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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엽기 혹은 진실 (세상 모든 즐거움이 모이는 곳) 원문보기 글쓴이: 고윤정
출처 : https://theqoo.net/1262648385
원작자: 김설단 작가 (https://britg.kr/novel-author/2327/)
12.
아랫마을에 도착해서 진료를 한 것은 결국 과장과 혜주 뿐이었다. 둘만이 전문의요, 폐에 관해서 전문가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부검팀장도 간단한 의학지식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법의학가였다.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고시에 낙방한 후 과학수사연구소에 특채로 들어가서 거의 불모에 가까웠던 우리 나라의 과학수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검의가 되기는 했지만, 이제와서 진료를 하기에는 그 쪽 길로 너무 굳어져 버렸다.
아랫마을의 조그마한 마을 회관에 진료실을 마련했다. 진료실이라고 해 봤자 혜주와 과장이 앉을 책상 두 개와 온도계, 청진기, 혈압 측정기 따위의 간단한 의료기구가 전부였다. 혜주와 과장이 조금 간격을 두고 책상을 놓고 앉고, 마을 사람들은 두 줄로 서서 모두 진료를 받았다.
마을 사람들을 모두 강제로 진료를 받는 중이었다. 그들은 아직 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군인들이 와서 무료 검진을 받으라고 하는 통에 귀찮은 몸을 일으켜서 이곳 마을 회관까지 나온 것이었다.
혜주는 이미 대여섯 명을 진료해 보았지만 다들 아무 이상이 없었다. 오히려 깨끗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순박한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건강하게만 보였다.
"다음 분."
파마머리를 한 아주머니 다음으로 혜주의 앞에 앉은 이는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윗도리 좀 올려보시겠어요?"
할아버지는 바지에서 윗도리를 뽑아 가슴께까지 걷어올렸다. 혜주는 할아버지의 가슴에 청진기를 들이댔다.
별 이상한 징후는 느껴지지 않았다.
혜주는 청진기를 떼며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어디 편찮으신 데 없어요?"
"아픈데? 없어."
"숨이 가쁘다거나 그런 거 없구요?"
"없어. 우리야 늘 산길 다니는 사람들인데 숨쉬는 게 불편하면 어찌 사누? 아무 이상도 없어. 우리 가족들도 다 아무 이상도 없어. 윗집 박씨하고 저 아래 나주댁이 죽고 이리 군인들이 들어와 자꾸 사람들을 소집하는디, 여기 아픈 사람 아무도 없어. 물 좋고 공기 좋은데 사는 사람들 아픈 데가 어디 있갔어?"
"네, 그렇게 보이네요. 할아버지 어디 아프시면 바로 말씀 하셔야 해요. 아셨죠?"
"아 그럼."
할아버지는 윗도리는 추스리고는 일어났다.
그 때였다. 잠시 전 혜주에게서 진료를 받고 누구를 기다리는지 저 뒤에 서있던 아주머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혜주가 아주머니를 불렀지만, 아주머니는 얼굴이 파래지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혜주와 과장은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아주머니 쪽으로 달려갔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정신차리세요!"
과장이 쓰러진 아주머니를 붙잡고 뺨을 때렸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눈을 까뒤집고 이미 경련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쓰러진 아주머니 주위로 몰려들었다.
"위생병!"
혜주가 목청이 터져라 밖에 있는 군인들을 불렀다. 뭔가 응급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쿵쿵쿵.
달려오는 군인들의 군화소리가 문 쪽에서 들렸다. 군인 두 명이 들어오더니 모여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혜주와 과장이 아주머니 주위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군인 한 명이 소리쳤다.
"여기 봉쇄해!"
그리고는 무전기를 들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화생방 요원들 투입해! 그리고 나머지는 전원 소독처리 후 철수!"
"응급조치가 필요해요! 구급차까지 옮겨야 해요!"
혜주가 군인을 보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군인들은 듣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봐요! 사람이 죽어간다구요!"
혜주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답 대신 갑자기 화생방 복장을 한 군인이 호스를 들고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마을 회관 안으로 흰 소독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이 제각각 비명을 지르며 출구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혜주와 과장 쪽으로 달려오다 걸려 넘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뭐하는 짓이야! 앞이 보여야 치료를 하지!"
과장이 고함을 질렀지만 사람들의 괴성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출구 쪽에서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오지마! 모두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말라구!"
군인들이 입구를 봉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기에 바빴다. 그리고 입구가 막히자 온통 하얀 공간 속에서 서로 밀리고 밀치는 모양이었다.
"경고한다! 나오는 자는 사살하겠다!"
탕!
군인의 경고 후 한차례 공포가 발사되었다.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다시 한 번 경고한다! 나오는 자는 사살하겠다! 이 곳은 작전구역이다!"
조용해진 마을 사람들 위로 군인의 섬뜩한 경고가 울려 퍼졌다. 마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연기가 걷혔다. 과장의 무릎 아래 누워있는 아주머니는 이미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있었다. 혜주과 과장은 망연한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손 써 볼 시간도 없이 차갑게 죽어버린 것이었다.
혜주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건, 이건 아냐. 죽어 가는 환자를 살려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
혜주는 낮은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과장 역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아냐. 이건 아냐."
화생방 두 명이 들것을 들고 혜주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둘이서 들것에 아주머니를 실었다.
혜주는 화생방 중 한 명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럴 순 없어요. 당신들은 사람을 죽였어."
"어쩔 수 없습니다. 발병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구역을 봉쇄하고 소독 및 사체 수습을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혜주는 대꾸한 힘조차 없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너무나 피곤했다. 깊은 잠을 자버리고만 싶었다.
혜주는 갑자기 지난 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다. 엔지니어. 자신은 인간이라는 기계를 만지는 엔지니어가 되겠다고. 그런 혜주에게 인간의 생명이 이토록 소중히 여겨진 적은 없었다. 의과대학에 들어가고 의사가 되면서 습관처럼 죽어 가는 환자와 그들이 흘리는 피를 보면서, 언제나 어쩔 수 없는 일일뿐이라고 치부했던 그녀였다. 혜주는 부끄러움이 몰려옴을 느꼈다. 혜주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화생방은 아주머니의 시신을 그대로 들것에 실어서 나가버렸다. 주민들은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혜주와 과장, 그리고 군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혜주와 과장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입구 쪽으로 사람들을 밀치고 나아갔다. 입구에서는 군인 여럿이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었다. 혜주과 과장은 주민들을 뒤로하고 입구를 빠져 나왔다.
혜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순박한 산골 사람들의 잔뜩 겁을 집어먹은 눈망울이 혜주와 과장을 공포와 부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혜주는 옆에 서 있던 군인에게 물었다.
"모두 보균자로 처리됩니다. 그리고 여기 이 곳에 격리될 겁니다."
혜주는 미안함에 몸이 떨렸다. 아주머니가 그렇게 죽은 것도 여기 이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격리된 것도 모두 자신이 무능하기 때문에 그런 것만 같았다. 과장도 혜주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주민들 쪽을 쳐다보지 못했다.
숙소 쪽으로 되돌아가는 차안이었다. 평소처럼 몇 번이나 소독을 하면서 차는 꽤 먼길을 올라갔다. 바로 인접마을이라고 해도 산길로 꽤나 떨어져 있는 까닭이었다.
"혜주씨."
과장이 낮은 소리로 혜주를 불렀다.
"네, 과장님."
"선뜻 나를 믿고 따라와 준 것 고마워요. 혹시 다음에 기회가 없을 지 몰라 미리 말해두는 거요."
"아니예요. 저야말로 과장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혜주씨. 부탁할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만일 내가 죽거든 혜주씨가 책임지고 내 시신을 부검 해요."
"과장님……."
혜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랫마을에서 죽은 아주머니의 모습을 실제로 보면서 과장도 불안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혜주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약속해줘요."
"네. 대신에 과장님께서도 제가 죽으면 부검을 해 주세요."
"알겠소."
혜주는 과장의 인간됨에 다시 한 번 감동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허준에게 자신의 해부를 맡긴 스승 유의태가 생각이 났다. 혜주에게 과장은 이미 유의태와 같은 존재였다.
"과장님. 혹시 다음에 기회가 없을 지도 몰라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말해요."
"과장님.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과장님을 모시게 된 건 제 생애 최고의 행운이에요."
"나도 혜주씨를 만난 걸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그리고 차가 다시 한 번 멈췄다. 차안으로 흰 연기가 가득 찼다. 덕분에 혜주와 과장은 눈물을 흘리는 서로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13.
숙소에 도착하자 각자의 옷과 과장이 부탁한 전자 현미경이 도착해 있었다. 혜주와 과장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현미경에 매달렸다. 부검팀장과 보건부 관리는 지쳤는지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조직 검사를 이렇게 몰래 해야만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아까부터 현미경만 뚫어지게 보고있는 과장의 뒤에서 혜주가 말을 건넸다.
"그러게 말이오." 과장은 현미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했다.
"방부 처리를 하지 않았더니 조직이 많이 상해버렸어요. 제대로 분석을 할 수가 없겠는걸."
과장은 현미경에서 눈을 떼더니 혜주에게 현미경 쪽으로 손짓을 했다.
"혜주씨도 한 번 봐요."
혜주는 현미경을 들여다 보았다. 조직이 많이 부패하기도 했지만 잔뜩 곰팡이 같은 것이 피어 있었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아보기가 힘들겠어요."
"그런데, 혜주씨. 조직을 한 번 자세히 봐요. 일반 곰팡이가 아니오."
