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주 우연히 뿌쉬낀의 단편소설집 '벨낀 이야기'를 읽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삶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 슬퍼하거나'......의 그 푸쉬킨.
러시아어 발음으로는 '뿌쉬낀'이다. 이 나라 언어의 발음에는 ㅋ ㅍ ㅌ가 없다.
거의 들리지 않는다. ㄲ ㄸ ㅃ로 발음한다.
좌우간 그 뿌쉬낀.
그냥 대한민국 모든 인구가 다 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저 유명한 시 구절을 남기신 분,
파파 할배인 줄 알았다.
이전 시대에 사람이었대도 저 시는 적어도 칠십은 넘어서 썼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알고 보면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연적과 결투를 하게 되었고
그 결투에서 총을 맞고 장렬히 [?] 전사 하였다고 한다.
38세의 나이로 죽었으니 요절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겠네.
관광지로 유명한 아르밧뜨 거리에 나가면 뿌쉬낀과 그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결투에 나서게한
그의 아름다운 아내 나딸랴 곤차르바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사시사철 -지금같은 혹한을 제외하고-그의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에 대해 잘 알기 전까진 '삶이 그대를...'이란 싯구는 동상의 뿌슈낀이 파파 할아버지가 되어
지은 싯구 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정말 부끄럽지만 뿌슈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뭐 사실 그렇게 부끄러워 할건 또 뭔가.
그럼 뭐 세상의 모든 위대한 예술가를 다 꿰고 있어야 한다는 건데,
불가능하지 않나.
이 시인을 다시 보게 된건,
위에 언급한 단편소설집을 읽게 되면서 부터 이다.
우선,
아주 아주 재미나다.
가벼우면서도 경망스럽지 않고 일상적인 이야기 인것 같은데 읽다 보면
무언가 묵직한 메세지가 담겨 있는.
구구절절 이러니 저러니 중언부언 하지 않고 핵심을 찌르는 기술이 대단하며,
그가 죽은지 150년이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아주 세련된 이야기를 써놓은 것이다.
물론 최근에 번역된 소설이라 그런 것 일수도 있지만,
원서가 촌스러운데 번역이 세련될 수 있을까.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는 충동이 마구 생겨나게 만드는.
이렇게 좋은 책을 만났구나 하는 감동이 샘솟는.......
누구라도 그의 단편을 읽어본다면 비슷한 감흥을 느낄 것이라 여겨진다.
무엇보다 전혀 어렵지 않고 따분하지 않아서 참 좋았다.
오늘 아침 영하 32도 라는 입이 떡 벌어지는 일기예보를 마주하며,
대체 이런 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막막함과 기막힘에 삶에의 전투력은
영하 320도 보다 더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아직 못 알아듣지만 방송에선 휴교령이 내려졌다 하니.
스타킹을 신고 내복을 입고 그 위에 겨울바지를 겹쳐 입고
이제 상의를 입을 차례다.
나시부터 하나 입고 내복에 해당하는 옷과 셔츠 그리고 깃이 아주 높아서 외출해서 단추를 여미면
눈 바로 밑까지 가려지는 스웨터를 반드시 입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코트. 장갑과 목도리는 생존을 위한 아주 긴요한 수단이다.
길에서 전화를 받거나 동전을 꺼내느니 하며 한 삼초만 손을 밖에 내놓아도 그 자리에서
감각이 마비될 만큼 얼어 붙는다.
모자 또한 마찬가지.
머리로 체온이 많이 손실되기 때문에 이런 날씨에 모자를 쓰지 않고 길에 십분만 서 있으면
저체온증과 함께 뇌가 얼어 붙고 회복이 힘든 바보가 되어 버린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여기선 모자가 절대로 액세서리가 될 수 없다.
장갑이든 모자든 하나라도 두고 외출했다가는 아무리 바빠도 다시 집구석으로 기어올라가
들고 나오게 된다.
한마디로 뒤지게 춥다.
아침 출근길 버스에서 내려 한 십분 걷게 되는 길.
