돌아가서 눈을 좀 붙이도록 해요. 브리핑 준비와 당직 때문에 벌써 이틀을 꼬박 새운 걸 알아요."
"네."
혜주는 과장을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멀리 서 있는 초병은 꾸벅꾸벅 조는 듯 해 보였다. 자신의 방의 문을 열고 들어온 혜주는 따뜻한 이불 속으로 몸을 뉘었다.
혜주는 혼란스러웠다. 과장의 느닷없는 배려가 과연 정당한 것일까? 과연 과장의 뒤를 이어가는 것이 잘하는 일일까? 하지만 혜주는 그 매력적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그것을 이룰 수만 있다면 혜주는 무엇이든 할 자신이 있었다. 암을 정복할 수만 있다면 이런 작전에 투입되는 것은 몇 번이고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0.
여섯시가 되자 밖이 소란스러웠다. 반쯤 잠이 들어있던 혜주는 아침 구보를 하는 군인들의 함성소리에 잠이 깨었다. 새삼 이 곳이 병영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혜주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나머지 세 명은 이미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그들도 밤새 긴장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잘 주무셨어요?"
혜주는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네, 잘 잤어요?"
과장이 태연하게 혜주의 인사를 받았다. 혜주와 그토록 은밀한 대화를 나눈 것이 채 한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과장의 얼굴에는 약간의 어색함도 비치지 않았다. 혜주는 과장이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충성!"
뒤에서 입구를 지키고 있던 초병들이 큰 소리로 경례를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온 모양이었다.
혜주가 뒤를 돌아보자 처음 보는 중사 한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잘들 주무셨습니까?"
중사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며 일행의 옆으로 와서 섰다.
"대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함께 아침 식사를 하자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모시러 왔습니다."
"그래요? 잠깐만 기다려 줘요. 곧 준비를 하고 나올 테니까."
과장이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옷 좀 걸치고 나오겠소."
런닝셔츠 차림의 부검팀장이 그렇게 말하고는 보건부 관리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혜주는 수돗가에서 세수를 했다. 샤워는커녕 머리조차 제대로 감지 못하는 것이 더할 수 없이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아하니 이 곳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그런 호사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 같았다. 어떻게든 빨리 일이 수습되는 것만이 방책이었다.
혜주는 제일 늦게 세수를 하고도 또 방으로 들어가서 화장을 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했다. 평소에도 화장을 잘 하지 않는 혜주였지만 립스틱 정도는 바르고 가야할 것 같았다. 혜주가 대충 차비를 마치고 방에서 나오자 나머지 일행이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사를 따라 조금만 걸어 내려가자 지난밤에 보았던 대대장의 막사가 보였다. 혜주 일행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안에는 테이블 위에 이미 5인분의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어서 와서 앉으시오."
대대장은 일행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자신도 의자 하나에 앉았다.
"간밤에 얼마 자지도 못했겠군요."
"네. 중령께서는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과장이 대대장에게 공손하게 답했다. 어제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하하. 이런 작전상황에서야 어디 편하게 보내는 밤이 있겠소. 하지만 이런 일이야 워낙 익숙하니까."
대대장은 은근히 과시하듯 말을 받았다. 그리고는 일행과 식사를 시작하면서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메뉴가 한 가지 뿐이라도 이해하시오. 이런 야전에서는 늘 밥이 이 모양이니까. 이렇게 다섯이서 함께 아침을 먹는 것만 해도 큰 행운 아니겠소. 오늘 아침이야 이렇게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밥을 먹지만 내일 아침이면 준비해야 할 식사가 4인분 혹은 3인분이 될런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니지. 당장 오늘 오후에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지. 안 그렇소? 지난 번 일차 팀이 왔을 때도 처음에는 이랬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취사병만 일하기가 쉬워졌지. 하하. 붉은 손에 지금은 손가락이 다섯이지만 이 손가락은 순식간에 썩어져 나간단 말야. 아무 조짐도 없이 순식간에 쓰러져 버리지."