"네. 폐조직 자체가 섬유화가 일어나기도 하고, 위에 곰팡이도 덧씌워져서 알아보기가 힘들지만. 그냥 곰팡이치고는 구조가 독특한 걸요?"
"아무래도 조직을 가져오는 동안 다른 포자가 스며든 모양이에요. 여기가 버섯 재배를 하던 곳이라 그런지."
"혹시 시체를 소각하는 곳이 버섯저장소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던 것 같군요."
"그렇다면 포자가 연기에 많이 날려다닐 수도 있겠군요."
"네, 그게 세포에 달라붙은 모양이에요. 다음 번 희생자가 나와서 다시 부검을 하게 되면 폐조직을 좀더 잘 보관해 와야겠어요. 중간에 이물질이 묻지 않게."
"네."
혜주는 계속 현미경을 들여다보았다. 폐조직에 이물질이 묻은 것도 다 대대장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그가 버섯저장소를 시체 소각장으로 사용하지만 않았어도 조직에 이렇게 많은 이물질이 묻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혜주는 어느 샌가 일행의 임무에 진척이 없는 것은 모두 대대장의 잘못 때문이라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혹시 탄저균 같은 종류의 테러는 아닐까요?" 혜주가 물었다.
"그렇다면 이토록 급속도로 감염지역이 확산되지는 않을 꺼요. 난 개인적으로 변종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라고 판단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하지만 전 아직 아무 것도 판단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어쩌면 신경계에 감염이 온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구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수밖에."
과장은 낙담한 표정이 역력했다. 혜주 역시 풀이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자 현미경이 도착하면 일말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져버린 까닭이었다.
어떻게든 새로운 폐조직을 입수해야만 했다. 그러자면 또 한 명의 희생자가 필요할 터였다.
과연 다음 번 희생자는 누가 될까? 날이 밝자 질문의 대답은 명확해졌다.
아침 공기의 쌀쌀함을 느끼면서 혜주는 방문을 나왔다. 너무 지쳐서 옷을 그대로 입고 자는 바람에 아직 어제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혜주였다. 수돗가에서는 보건부 관리와 부검팀장이 세수를 하고 있었다. 과장은 보이지 않았다.
똑. 똑. 똑.
"과장님!"
혜주는 과장의 방문을 노크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과장님! 아직 안 일어나셨어요?"
혜주는 다시 한 번 두드렸지만 역시 아무 소리도 없었다. 혜주는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쾅! 쾅! 쾅! 쾅!
혜주는 문을 부실 듯 세게 두드렸다.
"과장님!"
과장을 부르는 혜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보건부 관리와 부검팀장이 혜주에게로 다가왔다. 그들도 이미 사태를 짐작한 표정이었다.
보건부 관리는 혜주의 팔을 잡고 혜주를 말렸다.
"혜주씨. 진정해요. 사람을 부를게요."
"과장님! 안돼요. 과장님."
혜주는 거의 정신이 나간 듯 보건부 관리의 팔을 뿌리치며 문을 두드렸다.
부검팀장은 길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보초에게 달려가 사실을 알렸다. 보초 둘은 부검팀장을 따라 과장의 방 쪽으로 걸어왔다.
쾅!
보초 한 명이 검은 군화발로 과장의 방문을 걷어차자 문이 벌컥 열렸다. 과장은 하얀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과 코에서는 검은 피가 흘러내려 있었다.
"과장님!"
혜주는 보건부 관리에게 팔이 잡힌 채로 몸부림치며 울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함께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의논을 했던 과장이 이렇게 일행 중 첫 희생자가 되어버리다니. 혜주는 머릿속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소독팀 파견 바란다."
보초 중 한 명이 무전기를 들고서 그렇게 무전을 날렸다.
"나머지 분들은 물러나 주십시오."
나머지 한 명은 혜주 일행을 뒤로 밀어냈다. 혜주는 보건부 관리와 부검팀장에 의해 억지로 끌려 마당까지 내려왔다.
이윽고 화생방 복장을 한 군인 다섯 명이 뛰어올라왔다. 그 중 한 명은 들것을 가지고 올라왔고, 다른 한 명은 이동용 소독기구를 메고 왔다.
그들은 혜주를 지나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방안에 소독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울음을 참지 못하며 그 장면을 지켜보던 혜주의 머릿속에 과장의 당부가 떠올랐다.
'만일 내가 죽거든 혜주씨가 책임지고 부검을 해요.'
혜주는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자신을 붙들고 있는 보건부 관리의 손을 풀었다.
"군인들에게 해야할 말이 있어요."
그리고는 이미 들것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간 군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보건부 관리와 부검팀장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과장님 시체는 제가 부검을 해야해요."
혜주는 방문 앞에서 자신을 가로막는 화생방을 향해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모든 사체는 즉시 소각이 원칙입니다. 게다가 이 시신은 사망한 지 얼마가 지났는지도 모르니 즉각 소각장으로 옮겨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 과장님의 유언이에요. 제가 부검을 해야만 해요."
"죄송합니다. 대대장님의 명령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화생방은 군인 특유의 냉정함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
명령. 명령. 혜주는 그 명령이라는 말에 이젠 진절머리가 났다. 과장이 이렇게 죽어버린 것도 다 그놈의 명령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과 분함이 혜주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혜주는 폭발할 듯한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기다려요. 내가 대대장의 허락을 받아올 테니까."
혜주는 화생방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길 아래로 달음박질 쳤다. 대대장의 막사는 뛰어가면 1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있었다.
뛰어가는 혜주의 뺨에는 또다시 눈물이 흘렀지만 혜주는 얼른 닦아버렸다. 대대장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대대장의 멱살을 잡고 '과장님이 돌아가신 것은 모두 당신 때문이야!'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되었다. 그렇게 된다면 대대장에게 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대장을 이기려면 대대장보다 더 냉철해야만 했다.
대대장의 막사 앞에는 어제와는 다른 사병 하나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혜주는 서 있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팔이 혜주를 막아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강한 팔 힘으로 혜주를 밀어내듯 막아서며 물었다.
"대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급한 일이에요."
혜주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최대한 냉철한 척 한다고는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다리십시오."
사병은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혜주를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충성! 대대장님 붉은손 다섯……"
사병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혜주는 벌컥 안으로 들어섰다. 1초도 지체하기가 싫었다.
"중령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과장님께서 돌아가셨어요."
대대장은 기분이 상한 표정으로 혜주를 쳐다보았다. 사병은 막무가내로 들이닥친 혜주를 난감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알고 있소. 방금 무전을 들었어. 그래서 어쨌다는 거요?"
대대장은 과장의 죽음조차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양 대꾸했다.
"과장님께서 어제 저녁에 제게 부탁하셨어요. 과장님께서 먼저 돌아가시게 되면 저더러 과장님의 시신을 부검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래요?"
"네. 시신을 소각하지 말라고 명령해 주세요."
"알겠소. 그런 거라면. 내가 무전으로 연락해 놓을 테니 걱정 마시오. 단, 두 시간 안에 부검을 마쳐야 하오."
"알겠어요. 그럼."
혜주는 출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혜주가 막사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대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네?" 혜주는 고개를 돌려 대대장을 쳐다보았다.
"이봐. 젊은 아가씨. 여자라 군대를 다녀오질 않아서 그런지 아직 군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말야. 군대에는 절차와 규율이라는 게 있는 법이오. 내 숙소에 들어올 일이 있으면 먼저 보초를 거쳐야 하는 거요. 알겠소?"
"네. 알겠습니다."
혜주는 대대장의 말투가 못마땅했지만 그저 공손히 대답을 했다. 지금은 한 시라도 빨리 과장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내가 들어오라고 할 때 들어오는 거고, 내가 나가라고 할 때 나가는 거요. 알겠소?"
"네."
"그럼 가보시오."
"네."
혜주는 몸을 돌려 막사를 빠져 나왔다. 사병은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서 있었다. 혜주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요. 마음대로 들어가서."
"괜찮습니다."
사병은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으로 괜찮다고 했다. 혜주는 온 길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야, 이 새.끼야 너 들어와!"
혜주가 막사에서 몇 걸음쯤 벗어났을 때 막사 안에서 대대장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사병은 잔뜩 굳은 표정을 안으로 들어갔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너 보초를 어떻게 서는 거야! 저 년이 칼이라도 쥐고 들어왔으면 난 죽었어! 너 이 새.끼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해! 여자 하나 막질 못하고! 너 보초도 하나 제대로 못서!"
혜주는 대대장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사병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서 대신 해명을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14.
혜주는 위생복과 위생장갑, 그리고 마스크를 한 채 미리 부검용 막사에 도착해 있었다. 부검팀장과 보건부 관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과장은 간이 침대 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누워있었다. 아무래도 새벽에 죽은 모양이었다. 시신이 어느 정도 경직되어 있었다.
혜주는 자신이 과장의 몸을 부검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마치 과장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줄로 알았다. 과장이 죽은 지금, 혜주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할지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막사의 문이 열리고, 화생방 복장을 한 세 명이 들어왔다.
"두 분은 언제 오시는 거죠?"
혜주는 그들에게 먼저 물었다. 그러자 화생방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여기 왔소."
혜주는 놀란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세 명 중 두 명은 보건부 관리와 부검팀장이었다.
혜주는 순간 배신감을 느꼈다. 물론 그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검을 주도하던 과장이 죽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그들로서도 뭔가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과장이 죽은 지금은 붉은손 둘 즉, 부검팀장이 전체 팀장이었다. 그가 보호복을 입기로 결정을 내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혜주씨도 보호복을 입는 게 어때요?"
