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의 주제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료 구하러 돌아다니던 중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상당히 공감가는 비판의 글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반론] 로마인 이야기 비판
첫째, 지도자만이 역사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사회, 정치, 문화나 그 시대의 상황같은 '역사적 배경'에 따라, 지도자도 행동하기 마련이죠. 또한 공화정 초기의 평민과 귀족의 정치 권력 투쟁에서 볼 수 있듯, 사회 전체와 민중이 역사를 바꾸는 데도 한 몫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민 참여를 중시하는 민주 사회에서는 더욱 필요한 덕목이라 하겠지요.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사에서 많은 일들을 모두 지도자(영웅)의 행동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대표적인 보기죠. 공화정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없었다면, 과연 카이사르 혼자 제정을 세웠으리라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물론 지도자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지도자들이 카이사르나 그라쿠스 따위를 배우길 기대하면서, 우리는 그냥 기다려야 할까요? 지도자 말고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요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니, 그런 요소들 가운데 '지도자'라는 요소는 단지 한 부분일 뿐이지요.
시오노 나나미는 이렇게 영웅주의 사관으로 역사를 풀어봅니다. 그렇게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에만, '제도'의 훌륭함을 역설하는 식이죠. 왕정이 무너진 것은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공이라기 보다는, 타르퀴니우스 왕조가 쇠퇴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경제 위기가 닥치고, 이탈리아에서 에트루리아 세력이 힘을 잃으면서, 로마 귀족들은 더이상 왕을 모시고 싶어하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평민 계급과 함께 왕을 몰아내 버린 겁니다.
브루투스도 앞장 서서 많은 일을 했겠죠. 하지만 이런 여러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없이, 브루투스 혼자 왕정을 무너뜨리는데 큰 몫한 마냥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그리 단순하게 돌아가진 않는다 봅니다.
파시즘의 교훈을 톡톡히 치룬 오늘날 사람들에게, 시오노 나나미의 영웅주의는 또한 위험하기도 합니다. 효율적인 지배자 한 사람이 영속적으로 사회를 옳게 다스린 전례가 없습니다. 전제주의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죠.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는 이런 점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둘째, 로마의 정치 체제가 상당히 융통성을 지녔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 꽤 적합했던 체제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로마가 대 제국으로 성장했을때, 원로원 과두정이 힘을 잃게 된 것이구요. 원로원은 거대한 나라를 다스리기엔 그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죠.
셋째, 로마의 법치주의 역시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원로원과 귀족 중심의 법에서 출발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갈 수 있겠지요. 특히 '세나투스 콘술툼 울티뭄(원로원 최종 권고)'는 카이사르도 지적했듯, 로마의 법치주의를 짓밟는 전횡적인 법이었죠.
넷째, 로마인의 개방성 역시 인정합니다. 초기부터 다른 민족과 피가 섞이는 것을 그리 멀리하지 않았죠. 이것이야말로 로마를 천년동안 떠받쳐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아르피눔 출신의 키케로가 로마의 애국자가 되고, 히스파니아 출신의 황제가 로마를 이끌어 갑니다. 또한 게르만 출신의 장군이 로마의 군인으로서 로마를 위해 싸웠죠.
저는 여기서 미국 중심의 세계화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민족을 받아들이기는 하되, 미국이 그 중심에 서 있죠. 로마도 마찬가지라 봅니다. 물론 이러한 개방성 덕분에, 여러 문화가 뒤섞여 로마 문화를 이루면서, 새로운 문화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다원주의와는 거리가 멀지요. 미국 중심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까닭은, 다원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가 이끌어가는 반쪽짜리 다원주의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로마 중심의 세계화도, 그런 참된 다원주의와는 확실히 다릅니다.
다섯째,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알 수 있듯, 오늘날 사회는 점차 다원주의화되어 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로마도 과연 그런 다원주의 사회였는지는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귀족의 경우 입신양명이 최고의 가치를 가졌고, 평민들의 출세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연줄이 중요했던 탓도 크지요. 로마사회는 개인의 능력차나 다양성보다는, 관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사회라 봅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다신교의 역할을 매우 높이 사고 있지요. 그러나 로마인의 이러한 관용은 외국인의 신앙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여전히 유피테르를 중심으로한 전통 신앙을 중시했죠. 사실 이시스나 세라피스같은 외국신이 로마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것은 꽤 나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말고도, 전부터 디오뉘소스 신앙이 국가적으로 탄압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니 로마사람들이 반독점을 염두에 두었다고 보긴 어렵겠죠.
여섯째, 로마 도로의 가치는 저도 높이 평가합니다. 다만 어떤 연구자에 따르면, 장거리 교통에서 해상 교통에 견주자면 그 효율이 1/60 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단은 군용도로였고, 지방과 지방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틀림없습니다.
일곱째, 로마는 결코 복지국가로 볼 수 없습니다. 카이사르의 곡물 배급은 인기를 얻기위한 수단이었거든요. 인도주의적인 목적도 분명 있었겠지만, 정치적 인기를 얻기 위한 일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로마 황제들도 이것을 따른 것이지요. 오히려 엄청난 빈민을 먹여살리기 위해 제국의 역량을 쏟아부었다는 것은 지나친 낭비라 비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카이사르가 과연 '뉴 딜' 정책을 생각한 것인지는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여덟째, 시오노 나나미도 로마 사람이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볼 수 있는 민족'이라고 말하지는 않은 것으로 압니다. 단지 카이사르에 대해 말했을 뿐이죠. 사실 '민족성'이라는 것을 설정한다는 것은 무척 무모한 일이라 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민족성을 똑같이 가졌으리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렇게 불완전하게 민족성을 설정해놓고 역사를 해석할 수는 없다 봅니다.
아홉째, 로마의 정신적 자본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열번째, 이 부분도 인정합니다. 로마 사람들은 꽤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로마는 현장을 중시했죠. 백인대장이 대표적인 보기이긴 합니다. 다만 상위급으로 올라가면 역시 연줄에 따라 장교(물론 최고사령관은 빼고)를 정해버리곤 합니다. 트리부누스 밀리툼이 대표적인 보기죠.
열한번째, F 하이켈하임 '로마사'를 보니, 로마가 그리스에 원로원 시찰단을 보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인인 시오노 나나미로선 이런 사실을 놓치고 싶어하진 않겠지요. (이 사실을 믿건 안 믿건 말입니다) 재밋게도, 이 시찰단이 돌아와서 만든 법이 '12표법'입니다. 이 법은 그저 일반적인 관습법을 성문화했을 뿐입니다. 물론 '성문법' 자체에서 그 의의가 크긴 하지만요. 당시 성문화를 요구하던 로마 평민의 바램과는 거리가 멀었죠. 그래서 12표법은 단순한 귀족 계급(원로원)의 정략적 양보일 뿐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아마 원로원 시찰단은 아테네에서 정치적 술수를 배워온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로마인은 덮어놓고 배우기엔 비판할 거리가 무척 많은 책이기도 합니다. 물론 재미있는 책이기도 하지만요.
출처 : 다음카페 로마제국 http://cafe.daum.net/PaxRomana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영웅주의 사관을 가지고 책을 썼다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 입니다. 저도 책을 읽으면서 조금 너무한다 싶을정도로 지도자들의 위대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들을 강조한 듯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역사서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을때 저자의 개인적인 주관정도는 충분히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로마인 이야기]에 역사적 의의를 두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겠지요?