대대장은 마치 이 공포를 즐기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대대장은 누구보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도 몰랐다. 첫 번 파견된 붉은손이 모두 사망했다면 대대장도 희생자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으니. 혜주는 대대장의 허세가 그런 공포를 이기기 위한 자기 최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쪼록 맛없는 찬이라도 든든하게 먹어두시오."
"야전에서 먹는 밥이 다 그렇죠."
아무도 대대장의 말에 대꾸하려 하지 않았지만 부검팀장이 혼잣말처럼 대답을 했다.
"아, 이 사람 야전을 좀 아는 모양이군. 하긴 여기 있는 아가씨야 군대라는 걸 모를 테지만 남자들은 다들 군대를 다녀오니까. 그래 어느 부대를 나왔소?"
대대장은 그렇게 혜주를 향해 한 번 비꼬고는 부검팀장에게 물었다. 혜주는 자신이 남자들만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이질감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난 번 같은 미안함이 아니라 대대장의 말에 대한 불쾌감만을 느꼈다.
"저는 백마부대를 나왔습니다."
부검팀장은 은근히 자랑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혜주는 그의 그런 표정이 역겹기까지 했다.
"아, 그래요? 그럼 혹시 월남전에 참전하셨소?"
대대장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아닙니다."
"그렇구만. 사실 내가 월남전에 백마부대 중대장으로 참전을 했던 사람이오. 정말 무시무시한 전투였지. 하하. 지금은 모두 추억거리지만 말야. 어쨌든 그런 전쟁터를 경험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당신들은 모를 거요. 지금 당장은 이렇게 전우와 얼굴을 마주보고 있지만 바로 다음 순간에는 피 흘리며 죽어 있는 전우의 모습을 보게될 수도 있는. 전쟁터란 그런 곳이지."
"말만 들어도 무섭군요."
"무섭다? 하하, 무섭다? 하지만 말이오, 전쟁터에서는 한 번 두려움에 떨기 시작하면 다음 순간에는 죽는 거요. 두려움을 즐겨야지. 하하. 하긴 여기도 전쟁터는 전쟁터이니. 총알 대신 병균이 날아다니는 전쟁터. 다들 이 공포를 즐기길 바라오. 살아남기 위해서."
혜주는 대대장의 말이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어떻게 보면 말없이 앉아있는 과장이 이런 비상사태를 더 많이 겪어 본 베테랑일 수도 있었다. 혜주는 과장이 대대장에게 '당신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난 이런 일을 수없이 겪었어!'라고 큰소리를 한 번 쳐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대장의 코를 납작하게 해 버릴 수 있다면.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른 채 여기까지 온 부검팀장과 보건부 관리에게 비밀을 지키지 위해서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제가 보기에는 중령님께서도 무척 두려워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소독을 실시하시는 걸 보면."
혜주는 참지 못하고 톡 쏘아붙였다.
"내가 두려워한다고? 소독을 하기 때문에?" 대대장이 기분이 팍 상한 표정으로 혜주에게 말했다.
"이봐 젊은 아가씨. 뭘 모르면 입이나 다물고 있어. 내가 시신 소각과 수시 소독을 명령하지 않았다면 피해가 이 정도에 그쳤을 것 같아? 내 조치가 아니었다면 아마 아가씨도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걸? 이 병에 사람이 죽어 넘어지는 꼴을 아직 눈으로 못 봐서 그래.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다가 순식간에 죽어 넘어지는 그 꼴을. 아마 이 병이 내 구역을 벗어나 확산되기 시작하면 강원도부터 시작해서 이 한반도 전체가 시체로 넘쳐날걸."
"아직 전염병이라는 증거는 없어요." 혜주는 지지 않고 대꾸했다.
"새벽에 아랫마을에도 희생자가 한 명 나왔소. 당신들이 피곤할까봐 깨우진 않았지만. 덕분에 내 관할구역은 두 배로 늘었지. 조만간 아랫마을 주민들도 하나둘씩 죽어 넘어질꺼야. 얼마 있지 않아 내 관할구역은 세배 네배로 늘어날테지. 그 전에 당신들이 뭔가 대책을 세워주어야 하오."