부검팀장이 말했다.
"아뇨. 전 됐습니다. 두 분께서는 몸 움직이시기 불편하실 테니 집도는 제가 하지요."
혜주는 그렇게 말하고는 옆에 놓여있는 메스를 들었다. 부검팀장과 보건부 관리는 별 말 없이 혜주의 곁으로 와서 섰다.
혜주는 과장의 쇄골 가운데에 메스를 찔러 넣었다. 이미 사망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지난번 해부에서처럼 혈액이 스며 나오지는 않았다. 혜주는 손과 팔에 힘을 주어 천천히 메스를 아래쪽으로 그었다.
과장의 복부를 완전히 절개하는 동안 혜주는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자꾸만 눈에서 눈물이 흐르려 했기 때문이었다.
과장도 온 시신이 다 찢어진 채로 소각장으로 가게 되겠지? 과장의 가족들에게는 뭐라고 설명을 해야만 할까?
혜주는 과장의 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범하고 조용조용한 부인이었다. 과장이 지닌 명성과 지위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현명한 여자였다. 아마 과장의 부인도 과장의 이러한 비밀을 알고 있지는 않으리라.
혜주는 자신이 언제고 이 모든 사실을 그녀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장은 그녀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도 이 곳에서 이루어진 이 일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만일 그녀도 혜주도 늙어졌을 때, 그 때가 오면 혜주는 그녀에게 이 모든 사실을 말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으니까.
혜주는 자신이 과장의 몸을 갈가리 찢은 이 사실을 과장의 부인이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장의 두개골은 전번처럼 부검팀장이 절개했다. 전기톱은 전번과 다름없이 굉음을 내며 돌아갔다.
그 동안 혜주는 과장의 폐에서 떼어낸 조직을 한쪽 구석에 마련된 현미경에서 관찰했다.
지난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과장과 혜주가 함께 관찰하던 것을 이제는 과장의 것을 혜주가 관찰하고 있다는 것밖에. 혜주는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자신의 눈앞이 자꾸만 흐려짐을 느꼈다.
조직에는 잔뜩 섬유화가 일어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폐울혈에 수반되는 일반적인 폐조직의 섬유화보다 훨씬 진척되어 있었다. 과장이 사망한 시각을 아무리 이르게 추산한다고 해도 전혀 들어맞지가 않았다.
혜주는 과장의 폐조직을 슬쩍 위생장갑의 손목에 넣었다. 아무래도 과장의 전자 현미경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 날 밤이었다. 혜주는 아까부터 전자 현미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혜주의 옆에는 부검팀장이 서 있었다.
과장의 죽음 이후에 전의 숙소는 폐쇄되었다. 그리고 혜주 일행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숙소를 잡게 되었다. 과장의 전자 현미경은 자연스레 혜주의 차지가 되었다. 부검팀장도 보건부 관리도 그것을 가져가려 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숙소가 서로 떨어진 곳으로 재조정됨에 따라 밤에 서로가 서로의 숙소에 가는 것이 용이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혜주는 의논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억지로 부검팀장을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과장이 죽은 마당에 이제 팀장은 부검팀장이었고, 그렇다면 그와 상의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혜주 혼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난감한 이유도 있었다.
"도저히 알 수가 없어요. 폐에는 곰팡이 같은 것만 잔뜩 피어버렸고."
혜주는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부검팀장은 팔짱을 끼고 서서 혜주와 혜주의 방을 쭉 둘러보는 중이었다.
"이런 식으로 조직을 몰래 떼어와서 지금까지 관찰을 해 왔군요. 전 까맣게 몰랐군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 놈의 대대장의 명령 때문에 조직을 따로 보관할 수가 없으니까."
혜주는 현미경에서 눈을 뗐다. 그리고는 부검팀장에게 현미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 번 보세요."
"그래요. 한 번 봅시다."
부검팀장은 약간 머뭇거리며 현미경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죽은 과장의 유품이라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그는 현미경에 얼굴이 닿지 않게 약간 거리를 두고 현미경을 들여다 보았다.
"조직에 이물질이 묻어버린 모양인데요?"
"첨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까 부검실에서 조직을 막 떼어냈을 때도 상태가 비슷했어요. 도대체 왜 이런 건지 알 수가 없어요."
"네."
부검팀장은 현미경에서 눈을 뗐다.
"원인이 뭘까요? 공기로 전염되는 걸까요? 아니면 신체접촉?"
혜주가 부검팀장의 의견을 물었다.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소. 아무 것도 종잡을 수가 없군요."
"아랫마을에서는 벌써 두 명의 희생자가 더 발생했대요. 이대로 나가다가는 조만간에 아랫마을 주민들도 모두 사망하고 말 거예요. 한 시라도 빨리 해결책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돼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과장님이 돌아가셨으니 이젠 당신이 팀장이잖아요. 전 과장님만 믿고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사실 지금 많이 혼란스러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잘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자도록 합시다."
15.
다음날 아침 혜주는 아침을 먹기 위해 대대장의 막사로 향했다. 겨우 다섯 시간도 되지 않는 수면시간이었지만 혜주는 피로가 많이 풀린 상태였다. 처음으로 강원도 산 속의 아침 공기가 상쾌함을 느꼈다.
혜주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서울 도심의 탁한 공기와는 다른 신선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면 이 공기 속에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시무시한 병원균이 떠다닐 수도 있는 일이었다.
혜주는 약간 섬뜩해짐을 느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켰다.
'이 공기를 마시고 죽게 된다면……. 까짓 것, 죽는 거지.'
혜주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러고 나니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이런 게 대대장이 말한 '두려움을 즐기는 것'일까? 혜주는 자신이 과장의 발치만큼이라도 따라가는 인간이 되어 가는 듯 해서 기분이 좋았다.
막사 안에 들어서자 대대장이 혜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건부 관리와 부검팀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2인분의 식사만이 놓여있었다.
혜주는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그러나 일단은 태연히 의자에 앉았다.
"잘 주무셨소?" 대대장이 먼저 혜주에게 말을 건넸다.
"네. 대대장님도 물론 잘 주무셨겠죠? 그런데 왜 2인분뿐이죠?"
"그야 뻔하잖소." 대대장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간밤에 두 분 다 돌아가셨단 말인가요?"
혜주는 가슴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절망감을 삭이며 물었다. 이렇게 혼자가 되다니.
"돌아갔다? 어떤 의미에서는 둘 다 돌아갔다고 봐야겠지. 그 보건부에서 나왔다는 작자는 새벽에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그렇다면?"
"그 부검 전문가라는 작자는 아침에 작전지역에서 철수하기로 했소. 스스로 격리 수용되는 편을 선택했지. 그 인간 간덩이가 콩 알만 하더군. 내가 이제 와서 그럴 순 없다고 하니까 눈물을 흘리며 사정 사정을 하더군. 그래서 할 수 없이 작전 지역 외곽 쪽에 있는 영창에 격리 수용하기로 했지."
혜주는 배신감과 분노가 끓어올랐다. 지난밤에 혜주에게 했던 말은 뭐란 말인가? 어떻게 인간이 그토록 뻔뻔스러운 수가 있을까?
"개새.끼."
혜주는 저도 모르게 들릴 만큼 큰소리로 욕을 내뱉았다.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을 했지만 상관없단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부검팀장이 눈앞에 있었다면 더 심한 욕도 퍼부어 줄 자신이 있었다.
"하하. 젊은 아가씨가 생각보다 입이 험하구만." 대대장이 웃으며 혜주에게 말했다.
"자연스레 욕이 나오네요."
"일단 식사나 합시다."
혜주와 대대장은 수저를 들었다.
"아 참. 아랫마을에서 간밤에 다섯이나 더 죽었소. 윗마을에서도 처음으로 사망자가 나왔고. 일이 커지고 있어. 얼른 예방약이나 치료약을 개발하지 않으면 나라 전체가 계엄상태에 들어갈 판이오."
대대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혜주는 쌓인 말을 해야겠다고 결론 내렸다.
"죄송한 말이지만 중령님 식으로 계속 하다가는 결코 원인을 찾을 수 없어요. 더 자세한 부검과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해요."
대대장은 몹시 기분이 나쁜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금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거요? 이봐 아가씨. 내가 내린 즉각 소각 명령과 수시 소독 명령이 없었으면 우리 부대 사병들은 벌써 전원 사망이오. 물론 나도 아가씨도 벌써 죽었겠지."
"어쨌든 오늘 화상 회의에서 전 제 의견을 말할 겁니다. 이젠 제가 팀장이니까요."
혜주는 지지 않고 대꾸했다.
"소용없을 거요. 설사 내 방식이 틀렸다 한들 누가 나를 대신해서 이 일을 떠맡겠소. 저기 서울에 앉아있는 작자들은 아가씨보다도 간이 작은 자들이오. 전염병이 전국으로 확산되면 아마 죄다들 외국으로 도망쳐버릴걸."
대대장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혜주는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판이었다. 어쩌면 혜주는 자신이 이 수렁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죽는 날에나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혜주는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대장을 굴복시킬 수 없다면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중령님께서 허락을 해 주세요."
"그럴 수 없소. 왜냐면 내가 하고 있는 조치가 가장 최선이니까."
"어떻게 그걸 확신하시죠?"
