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후에 역에서 만난 노인
피아노 연주에 반해 20분도 더 서 있었다.
왕궁을 다보고 나오자 씨클로 운전자들이 출구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에 왕릉을 오토바이로 가자더니 어느 참 오토바이로 바뀌었고 씨클로 운전수도 한 명이 바뀌어 있었다. 사실 나이든 영감님을 보고 씨클로를 선택한 것인데 젊은 사람으로 운전기사가 바뀐 것으로 이는 흐엉강을 돌고돌아 능을 찾는 관계로 뒤에 탈 우리의 안전성을 고려한 것 같았다. 능은 수로를 따라 보트로 가기도 한다고 했는데 선택할 필요가 없게도 된 셈이다. 흥정한 비용을 다시 확인하자 그러마고 하고는 그들은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한다고 했다. 그런데 장소를 이미 정해놓은 듯 보였다. 그러자 재빨리 K는 점 찍어둔 장소를 청했다. ‘분보후에’라는 서민적 냄새가 풍기는 소고기 쌀 국수집. 그들도 같이 먹자고 했더니 자리를 비켜주고 만다. 아직은 프로냄새가 안 난다 싶은 우리의 운전기사들이다. 소문답게 맛깔나는 집이다. 젓가락질 서툰 서양인도 열심히 국수를 말아 올린다.
뜨득 황제릉(Tomb of Tu Duc, Lang Tu Duc)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일어서자 어디서 우리를 지켜보았는지 바로 오토바이가 나타났다. 우리는 곧바로 티엔무사원으로 향했다. 앞서 소개한대로 베트남의 가장 중요한 문화의 중심지 중의 하나인 티엔 무 파고다. 곳은 가장 순수한 불교도의 수도생활을 대표한다. 파고다 건물은 높이 21미터의 불탑으로 8각 모양의 7층으로 이뤄졌다. 1844년 티에우 트리(Thieu Tri)왕에 의해 건축된 티엔무 파고다는 비록 19세기 때 건물이 지어졌지만, 1600년대 종교 중심으로 티엔무는 시작되었다.
사실 그곳이 지구인에게 알려진 것은 사이공에서 희생되었던 반체제 수도승 쿠앙 둑(Quang Duc)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읽은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이 떠오르는 그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실로 대단한 화자꺼리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가 타고 다녔다는 자가용을 보았다. 그리고 황제릉을 보기위해 온 방향으로 강변을 따라 다시 되돌아갔다. 강변에서 보자면 시내를 기점으로 제일 먼 지점에 위치한 릉이 자롱 황제 능이고 그 다음 민망황제, 티에우찌 황제, 뜨득황제 능 순인데 자롱황제능만해도 시내에서 16킬로 떨어져 있어서 대개는 민망이나 티에우찌 뜨득 카이딘 능을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우리도 그쯤 구경을 했다.
대충 보고 돌아서는 길, 티에우찌 릉 앞에서였다. 기사가 개를 보더니만 저것 먹으면 힘이 난다고 하며 먹을 의향이 있느냐 한다. 아마도 예정이 끝나가니 다음 코스로 연장할 생각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그러더니 젊은 아가씨도 소개해 줄 수 있다고 선뜻 청을 한다. 1백 달라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남자들끼리 와서 그러는지 아니면 우리가 젊게 보인 것인지 반은 기분 좋고 반은 어이가 없었지만 듣고 그냥 말았다. 우리는 구시가지 끝에 자리한 동바시장 앞에서 내렸다. 당초 계약한대로 4십 만동을 건네자 2시간이 지났고 더 본 것이 많다며 더 달라고 아우성이다. 깎지 않으면 안되고 단번에 오케이하고 순응하는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영어가 잘 안되니 시계와 영어 숫자 TWO를 연실 가리키며 졸라대는데 끝까지 버티려다가 미소작전으로 나오는 통에 그만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다. 사실 20만동이라고 해야 우리 돈으로는 1만원이 아닌가.