"그 부분에 관해서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과장이 나섰다.
"사태의 원인조차 파악되지 않은 시점에서 무조건 시체를 소각한다는 게 난 좀 꺼림칙합니다."
"어쩔 수 없소. 달리 방도가 마련되지 않는 한은 지금의 체제를 유지할거요. 다른 최선의 방도를 당신들이 제안하지 않는다면 내가 생각하는 최선대로 내 구역을 관할할 거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과장은 보건부 관리 쪽을 향해 물었다. 모든 전염병에 관련한 비상 사태에서 여러 가지 수습책을 마련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니 뭔가 생각해 둔 바가 있을 법도 했다.
"글세. 저도 아직까지 뭐라고 할 말은 없습니다. 희생자의 거주지를 한 번 살펴보고 싶은데요. 뭔가 단서를 찾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희생자의 집도 모두 소각한 건 아니겠죠?" 과장이 농담처럼 대대장에게 물었다.
"아, 그거 말이오? 첫 희생자의 집만 빼놓고는 모두 소각해 버렸소. 첫 번째 팀이 나머지도 다 조사해 봤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진 못했소."
대대장의 말에 과장은 다시 한 번 기가 찬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대대장의 처리방식에 이의를 제기할 의욕조차 사라져 버렸으리라.
"어쨌든 하나라도 남아있다니 다행이군요. 어서 그 곳으로 이동하도록 하지요."
보건부 관리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혜주를 비롯한 나머지도 모두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일어나는 일행을 향해 대대장이 또다시 말을 던졌다.
"아, 정오에 서울과의 화상회의가 있을 예정이니 얼른 끝내야 할거요."
11.
일행이 첫 희생자의 집에 도착한 것은 대대장의 막사에서 차를 타고 30분쯤 산길을 달렸을 때였다. 어제와 다름없이 중간중간 소독이 행해졌고, 이제는 다들 거의 익숙해져 버렸다.
"여기입니다."
상병이 차를 세웠다. 어제 새벽까지 혜주 일행을 태우고 다녀서 그런지 상병의 얼굴에도 피곤이 묻어 나왔다. 혜주는 이틀 밤을 꼬박 새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상병에게 연민을 느꼈다.
외진 곳에 위치한 첫 희생자의 집은 주위에 겹겹이 바리케이트가 둘러쳐져 있었다. 보초를 서고 있는 군인들도 모두 화생방 보호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화생방 중 한 명이 혜주 일행에게 다가왔다.
"보호복을 착용하시죠."
"꼭 보호복을 착용해야 하나?" 과장이 물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우린 됐네."
과장이 그렇게 먼저 대답을 하고는 일행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과장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넷은 부검 때처럼 위생복과 위생장갑, 그리고 마스크만 착용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조그마했다. 방이 둘 있었고, 조그마한 마루가 방 앞에 나와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을 따로 나 있었다. 화장실은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방이 두 개라고는 하지만 한 칸은 광처럼 이것저것이 쌓여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박스였다. 박스에는 '진수버섯'이라는 상품명이 적혀 있었다.
"희생자가 버섯재배조합에서 일했다고 하더군요." 보건부 관리가 일행에게 말했다.
"부부만 한 집에 살았대요. 아마 한 쪽 방만 썼을 겁니다."
일행은 옆방으로 건너갔다.
방에는 사람이 살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조그마한 장롱과 낮은 화장대가 놓여있었다. 선반 위에는 이것저것 집기들이 놓여있었지만 뒤져봤자 특별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재배조합에서 일해서 외지로도 많이 나다닌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보건부 관리가 서랍을 열어 살펴보면서 말을 했다.
"그럼 외지에서 병원균이 묻어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겠군."
"하지만 외부에는 발병보고가 없었잖아요." 혜주가 과장의 말을 받았다.