혜주는 자신이 대대장을 설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경험으로 알 수 있지. 내가 월남에 있을 때 부대에 알 수 없는 괴질이 돌아서 하루에 두 세 명씩 죽어 자빠졌소. 내가 그때 중대장이었는데, 대대장 놈이 어쩔 줄을 몰라 하길래 내가 명령을 내렸지. 시체를 다 소각하고 발병의 낌새라도 보이는 놈은 모두 죽이라고. 내 손으로 내 부하 다섯 놈을 죽였소. 덕분에 오백명이 목숨을 건졌지."
대대장은 독기 어린 눈으로 말을 했다. 혜주는 그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대대장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혜주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말하는 대대장의 말투가 재수가 없었다.
"이건 그냥 괴질이 아니예요. 그리고 희생자는 군인이 아니구요. 사람 죽는 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씀하지 마세요."
대대장은 혜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가 분노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혜주는 지지않고 똑바로 쳐다보았다. 먼저 흥분하는 쪽이 지는 것이다.
"내 부하도 50명이 죽었어. 너 같은 계집애가 눈앞에서 부하가 죽어 가는 심정을 알아! 사람이 죽어 자빠지는 데는 너보다 내가 더 가슴이 아파. 그렇지만 전장에서는 한 순간의 감상에 전체가 죽는 수가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대대장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혜주는 그대로 대대장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할 말도 없었지만, 화가 잔뜩 난 지금의 대대장에게 무슨 말을 한 들 곧이 듣지 않을 것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 대대장은 스스로 화를 가라앉혔다. 그의 붉어진 뺨이 다시 원래의 색을 찾았다.
"미안하오. 내가 말이 심했어. 화가 났다면 용서하시오."
그러나 혜주는 그의 사과를 곱게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더 비꼬아 줄 작정이었다.
"화가 나도 어쩔 수 없죠. 여기 지휘관은 중령님이니까요. 저 같은 게 화를 낼 수나 있나요."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작전에서 빠지시오. 지금 당장이라도 그렇게 해줄 테니까. 혜주씨가 빠진다면 본부에서는 새로운 붉은손들을 파견할 테지."
대대장의 냉정한 말이었다. 혜주는 오기가 솟아올랐다.
"아뇨.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절대로."
혜주는 속으로 다짐했다. 난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그리고도 이틀이 지났다. 아랫마을 사람들의 반수가 죽었다. 그리고 윗마을에도 이미 사람들이 서너 명 더 죽어나갔다. 그러는 사이 혜주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혜주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번갈아 다니며 사람들의 상태를 살폈지만 병의 징후는 찾을 수 없었다. 멀쩡하던 사람들이 마법에라도 걸린 듯 숨을 멈추고 죽어나갔으며 혜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것이 그토록 공포스러운 것임을 느꼈다.
그러던 중 스스로 격리를 택했던 부검팀장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대장은 아침 식사 자리에서 유쾌한 듯이 그 소식을 전했고, 혜주는 한편으론 속 후련함을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생각을 하는 자신이 서글퍼졌다.
그리고 오늘 낮에는 지금껏 혜주를 이리저리 차로 이동시켜주던 상병이 점심을 먹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혜주는 이 곳 붉은방에 온 첫날 숙소로 향하던 산길에서 상병의 손을 잡고 올라갔던 일을 떠올렸다. 혜주는 그를 만난 것이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을뿐더러 그와 변변히 말 한마디 나누어보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픔을 느꼈다.
혜주는 점점 지쳐만 갔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이제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을 진료하는 일은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사망자가 혜주가 있는 근처에서 발생할 경우에는 혜주의 요청으로 부검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역시 성과는 없었다.
어쩌면 헤주는 자신이 어느 순간 그들처럼 죽어버리기를 바라고 있는 지도 몰랐다. 부검을 위해 붉은방으로 파견된 붉은손 네 명중 이미 혜주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망했다. 대대장은 여느때와 다름없는 과장된 용기로 매일 아침 혜주와 식사를 같이 하기는 했지만 내심 불안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사병들만 해도 혜주의 정체를 아는 몇몇은 혜주가 지나가기만 해도 슬슬 물러났다.
지금 이 곳 붉은방에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죽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혜주였다. 혜주 역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이쯤에서 혜주가 죽어주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야만 또 다른 붉은손들이 이 곳으로 들어올 테니까. 혜주는 자신의 임무를 완성한다기보다는 죽음을 기다린다는 심정으로 이 곳에 머물러 있었다.
혜주는 오늘밤도 늦게까지 과장의 전자 현미경에 매달려 있었다. 이미 이러한 작업을 통해 사태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옅어진 상태였지만, 그러나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미 다섯 번째 부검을 통해 시신의 폐조직을 몰래 떼어와 슬라이드로 만든 상태였다. 하지만 늘 표본을 이물질에 노출되어 쉽게 부패해 버렸다. 이번 조직도 예외는 아니어서 벌써 곰팡이 같은 것이 들어앉아 버렸다.
"후."
혜주는 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가망이 보이질 않았다.
혜주는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쐬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지금 혜주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언제 죽는 것일까?'
만일 신이 누구나의 죽을 날짜를 정해놓았다면 혜주는 아직은 자신의 날이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마도 곧 오겠지. 과장과 부검팀장, 보건부 관리. 먼저 간 그들보다 길어야 하루 이틀일 거라고 혜주는 생각했다.
'하지만 왜 하필 나만 이렇게 멀쩡한 걸까?'
그러나 혜주는 이러한 궁금증을 가졌다. 왜 하필 자신만이 가장 늦게까지 살아남는 걸까? 어째서 넷 중에서 혜주 자신이란 말인가? 신께서 잠시 실수를 하신 걸까?
이곳 붉은방에서 이루어지는 이 연쇄적인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것이 병원균이든 독극물이든 그것에 가장 많이 노출된 사람은 과장 다음으로 혜주였다. 그런데 어째서 혜주는 아직 이렇게 멀쩡한 걸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과장 다음의 희생자는 혜주여야 마땅했다.
혜주는 쌀쌀한 기운에 창문을 다시 닫았다. 그러자 검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드러났다.
거의 대부분을 밤잠을 자지 못한 혜주의 얼굴을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죽게 된다면 다들 나의 마지막 얼굴을 이대로 기억하겠지?'
혜주는 갑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흉한 모습으로 기억되기가 싫어졌다.
혜주는 책상 한쪽에 놓여있는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우스꽝스럽게도 화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혜주는 가방을 뒤적였다. 이것저것이 온통 뒤섞여 있어 립스틱 하나도 제대로 찾기 힘들었다.
좌르르.
혜주는 짜증스럽다는 듯 가방을 바닥에 쏟아버리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이성을 잃어가는 자신이 싫었지만 혜주는 이미 자기 자신을 통제할 의욕을 잃어버렸다.
혜주는 엎드려서 주섬주섬 널부러진 물건들 사이에서 립스틱을 찾기 시작했다.
"아얏!"
혜주는 손바닥을 찌르는 뾰족한 것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혜주는 손바닥을 부여잡고 자신의 손을 찌른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병뚜껑이었다. 혜주는 조심스럽게 병뚜껑을 집어 올렸다.
冬蟲夏草(동충하초).
진규가 혜주에게 보낸 드링크제의 뚜껑이었다.
혜주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진규의 얼굴을 볼 수도 있었으리라. 진규와의 안타까운 인연이 다시 한번 혜주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혜주의 머릿속으로 불현듯 떠오르는 무엇이 있었다.
16.
동충하초. 겨울에는 곤충이었다가 여름에는 식물이 된다.
그것은 살아있는 누에의 세포에 포자를 내려 번식을 하는 버섯을 일컫는 말이었다. 살아있는 애벌래의 몸의 양분을 빨아 자라나는 버섯.
혜주는 현미경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세포를 뚫어지게 보았다.
만일 이것이 외부에서 들어온 포자 때문에 부패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폐세포 속에 자리잡고 있던 포자가 번식을 하는 것이라면?
혜주는 자신이 결정적인 단서를 잡았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살아있는 곤충의 몸에서 번식하는 세포가 변형하여 인간의 페세포 속에서 번식할 수 있게 되었다면? 만일 이번 사태의 원인이 그런 것이라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지금까지 추출한 모든 폐조직은 급속도로 섬유화를 이루어 갔고, 그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만일 혜주가 지금껏 혼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진규가 보낸 그 드링크제의 약효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이미 치료약은 존재하는 셈이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살릴 수도 있다!'
혜주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진규를 찾아가야 해.'
진규가 개발한 그 약물의 자세한 정보만 알 수 있다면 해결은 이미 보인 셈이었다. 남은 일은 상부에 보고를 해서 진규가 개발한 그 약품을 대량으로 보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혜주의 머릿속에는 반론이 떠올랐다.
'만일 내 추측이 틀린 것이라면?'
그렇게 된다면 문제였다. 혜주가 이 곳을 나가서 진규를 만날 수 없으므로 틀림없이 본부 측에서는 진규를 억지로 이곳 붉은방으로 끌고 올 것이었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만일 혜주의 추측대로 진규의 신약이 해독제가 될 수 없다면 이번에는 진규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이었다.
혜주는 고민했다. 과연 진규를 이 위험 속으로 빠뜨려도 되는 것인지.
'어떻게 몰래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오래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일분 일초에 몇 명이 더 죽어나갈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혜주는 대대장과 담판을 짓기로 했다. 그리고 당장 대대장의 막사로 향했다.
막사 앞에는 초병 하나가 문을 지키고 있었다. 혜주는 숨이 차도록 뛰어와서는 초병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대장님을 만나야 해요. 급해요."