있는대로 싸매고 눈만 내놓고 팽귄처럼 뒤뚱대며 걸어다니면 뭐 견딜만 하다 싶었는데
-30도 이하로 내려간 날씨는 아!!!!!!!!!!!!!!!!!정말이지.
그 자체로 극기였다.
대체 내가 여기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하는 강한 의문이 얼어 터질 것 같은 발과 손과 코를 인질로 붙잡고서 그럴듯한 답을 내놓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을 기세로 덤볐다.
미친듯 발길을 몰아붙여 일단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니,
지지난 해 초 겨울 설악산 야간 등반을 마친후와 같은 나른함과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희한한 감정이 교차했다.
좀 있으면 다시 집으로 가야할 시간,
있는대로 싸매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한데로 나서는 기분은
사흘 굶은 호랑이의 쩍 벌린 아가리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 같은 그저 무섭고 섬뜩한.
아침에 버스 정류소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지 못할 장면과 마주쳤다.
남성용으로 보이는 검정색 겨울 파카 하나가 얌전하게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뭐지,
벗어 걸어 놓은 듯 조신하게 놓여진 것이 일부러 놓아둔 것 같은 데
저걸 벗어 놓은 거라면 술에 마비되어 자신도 모르게 벗어 놓은 걸까.
추위에 떨다 03 [한국으로 치면 119]에 실려 간걸까.
그렇담 옷만 남겨 놓고 가진 않았을텐데.
저 옷을 벗어 놓고 간 남자는 스스로 얼어 죽기 위해 겉옷을 벗어 놓은 채
눈밭으로 걸어들어 간 걸까?
실제로 버스 정류소 뒤로는 끝을 알 수 없는 드넓은 눈밭이 펼쳐져 있다.
수행이 극에 달해 눈밭에서도 알몸으로 거뜬히 살아낼 수 있는 신공의 경지에 이른 누구일까.
하필 -30 밑으로 떨어져 버린 미치도록 추운 날과 그 파카와의 절묘함이란.
골프를 치던 사람들은 이제 슬슬 골프를 칠때가 왔다고 기뻐하더라.
물론 부산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겹기만한 겨울도 이제 2월이 지나고 3월이 오면 끝이 보일테니 조금만 견디면 되리라.
하지만 여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4월까진 끊임없이 눈이 내리고 그때까지 겨울 코트를 벗지 못하리라.
아,
이제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이 죽일 놈의 추위는 끝나지 않을 것 처럼 길고도 길어서
지레 인간들을 지쳐나가 떨어지게 만든다.
년중 반을 겨울로 지내야 하다니.
인간에게 -특히 온난한 기후에서 살던 인간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임에 틀림없다.
자, 그렇다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거라고!
체념하고서 보따리를 싸든가
아님 기쁘게 견디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우울증에 걸려 미치면 곤란하지 않은가.
하필 이렇게 추워지기 삼일 전 뿌쉬낀을 만났다. -그래봤자 그때도 영하 20도 였다-
이왕 여기까지 걸음한 거,
읽을 줄 알고 떠듬떠듬 쓸 줄도 알게 된거,
세살 먹은 애가 하는 말처럼 앞뒤가 안 맞고 아직은 대책이 안 서는 지경이지만
말문은 터졌다는거,
일년을 공들인 시간인데 추위와 맞바꾸긴 아깝지 않은가.
벨낀 이야기를 원서로 읽을 수 있는 그날까지 버텨보자 하는 강렬한 꿈이 추위를
견디는 난로가 되어 나를 데우고 있다.
지금도 이리 추운데 대체 백년 이백년 전은 얼마나 견디기 힘들 게 추웠을까.
그 추위를 뚫을 방편으로 뿌쉬낀은 시를 썼고 치곱쓰끼[차이코프스키]는 위대한 음악을 생산해
냈을까.
도스또옙스끼와 딸스또이와 라흐마니노프와 셀 수 없는 많은 위대한 문화를 만들어 놓은
그들이 살다간 땅이다.
그들의 언어로 그것들을 고스란히 느껴 보는 일.
마흔이 넘은 나이에 시작한다고 늦었다고 하기엔 어쩌면 너무 이른 일은 아닐까.
