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무사
곽 흥 렬
한 종편 TV 예능 프로그램이 큰 반향을 남기고서 막을 내렸다. ‘미스트롯’이라는 이름의 가요경연대회였다.
첫 방송분이 전파를 탔을 때부터 미스트롯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몰고 왔다. 가정마다, 직장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즐겨 대화 소재로 오르내리며 단숨에 안방극장을 사로잡았다. 한 주, 두 주 방영 횟수가 거듭될수록 시청률이 폭발적인 상승 곡선을 그려나간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추이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날이 다달이 인기 가도를 달리더니, 마침내 최종회차에선 무려 20%에 가까운 놀랄 만한 기록으로 정점을 찍고서 종편 예능의 역사를 새로 썼다. 이제껏 만나 보지 못했던 색다른 제목에다 참신하고 특별난 기획이 시청자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던 게 아닌가 싶다.
주관 방송사로서는 미스트롯의 흥행에 힘입어 광고 수주 건수가 다락같이 치솟아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렸을 것임은 묻지 않아도 그림이다. 순전히 광고 수익으로 꾸려 나가야 하는 것이 민영방송의 생존 환경일 터이고 보면, 미스트롯을 눈여겨 지켜본 다른 방송사들은 군침을 흘렸음에 틀림없다. ‘트로트가 좋다’ ‘트롯신이 떴다’ ‘불타는 트롯맨’ ‘트롯 챔피언’, 이 같은 표제들로 너도나도 어슷비슷한 프로그램을 다투어 쏟아내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자연 배가 아프게 마련인 법, 급기야는 공영방송에서까지 ‘트롯 전국체전’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뒤늦게 그 대열에 뛰어들었으니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비단 프로그램의 명칭이라든가 포맷 그리고 연출 기법 따위만이 아니다. 거기에 출연하는 가수라는 사람들의 노래 역시도 하나같이 미스트롯의 아류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저것 같고 저것이 이것 같은, 그야말로 도토리 키 재기여서 도무지 차별성이라곤 눈 닦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스트롯을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짜느라 오랜 시간에 걸쳐 머리 싸매었을 제작진의 노고는 나 몰라라 하고, 남이 애써서 차려 놓은 밥상에 달랑 숟가락만 얹은 꼴이지 않은가.
전남 순천의 천년 고찰인 송광사松廣寺는 세상의 하고많은 절집들에서 너무도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세 가지가 없다. 그 하나는 풍경風磬이고, 다른 하나는 주련柱聯이며, 나머지 하나는 탑이다. 아무리 찬찬히 살펴도 송광사에는 이 세 가지가 눈에 뜨이지 않는다. 송광사가 승보종찰의 대가람이라는 사실은 웬만한 식자층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겠지만, 풍경과 주련 그리고 탑이 없다는 비밀을 아는 이들은 극히 드물 것이리라. 산천경개 빼어난 곳치고 불보살 모시지 않은 데를 찾지 못할 만큼 크고 작은 절집들이 널려 있어도, 유독 송광사에만 항용 불교의 필수적 요소라 여겨지는 그 같은 구성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절집이라면 으레껏 풍경이며 주련이며 탑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송광사가 여지없이 깨뜨려 버린 것이다.
풍경도, 주련도, 탑도 없기에 역설적으로 여타의 절집들과 오히려 차별화가 된다. 남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어 가지고 있는 것을 일부러 갖지 않았다는 돌올한 존재감, 송광사의 이 점에 나는 그만 매료되고 말았다. 불현듯이, 위인들에게 별호를 지어 생전의 업적을 칭송하듯 송광사에 내 식의 별칭을 붙여 공경 찬탄의 환희심을 표현하고픈 충동이 일었다. 그리하여 몇 날 며칠 궁리 궁리를 거듭한 끝에 ‘삼무사三無寺’라는, 나름 위엄을 갖춘 절집의 격이 묻어난다 싶은 이름 하나를 얻었다.
“삼무사, 삼무사, 삼무사……” 입 안에 넣고 왕사탕을 굴리듯 마음 안에 품고 되풀이 궁굴려 본다. 없을 ‘무’ 자야말로 불교에서 출가 사문들이 즐겨 화두로 들어 참구參究하는 참으로 크고 무거운 글자 아닌가. 오랜 옛적부터 실체적인 이름은 존재해 왔지만, 여태까지 상징적인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던 가람 ‘삼무사’. 하나의 무 자에 그친 일무一無도 아니고 그 세 곱이나 되는 삼무三無이고 보면, 스스로 생각해도 천년 대가람에 썩 잘 어울림 직한 명칭 같아서 가슴속이 느꺼워져 온다.