"무슨 일이신지 말씀을 하시면 제가 깨우겠습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고 하세요."
혜주는 아직 숨을 채 고르기도 전이었다. 초병은 혜주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대대장을 깨우러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혜주는 전번처럼 막사 안으로 불쑥 들어가지 않고 기다렸다. 이번에는 대대장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되었다. 어떻게든 그를 설득시켜야만 하니까.
잠시 후 막사 안에 불이 켜졌다. 안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초병이 문으로 나왔다.
"들어오시랍니다."
혜주는 안으로 들어섰다.
대대장은 군복 셔츠를 바지 안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그래. 단서를 찾았다고?"
"네."
"말해보시오."
"확실친 않아요. 하지만 제 추측으로는 이번 발병의 원인은 버섯이예요."
"버섯?" 대대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혜주를 쳐다보았다.
"네. 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버섯 중에 동충하초라는 게 있어요."
"계속하시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겨울에는 곤충이었다가 여름에는 풀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버섯이 살아있는 누에에 포자를 내려서 반년만에 누에의 양분을 빨아먹고 성장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당신 말은……?"
"그 버섯 포자가 인간의 폐에 포자를 번식시키고 있다는 거죠."
"그게 가능한 말이오?"
"물론 지금까지 그런 종이 발견된 적은 없어요. 하지만 변종이라면 가능하죠."
"그걸 증명할 수 있소?"
"아직은요. 하지만 방법이 있어요."
"뭐요?"
혜주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지금부터 대대장을 어떻게 설득시키느냐가 관건이니까.
"제 친구 중에 이 동충하초를 연구하는 학자가 있어요. 그리고 이곳 붉은방에 오기 전에 그 친구가 보낸 동충하초로 만든 드링크제를 마시고 왔어요. 시중에는 없는 제품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었는데, 저만 죽지 않은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 드링크 때문이라는 말인가?"
"물론 확실친 않아요. 모두 제 추측이죠. 하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여기 있는 모두의 생명을 구할 수 있어요. 그 친구를 한 번만 찾아갈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지금 작전지역을 나가겠다는 말을 하는 거요?"
"다시 돌아올 게요. 치료약을 가지고서."
"그럴 순 없소. 상부의 지시가 있지 않는 한은."
"하지만 누구도 그걸 허락해 주지 않을 거예요. 중령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해요. 부탁 드릴게요. 모두를 살리는 길이에요."
"미안하지만 내 지휘권을 벗어나는 일이오."
대대장은 차갑게 거절했다.
"아뇨. 여기 이곳의 지휘관은 중령님이에요. 중령님께서 결정하실 수 있어요."
"군대에는 지휘계통이라는 것이 있소."
"하지만 월남전에서는 그렇지 않으셨다면서요. 이곳도 전쟁터예요. 오늘밤 안으로 치료약을 구해오지 않으면 아랫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을 거예요."
대대장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까?
"생각해보세요. 중령님의 부하들도 함께 죽어가고 있잖아요. 게다가 이번 작전을 성공했을 때 정부에서는 엄청난 보상이 주어질 거예요. 아마도 중령님도 별을 달 수도 있을 거예요."
"난 보상 따위를 바라고 이런 일을 하는게 아니오!"
대대장이 소리쳤다. 순간 혜주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아니, 전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라……."
혜주는 대대장의 예상치 못한 질책에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의 말을 주워담으려 했다.
"됐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소."
대대장은 그렇게 혜주의 말을 자르고서는 다시 한 번 긴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혜주는 조용히 대대장의 곁에 서서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좋소."
마침내 대대장은 혜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깐 기다리시오."
대대장은 책상 한 구석에 마련된 전화 쪽으로 가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이쪽으로 좀 와."
대대장은 아주 짧게 명령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혜주는 어찌 해야 할지를 몰라 그대로 서 있었다.
대대장을 그러고도 한참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금 부른 그 사람을 기다리는 듯 보이기도 했다. 혜주 그대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충성! 부르셨습니까."
달려왔는지 숨이 찬 기색이 역력한 중사 한 명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한참 자고 있다가 연락을 받았을 텐데 채 3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혜주는 군인의 민첩성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잘 들어요. 김혜주씨." 대대장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중사가 혜주씨를 비밀 통로로 해서 작전지역 바깥으로 인도해 줄 거요. 그러면 근처에 주차장이 보일거요."
대대장을 자신의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이건 내 차 열쇠요. 버튼을 놀렀을 때 시동이 걸리는 차가 내 차요. 그걸 타고 그 친구를 찾아가요. 만일 혜주씨가 생각한 그것이 병의 원인이 맞다면 어떻게든 치료약을 구해 오시오. 그러나 혜주씨가 틀렸을 경우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 내일 아침해가 뜨기 전에 이 곳에 도착하시오. 그러나 만일 동이 틀 때까지 이 곳에 당도하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복귀하지 말아요. 간밤에 혜주씨가 죽은 걸로 처리할 테니까."
"중령님……."
혜주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혜주씨를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오. 작전 구역에서 누군가가 이탈한 것이 발각되면 내 처지가 곤란해지기 때문이오."
중령은 주머니에서 작은 캡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혜주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군인들이 특수 임무를 지니고 위험지역에 파견될 때 소지하는 것이오. 캡슐을 입안에서 깨물어 터뜨리면 고통 없이 바로 죽을 수 있어요. 만일 혜주씨의 추측이 틀린 것이라면 어차피 혜주씨는 죽을 거요. 그러니 동이 틀 때까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으면 병이 전염되지 못하도록 어딘가 고립된 장소를 찾아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
"네."
혜주는 캡슐을 손이 꼭 쥐었다.
"설마 이곳을 이탈해서 외부에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알리지는 않겠죠?"
대대장은 확인하듯 혜주에게 물었다.
"물론이에요. 그럴 것 같으면 이 곳에 오지도, 아직 여기 이렇게 남아있지도 않았을 거예요."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런 혜주씨를 믿겠소."
혜주는 대대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사, 이 아가씨를 작전 지역 밖으로 안내해 주게."
"네, 중령님."
중사는 그렇게 대답을 했다. 그는 대대장이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는 충직한 부하로 보였다. 작전지역 외부로 통하는 비밀통로까지 알고 있을 정도라면 엄청난 신임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오시죠."
중사는 혜주에게 말하고는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혜주는 다시 한 번 대대장에게 인사를 하고는 중사를 따라 막사 밖으로 나갔다.
17.
혜주는 중사를 따라 한참을 걸어갔다. 그곳은 이곳에 와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산길이었다.
마침내 중사와 혜주는 어느 동굴 입구에 다다랐다. 중사는 바지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군용 플래쉬를 꺼내 길을 비추었다. 혜주는 조심조심 중사의 뒤를 밟아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허리를 숙이고서야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만큼 동굴의 위아래 폭은 낮았다. 혜주는 발목까지 물이 차 오른 것을 느꼈다. 천장에서도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중사를 아무 말도 없이 계속 앞장서서 걸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저 끝에서 약간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출구가 보인다 한들, 지금은 캄캄한 밤인데 불빛이 새어 들어올 리가 없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더 자세히 다가가자 비밀이 풀렸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전등이 달려있었다. 이미 전선까지 연결된 곳이라면 이 곳은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통로임이 틀림없었다. 혜주는 대대장이 이미 유사시에는 이 곳을 통해 탈출할 수 있도록 보장받고서 이 작전에 투입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중사는 전등이 달려있는 천장부분을 힘껏 밀어 올렸다. 그러자 위로는 별이 총총 떠있는 밤하늘이 훤히 드러났다.
"잘 들어요. 이 곳을 나가서 산길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공영 주차장이 있을 겁니다. 거기서부터 중령님께서 시키신 대로 차를 찾아서 타고 가요. 제가 데려다 줄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입니다. 저 역시 작전 구역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요."
"네 고마워요."
"또 한가지.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길 빕니다. 만일 당신이 실패하면 중령님은 보안을 위해서 나까지 제거하려고 들 겁니다. 물론 나 역시 국가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군인이지만, 반드시 당신이 성공하기를 빌겠어요."
"알겠습니다. 반드시 돌아올게요."
중사는 자신의 양손을 모아서 받침대를 만들었다.
"자, 이걸 밟고 올라가요."
혜주는 중사의 손을 딛고 위로 올라갔다. 중사는 힘껏 혜주의 발을 들어올려 혜주를 바깥으로 내어보냈다.
혜주가 나온 곳은 조그마한 참호였다. 참호 아래에 그런 비밀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혜주가 뚜껑을 닫으려고 하기도 전에 발 아래의 뚜껑은 닫혀버렸다. 혜주는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아래로 연결된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내려가자 정말로 공영 주차장이 나왔다. 이미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진 곳인지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차라고 해 봐야 채 다섯 대도 보이지 않았다.
혜주는 주머니에서 대대장의 차 키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딩동. 부르릉.
멀리 있는 승용차 한 대에 시동이 걸렸다. 혜주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차에 올라탔다.
얼마나 달렸을까. 혜주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강원도에서 경남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차도 거의 없는 해안도로를 혜주는 엄청난 속력으로 달렸다. 차의 성능도 좋았다. 속도계는 거의 시속 160 킬로미터를 넘어가고 있었다.
해안도로에는 가끔 인근 산에서 야생 동물들이 나와 차에 치이기도 하는 법이지만 혜주의 앞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상 혜주의 지금 심정으로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면 그대로 치고 지나갈 각오도 되어있었다.
