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중국문명의 기원』에서 일부분을 친것 입니다.
<춘추>는 매해의 사건을 기록할 때 반드시 '왕정월'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그 시기를 분명히 했다. '왕정월'이라는 표현은 곧 '하력' 과 '은력'의 정월이 아닌 '주력'의 정월을 강조키 위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하력' 과 '은력' , '주력'은 각각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후세인들은 이 3개의 역법체계를 통칭해 흔히 '3정'이라고 했다. 이는 '3개의 정월'이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춘추전국시대만 하더라도 열국은 '3정' 중 하나를 택해 각기 다른 역법체계를 사용햤다. 이는 열국에서 사용된 문자체계가 각긱 달랐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3정'의 가장 큰 차이는 말할 것도 없이 한해의 시작인 이른바 세수의 월건에 있었다.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
하력 11 12 1 2 3 4 5 6 7 8 9 10
은력 12 1 2 3 4 5 6 7 8 9 10 11
주력 1 2 3 4 5 6 7 8 9 10 11 12
<춘추> 와 <맹자>에는 주력을 많이 썼다. 또한 <시> (소아,4월)은 하력을 쓴 것이고, <시> (빈풍,7월)은 하력과 주력을 아울러 사용했다.
(주력의)2월에 얼음이 없었다. <춘추좌전> (노성공 8년) 주력의 2월 곧 하력의 12월
(주력의)가을, 홍수가 나서 보리싹이 나지 않았다. <춘추좐전> (노장공 7년) 주력의 가을은 5-6월
(주력의)7-8월 사이에 가뭄이 들어 삭이 말라 버렸다. <맹자> (양혜왕 상) 주력의 7-8월은 하력의 5-6월
11월에 통나무 다리가 이뤄지고 12월에는 수레가 다닐 수 있는 다리가 이뤄지면 백성들은 강물을 건널 것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맹자> (이루 하) 하력을 기준으로 하였음.
가을,송나라 사람이 장갈을 점령했다. 겨울 경사(낙양)에서 노나라로 사람을 보내 흉년의 상황을 알렸다. <춘추좌전> (노은공 6년) 전문 하력을 취함
가을7월, 겨울, 송인이 장갈 땅을 취했다. <춘추> 경문 주력을 취함
봄, 진나라 군후가 태자 신행을 죽였다. <춘추좌전> (노희공 5년) 경문 주력을 사용
12월 27일, 태자가 신성에서 액사했다. <춘추좌전> (노희공 4년) 전문 하력을 사용
아래글은『패의 중국인 양의 중국인』(저자 :가토 도루) 에서 일부분을 친것 입니다.
3세기, 서진의 황보밀이 쓴 제왕세기에는 하 왕조의 인구로, 천 3백 55만 3천 9백 23명이라는 아주 그럴싸한 숫자로 대고 있다. 이것은 신용할 수 없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적의 분포와 규모로부터 막연하게 추정하건대, 하 왕조와 은 왕조의 인구 규모는 대체로 백만에서 3백만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았을까? 참고로 타국의 예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 추정 인구는 약 2백만이었다.
당시의 기록에 의거하여 각국이 보유한 전차(두마리의 말이 끄는 2륜 전차)의 대수를 합계하면, 2만 5천 승이었다. 1승(1량)의 전차당 병사는 35명이 표준이었으므로, 천하의 총 병사 수는 87만 5천 명이 된다. 춘추 시대의 법령에서는 전 인구에서 점하는 정정正丁(병역의 대상이 되는 건강한 성년 남자)의 비율을 2할(20%)로 보게 되어 있었다. 87만 5천을 다섯 배 하면 약 4백 50만이 된다. 이것이 당시 천하의 총인구인 셈이었다.
참고로, 대피라미트를 건조할 무렵의 이집트(기원전 26세기) 추정 인구는 약 5백만, 공자와 손자등의 사상가가 활약한 춘추시대의 중국 인구 규모도 그와 거의 같았을 것이다.
유사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중국의 인구는 5백만을 넘지 않았고 인구 증가율도 완만했다. 인구가 과소한 탓에, 하나라도 은나라도 주나라도 그 통치 형태는 복수의 도시국가가 공통의 왕을 봉대함으로써 연결되는 왕국 수준에 머물렀다. 왕의 직할지는 좁고, 각지 제후의 통치도 도성의 근교에밖에 미치치 않았다. 문명은 점과 선으로 퍼지고 있는 데 지나지 않앗다. 도시 국가들 사이에는 미개척의 벌판과 울창한 처녀림이 펼쳐져 있었다. 이렇듯 인구가 희박했던 상화이 일변한 것은 다음의 전국시대 부터다.