4시쯤 그들과 헤어졌으니 기차 타는 시각 7시58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는다. 우리는 동바시장으로 향했다. 아니 K를 억지로 끌고 갔다. 고상한 취미인지 그는 조금 지저분하다싶은 곳은 극구 사양한다. 나는 지난 번 호치민 여행 때 맛나게 먹은 새우 말린 것을 사고 싶어서인데 어제 다낭 성당 앞 한 시장에서 잠시 들렀는데 가격이 만만치가 않았다. 1킬로그램에 45만동, 이곳은 40만동. 그러고 보면 나짱이나 달랏이 물가가 더 싼 폭이다. 사는 것을 포기하고 이제부터서는 K가 가자는 데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구 시가지를 떠나 신시가지에 DMZ카페라는 곳을 찾았다. 여기서 DMZ가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니. 그 의미를 모르는지 아는지 젊은 친구들로 붐비는 곳, 우리는 곳에서 맥주에 스프링 롤을 곁들여 저녁 겸 보충을 했다. 그런데 맛이 예사롭지 않다. 3천원에 이 맛이라 한다면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대박이 날것이다 하는 예언을 하며 두 접시를 더 시켜 먹었다. 그제서야 풍만함이 느껴졌다. 몇 분을 가면 되는지 지름길이 어딘지 맛있는 곳이 주변에 또 있는지 등등 구글 GPS를 이용한 K의 길 찾기는 실로 신 세상의 눈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아 우리는 강변을 따라 기차 역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축제기간인지 강변에 야외전시물들이 우리를 반겼다. 가는 도중 배를 타라는 처녀뱃사공의 말이 솔깃하여 우리는 티엔무 사원까지 단돈 5천원을 주고 다녀오기로 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맞은 편 왕궁은 영욕의 시간을 어느 참 감추고 신시가지 네온 불빛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때 그 누구든 왕궁을 하늘 쳐다 보듯 바라보던 때를 지나 이제는 누구든 평등하다는 문명이 깃든 새로운 세상인 것이다. 인류는 그런 점에서 아주 진보적이다. 문명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달랏도 대단한 예술성이라 했는데 강변에 놓인 공예품이나 그림 분재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이들은 가난해도 감성많은 놓치지 않는듯 보였다. 우리는 충족하지만 정반대가 아닐까. 강변 가든파티를 하는지 피아노 음악이 나온다. YANI의 음악에 나도 모르게 발이 멈춰진다. 붉은 빛 포도주 한잔에 달콤한 낭만을 얹는다면...가난하지만 감흥을 간직한 그들의 여유가 부러웠다. 가난과 낭만은 분명 별개다. 우리도 가난 할 때 인문학은 더 번성했었다.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시 역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아주 잘 맞춘 셈이다. 비가 더운 기운을 일시에 지우고 있다. 오늘 우리는 행복했다. 버겁다싶은 하루 여정인데 이른 새벽 나와 하루 일정을 아무 탈 없이 소화를 했으니. 인삼사탕을 뿌리며 웃음을 나누고 씨클로 기사에게 돈 만원을 더 얹어준 것도 잘 한 것이고 1백 달러 주고 아가씨를 안아보겠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일어나지 않은 것 자체도 참으로 고마운 나의 행실이 아닌가.
기차 역 맨 끝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갔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카페, . 모기가 달라붙고 있었다. 주인은 선풍기를 틀어주었다. 우리는 콜라를 시키고 먹을 것을 싸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영감님 영어가 꽤 유창하다. 억지로 하는 영어가 아니라 본토발음에 가깝다. 순간 떠오르는 생각, 그는 분명 과거 미군들하고 관련된 사람이 아닐까. 비록 누추하지만 제스처도 그렇고 여느 노인과는 사뭇 달랐다. 거침이 없는 그의 화술에 나는 그가 바로 저 영어 때문 평생 고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영어를 배우려고 난리인 베트남인데 참 아이러니한 인생살이다.
1975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점령한 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소위 반동분자들의 처치와 사회체제를 공산사회로 전환시키는 부의 재분배, 국유화, 집단화였다. 모든 반동분자들에 대하여는 일정기간 재교육을 받으면서 자기의 죄과를 씻게 하고 새로운 공산사회 건설에 참여시킨다는 지령이 내려졌다. 교육 내용은 각자 저지른 과오에 대한 자아비판과 상호비판, 미국 측이 저지른 범죄, 공산 혁명 영웅의 전기 학습, 혁명 정부의 시책 등등이었다. 재교육 장소는 각 지역 별로 전에 베트콩들이 기지로 이용했던 지역이었다. 사이공 지역의 재교육 수용 소는 타이닌(Tay Ninh) 省으로 지난 날 자기네들의 본거지였다.