결국 혜주는 자정이 되기 전에 밀양 관내에 진입할 수 있었다. 혜주는 고향을 떠난 지 10년만에 다시 이 곳에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물론 옛 고향을 찾는다는 그런 여유있는 형편으로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어둠 속이었지만 주변 풍경을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혜주는 옛 기억을 더듬어 밀양 대학교 쪽으로 핸들을 틀었다.
정문에는 수위아저씨로 보이는 사람이 차단기 너머로 어슬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혜주는 정문의 차단기 바로 앞으로 차를 멈췄다.
수위아저씨는 이런 야밤에 누가 찾아왔나 궁금한 표정으로 차 쪽으로 걸어왔다.
"무슨 일이슈?"
"저기 죄송한데요. 석진규 박사님 댁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아, 그 양반? 왜? 만나러 오셨수?"
"네. 옛날 친구인데 지금 급하게 꼭 좀 만나야 하거든요."
"그래?"
수위아저씨는 혜주를 수상쩍은 듯이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야 연구실에서 거의 사는 사람이니 아마 지금도 연구실에 있을 거요. 이름을 말해주면 내가 전화를 해서 들여보내도 되냐고 물어보리다."
"김혜주라고 전해주세요."
"좀 기다리슈."
수위아저씨는 차단기 옆에 마련된 부스 안으로 들어가더니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짧은 통화 후에 차단기가 놀라갔다.
"저기 보이는 건물이 연구실이우."
수위아저씨는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물로 손가락질 하며 혜주에게 소리쳤다. 혜주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차를 운전해 들어갔다.
건물 앞에는 진규가 나와서 서 있었다. 혜주는 진규 앞으로 차를 멈췄다. 혜주가 차에서 내리자 진규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혜주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진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말을 꺼냈다. 헤주 역시 10년만에 만난 옛 친구와의 재회에 쑥스럽기도 하고 한없이 반갑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진규야. 사실 말야. 너무 급한 일이 있어서 찾아왔어."
"어쨌든 이렇게 만나니까 정말 반갑다. 연구실로 좀 들어올래? 뭐라도 좀 마시게."
진규는 혜주의 사정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 혜주는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진규의 연구 자료를 보아야 할 필요도 있으니까.
진규의 연구실로 올라가면서 혜주는 고민했다. 진규에게 모든 걸 설명해야만 할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외부인에게 붉은방에서 이루어 진 일을 알리는 셈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보안에 구멍이 생긴다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진규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그의 연구물을 공개해 달라고 해도 되는 것일까? 동충하초에 대한 연구는 진규가 오랜 세월을 연구한 피땀의 결과일 것이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신의 연구 결과를 넘겨달라고 해도 되는 것일까?
혜주는 진규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버섯을 연구했다는 진규의 말. 혜주는 진규를 믿기로 했다. 진규라면 혜주의 입장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진규라면 붉은방에서 이루어 진 일에 대해서 알게 되더라도 비밀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연구실에 도착하자 혜주는 진규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진규야. 실은 엄청난 일이 있어. 그리고 네 도움이 필요해."
"무슨 일인데 그래? 물론 이 시간에 이렇게 허겁지겁 찾아올 정도면 큰일이겠지."
"아마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일 일거야. 지금 강원도 일대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있어. 그리고 난 지금 거기서 오는 길이야."
18.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났을 때 진규의 표정은 예상대로 굳어져 있었다.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일 테니까.
진규는 혜주의 말을 다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어. 아까 말한 첫 희생자의 이름 말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혜주는 진규의 말에 깜짝 놀랐다.
"뭐라구?"
"그 사람. 이 곳에서 버섯재배를 하는 어떤 사람과 자주 왕래하면서 지내던 사람이야. 한 번 소개를 받은 적도 있어."
"정말?"
그러고 보니 첫 희생자의 집에서 경남행 차표가 수두룩하게 발견된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 곳도 전염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이 곳에는 피해자가 없었구나."
"아니, 어쩌면 피해자가 있었는지도 몰라."
"무슨 말이야?"
"그 사람과 자주 만난 그 버섯재배를 하던 사람의 일가족이 사망했어. 거의 한달 전쯤의 일이야."
"그럴 수가. 그렇다면 왜 이곳에는 병이 퍼지지 않은 거지?"
"일가족이 버섯 재배를 하느라 워낙 외진 곳에 살았어. 가족이 죽자 산동네에서 의사 노릇을 하는 영감이 사망진단을 내렸지. 혼자 사는 영감인데 진짜 의사 면허증이 있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는 돌팔이야. 때로는 수의사 노릇도 하고. 그 영감과 인부 몇몇이 일가족을 산에 매장했는데, 매장을 마치고 내려오던 중에 낭떠러지에서 차가 굴러 떨어져 모두 사망했어. 다들 그저 단순 사고라고 생각했지."
"그렇다면 이미 이 곳에서 먼저 병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구나. 우연히도 전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래."
혜주는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고향이 자칫하면 죽음의 도시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혜주야. 가 볼 데가 있어."
"어딜?"
"일가족이 묻혀 있는 곳을 알아. 그 곳에 가서 무덤을 파헤쳐 보면 진짜 병의 원인이 버섯 때문인지 어떤지 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없어. 내일 날이 새기 전까지 돌아가야 해."
"산을 질러가는 지름길을 알아. 내 짚 차로 가면 얼마 안 걸릴 거야."
혜주는 결국 진규를 따라 가기로 했다. 희생자의 시신에서 완성된 균사를 채취할 수 있다면 밤새 치료약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차를 달려 산길로 접어들자 주위는 점차 음산해졌다. 곳곳에 무덤이 보이는 산은 옛적부터 귀신이 나온다던 그 산이었다. 육이오 동란 때 죽은 사람들을 무작위로 끌어다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산은 그 후로도 이름 없이 거리에서 죽어간 수많은 걸인들의 묘지가 되었다.
한참을 길도 안 보이는 것 같은 산길을 헤치고 올라간 진규의 짚 차는 약간 평편한 산중턱에서 멈춰 섰다.
"여기야."
진규와 혜주는 차에서 내렸다. 어두운 수풀 너머로 약간 두툼한 무덤이 보였다. 볼록한 것이 하나 뿐인 것으로 봐서 일가족을 함께 매장해버린 모양이었다.
진규는 뒤쪽 트렁크를 열어 삽을 한 자루 꺼냈다.
"삽, 한 자루뿐이니? 나도 도울게."
진규는 혜주의 말에 순순히 삽을 한 자루 더 꺼냈다. 시간이 없었다. 여자인 혜주에게 삽질은 버거운 일 일 테지만 둘이 하는 것이 혼자 하는 것보다는 빠를 것이었다.
둘은 각기 삽을 들고 무덤가로 가서 섰다. 혜주는 편히 잠든 자들을 다시 깨우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이 화가 나서 혜주에게 저주를 퍼붓는 대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당장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당신들의 유해가 필요하니까.
진규가 먼저 삽질을 시작했다. 농군의 아들인 만큼 삽질이 능숙했다. 혜주도 어설픈 폼새로 진규를 도와 삽질을 계속했다.
얼마나 삽질을 했을까? 둘은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허리 펼 새도 없이 삽질을 계속했고, 등줄기에는 더운 땀이 났다. 차고 어두운 밤 공기에 진규의 몸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올 정도였다.
딸깍.
혜주의 삽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드디어 관이 있는 부분까지 파내려 온 모양이었다. 혜주는 삽질을 멈추었고, 진규가 관의 위쪽에 있는 흙을 삽으로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관은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 인간들이 무덤 밟기가 귀찮으니까 관 세 개를 하나에 묻어버렸군."
진규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리고는 삽 끝을 제일 작은 관의 틈새에 넣고 힘껏 재껴 올렸다.
뜨득!
관이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혜주와 진규는 두려움과 기대가 섞인 눈으로 관 쪽을 쳐다보았다. 진규가 조심스럽게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서 관뚜껑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모습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체격의 아이의 시신에 온통 버섯이 자라나 있었다. 팽이버섯처럼 가느다란 형태의 버섯이 입으로 코로 그리고 피부 전체로 온통 퍼져 있었다. 거의 사람의 형상을 한 버섯 군집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혜주와 진규는 그 끔찍한 모습과 지독한 시체 썩는 냄새에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진규는 이윽고 혜주에게 말했다.
"혜주야. 내 차 트렁크에 커다란 비닐봉투가 있을 거야. 좀 가져다 줘."
"비닐봉투? 시신을 가져가게?"
"응. 통째로 가져가자. 이 변종의 비밀을 밝혀야지."
"어, 그래."
혜주는 시신의 충격적인 모습에 거의 정신을 잃어있었다. 시신을 통째로 운반하는 것이 좋은 생각인지 어떤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그냥 진규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진규와 혜주는 아이의 시신을 그대로 들어서 비닐 봉투 안에 담았다. 봉투는 무엇을 담는 용도인지 사람의 몸이 들어가고도 훨씬 남았다. 혜주와 진규는 끙끙대며 시신을 차의 트렁크에 실었다.
"이제 다시 연구실로 가자."
"응."
진규의 말에 혜주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혜주는 그러면서 진규의 침착함에 찬탄을 했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일을 눈앞에 두고도 저토록 냉철하게 일을 처리해 나아갈 수 있다니. 혜주는 진규가 자신처럼 의사가 되었다면 아마 과장과 같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진규는 차를 출발시켰다. 차는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국도로 내려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차는 없었다. 진규는 급한 마음에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한참을 고속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앞쪽으로 경찰 초소의 불빛이 보였다. 이 곳에 올 때에도 지나쳤던 검문소였다. 진규는 차의 속력을 서서히 줄였다.