"그렇긴 그렇지. 하지만 만일 변종 바이러스 같은 거라면."
툭.
텔레비전 옆을 지나가던 혜주가 텔레비전 위에 놓여있던 작은 통 하나를 떨어뜨렸다. 혜주는 조심스럽게 통에서 쏟아진 것을 관찰했다. 과장과 부검팀장도 혜주 옆으로 와서 섰다.
안에서 나온 것은 지난 버스 승차표였다. 스무 장 가까이 모여있는 버스표는 모두 마산행이거나 마산에서 원주로 오는 왕복표였다.
"경남엘 자주 간 모양이지?" 부검팀장이 흐트러진 버스표를 보면서 말했다.
"버섯재배조합에서 일을 했다니 뭔가 일 때문에 가지 않았을까?" 과장이 추측을 덧붙였다.
"경남에도 버섯을 많이 하죠."
혜주가 말을 했다. 그러자 과장이 되물었다.
"그래요? 어떻게 알았죠?"
"제가 고향이 경남이잖아요. 경남에 친구도 있어요. 그 친구도 버섯을 재배한대요. 얼마 전에 소식이 닿아서."
혜주는 진규의 소포를 생각하면서 말을 했다.
"그렇군요."
과장은 다시 다른 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혜주는 진규와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면서 버스표를 다시 통 안에 넣어서 텔레비전 위에 올려놓았다. 이 곳에서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진규를 만날 수 있겠지. 혜주는 잠시 서글퍼졌다.
"어서 마무리하시죠. 곧 출발해야 회의 시간에 맞춰 제1구역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화생방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일행에게 알려왔다.
"젠장. 여기서는 어딜 가나 시간 제한에 걸리는 군."
부검팀장이 화생방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불평을 터뜨렸다.
"이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이만 정리하고 사진이나 찍어갑시다."
과장이 이렇게 말을 하고 보건부 관리가 주머니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서 방 안 구석구석을 찍었다.
혜주와 과장, 부검팀장이 방을 빠져 나오는 동안에도 보건부 관리는 번쩍번쩍 플래쉬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어댔다.
대대장의 막사까지 오면서 일행은 디지털 카메라와 자신들이 육안으로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뭔가 단서를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결론은 역시 '알 수 없다'였다.
난감한 표정으로 소독 연기만 수 차례 맡으면서 갔던 길을 되돌아 대대장의 막사로 돌아온 것은 정확히 정오였다. 일행은 서둘러 대대장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자 빨리들 앉아요. 회의가 지금 시작되니까."
대대장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막사 안에는 한 쪽에 스크린이 쳐져 있었고,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스크린 위에는 조그마한 카메라가 장착되어있었다.
"우린 그냥 앉으면 되는 겁니까?"
과장이 대대장에게 물으며 자리에 앉았다. 나머지 세 명도 따라 각자의 의자에 앉았다.
"아, 참 좋은 세상 아니오. 이런 강원도 산골과 서울이 얼굴을 마주보고 회의를 할 수 있다니. 정말 기술이 많이 발전을 했어."
이윽고 실내의 조명이 조금 어두워지며 스크린에 서울 회의실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화면에 나타난 사람은 모두 네 명이었다. 국무총리와 육군 참모총장, 그리고 군단장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양복을 입은 사내가 앉아있었다. 정부의 고위관료쯤 되겠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아주 젊어 보였다. 이 곳에 오기 전에 혜주 일행에게 브리핑을 했던 소령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온다면 거짓말을 한 것에 좀 따지고 싶었던 혜주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수고하십니다."
대대장은 군장성을 앞에 두고도 경례도 붙이지 않은 채 앉아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이구, 수고는 중령께서 하십니다. 그래, 그쪽 상황은 어떻소?"
"저희 다섯은 보시는 대로 아직 살아있습니다. 하하. 그리고 간밤에 사병 한 명이 더 죽어서 총 사망자 수는 세 명이 되었고, 아랫마을에서는 두 명이 죽었습니다."