전국시대는 중국사상 최초의 고도성장 시대였다. 인구는 급증하여 춘추시대의 네 배에 해당하는 2천만이 되었다.
인구가 네 배로 급증한 주원인은 철기의 보급이다. 철의 원료는 동광석보다 훨씬 풍부햇다. 또 청동기와 달리 철기는 대량 생산이 가능했다. 그 결과 춘추시대까지 존재했던 다수의 도시국가는 소수의 대국에 흡수 병합되고 ‘영토구가’가 생겨났다.
사기에 따르면, 7대 강국의 각 병력 수는 진·초나라의 병력이 백만, 위나라는 70만, 나머지 4개국이 각각 수십만씩이었다. 가령 강국이었던 조나라와 제나라의 병력을 각각 80만, 소국이었던 한나라와 연나라를 각각 50만이라 상정하면, 7개국의 총병력은 합계 5백 30만이 된다. 당시의 법령에서는 1가구의 평균 사람 수 5명 중 2명을 ‘졸卒’로 했다. 이 비율을 적용하면 총병력 5백 30만은 2백 65만 가구, 인구가 천 3백 25만명을 헤아리게 한다. 7대 강국 이외에 위나라와 송나라 등의 T국 인구도 고려하면 당시 중국의 총인구는 약2천만이라는 어리셈이 나온다.
인구학자 왕요민의 추계에 따르면, 진나라 말기의 동란으로 인구가 감소했기 때문에 전한 초기의 인구는 천 5백만에서 천 8백만 정도였다가 그 후 급증했다. 전한의 7대 황제인 무제의 치세 초기에는 3천 7백만에 달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국 인구조사는 전한 말, 평제 원시 2년(서기 2년)에 실시되었다. 그것에 따르면, 천하의 양민과 호적 등록 인구는 약 6천만이었다.(정확하게 끝자리까지 쓰면, 5천 9백 59만 4천 9백 78명). 호적에 기재되지 않았던 노비와 유민, 변경의 주민, 소수민족 등 탈루 부분도 고려하면 한 왕조의 실제 인구는 7천만을 넘었을 것이다. 이는 당시 세계 추정 인구 3억 명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유교 사상을 받들었던 중국인은 선조의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열심히 자손을 만들었다.
무제는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추은의 영’을 내렸다. 제후의 영지와 재산은 장남만이 아니라 다른 형제에게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명령이다. 위에서 이것을 하면 아래서도 이것을 하게 마련인지라, 서민들도 대체로 자식을 많이 두게 되었고, 더욱이 형제 균분 상속에 따라 대대로 재산과 농지가 세분되어 갔다. 농지 간척과 식량 증산은 인구증가를 따라잡지 못했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농가는 세분화하고 사회는 곤궁해졌다. 곤궁한 농민들은 자식을 많이 낳음으로써 노동력을 확보하여 생활을 유지하려고 했다.
광무제 중원 2년(서기 57년)의 호적 등록 인구는 2천 백만 7천 8백 20명에 지나지 않았다.
환제 영수 3년(157년)의 호적 등록 인구는 5천 6백 48만 6천 8백 56명이었다. 전한 말의 95% 수준까지 회복한 셈이었다. 후한 조정의 지배력은 전한보다 약했고, 그에 따라 호적 파악 능력도 낮았다. 아마도 후한의 실제 인구는 전한 말을 웃돌았을 것이다.
당현종 천보 14년(755년) 5291만 9309명
북송 휘종 대관 4년(1110년) 4673만 4784명
원 세조 지원 28년(1291년) 5984만 8964명
명 세종 가정 41년(1562년) 6365만 4248명
순치 8년(1651년)의 호적 등록 인구는 약 5천 3백만, 강희 24년(1685년)에는 약 1억 천만, 건륭 6년(1741년)은 약 1억 4천만, 건륭 30년(1765년)에 2억, 건륭 59년(1790년)에 3억대에 오르고, 아편전쟁 직전인 도광 13년(1833년)에는 마침내 4억이 되었다.
중국사의 경험칙에 따르면, 인구 1인당 농지 면적이 4무(약 24아르)를 밑돌면 농민이 빈곤화되고 사회가 쇠퇴한다. 청조에서는 건륭 31년(1766년)에 1인당 농지 면적이 4무 이하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인구는 계속 증가했다.
유교를 받드는 중국인은 핏줄로 이어진 자손을 남기지 않는 것은 선조에 대한 최대의 불효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