검문을 하던 경관이 갑자기 불봉을 흔들어 진규의 차에 정지 신호를 보내왔다. 혜주는 돌연 불안함을 느꼈다. 차의 트렁크에는 시신이 실려있다. 만일 이것이 발각되는 날에는.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설명해야만 하나?
혜주는 경관이 진규의 차를 그냥 통과시켜주기만을 기도했다. 그러나 경관은 결국 차를 세웠다.
진규가 운전석의 창문을 내리자 경관이 안쪽으로 후레쉬를 비추며 물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이 근방에서 밀렵을 한다는 제보가 있어서 검문 중입니다."
"저희는 밀렵 같은 거 하는 사람들 아닙니다."
"네. 그럼 두 분 어딜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아, 저 그게."
진규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차에 흙이 잔뜩 묻었군요.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 같은데, 이 늦은 밤에 산에는 뭐하러 가셨습니까?"
"그게 말하기가 좀 곤란한데."
진규는 계속 머뭇거렸다. 그러자 경관의 얼굴에는 더욱 의심의 빛이 흘렀다.
"실례지만 트렁크를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결국 경관은 진규에게 트렁크를 열 것을 지시했다. 진규의 얼굴에는 진땀이 흘렀다.
혜주 역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뭐라고 설명을 하여야 할까? 만일 이 자리에서 체포된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때였다. 진규가 경관에게 신분증을 내밀었다.
"저기 제가 이 근처 밀양 대학교에 교수로 있는 사람입니다. 버섯을 연구하죠. 지금 산에서 버섯을 좀 채취해오고 있습니다."
"그래요?"
경관은 진규의 신분증을 확인하더니 그래도 미심쩍은지 다시 진규를 향해 말을 했다.
"어쨌든 트렁크 안을 좀 봐야겠습니다."
진규는 결국 트렁크를 열었다. 그리고는 비닐봉투를 조금 열어서 버섯 부분만을 조금 보였다. 그러자 시체 썩는 냄새가 확 올라왔다.
"이게 무슨 냄새요!"
경관이 급히 얼굴을 돌리며 진규에게 소리쳤다.
"이게 상한 버섯이라서요. 저 같은 학자에게는 상한 버섯도 연구 대상이거든요."
"알겠소. 어서 트렁크 닫으시오."
경관이 코를 막으며 진규에게 말했다. 진규는 얼른 트렁크를 닫고는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경관이 진규에게 그렇게 인사를 했다. 진규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출발하자 진규와 혜주는 동시에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19.
연구실 건물 앞에 도착한 것은 거의 새벽 세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혜주와 진규는 비닐에 쌓인 아이의 시신을 연구실까지 들고 올라갔다.
아이의 시신에서 버섯의 성체를 채취한 진규는 자신이 개발한 약품으로 몇 번에 걸쳐 실험을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혜주에게 말했다.
"확실해. 내가 개발한 추출물이 균사를 파괴하고 있어. 이대로 가져가서 복용해도 이미 면역성을 키울 수 있어."
결국 혜주의 추측이 맞은 것이었다. 혜주가 붉은방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모두 진규가 준 드링크를 마시고 내성이 생긴 때문이었다.
진규는 또다시 연구실 한 쪽에 설치된 냉동보관실에서 조그마한 약병을 꺼냈다.
"이건 내가 동충하초에서 추출한 원액이야. 만일 발병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걸 폐동맥에 주사하면 살릴 수가 있을 거야."
혜주는 진규에게서 약병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진규야."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 너야말로 그 곳으로 들어간 용기가 대단한 거지. 내 연구실에 있는 드링크 샘플이 한 300병정도 될 거야. 이거면 일단 급한 사람들에게 지급할 수 있을까?"
"응."
"좋아. 그럼 이걸 가지고 어서 그 곳으로 가."
혜주는 아쉬웠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진규와 좀 더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작전이 종료되는 대로 반드시 진규를 다시 찾아오리라 다짐했다.
"참, 진규야. 만일 이게 치료용으로 대량 생산되게 된다면 네 연구는 사업성을 잃게 될 거야. 곧 상품으로 출시될 예정일 텐데 아마 타격이 클 거야."
"상관없어. 어차피 연구를 시작할 때부터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혜주는 진규의 말이 더욱 고마웠다.
"약속할게. 정부에서 분명히 보상이 있을 거야. 내가 꼭 보상을 받아낼게. 금전적으로든지 아니면 국립 연구소에 평생 연구원 자리를 보장한다든지 네가 원하는 대로 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어차피 난 지금 내 위치에서도 전혀 불편함 없으니까."
진규와 혜주는 샘플로 제작된 드링크제 300병을 대대장의 차에 실었다. 그리고 혜주는 운전석에 앉았다.
"일이 끝나는 대로 꼭 찾아올게."
"그래. 어서 가. 늦겠다."
"응."
혜주는 차를 출발시켰다. 백미러로 손을 흔드는 진규의 모습이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두 친구의 10년만의 재회는 이런 식으로 멋없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혜주는 해안도로를 질주했다. 빨리 가지 않으면 동이 틀 것이었다. 어차피 치료약을 구하는데 성공했으므로 동이 터도 상관은 없다지만 될 수 있다면 대대장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작전지역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동쪽 하늘에서 여명이 비춰오기 시작했다. 혜주는 비밀통로로 다시 들어가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혜주는 핸들을 틀어 처음 붉은방으로 들어갔던 그 길로 차를 몰아갔다.
바리케이트가 쳐진 그 곳에는 초병이 지키고 있었다. 초병은 대대장의 차번호를 알아보는 듯 움찔했지만 이내 대대장이 차를 타고 들어올 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총을 두 손으로 잡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혜주는 바리케이트 앞에서 차를 세웠다. 초병은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다가오더니 차에 탄 사람이 혜주라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어떻게."
"놀랄 것 없어요. 일단 바리케이트부터 치워줘요. 들어가야 하니까."
"일단 상부에 보고하고……."
초병은 너무 몰란 나머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머뭇 거렸다.
"중령님도 이미 알고 계세요. 걱정 마요."
혜주는 뒷좌석에 놓여있는 드링크 한 병을 꺼냈다. 그리고는 창 밖으로 내밀었다.
"자 받아요."
"뭡니까?"
"치료약이에요. 우리 모두를 살려줄. 이걸 구하러 갔던 거예요."
초병을 머뭇거리며 병을 받아들었다.
"살고 싶으면 얼른 마시는 게 좋을 거예요."
초병은 못 믿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병을 들고는 무전으로 뭐라고 뭐라고 연락을 취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날은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초병은 마침내 무전을 다 듣고 나더니 들고 있는 병을 따서 꿀꺽 삼켰다. 그러더니 차 앞에 놓인 바리케이트를 힘겹게 옮겨 치웠다.
혜주는 차를 그대로 운전해서 붉은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모두를 살릴 수 있다.'
죽음의 마을이 된 붉은방에도 희망의 햇살이 비추이는 순간이었다.
혜주가 붉은방에서 철수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다. 산골마을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붉은방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일들은 비밀 속으로 묻혀져 갔다. 과장을 비롯한 모든 희생자들은 잘 조작된 사고로 위장되어 가족들에게 사망소식이 전해졌고, 혜주는 과장의 영결식에도 참가를 했다.
혜주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병원에서의 생활은 전과 다름없었다. 다만 한가지 달라진 점은 수시로 정부측과 긴밀한 연락을 유지한다는 것 뿐.
오늘은 국무총리와 점심 약속이 되어있었다. 다섯 붉은손들 중 살아남은 대대장과 혜주가 함께 참석하기로 되어있었다. 아마도 보상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갈 것 같았다.
총리의 집무실에 도착한 것은 한 10분 정도 약속시간에 늦었을 때였다. 혜주는 비서의 안내를 따라 총리실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총리와 대대장이 먼저 와서 혜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탁자에 앉아 둘은 유쾌하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대장 역시 국무총리와 맞대면을 할 정도로 거물급 인사 취급을 받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죠."
혜주는 사과의 말을 앞세워 문으로 들어섰다.
"아, 뭐 이쯤이야. 오기만 하면 된 거지."
대대장이 유쾌하게 대답하면서 혜주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김혜주씨." 총리 역시 혜주를 웃는 얼굴로 반겼다.
"일단 앉아요."
혜주는 빈 의자에 앉았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오늘 두 분과 점심 식사 자리를 마련한 것은 보상 문제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중령과는 향후 5년 이내에 소장으로 진급을 하는 것으로 이미 합의를 보았소이다. 이제 혜주씨만 남았는데. 혜주씨는 특별히 원하는 것이 있소?"
"글쎄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바는 없어서."
"그래요? 일단 정부 쪽에서는 최태식 과장님이 맡고 계시던 국립보건원 연구이사 자리를 제안하고 싶은데요."
혜주는 총리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했다.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혜주에게는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과장이 혜주에게 주려고 했던 바로 그 기회. 혜주는 그것이 필요했다.
"네. 멋진 제안이네요. 하지만 전 그런 시시콜콜한 것보다는 과장님이 실제로 맡으시고 계시던 일을 이어 받고 싶은데요."
"실제로 맡았던 일이라?"
총리는 짐짓 혜주를 떠보았다. 혜주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최태식 중령님이라고 해야겠군요."