대대장은 아주 여유롭고도 간단하게 상황을 보고했다. 하긴 발병의 징후가 아예 없다니 사망자만 보고하면 하면 되는 것이었다.
"네 분께서는 뭔가 알아낸 것이 있습니까?"
양복이 혜주 일행에게 물었다.
"애석하게도 아직 없습니다."
과장이 대답했다. 혜주는 마치 자신들이 임무를 게을리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결코 혜주 일행이 최선을 다하지 않아 사태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가 아무 것도 짐작을 할 수가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혜주는 갑자기 대대장이 원망스러워 졌다. 대대장이 이상한 명령으로 혜주 일행의 활동에 지장만 주지 않았다면 일은 훨씬 수월하게 진척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대대장의 비합리적인 지휘에 대해 한마디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무능을 대대장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 같아 보일 것 같아서 그러지는 못했다.
총리가 입을 열었다.
"병이 번지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소. 그렇다면 네 분께서 아랫마을에 가셔서 진찰을 좀 해 주시죠. 감염의 기미가 보이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격리수용을 한다면 병의 확산을 좀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게 워낙 징후가 없어서 말입니다. 아무런 증세도 보이지 않던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숨을 못 쉬고 넘어가 버리니 이거 원."
대대장이 총리의 말을 그렇게 받았다. 그러자 참모총장이 총리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 말을 했다.
"그렇지만 네 분 중에 두 분은 전문의이시니 진찰을 하면 뭔가 감염자를 찾아 낼 수도 있지 않겠소."
"하지만 아직 병에 의한 감염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습니다." 혜주의 말이었다. 그러자 군단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혜주의 말을 받았다.
"그건 그렇소. 이북에서 간첩 놈의 새.끼들이 넘어와서 그 일대에 독극물을 풀었을 수도 있다, 그 말이오. 내가 처음부터 말한 게 바로 그거란 말이지. 중령! 일대 수색은 확실히 하고 있겠지요?"
혜주는 자신의 말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군단장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쨌든 대대장은 군단장의 물음에 웃으며 대답을 했다.
"하하. 그건 염려 마십시오. 철저하게 수색하고 있습니다. 그치만 간첩이 있대도 어디 살아있겠습니까? 제가 푼 독에 벌써 죽었을 겁니다. 하하."
"하여튼 앉아 계신 여러분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나라가 망하느냐 살아남느냐가 결정되는 겁니다."
총리가 비장한 표정으로 마무리 말을 했다. 이런 비밀스러운 일을 국무총리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혜주에게는 놀랍기도 했다.
총리의 옆에 앉아있던 양복이 총리의 말에 덧붙였다.
"하여튼 사태가 성공적으로 수습되고 나면 차후에 보상은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 질 것입니다. 약속드립니다."
"하하. 보상이 문제겠소. 국운이 걸린 문제인데, 안 그렇소?" 대대장이 나머지 네 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양복은 대대장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회의는 이만 끝내기로 하지요. 차후 경과가 있을 때 다시 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뭔가 진척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바로 회의 소집을 요구해 주십시오. 저희는 24시간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만 이것은 국가 비상사태입니다. 보고에 한 시도 지체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걱정 마시오." 대대장이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 양복을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그럼." 양복이 간단한 인사말을 하자 스크린이 꺼졌다. 그리고 막사 내에 불이 들어왔다.
대대장은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었다. 내심 그도 회의 내내 긴장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대대장은 네 명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 또 생겼군요. 아랫마을로 가서 환자를 보셔야지요."
"그치만 보고에는 어떠한 징후도 없다면서."
과장이 자신 없는 듯 말꼬리를 흘렸다.
"까짓 거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해야지 별거 있겠소? 숨만 조금 헐떡거리는 놈 있으면 보고해요. 바로 격리시켜버리면 되니까."
일행은 난감한 표정으로 과장과 대대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첫댓글 아오 빡쳐 군무새 새끼
재밌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