어리고 젊은 나이에 여기에서 견디어야 했다면
돌거나 미치거나 둘 중에 하나 했을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콘서바토리라는 세계적인 음악원이 이 도시에 있다.
소극장 중극장 대극장 세개의 아주 좋은 연주홀을 보유하고서.
거의 365일 연주가 이루어지는 알고 보면 예술이 흘러 넘치는 이 곳.
연주가 끝난 후 악귀처럼 달려드는 추위를 떨치고 집에 갈 일이 무서워
요즘은 통 발걸음을 못 했지만.
뒤지게 추운 날들.
옷을 하도 많이 입고 다녀 밀롱가도 못 간다.
벗는 데 한 삼십분 걸릴 옷들을 다 벗고 다시 춤출 만한 옷들을 갈아 입을 생각을 하면.
아우,
춤 아니라 춤 할배라도....
하하..
이불 뒤집어 쓰고 그저 공부나 할 밖에.
미친 날씨 덕에 원어로 뿌슈킨의 위대한 시들을 읽을 시간이 한 사흘 쯤 당겨지지는 않을지.
그대들 나의 오랜 벗들에게
뿌슈낀의 시 한편을 선물로 바치며...
내 그대를 사랑했노라
사랑이라는 게 존재하는 한, 내 영혼에서 완전히 꺼지지 않나니
그러나 나의 사랑은 더 이상 그대를 괴롭히지도 방해하지도 않나니
내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니
내 다만 그대를 사랑했노라
이야기도 희망도 없이
때로 나의 소심함과 때로 나의 질투가 나를 괴롭혔지만
내 다만 그대를 사랑했노라, 그토록 진심으로 그토록 조심스레
신의 섭리에 따라 다른 이들이 그대를 사랑한 것만큼
이 글의 제목 또한 뿌슈낀의 시 구절 중 하나 임을 알려드리며~
첫댓글 아.. 반가운 언니의 글. 숨통이 트이는 듯한 이 기분. ^^
난 러시아 문학을 사랑한다
그래 봐야 읽은 거라곤... 없다;;
뿌쉬낀과 도스또예쁘스끼를 사랑한다
발음할수록 기분 재밌어지는 작가는 참 드물거든
잘살아내고 잇는것같아보이네언냐ㅎ^^원어로읽다니 존경스러버(욕은.. 한국말이더 감칠맛나제?**)껍디집지나가믄언니생각나 언니와야 묵으러 갈텐데 이라믄서ㅋㅋ자주 글올리랑 기다리고이쓰껭 밥잘챙기묵엉 카렌냥♥
러시아 말 중에 40도 이상이 아니면 술이 아니고, 영하 40도 이하면 추운 것이 아니고, 4,000km이상이 아니면 거리가 아니라고 하더이다.ㅋㅋㅋ 찬비님이 러시아 훈남들한테 아직 꽂혀 있는 것 같던데, 모스크바 백야에 춤출 수 있는 날이 오면 연락주세요.
보드카 한잔 하면서 해후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날까지 건강히 계시길^^
사람들 잘 씻고는 다녀? 암만 추워도 집안에서 책만 읽지 말고 좋은 공연들 많이 보러 다녀 그게 다 나중에 살아갈 에너지가 되잖아 ^**^
언제오시나요 3월에 함나오는걸로 알고있는데...
언냐. 와서 꼭 러시아 말로 뿌쉬낀 할배 시 읽어줘잉.
그냥.카렌언니랑.다해언니랑.둘이.대화시키고.시프다...거기다.루옵까지.세명.모다.놓으면.ㅋㅋㅋ
춥다고 꽁꽁 싸매고 다니는 요즘. 언니가 있는 그곳의 추위에 난 못버티고 우울증과 함께 짐쌌을끼라. 참으로 대단해오~ 잘 버티고 이겨서 건강한 얼굴로 돌아와요~^ㅡ^*
그 목욕탕에 가면 가끔 네 얼굴을 찾는다는...이렇게 추운날 열탕에 몸담그면 완죤 행복한데...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행복이 널 지배하고 있어 다행이고 부럽다...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