재교육 해당 인원은 각자 식량을 지참하고 신고하도록 하였고 재교육 인원은 전투 간에 포로가 되었거나 항복 후 즉각 체포된 수많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약 30여 만명으로 집계되었다.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신고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정해진 기간 내에 돌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시민들이 항의하자 그들은 며칠 분의 식량만 준비하라고 하였지 기간은 정하지 않았다고 발뺌하였다. 최근에 북베트남의 개방정책의 일환으로 일부 장기 재교육자들을 석방하였으나 아직도 수용된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티우(Thieu) 정부의 고위관리, 미 제국주의자에 빌붙은 자,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자, 인민의 고혈을 빤 자 등이라는 것이다.
사회도 달라졌다. 1975년 6월부터 전 은행예금을 동결하고 4개월 후에 화폐개혁을 실시하여 1인당 균등하게 미화 40달러에 상당하는 돈을 바꾸도록 하였다. 도시 인구를 그들이 통제 가능한 범위로 줄이기 위하여 1차로 사이공의 20여 만명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150만 명을 그들의 신 경제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들은 1980년까지 총 500만 명을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모든 신문이 사라지고 내용이 비슷한 2개의 당 기관지만 발간되었다. 모든 서적은 검열을 받아야 했고 금서 목록이 작성되었다. 서점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이 소장한 모든 서적들도 몰수되어 역사, 종교 서적을 불문하고 소각되었다. 영화, 음악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퇴폐적이고 감상적인 작품들은 모두 사라져야 했고 혁명의 영웅, 할당률을 초과달성하는 모범 집단농장 등을 찬양하는 영화나 음악, 군가로 대치되어 갔다. 20가구 당 1개의 스피커가 사이공의 거리와 골목에 배치되어 요란한 군가와 지시사항, 성명서가 방송되었다.
점령 후 몇 달 동안은 그대로 감시하고 있었으나 티우 정권하에서 반정부 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카톨릭, 불교에 대한 조치도 시작되었다. 자기들의 혁명과업 수행에 정말 많은 공헌을 하였고 이들을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가장 거추장스러운 방해자인 것이다. 그대로 두면 자기들이 당할 차례인 것은 뻔한 일인 것이다. 반정부 활동의 중심지였던 안쾅(An Quang)사는 폐쇄되었고 트리쾅(Tri Quang), 티엔 민(Tien Minh) 등의 유명한 승려들이 체포되어 갔다. 티우의 부정 규탄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트란 훈 탄(Tran Hun Thanh) 신부, 호앙 퀸(Hoang Quinh) 신부 등 수백 명의 신부들이 투옥되었다. 이들의 죄명은 미국 CIA의 첩자라는 것이었다. 이 유명한 승려, 신부들은 재교육이 필요 없는 인사들로서 다시는 베트남 사회에 나타나지 못하고 옥사해야 했다.
아마도 그도 그 역사의 언저리를 감히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리라. 드디어 기차가 들어올 시각, 우리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아침과는 다른 진풍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을 쳐 껴들기도 힘든 정도다. 우리는 차안에서 그가 만들어준 샌드위치로 요기를 했다. 먹으며 이는 제대로 된 미국식이다 싶었다. 노인에게 어찌 영어를 그리 잘하는지 묻지 않은 게 아쉽지만 잘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때는 시대가 너무 어지럽고 누구든 갈피를 못 잡았었다. 기차는 정시에 출발하더니만 이곳에 올 때와는 다르게 2시간 반 만에 다낭에 도착했다. 11시가 다된 시간, 지쳐 눈꺼풀이 절로 감겼지만 그래도 통쾌하고 상쾌한 하루였다. 숙소에 들어와 달랏 포도주를 마셨다. 해냈다는 즐거움이어서인지 달착지근한 포도주는 휴식의 마중물이 이내 되어주었다. 내일은 또 어디로 향할 것인가.
후에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