송광사가 그저 우연처럼 어떻게 저떻게 하다 보니 풍경과 주련과 탑을 갖추지 않게 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아하! 하고 무릎을 칠 만한 연유가 숨어 있다. 먼저 풍경을 달지 않은 것은 고요한 산사에서 울리는 풍경 소리마저 자칫 공부하는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가 될까 저어함이었고, 다음으로 주련을 걸지 않은 것은 어설픈 식견으로 혹여라도 천지자연의 숭엄한 질서를 왜곡시킬 수 있음을 경계함이었으며, 마지막으로 탑을 세우지 않은 것은 절집이 자리한 터의 지세가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어서 육중한 석탑을 쌓으면 그 무게로 인해 땅이 가라앉게 된다는 풍수지리적인 해석을 따랐기 때문이다.
곰곰 헤아려보건대, 얼마나 신선한 코페르니쿠스식 발상의 전환인지 모르겠다. 비록 암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일일지라도 혼이 깃든 남의 노작勞作을 줏대 없이 흉내나 내어서는 빛이 바래게 마련인 것이 세상사 절대 불변의 이치일 터이다.
송광사인들 왜 근사하게 풍경을 달고 주련을 걸며 탑을 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인가. 만일 여느 사찰들처럼 그저 생각 없이 그리 좇아서 따라만 했더라면, 우리 사는 세상 골 곳에 흩어져 있는 그만그만한 절집들 가운데 하나로 치부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어느 선지식의 머리에서 나온 혜안이려나. 송광사는 내게 남의 것이 아무리 근사해 보여도 절대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어쭙잖은 짓은 하지 말라는 엄숙한 가르침을 삼무로써 새삼 말없이 일깨워주고 있다.
언젠가 내 이승과의 인연을 마무르고 영원한 안식에 드는 날, 후세 사람들에게 무슨 세 가지를 갖지 않은 ‘삼무인三無人’으로 기억될꼬.
<곽 흥 렬郭 興 烈 약력>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산과 들의 품에 안겨 자라다, 큰 고기는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지론에 떠밀리다시피 어린 시절 대처로 떠나 줄곧 서른여섯 해를 살았다.
경북대학교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스무 남은 해 동안 대구 심인고, 경상고 등에서 국어 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오다 2008년 늦은 가을 고향의 흙냄새, 풀냄새가 그리워 낙향하였다.
1991년 《수필문학》, 1999년 《대구문학》으로 문단에 나와 『가슴으로 주운 언어들』, 『빼빼장구의 자기 위안』,『빛깔 연한 꽃이 향기가 짙다』, 『우시장의 오후』, 『칠팔월에 내린 눈』 등의 수필집과 수필 선집 『여자와 함께 장 보는 남자』, 산문집 『에세이로 풀어낸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 세태비평집 『사랑은 있어도 사랑이 없다』, 수필 쓰기 지침서 『곽흥렬의 명품수필 쓰기를 위한 길라잡이』, 『수필 쓰기의 모든 것』, 서평집 『곽흥렬의 수필 깊이 읽기』, 제자들과의 공동수필집 『한 그루 나무, 서른 송이 꽃들』 등을 내었다.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코스미안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12년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창작기금을 수여 받았다. 한국문인협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영남수필문학회 회원이다.
후학들을 기르는 데도 힘을 기울여, 경주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과 대구문화방송 부설 문화강좌, 육군3사관학교 그리고 경북 청도도서관 등에서 수필 창작 강의를 하면서 매일신문, 부산일보, 전북일보 등의 신춘문예와 평사리문학대상, 신라문학대상, 시흥문학상, 천강문학상, 공무원문예대전 등의 유수한 공모전에 많은 제자들을 당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현재 고령신문 사외 집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필생의 업으로 삼고 서른 해 넘는 세월 동안 수필 창작에 열정을 쏟아오고 있다.
*e-mail: kwak-pogok@hanmail.net
첫댓글
천년 고찰인 송광사에 풍경, 주련, 탑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사찰이면 으레 갖추어진 것으로 아는데
타 사찰과 차별화를 가짐으로써 품격을 유지한다는 것에
三無寺의 내력을 알게 됩니다.
민주화를 통하여 우리의 문화가
대중문화가 되고,
자본주의가 되면서 금전이 앞서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각 방송사도 시청률을 앞세우는
시대적인 것에 편성되는
우리 사회의 한 면이기도 하지요.
다양화된 사회에
가치관의 다양성 그러면서
개성을 중요시 한답니다.
곽흥렬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새겨보는 글, 감사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겁니다. 수필의 여러 역할들 가운데 하나가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교술적 기능임을 생각하면 이것도 나름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말씀처럼 역발상이야말로 예술에서, 아니 우리 삶 자체에서 무척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합니다.
송광사에 그런 비밀이 있었구나.
있고 없고가 세간의 관심은 되겠으나 출세간의 승인들에겐 그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세간의 관심과 출세간의 관심은 다를 수 있겠지만, 어차피 우리는 세간에 살고 있으니 이런 글도 한번 써 보는 거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