총리의 얼굴에 놀라움이 비쳤다. 설마 혜주가 과장의 비밀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었다. 옆에 앉아있는 대대장의 얼굴에도 의아스런 놀라움이 서렸다.
"과장이 군인이었단 말이요?" 대대장이 총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 이 참. 이런 자리에서 말하기가 곤란한 문제군요." 총리는 대대장의 눈치를 살피며 얼버무렸다.
"일단 나가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그러죠."
셋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20.
혜주는 저녁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붉은방에서 나온 이후로는 이런 식의 여유로운 생활이 당분간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총리와의 점심 식사에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우선 혜주는 자신의 제안대로 과장의 위치를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다. 총리는 혜주가 여자라는 이유로 과장과 동일한 계급으로 임무를 맡게 되는데 약간 주저하는 듯 했으나, 그 역시 혜주가 과장에 버금갈 정도로 모든 일을 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우스꽝스러웠던 것은 대대장의 표정이었다. 과장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챈 그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혜주는 과장과 자신이 몰래 폐조직의 일부를 빼돌려 밤늦게까지 연구를 했다는 사실까지 말해버려 대대장을 더욱 놀래켜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그리고 진규. 진규의 이야기도 총리에게 꺼냈었다. 진규의 연구가 이번 사태 때문에 상업성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총리는 진규가 원한다면 상당액의 금전적 보상과 농림부 산하의 연구기관에서 편안히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외에도 혜주는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연락을 하라는 총리의 당부를 들었다. 물론 앞으로 혜주 쪽에서 도움이 필요할 일은 없을 테지만.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되어간다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진규를 만나서 진짜 옛친구로서의 회포를 풀고, 지난 이야기를 나누는 일만이 남았다. 혜주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딩동.
벨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혜주는 조심스럽게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한 양복을 입은 중년 신사가 서 있었다.
'또 정부에서 나온 사람일까?'
혜주는 궁금해졌다. 설마 또다시 제2의 붉은방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혜주는 농담처럼 혼자서 되뇌이며 문 밖에 선 사람에서 물었다.
"누구시죠?"
"김혜주씨 댁인가요?"
"그런데요? 무슨 일이시죠?"
"저는 석진규씨 변호사 되는 사람입니다."
진규의 변호사? 혜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진규가 보상을 타내기 위해 변호사라도 선임했단 말인가?
아니, 결코 그럴 리는 없었다. 혜주는 다시 한번 변호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거죠?"
"석진규씨의 유언장을 집행하러 왔습니다."
혜주는 다시 한번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는 급한 마음에 문을 열어젖혔다.
"유언장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진규가 죽기라고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변호사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봉투를 꺼냈다.
"석진규씨가 죽기 전 김혜주씨 앞으로 맡긴 편지입니다. 저는 이것을 전하러 왔습니다."
혜주는 변호사로부터 봉투를 받아들면서도 아직까지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진규가 죽었다구요?"
"네. 어제 연구실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혜주의 눈에서는 그제서야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혜주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사인은 뭐죠?"
"폐경색입니다. 아무래도 과로가 원인인 것 같다고 그러더군요."
혜주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폐경색이라는 말에 일말의 의심이 들기는 하였다. 혹시 또 다른 변종이 나타나 진규의 목숨을 앗아가버린 것은 아닐까?
"김혜주씨게게 남긴 것은 그 봉투가 전부입니다. 개봉은 직접하시도록 되어있습니다.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네."
혜주는 돌아서서 가는 변호사의 뒤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의 윗부분을 찢었다. 안에는 얇은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혜주는 편지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혜주에게.
혜주야 네가 이 편지를 읽을 쯤에는 내가 이미 이 세상에 없겠구나. 혹여 누군가 이 편지를 보게 될까 두려워 자세한 말을 여기에 적을 수는 없구나. 다만 너를 위해 마련한 선물이 있어. 내 연구실에 가서 문에서 세 번째 줄에 있는 마룻바닥을 열어봐. 그 속에 네게 줄 선물이 있어. 꼭 혼자만 열어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석진규.
혜주는 편지를 다 읽고는 달려가서 밀양대학교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그리고는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밀양대학교죠?"
"네 그런데요?"
"석진규 교수님 연구실을 혹시 지금 누가 쓰고 있나요?"
"아뇨. 지금은 비어있습니다."
"전 석진규 교수님 친한 친구인데요. 그 연구실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아뇨. 외부인에게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혜주는 그대로 전화를 끊고는 총리실로 통하는 핫라인으로 다시 전화를 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하셨죠? 지금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어요."
혜주가 경찰과 함께 진규의 연구실을 찾은 것은 바로 다음날 새벽이었다. 놀랍게도 전화 한 통에 경찰의 동행에 법원에서 발부한 수색 영장까지 혜주에게 지원되었다. 혜주는 국가의 권력이라는 것이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엊그제 돌아가신 양반 수사할 것이 뭐가 있다고."
연구실의 문을 따는 수위아저씨의 표정에는 평소에 진규에게 가지고 있던 친근함이 그대로 우러나왔다. 동행 경찰과 혜주는 수위아저씨가 문을 열 때까지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셋은 안으로 들어갔다.
"죄송하지만 수위아저씨와 밖에서 좀 기다려 주시겠어요?"
혜주는 경찰에게 그렇게 부탁을 했다. 경찰은 말없이 수위아저씨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혜주는 연구실의 문을 닫았다.
혜주는 조심스럽게 마룻바닥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과연 문에서 세 번째 줄의 마룻바닥이 헐겁게 흔들렸다. 혜주가 나무의 한쪽 끝을 누르자 다른 한쪽 끝이 들려 올라왔다. 혜주는 그대로 나무토막을 들어내었다.
그 안에는 두 개의 칸으로 나뉘어져 수십 개의 파일과 여러 샘플병들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칸 가운데에 하얀 봉투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봉투 위에는 '혜주에게'라고 쓰여있었다.
혜주는 봉투를 집어들고 안에 있는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혜주에게.
드디어 이 곳을 열었구나.
혜주야 기억나니? 지난 날 우리가 약속했던 것. 암을 고치는 의사가 되자고.
물론 넌 의사의 길을 걸었지만 난 그렇지가 못했지. 하지만 난 결코 포기한 것이 아니었어.
난 내가 연구하는 동충하초를 통해 암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 암세포만를 파괴하면서 성장하는 버섯 포자를 개발하려고 생각했지. 그리고 오랜 연구는 분명 결실을 맺었단다.
물론 그 와중에 많은 어려움도 있었고 예기치 못한 희생자들도 있었어. 난 죽어가는 말기 암환자들을 수소문해서 그들에게 몰래 실험을 했어. 그리고 그 테이타를 통해 다시 약품을 개량하는 작업을 반복했지. 그리고 연구는 거의 성공단계에 접어들었어.
난 그러한 실험에서 한 번도 죄책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어. 그들은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서 영원히 암을 퇴치하는 신약을 개발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라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예기치 않게 너에게 붉은방의 소식을 듣게 되었어. 그리고 난 내가 의도하지 않은 엄청난 결과에 놀라고 말았지. 난 내가 개발한 그 세포가 그토록 무서운 전염병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될지 꿈에도 몰랐어. 난 내가 행한 그 무서운 짓에 뼈저리게 반성했어.
그리고 나는 결심했어. 그 모든 책임을 지기로. 내가 억울하게 죽어간 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난 마지막 실험을 나에게 했어. 그리고 난 분명히 지금 죽어있겠지.
혜주야. 지금 여기에는 정확히 두 개의 샘플과 연구자료가 있어. 만일 내가 죽은 원인이 폐출혈이라면 A연구 결과가 암을 퇴치하는 새로운 신약이야. 그것이 아니라 내가 폐경색으로 죽었다면 B연구 결과가 그것이겠지.
어찌되었든 네가 이 편지를 읽는 순간이 인류가 암을 정복한 첫 순간이 되겠구나. 축하한다. 난 이 모든 연구의 업적을 너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 이건 우리가 어린 시절 함께 꿈꾸어 온 것이니까 우리 둘의 것이야.
그럼 혜주야 안녕.
석진규.
편지를 끝까지 읽은 혜주는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버렸다. 혜주는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에는 눈물만이 흐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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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어서 반으로 나눠 올립니다.
첫댓글 와 재밌다!!!!!!!! 간만에 흥미진진하게 읽었네
ㅠㅠㅠ세상에 존잼
와 대박 존나 재밌다.. 혜주 성격 진짜 맘에들어
와 씨 존잼
재밌게 잘 읽고가!!!
두시간 순삭됐어.. 소설 진짜 잘썼다
혜주 개멋있다… 행동력이랑 판단력 미쳤어
위험한 일을 계속 하는 혜주도 멋있고.. 죽으면서 까지 약을 개발하는 진선규도 멋있고.. ㅜㅜ 나랑은 다른 사람들..
여샤 나 글쓴인데 왜 그렇게 생각해 ㅜㅜ 나한텐 여시도 멋있는 사람이야 글 읽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데 이렇게 감상평도 남겨주잖아 !!! 솔직하게 남기는 감상을 보니 여시는 참 순수한 사람인 것 같은데 그 점이 멋있어💝💝 오늘도 화이팅!! 힘내~~
@푸딩위에딸기 헉 뭐야!!!!! ㅠㅠㅠㅠ 여샤 너무 감동이야 🥹🥹 요즘 내가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있느라 주눅 들어있어서 습관적으로 자책한것같아,, 여시의 댓 항상 생각하며 당당하고 멋있게 살게 힘나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